책 읽히기 2


 책을 좋아합니다. 책을 즐겨읽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좋은 책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라고는 할 수 없으나, 조용히 신문배달 일꾼으로 살아가려 했으나 책 만드는 일꾼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함께 신문배달 일꾼으로 살아가는 형들이 지나치게 게을러터져 도무지 함께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형들이 일으키는 배달사고 전화를 받다가 지치고, 새벽에 깨우고 깨워도 안 일어나는 형들을 깨우다가 지쳤습니다. 때마침 제가 돌리는 신문에 실리는 글이 자꾸 어그러지며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나는 기자가 아닌 신문배달 일꾼일 뿐인데 신문값 거두러 달마다 집집을 돌아다니다 보면 독자들은 기자가 아닌 배달 일꾼한테 된소리 쓴소리 막소리를 퍼붓습니다. 나보고 어쩌라고. 난 그저 이 신문을 돌리는 삼천 일꾼 가운데 하나일 뿐인데. 따져야 한다면 이 따위 글을 갈겨써서 신문에 버젓이 찍어 내놓은 기자들한테 전화를 걸어 따져야지.

 돌이켜보면 내 어버이 사는 집에서 뛰쳐나왔기에 신문배달 일꾼이 되었습니다. 신문배달 일꾼으로 함께 지내던 형들이 더없이 게으르게 살아갔기에 이 자리에서 뛰쳐나와 책마을 일꾼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와 같이 살아온 내 이야기를 책삶으로 이어 이야기 한 자락 쓰는 사람으로 지냅니다.

 책만 읽다가 책을 만들다가 책으로 엮일 글을 쓰면서 생각합니다. 책만 읽을 때에는 다 만들어진 책에 실린 그대로 읽습니다. 책을 만들 때에는 사람들한테 무엇을 읽혀야 할까를 헤아리며 낱말 하나 토씨 하나 매만집니다. 책으로 엮을 글을 쓸 때에는 내가 털어놓아야 할 내 삶이 무엇인가를 차분히 되새깁니다.

 누구나 책을 쓸 수 없으나, 누구나 책을 쓸 수 있습니다. 모든 글이 책으로 태어나지 않으나, 모든 글은 책으로 태어날 만합니다. 책읽기에서 책만들기를 거쳐 책쓰기로 오는 동안, 일기쓰기가 왜 뜻있고 값있는가를 시나브로 깨닫습니다. 국민학교를 다니던 때에는 일기를 안 쓰면 담임교사가 흠씬 두들겨패며 꾸짖다가는 윽박지르니까 억지로 칸을 채웠어요. 일기를 쓰는 맛과 멋은커녕 재미조차 없던 여섯 해였습니다. 그런데 이 또한 달리 돌아보곤 합니다. 억지로 써야 하는 글을 써 보았기에, 내 이웃이나 내 벗이나 내 뒷사람한테 ‘글을 억지로 쓰지 마셔요. 힘들고 따분해요.’ 하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습니다. 강원도 깊은 산골짜기 군대에서 스물여섯 달을 죽은 듯이 밟혀 지냈기 때문에 젊거나 어린 사내들한테 ‘군대라는 곳에 일부러 가지 마셔요. 우리는 군대가 아닌 평화를 찾고 사랑해야 합니다.’ 하는 이야기를 물려줄 수 있습니다.

 그저 책읽기가 좋던 때에는 좋은 책을 사람들이 널리 많이 읽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때에는 좋은 책이라면 잘 팔리는 책이 되어야 한다고 여겼고, 높은 등수에 드는 책이라면 좋은 책이 될 만한 까닭이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책만들기를 하면서 잘 팔리는 책이 한결같이 좋은 책이 아니라고 깨닫고, 때로는 잘 팔리는 책 모두 좋은 책하고는 동떨어지기까지 한다고 깨닫습니다. 책한테 매기는 등수가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비로소 알아차립니다. 사람한테 등수를 매길 수 없듯 책한테 등수를 매길 수 없습니다. 학교한테든 나라한테든 겨레한테든 짐승한테든 등수를 매길 수 없습니다. 책쓰기를 하는 자리까지 오면서, ‘좋은 책 = 잘 팔리는 책’이란 생각은 싹 집어치울 뿐 아니라, 이렇게 어리석은 생각을 했다니 나도 참 철딱서니없는 바보였다고 깨닫습니다. 한 사람이 읽는 책 하나만큼 소담스러운 책이란 없습니다. 한 사람을 바라보면서 쓰는 책이고 만드는 책이며 읽는 책입니다.

