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 까는 어린이가 '토끼'라고 외친다. 그래, 토끼 귀처럼 까셨군요..

 - 201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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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영희 님


 리영희 님이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놀라지는 않는다. 올 일이 왔다고 생각한다. 문득 궁금해서 몇 군데 누리신문으로 들어가 보니 첫 쪽에 큼지막하게 ‘궂긴 이야기’를 적바림해 준다. 그렇구나, 이렇게 숨을 거두고 나서야 첫 쪽에 큼지막하게 실어 주는구나. 살아 있는 동안 당신 말씀을 조금 더 귀담아 들어 주면서 첫 쪽에 큼지막하게 실어 줄 수는 없었겠구나. 여느 때마다 덧없는 정치다툼이나 부질없는 경제성장 숫자를 잔뜩 싣던 신문들이기 때문에, 여느 때에 우리들 마음밭을 곱게 일구는 데에 밑거름이 될 이야기는 싣기 어려울는지 모른다. 아무렴.

 다들 리영희 님을 놓고 ‘실천하는 지식인’이었다고 읊는다. 그래, 틀린 말은 아니다. 리영희 님은 말을 앞세우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실천하는’ 사람이다. 리영희 님은 글을 쓸 때에 허투루 쓰는 법 없이, ‘글 한 줄 쓰느라 책 다섯 권을 읽는다’고 했으니 참다운 지식인이다.

 그러면, 이렇게 말을 앞세우지 않고 몸으로 살아내면서 글 한 줄 쓰느라 책 다섯 권을 읽는 매무새는 어떤 사람이 보여주는 모습인가.

 아무도 따를 수 없는 하느님 같은 사람 모습인가.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보여주는 모습인가. ‘지식인’이라면 밑바탕으로 갖출 모습인가.

 리영희 님은 내 아버지 같은 사람이다. 리영희 님은 당신 아들을 걱정하고 사랑하는 매무새로 글을 쓰고 말을 나누었기 때문에 내 아버지 같은 사람이다. 리영희 님이 쓴 책을 읽을 때면, 리영희 님이 온삶을 바쳐 알알이 영근 알뜰한 넋을 아로새길 수 있었기에 당신은 내 아버지 같은 사람이다. 아버지가 당신 아들을 어떻게 헤아리면서 사랑하는가를 돌아볼 노릇이다. 아버지다운 길을 걷는 사람이라면 어떠한 매무새일는지 살필 노릇이다.

 히유. 아이야, 날이 차다만 자전거 타고 살짝 마실을 다녀오자. 찬바람 좀 잔뜩 쐬어야겠다. (4343.12.5.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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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00원


 보일러에 기름 300리터를 넣는다. 기름집에 전화를 넣으니 이날 따라 기름 넣는 집이 많다며 못 갈 수 있다고 말한다. 이듬날 아침에 와도 괜찮다고 이야기한다. 5분쯤 지났을까, 전화가 울린다. 다른 목소리인데 기름집이다. 금방 기름 들고 간다면서 어디인지 묻는다. 같은 기름집 일꾼인데 이렇게 다른 목소리일 수 있을까. 기름차를 모는 일꾼은 어디어디라 하니 금세 알아듣는다. 곧 기름차가 우리 멧골집으로 찾아오고 기름통에 기름바늘을 꽂고는 콸콸콸 넣는다. 기름차를 모는 기름집 일꾼은 고등학생 때까지 이 마을에서 살다가 서울로 가서 마흔 해를 살았고, 이제 다시 고향마을로 돌아와서 늘그막에 기름집 일꾼으로 하루하루 보낸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구나, 그래서 이렇게 금세 알아듣고 쉬 찾아와 주시는구나. “시골에 살면 좋지요. 요새는 시골에도 유치원 차가 다 들어와서 태워다 주고 태워 오잖아요. 도시도 도시대로 좋지만 시골도 시골대로 좋지요.” 어느덧 300리터가 다 찬다. 기름집 일꾼한테 잔돈이 없어 집에 있는 천 원짜리를 어찌저찌 긁어모아 삼십이만 칠천 원을 맞춘다. 기름집 일꾼한테 기름값을 건넨다. 추운 저녁날, 방에 있으라던 아이가 문을 빼꼼 내밀더니 신을 꿰고 마당으로 나온다. “아저씨! 아저씨!” 하면서 웃고 노래하며 춤을 춘다. 기름값을 받던 아저씨가 이 가운데 오천 원을 덜어 나한테 도로 내민다. “아이 과자나 사 주셔요.” “네? 괜찮아요.” “아이가 귀여워서 깎아 드려요.”

