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히기 2
책을 좋아합니다. 책을 즐겨읽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좋은 책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라고는 할 수 없으나, 조용히 신문배달 일꾼으로 살아가려 했으나 책 만드는 일꾼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함께 신문배달 일꾼으로 살아가는 형들이 지나치게 게을러터져 도무지 함께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형들이 일으키는 배달사고 전화를 받다가 지치고, 새벽에 깨우고 깨워도 안 일어나는 형들을 깨우다가 지쳤습니다. 때마침 제가 돌리는 신문에 실리는 글이 자꾸 어그러지며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나는 기자가 아닌 신문배달 일꾼일 뿐인데 신문값 거두러 달마다 집집을 돌아다니다 보면 독자들은 기자가 아닌 배달 일꾼한테 된소리 쓴소리 막소리를 퍼붓습니다. 나보고 어쩌라고. 난 그저 이 신문을 돌리는 삼천 일꾼 가운데 하나일 뿐인데. 따져야 한다면 이 따위 글을 갈겨써서 신문에 버젓이 찍어 내놓은 기자들한테 전화를 걸어 따져야지.
돌이켜보면 내 어버이 사는 집에서 뛰쳐나왔기에 신문배달 일꾼이 되었습니다. 신문배달 일꾼으로 함께 지내던 형들이 더없이 게으르게 살아갔기에 이 자리에서 뛰쳐나와 책마을 일꾼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와 같이 살아온 내 이야기를 책삶으로 이어 이야기 한 자락 쓰는 사람으로 지냅니다.
책만 읽다가 책을 만들다가 책으로 엮일 글을 쓰면서 생각합니다. 책만 읽을 때에는 다 만들어진 책에 실린 그대로 읽습니다. 책을 만들 때에는 사람들한테 무엇을 읽혀야 할까를 헤아리며 낱말 하나 토씨 하나 매만집니다. 책으로 엮을 글을 쓸 때에는 내가 털어놓아야 할 내 삶이 무엇인가를 차분히 되새깁니다.
누구나 책을 쓸 수 없으나, 누구나 책을 쓸 수 있습니다. 모든 글이 책으로 태어나지 않으나, 모든 글은 책으로 태어날 만합니다. 책읽기에서 책만들기를 거쳐 책쓰기로 오는 동안, 일기쓰기가 왜 뜻있고 값있는가를 시나브로 깨닫습니다. 국민학교를 다니던 때에는 일기를 안 쓰면 담임교사가 흠씬 두들겨패며 꾸짖다가는 윽박지르니까 억지로 칸을 채웠어요. 일기를 쓰는 맛과 멋은커녕 재미조차 없던 여섯 해였습니다. 그런데 이 또한 달리 돌아보곤 합니다. 억지로 써야 하는 글을 써 보았기에, 내 이웃이나 내 벗이나 내 뒷사람한테 ‘글을 억지로 쓰지 마셔요. 힘들고 따분해요.’ 하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습니다. 강원도 깊은 산골짜기 군대에서 스물여섯 달을 죽은 듯이 밟혀 지냈기 때문에 젊거나 어린 사내들한테 ‘군대라는 곳에 일부러 가지 마셔요. 우리는 군대가 아닌 평화를 찾고 사랑해야 합니다.’ 하는 이야기를 물려줄 수 있습니다.
그저 책읽기가 좋던 때에는 좋은 책을 사람들이 널리 많이 읽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때에는 좋은 책이라면 잘 팔리는 책이 되어야 한다고 여겼고, 높은 등수에 드는 책이라면 좋은 책이 될 만한 까닭이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책만들기를 하면서 잘 팔리는 책이 한결같이 좋은 책이 아니라고 깨닫고, 때로는 잘 팔리는 책 모두 좋은 책하고는 동떨어지기까지 한다고 깨닫습니다. 책한테 매기는 등수가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비로소 알아차립니다. 사람한테 등수를 매길 수 없듯 책한테 등수를 매길 수 없습니다. 학교한테든 나라한테든 겨레한테든 짐승한테든 등수를 매길 수 없습니다. 책쓰기를 하는 자리까지 오면서, ‘좋은 책 = 잘 팔리는 책’이란 생각은 싹 집어치울 뿐 아니라, 이렇게 어리석은 생각을 했다니 나도 참 철딱서니없는 바보였다고 깨닫습니다. 한 사람이 읽는 책 하나만큼 소담스러운 책이란 없습니다. 한 사람을 바라보면서 쓰는 책이고 만드는 책이며 읽는 책입니다.