 책 한 권 변변하게 읽지 않는 우리 어머니가 더없이 아름답습니다. 책 한 권 마땅하게 읽지 못하는 이웃 아주머니가 그지없이 곧바릅니다. 책 한 권 제대로 읽을 겨를 없는 동네 농사꾼 할배가 가없이 훌륭합니다. 책 많이 읽는 저보다 한결 곧바르며 아름답고 훌륭합니다.

 《100만 번 산 고양이》에 나오는 고양이는 100만 번을 살았지만 몸소 겪은 일이란 없습니다. 그저 100만 번을 살았을 뿐입니다. 드디어 100만 번째로 살 무렵에 처음으로 ‘한 가지 일을 겪’습니다.

 이 고양이한테는 백만째 삶에 이르러야 ‘삶을 겪’는, 그러니까 ‘삶을 품에 안’는, ‘삶을 껴안’는 셈입니다. 책을 만 권 읽든 십만 권 읽든 백만 권 읽든 삶을 겪지 못한다면, 삶으로 품에 안지 않는다면, 삶으로 껴안지 않는다면 무슨 보람이 있겠습니까. 《100만 번 산 고양이》하고 똑같아요. 100만 번을 살아도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느끼지 못하는 고양이처럼, 100만 권째 책을 읽어도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슬픈가요.

 우리는 책만 읽고 살 수는 없습니다. 책을 먹으며 살 수도 없습니다. 일을 하고 놀이를 하며 삶을 꾸리는 사람입니다. 이러는 가운데 책도 읽습니다. 일을 하고 놀이를 하며 삶을 꾸리는 가운데 사랑을 나누고 사람을 사귀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춥니다. 땅을 일구고 곡식을 갈무리하며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며 이부자리를 개고 빨래를 하며 아이를 낳고 돌보며 하루하루 삶을 꾸립니다. 이처럼 삶을 꾸리는 가운데 책이 있고 노래가 있으며 그림이 있습니다.

 누구나 책에서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 연속극을 보면서도 사람살이를 느낄 수 있어요. 그런데, 생각해 보셔요. 우리들이 일구는 삶처럼 책답고 연속극다운 이야기가 또 어디에 있는가요. 우리들이 겪고 부대끼며 부딪히는 온갖 이야기와 일이 바로 ‘책’이 된답니다. 책에 담는 이야기란 바로 우리 삶이랍니다.

 재미와 즐거움, 슬픔과 아픔, 앎과 슬기란 어디 먼 나라가 아닌 가장 가까운 내 삶에서 비롯합니다. 바로 이 삶에서 책이 나옵니다. 삶 없는 책은 없습니다. 아니, 요새는 삶 없는 책이 많더군요. 삶 없이 돈만 있는 책이 참말 많아요.

 책 없는 삶은 있습니다. 노래 없는 삶도 있고, 사진이든 그림이든 연극이든 영화이든 없는 삶 또한 있어요. 삶이 있기에 책이든 노래이든 사진이든 그림이든 연극이든 영화이든 있습니다. 삶에서 비롯하는 모든 문화요 예술이며 교육이고 정치랑 사회랑 경제입니다.

 들판에 목숨이 있습니다. 숲속에 바람이 지나갑니다. 하늘에 구름이 흐릅니다. 깊은 밤에 달과 별이 있습니다. 한낮에 해맑고 따사로운 햇살이 있습니다.

 저는 헌책방을 자주 다니며 책을 만납니다. 헌책방을 바지런히 다니며 책을 꽤 많이 만나는데, 책만 만나는 일이란 없습니다. 헌책방 일꾼도 만나고 헌책방을 찾는 다른 책손도 만납니다. 헌책방 가는 길에 숱한 사람과 부대낍니다. 헌책방에서 마주하는 책을 펼칠 때에 이 책하고 얽힌 갖가지 이야기하고 만납니다. 오랜 나날 묵은 책을 들추며 오랜 나날에 걸쳐 어떤 삶이 이 책 하나에 녹아들었는가를 되새깁니다.