 인천에 살던 때, 일곱 살부터 열일곱 살까지 5층짜리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이 아파트는 연탄 때는 아파트였다. 방마다 연탄 한 장 넣어 불을 때니까 이렇게 해 본들 따뜻할 수 없고, 나중에 기름보일러라는 녀석이 한창 나오며 널리 사랑받을 즈음 동네방네 기름보일러 놓는 집이 늘었다. 위아래옆 이웃집이 거의 다 기름보일러로 바꾸며 나무 마룻바닥을 뜯어내고 구리파이프 깔아 시멘트로 다시 덮느니 뭐를 하느니 하고 나서 아주 느즈막히 우리 집도 기름보일러를 놓는다. 기름보일러를 놓는 데에는 여러 날이 걸린다. 먼저 마루를 뜯어내고, 마루에 있던 짐을 방 한쪽에 몰아놓는다. 마루에 파이프 다 깔고 시멘트로 덮어 말린 뒤에 짐을 다시 마루 한쪽으로 죄 몰아놓고, 이제는 방에 있던 옷장이며 짐이며 모조리 붙인 다음 방도 똑같이 바닥을 들어내어 파이프를 깐다. 그런데, 내가 떠올리기로는 처음부터 구리파이프를 쓰지 않고 피브이시인가 플라스틱 같은 파이프를 쓰느라 겨울에 한 번 얼어터져서 다시 구리파이프로 바꾼 줄 안다. 다른 이웃집도 비슷한 일을 숱하게 겪었고.

 이렇게 기름보일러를 들이기까지 집집마다 난로를 방이나 마루에 놓고 살았다. 그런데 난로라 해 봤자 불이 얼마나 세겠는가. 연탄으로는 안 되니 아파트 중앙난방을 한다며 스팀이 나오기는 했으나 창문이 얼지 않을 뿐 거의 도움이 되지 않기 일쑤였다. 그나저나 기름보일러이기 때문에 기름집에서 기름을 사 와야 한다. 우리 집은 아들이 둘, 그러니까 기름을 사다 나를 일꾼이 쏠쏠히 있는 셈. 국민학교 5학년이었나, 이무렵부터 형이랑 나는 주말마다 20리터들이 기름통을 둘씩 들고 기름집으로 가서 기름을 사 왔다. 형은 집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날랐다. 우리 집은 4층인데 계단에서도 쉴 줄을 몰랐다. 어린 꼬맹이가 20리터들이 기름통을 한손에 하나씩 들고 세 살 위 형을 따라가려면 얼마나 벅찼는지. 그러나 조금이라도 뒤처지만 형한테 꿀밤을 맞았기 때문에 손이 얼얼해 떨어질 노릇이었어도 죽어라 좇아갔다.

 예나 이제나 기름을 사다가 보일러를 돌리면서 ‘기름값 에누리’를 받아 본 적이란 없다. 늘 숫자판에 찍힌 그대로 값을 치렀다. 그런데 5000원 에누리라니.

 기름차를 떠나 보낸다. 문을 닫고 들어가려는데 기름차 아저씨가 차에서 내리더니 뭔가를 가슴에 잔뜩 안고 달려온다. “휴지라도 드려야 하는데, 깜빡했네. 재미있게 잘 사셔요.”

 내 나이 예순이 될 2034년 겨울날, 내 고향마을인 인천 골목동네로 다시 찾아가 본다 할 때에, 그곳 그때에 만날 내 딸아들 뻘 될 젊은이한테 나는 무슨 말 무슨 이야기 무슨 꿈을 들려줄 수 있을까. (4343.12.5.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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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10-12-06 08:18   좋아요 0 | URL
전 내 나이 예순에 돌아갈 고향이 없어요. 부럽고 따뜻하고 존경받을 이야기입니다. ^^

파란놀 2010-12-06 12:35   좋아요 0 | URL
오늘 살아가는 그곳을 좋은 고향으로 가꾸어 주셔요~
 


 내 이야기가 사진입니다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13] 모토하시 세이이치(本橋成一), 《上野驛の幕間》(現代書館,1993)


 사진쟁이 김기찬 님은 사진밭에서는 《골목 안 풍경》이라는 사진책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여느 사람들한테는 그닥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김기찬 님이 《골목 안 풍경》 말고 《역전 풍경, 서울역 부근 1968∼1983》(눈빛,2002)이나 《잃어버린 풍경, 1967∼1988》(눈빛,2004) 같은 사진책을 내놓은 줄 아는 사진밭 사람은 무척 드뭅니다. 찬찬히 읽히지 못할 뿐더러 제대로 읽히지 못하는 셈입니다.