책 한 권 변변하게 읽지 않는 우리 어머니가 더없이 아름답습니다. 책 한 권 마땅하게 읽지 못하는 이웃 아주머니가 그지없이 곧바릅니다. 책 한 권 제대로 읽을 겨를 없는 동네 농사꾼 할배가 가없이 훌륭합니다. 책 많이 읽는 저보다 한결 곧바르며 아름답고 훌륭합니다.
《100만 번 산 고양이》에 나오는 고양이는 100만 번을 살았지만 몸소 겪은 일이란 없습니다. 그저 100만 번을 살았을 뿐입니다. 드디어 100만 번째로 살 무렵에 처음으로 ‘한 가지 일을 겪’습니다.
이 고양이한테는 백만째 삶에 이르러야 ‘삶을 겪’는, 그러니까 ‘삶을 품에 안’는, ‘삶을 껴안’는 셈입니다. 책을 만 권 읽든 십만 권 읽든 백만 권 읽든 삶을 겪지 못한다면, 삶으로 품에 안지 않는다면, 삶으로 껴안지 않는다면 무슨 보람이 있겠습니까. 《100만 번 산 고양이》하고 똑같아요. 100만 번을 살아도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느끼지 못하는 고양이처럼, 100만 권째 책을 읽어도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슬픈가요.
우리는 책만 읽고 살 수는 없습니다. 책을 먹으며 살 수도 없습니다. 일을 하고 놀이를 하며 삶을 꾸리는 사람입니다. 이러는 가운데 책도 읽습니다. 일을 하고 놀이를 하며 삶을 꾸리는 가운데 사랑을 나누고 사람을 사귀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춥니다. 땅을 일구고 곡식을 갈무리하며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며 이부자리를 개고 빨래를 하며 아이를 낳고 돌보며 하루하루 삶을 꾸립니다. 이처럼 삶을 꾸리는 가운데 책이 있고 노래가 있으며 그림이 있습니다.
누구나 책에서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 연속극을 보면서도 사람살이를 느낄 수 있어요. 그런데, 생각해 보셔요. 우리들이 일구는 삶처럼 책답고 연속극다운 이야기가 또 어디에 있는가요. 우리들이 겪고 부대끼며 부딪히는 온갖 이야기와 일이 바로 ‘책’이 된답니다. 책에 담는 이야기란 바로 우리 삶이랍니다.
재미와 즐거움, 슬픔과 아픔, 앎과 슬기란 어디 먼 나라가 아닌 가장 가까운 내 삶에서 비롯합니다. 바로 이 삶에서 책이 나옵니다. 삶 없는 책은 없습니다. 아니, 요새는 삶 없는 책이 많더군요. 삶 없이 돈만 있는 책이 참말 많아요.
책 없는 삶은 있습니다. 노래 없는 삶도 있고, 사진이든 그림이든 연극이든 영화이든 없는 삶 또한 있어요. 삶이 있기에 책이든 노래이든 사진이든 그림이든 연극이든 영화이든 있습니다. 삶에서 비롯하는 모든 문화요 예술이며 교육이고 정치랑 사회랑 경제입니다.
들판에 목숨이 있습니다. 숲속에 바람이 지나갑니다. 하늘에 구름이 흐릅니다. 깊은 밤에 달과 별이 있습니다. 한낮에 해맑고 따사로운 햇살이 있습니다.
저는 헌책방을 자주 다니며 책을 만납니다. 헌책방을 바지런히 다니며 책을 꽤 많이 만나는데, 책만 만나는 일이란 없습니다. 헌책방 일꾼도 만나고 헌책방을 찾는 다른 책손도 만납니다. 헌책방 가는 길에 숱한 사람과 부대낍니다. 헌책방에서 마주하는 책을 펼칠 때에 이 책하고 얽힌 갖가지 이야기하고 만납니다. 오랜 나날 묵은 책을 들추며 오랜 나날에 걸쳐 어떤 삶이 이 책 하나에 녹아들었는가를 되새깁니다.
책도 책이지만 책한테만 박히기보다 책 안팎을 오가며 사람 삶을 느끼고 나 스스로 꾸릴 삶을 헤아리고 싶습니다. 책을 읽히기보다 삶을 읽히고 싶습니다. 내 고마운 벗님한테랑, 또 내 사랑스러운 살붙이한테랑, 좋다고 하는 책을 읽혀도 나쁘지는 않다지만, 좋다고 할 만한 삶을 읽히며 어깨동무하고 싶습니다. 책이란, 알뜰히 잘 끓인 국에 한 방울 똑 떨어뜨리는 ‘생협 유기농’ 참기름입니다. (2003.10.20.처음 씀/2010.10.25.달.고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