 책도 책이지만 책한테만 박히기보다 책 안팎을 오가며 사람 삶을 느끼고 나 스스로 꾸릴 삶을 헤아리고 싶습니다. 책을 읽히기보다 삶을 읽히고 싶습니다. 내 고마운 벗님한테랑, 또 내 사랑스러운 살붙이한테랑, 좋다고 하는 책을 읽혀도 나쁘지는 않다지만, 좋다고 할 만한 삶을 읽히며 어깨동무하고 싶습니다. 책이란, 알뜰히 잘 끓인 국에 한 방울 똑 떨어뜨리는 ‘생협 유기농’ 참기름입니다. (2003.10.20.처음 씀/2010.10.25.달.고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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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읽히기 1


 아이가 스스로 책을 사서 보는 나이는 몇 살쯤 될까요. 아이는 왜 스스로 책을 사서 보는 날을 맞이할까요. 아이로서는 어버이가 장만해 주는 책을 읽어도 나쁘지 않을 텐데, 어이하여 굳이 제 돈을 들여 제 책을 따로 마련해서 읽는 날을 맞이하려고 할까요.

 아이가 좋은 책을 읽으면서 크면 좋다 할 만합니다. 아이는 어버이가 장만해 준 좋은 책을 하나둘 맛나게 받아먹는 가운데 씩씩하고 튼튼한 넋을 살찌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한테 좋은 책만 있고 좋은 삶은 없다면, 아이가 스스로 읽은 좋은 책을 좋은 삶으로 펼쳐낼 길이 없다면, 아이가 맞아들인 좋은 책이 바탕이 되어 스스로 좋은 책을 새롭게 알아보는 눈길과 손길을 열 수 없다면 어찌 될까 궁금합니다.

 우리 살림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습니다. 텔레비전이 없어야 할 까닭이 있느냐고 묻는 분이 있는데, 저는 거꾸로 여쭙니다. 텔레비전이 있어야 할 까닭이 있느냐고.

 우리 살림집에는 빨래기계가 없습니다. 빨래기계를 안 쓰는 까닭이 있느냐고 묻는 분이 많은데, 저는 되레 여쭙니다. 빨래기계 없으면 빨래를 못할 까닭이 있느냐고.

 텔레비전을 들이든 안 들이든 전기삯에 텔레비전 수신삯이 끼어 있습니다. 한국전력에 전화삯을 들여 따로 알리지 않으면 텔레비전 수신삯은 억지로 빠져나갑니다. 텔레비전을 켜면 어떤 방송을 보려 할 때이든 꽤 길게 흐르는 광고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광고를 안 보고 즐길 수 있는 방송은 한 가지조차 없습니다.

 지하철이나 버스가 값싸다 하지만, 지하철과 버스는 온통 광고투성이입니다. 눈높이에 따라 빼곡하게 들어찬 광고판입니다. 어지러이 붙어 눈을 지치게 하는 광고덩어리입니다. 이처럼 광고삯을 받는 지하철이요 버스라 한다면, 광고로 돈을 버는 만큼 찻삯을 더 줄이거나 아예 거저로 해야 마땅합니다.

 온누리는 돈에 따라 짜맞추어져 있습니다. 돈이 없으면 물을 마실 수 없고 뒷간을 쓸 수 없습니다. 돈이 없으면 느긋하게 다리쉼을 하자며 앉을 자리마저 없습니다. 온통 된통 돈으로 흐르는 누리인데, 이런 누리에서 책읽기란 어떤 일이 될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이한테 좋은 책 수없이 사들여 읽힌다 한들 아이는 무엇을 받아먹으며 무슨 얼을 북돋울 수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착하거나 참되거나 고운 삶이 사랑받을 수 없는 나라에서, 아름답거나 빛나거나 훌륭한 책 하나가 아이한테 어떠한 마음밥이 될는지 걱정스럽습니다.