 일본 우에노역 삶자락을 사진으로 담은 책 《上野驛の幕間》(現代書館,1993)을 봅니다. 김기찬 님이 일군 《역전 풍경》하고 한 자리에 놓고 보니 김기찬 님 사진책이 몹시 초라해 보입니다. 김기찬 님은 《역전 풍경》이라는 사진책으로 서울역 둘레 사람들과 삶자락을 스치듯 담아냈으나 알뜰히 살피며 여미지는 못했습니다. 이와 달리 《우에노역 한자락》을 일군 모토하시 세이이치 님은 일본 우에노역이라는 데에서 뿌리내리어 살아가는 사람처럼 ‘역 둘레 사람들’을 마주하고 맞이하며 얼싸안는 모습을 고이 담습니다.

 아무래도 일본 사진쟁이 모토하시 세이이치 님은 ‘우에노역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사진을 찍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기찬 님이 진작에 내놓던 《골목 안 풍경》 사진들을 보면, 당신이 살던 집에서 골목동네로 마실을 나와서 찍은 사진이기는 하나 ‘골목동네 사람과 한식구가 되며’ 찍은 내음과 빛깔과 손길과 몸짓이 듬뿍 배었습니다. 김기찬 님 《역전 풍경》은 이렇게까지 짙은 내음과 빛깔과 손길과 몸짓까지 배어들지는 않았어요. 게다가, 《역전 풍경》을 찍던 무렵은 사진기자로 일하던 때이니, 틈틈이 사진을 찍느라 더 깊이 파고들지 못했다 여길 만합니다.

 한편, 한국과 일본 두 나라는 삶과 넋과 사진이 얼마나 다른가 헤아려 봅니다. 한국 사진쟁이와 일본 사진쟁이는 사진을 마주하는 매무새가 어느 만큼 벌어졌는가 곱씹어 봅니다. 한국 삶자락과 일본 삶자락은 저마다 얼마나 살갑거나 따스하거나 넉넉하거나 아름다운가 가누어 봅니다.

 사진 솜씨가 더 빼어나다 해서 더 빼어나다 싶은 사진을 얻지 않습니다. 사진 장비가 한결 훌륭하다 해서 한결 훌륭하다 싶은 사진을 이루지 않아요. 내 삶을 읽을 줄 아는 가운데 내 이야기란 내 삶에서 비롯하는 줄 깨달을 때에 나 스스로 즐겁고 좋은 사진을 일굽니다.

 엊그제는 아침부터 바지런을 떨며 읍내 마실을 나왔습니다. 빨래를 하고 아이랑 엄마랑 함께 밥을 먹고 아이 옷을 챙겨 입히며 시골길을 헉헉대며 달려 버스 타는 곳에 닿았습니다. 옆지기는 몸이 많이 힘들어 아빠 혼자 아이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시골버스는 아침 11시 50분에 음성 읍내에서 떠나 넓은벌(광벌) 마을에 12시 안팎에 닿습니다. 어느 날에는 12시 7분쯤 떨어지고 어느 날에는 11시 57분에 떨어지기에 종잡을 수 없는 터라 일찌감치 버스 타는 곳에 나와 있어야 합니다. 아이랑 아빠는 11시 51분에 집을 나섰습니다. 아이를 걸리며 가다가 아무래도 늦겠다 싶어 아이를 안고 달리니 12시 2분에 닿습니다. 고맙게도 이날은 버스가 12시 8분에 들어옵니다. 한 시간 남짓 읍내 장마당 구경을 하고 나서 낮 한 시 사십 분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여러 날째 낮잠 없이 저녁까지 버티며 놀던 아이는 버스를 타고 나오기 앞서부터 졸음 가득한 눈이었는데 장마당을 마구 걸어다니면서도 졸음을 떨치지 못합니다. 내내 아빠 품에 안겨 다니다가는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곯아떨어집니다. 아빠는 아이를 안고 버스에서 내려 시골길을 천천히 걷습니다. 집에 거의 다 닿을 무렵 길가 들꽃이 말라죽으며 남은 꽃받침이 참 예쁘다고 느껴 사진 한 장 박을까 생각하다가 그만둡니다. 아이가 새근새근 잘 수 있도록 눕힌 채 가슴으로 안느라 한손으로 아이를 안고 한손으로 사진기를 쥐지 못합니다. ‘아이를 왼어깨로 안고 사진을 찍을까?’ 생각하다가 고개를 젓습니다. 이렇게 해도 아이는 깨지 않겠지요. 살짝 응응거리다가 다시 잠들겠지요. 그러나 아빠 사진 한 장 더 얻는다면서 잘 잠든 아이가 끄응 하며 뒤척이도록 하고 싶지 않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자리에 눕혀도 아이는 깨지 않습니다. 다른 때에는 이렇게 자리에 눕히면 깨곤 했는데, 아이가 참 힘들었나 봐요. 달게 잘 자는 아이를 바라보다가는 아빠 일손을 좀 붙잡을까 생각했지만, 아빠 또한 졸음이 밀려듭니다. 아이가 잘 때에 아빠 일을 하고픈데, 아이가 잘 무렵에는 아빠도 지쳐서 함께 곯아떨어지고야 맙니다. 한 시간쯤 눈을 붙이고 나면 아이도 어느새 일어나고, 바야흐로 저녁을 지어 함께 먹을 때입니다. 참말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알 노릇이 없어요. 그래도 날짜는 하루 이틀 지나며, 1월이던 달력이 12월 마지막에 이르고, ‘어, 우린 아직 2011년 달력이 없는데?’ 하는 생각을 비로소 합니다.