 아이는 틀림없이 제 손으로 제 마음밥 살찌울 제 책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책만 찾을 수 있다고 모든 일이 마무리되지 않습니다. 아이는 어김없이 제 온몸으로 제 온삶을 찾아야 하니까요. 아이 온삶을 일구면서 즐기는 책이어야 합니다. 아이 온삶을 빛내면서 즐기는 일이어야 합니다. 아이 온삶을 밝히면서 즐기는 놀이여야 합니다. 아이 온삶을 돌보면서 즐기는 밥이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좋다 하는 책을 들여다볼 때에, 줄거리와 목소리는 아주 좋은데, 말투나 낱말이나 말결이나 말씨는 영 글러먹거나 아쉽게 어긋나 있기 일쑤입니다(깊으며 너른 넋을 펼치는 리영희 님 책조차 씁쓸하고 슬픈 말마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인데, 리영희 님이 배우며 살아오던 무렵에는 옳고 바른 말로 가르치는 틀이 없었고, 오늘날까지 이런 틀은 서지 못합니다). 말다운 말로 훌륭한 말씀을 펼치는 책이란 무척 드뭅니다. 그나마 어린이책은 어른책보다 낫지만 어린이책에 깃든 말마디는 몹시 두렵습니다. 아이가 차츰 커서 푸름이가 되고 어른이 될 무렵 스스로 쥐어들 책에 담길 말마디는 대단히 무섭습니다. 아이들은 이런저런 책에 어떤 말이 스몄는가는 제대로 느끼지 않으면서 알맹이만 받아먹을 테니까요. 때로는 알맹이는 받아먹지 못하면서 허울좋은 겉치레 말마디에 젖어들 테니까요.

 청소년범죄라는 이름이 붙지만 하나같이 어른범죄입니다. 어른이 저지르던 못된 짓을 아이들이 보고 따라합니다. 어른이 아름답게 살아갈 때에는 아이 또한 아름답게 살아갑니다. 어른이 아름다우며 훌륭한 말을 하는데 아이가 엉터리 말을 할 까닭이란 없습니다. 어른 스스로 돈바라기 삶에 매여 있는 동안 아이 또한 저절로 돈바라기 삶에 매입니다.

 《열두 살에 부자가 된 키라》를 비롯해 ‘어린이 경제동화’가 수없이 쏟아집니다. 아이한테 ‘철학동화’이니 ‘과학동화’이니 하다가 바야흐로 ‘경제동화’ 판까지 나아갑니다. 그런데, 아이한테 철학동화이든 과학동화이든 경제동화이든 읽히려는 사람은 어른이고, 이런 책을 만들어 돈을 버는 사람 또한 어른입니다.

 가야 할 바른 길이 있습니다. 가야 할 고른 길이 있습니다. 가야 할 알맞은 길이 있습니다. 어른부터 먼저 책다운 책을 골라서 잘 읽어야겠습니다. 아이 삶을 아름답게 가꾸고 아이가 커 갈 앞날이 아름답길 바란다면 어른이 꾸리는 삶부터 고치고 다듬고 매만지고 보듬어야 합니다. 어른이 하루하루 꾸리는 오늘부터 아름답게 가꾸면서 앞날을 차근차근 아름답게 가꾸려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어른부터 올곧게 살며 아름다움을 가꾸고 사랑하는 마음일 때에 비로소 아이한테 책 하나 알맞게 쥐어 줄 수 있습니다.

 좋은 책 만 권을 읽혀도 나쁘지는 않겠지요. 그렇지만 좋은 책 만 권을 아이 머리속에만 가두어 둔다면, 만 권을 가둔들 십만 권을 가둔들 백만 권을 가둔들 아이가 무럭무럭 크지 못합니다. 머리속에는 백만 권 책이 들어 있으나 손과 다리와 가슴에는 아무것이 없다면 이 아이 앞날은 어찌 될까 모르겠습니다. 아니, 참 무섭습니다. 손으로는 아무 할 줄 아는 재주가 없는데 머리에는 책이 만 권이나 담아 놓은 아이라면 매우 무섭습니다.

 머리에 책 한 권조차 들어 있지 않지만 두 손과 두 다리와 자그마한 가슴에는 싱그러우며 튼튼한 빛줄기 하나 건사하는 아이라면 참말 반갑습니다. 눈부시도록 놀라우며 고맙습니다. (2003.3.5.처음 씀/2010.10.25.달.고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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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쪽지 2010.10.22.
 : 혼자 장날 마실 다녀오기



- 아침에 일찍 세 식구가 함께 읍내 장날 나들이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이 밥을 먹이고 아이 똥을 누이며 빨래를 한다며 이래저래 부산을 떨다가 그만 버스 때를 놓친다. 11시 50분 버스 때를 놓친 다음에는 13시 40분 버스 때인데, 이무렵에는 아이가 그만 낮잠을 잔다. 여느 때에는 낮잠 안 잔다며 칭얼거리던 아이가 요사이에는 낮잠을 아주 잘 자 준다. 더없이 고마운 한편, 꼭 이렇게 함께 나갔으면 할 때에 잠이 든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하면, 아빠가 더 일찍부터 바지런을 떨었으면 아침 때에 잘 맞추어 나들이를 다녀왔고, 아이 또한 즐겁게 낮잠에 들 수 있었겠지.

- 아이가 낮잠 자는 모습을 보다가 아빠 혼자 자전거를 타고 읍내에 다녀오기로 한다. 아이랑 엄마랑 먹는 능금이 다 떨어졌다. 능금을 사고, 능금을 사는 김에 장마당에 펼쳐진 먹을거리 한두 가지를 사 올까 생각한다.

- 슬금슬금 달린다. 자전거로 달릴 때에는 사진기에 가벼운 렌즈를 붙인다. 무거운 렌즈를 붙이면 내가 바라는 사진을 한결 잘 담을 수 있으나, 이때에는 자전거를 달리며 목이 좀 아프다. 언덕길을 오를 때에는 더 힘들기도 하다. 그러나 사진을 조금 더 잘 찍고픈 마음이라면 목이 아프건 어떠하건 무거운 렌즈를 달며 자전거를 달려야겠지.

- 늘 다니는 읍내길이지만, 가을 막바지에 이르는 읍내길은 새삼스럽다. 여름날 보던 푸르디푸른 느티나무 잎사귀가 차츰 누렇게 바뀐다. 곧 샛누런 빛깔로 탈바꿈하리라.

- 비탈논을 일구는 곳 가운데 벌써 벼를 다 벤 곳이 있고 한창 벼를 베는 곳이 있다. 내 사진기로 담아도 좋으리라 생각하면서, 사진기 아닌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담아도 좋겠다고 느낀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라면 사진기를 목에 안 걸어야 하지 않나? 오르막에서 멈추기 싫으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셈 아닐까? 하기는. 오르막을 낑낑 오르다가 ‘아, 이 모습 사진으로 담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이 들 때에 멈추기는 어렵다. 오르막을 낑낑 오른 다음 시원한 내리막을 달리는데 ‘어, 이 모습 참 좋잖아. 찍고 싶다. 그런데 멈춰야 하다니.’ 하고 생각하다가 그예 안 멈추고 지나가곤 한다.

- 자전거를 달리면서 셔터빠르기를 1/125초까지 올리며 사진을 찍어 보다. 그러나 오르막에서 뒤뚱뒤뚱거리며 사진을 찍으니 흔들린다. 그냥 멈추어서 찍어야 한다.

- 읍내 장날에는 나처럼 자전거를 끌고 마실하는 분이 꽤 있다. 이분들은 읍내하고 제법 떨어진 곳에서 살아갈 테지. 딱히 자전거를 묶어 둘 데가 없기도 하고, 자전거 짐바구니에 물건을 담아야 하니, 다들 자전거를 끌고 장마당을 슬슬 돈다.

- 장날만큼은 시골 하나로마트가 장사를 못하는 날이라 하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장마당 장사꾼들 모두 물건을 잘 파는지는 모르겠다. 낮 세 시 가까이 장마당에 닿아 둘러보는데, 이때에 처음 마수를 했다는 분을 본다. 어쩌면 마수조차 못하고 장마당을 걷는 할매 할배도 있지 않을까.

- 호떡과 핫도그를 산다. 아이 엄마가 먹고 싶다는 참외까지 산다. 참외는 꼭 한 곳에서만 판다. 용케 참외를 파는 곳이 있다. 이 집에서 살까 말까 망설이다가 ‘아이 엄마가 먹고 싶어 한다면 추운 겨울날 딸기를 어떻게든 마련해서 먹인다’고 하던 옛말을 떠올린다.

- 호떡과 핫도그가 식을까 걱정하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오르막을 힘차게 달린다. 읍내로 나올 때에는 텅 빈 가방이지만, 집으로 돌아갈 때에는 꽉 찬 가방이다. 그예 땀을 뻘뻘 흘린다. 용산리 숯고개를 넘어 비로소 내리막으로 접어든다. 오늘도 언제나처럼 길바닥에는 숱한 뱀과 잠자리와 작은 멧짐승 주검이 깔려 있다. 납짝꿍이 된 주검을 밟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돌면서 내리막을 달린다. 숨이 차며 집에 닿으니 아이 엄마는 아이랑 맛난 밥을 차려서 먹는다. 이런. 이럴 줄 알았으면 호떡 안 사도 됐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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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쪽지 2010.10.21.
 : 두 번째 자전거수레



- 아이가 까까 사러 가자면서 아빠 자전거수레를 가리킨다. 아빠 손을 잡으며 수레에 탄다고 한다. 한 번 태웠을 뿐인데 자전거수레에 타면 까까 사러 가는 줄 아는가? 아이한테 바람을 쏘이고 싶기도 해서, 오늘도 엊그제처럼 보리밥집으로 달려 보기로 한다. 해질녘이기에 아이 옷을 더 두툼히 입힌다. 아이는 장갑을 싫어하고 모자도 싫어한다. 수레에 앉혀 담요를 덮여 놓아도 손을 뺀다.

- 논둑길을 달리는 동안 잠자리가 떼지어 날아오른다. 아이를 돌아보며 “잠자리다!” 하고 얘기한다. 아이는 “구름! 하늘!” 하며 딴 소리를 한다. 훗. 그러나 수레에 앉으면 잠자리는 아빠 엉덩이와 등짝에 가리고, 하늘과 구름이 훨씬 잘 보이겠지.

- 보리밥집에 닿을 무렵, 네찻길에서 뒤쪽 차와 앞쪽 차가 없는 줄 잘 살핀 다음 길을 건넌다. 건널목이 있으나 이 건널목에서 푸른불이 안 들어온 지 오래. 몇 달쯤 된 듯한데, 어쩌면 더 오래되었는지 모르는데, 건널목 신호는 안 바뀌고 귤빛 불만 깜빡거린다. 시골버스역으로 건너도록 건널목이 있는데, 이 건널목을 건널 사람은 한두 시간에 드물게 있으니 굳이 건널목 신호가 없어야 한다 할 만하다. 그러나 이 길을 건너야 하는 사람이 아예 없지는 않으니까, 길을 건널 사람이 단추를 누르면 이내 신호가 바뀌도록 장치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시골에서는 건너는 사람이 뜸하니까, 때 되면 바뀌는 신호가 아니라 건널 사람이 단추를 누르면 바뀌는 신호로 고쳐 주면 좋겠다.

- 찻길을 가로질러 건너니까 아이는 이내 “다아 왔다!” 하고 소리친다. 참 재미난 녀석이다. 우리 딸내미이지만, 어쩜 이렇게 다 온 줄 알고 이렇게 말할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인천 골목동네 집에 살던 때에도 한참 골목마실을 돌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으레 “다아 왔다!” 하고 외치곤 했다. 처음 이 말을 외친 때다 몇 달 때였을까. 열예닐곱 달쯤부터 이런 말을 외쳤을까.

-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어둠이 깔린다. 어둑어둑한 길을 달리는데 아이가 “달!” 하고 외친다. 그래, 달을 보면서 집으로 가는구나. 달빛이 비추어 주는 논둑길을 달린다. 마지막 꽤 가파른 비알에서 1단 기어를 넣는데 체인이 튄다. 1×2 기어는 어김없이 튄다. 왜 그럴까. 새로 바꾼 체인과 기어가 이 자리에서만 아귀가 잘 안 맞기 때문인가. 가파른 비탈을 한창 오르다가 기어가 풀리며 페달이 헛돌면 아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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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대기 한 장만 있어도 얼마든지 잘 노는 아이. 생각해 보면 나 어릴 때에도 우리 아이하고 똑같지 않았던가.  

- 2010.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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