 사진책 《우에노역 한자락》을 다시 들춥니다. 우에노역을 거쳐 어디론가 떠나거나 어디에선가 찾아오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우에노역은 시끌벅적했다가 조용해지고, 조용하다가는 시끌벅적해집니다. 잘나 보이는 사람이 있고, 못나 보이는 사람이 있으며, 수수해 보이는 사람이랑 멋스러워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온갖 사람 온갖 모습을 보면서, 아하 그렇구나, 온갖 사람 온갖 모습이란 온갖 이야기가 되는구나, 하고 되새깁니다. 그저 사람만 찍는다고 사람사진이 되지 않고, 서울역이든 우에노역이든 또 골목길이든 여느 길거리나 마을에서든 사람만 집어넣는다고 볼 만하거나 살가운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다 달리 깃들거나 서린 이야기를 느끼어 살포시 담아야 사진이 됩니다. 저마다 다 달리 이루는 이야기를 담지 못한다면 사람을 사진에 넣을 까닭이 없습니다. 웃는 얼굴에는 웃는 이야기가 있고, 슬픈 얼굴에는 슬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애틋한 이야기, 그늘진 이야기, 기쁜 이야기, 궂은 이야기, 사람 살아가는 하루하루 언제나 다른 이야기가 온누리 곳곳에 그득그득 있습니다. (4343.12.5.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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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섬 이야기 비룡소의 그림동화 110
요르크 뮐러 그림, 요르크 슈타이너 글, 김라합 옮김 / 비룡소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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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벌레 삶은 즐겁지 않아요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34] 요르크 뮐러·요르크 슈타이너, 《두 섬 이야기》(비룡소,2003)



 좋은 이야기라 할는지, 훌륭한 이야기라 할는지, 놀라운 이야기라 할는지, 아픈 이야기라 할는지, 따스한 이야기라 할는지, 여러모로 뒤엉킨 그림책 《두 섬 이야기》를 펼칩니다. 그림책 《두 섬 이야기》는 처음에는 ‘세 섬’이었으나 ‘한 섬’은 사람들이 끝없이 돈벌레 짓을 하다가 그만 물속으로 꼬르륵 가라앉고 말아, ‘두 섬’이 되었을 때 이야기를 담습니다. 아마, 맨 처음 세 섬이던 때에는 세 섬 모두 어슷비슷 조촐한 모양새였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어느새 한 섬하고 두 섬이 다른 모양새가 되고, 이 다른 모양새로 흐르고 흐르던 어느 날 한 섬이 무너졌으며, 남은 두 섬이 비슷한 모양새로 다시금 제자리를 찾았으나, 끝내 다른 한 섬마저 예전 섬이 걷던 길을 되풀이하면서 물속으로 가라앉을 뻔하는구나 싶어요.


.. 큰 섬에는 부자와 가난뱅이, 주인과 머슴이 살았습니다. 또 큰 섬의 배들은 으리으리했어요 … 그와 달리 작은 섬에는 주인도 머슴도 없었습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모든 일을 함께 했지요. 그런 까닭에 부자도 없고 가난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 역시 없는 탓에, 노래하고 춤추고 연을 날리며 즐겁게 놀 시간이 많았습니다 ..  (4∼5쪽)


 그림책 첫머리에 적힌 이야기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첫머리부터 이 그림책 마무리가 어떻게 될는지를 환히 보여줍니다. 부자와 가난뱅이가 갈린 섬은 앞날이 어찌 되겠습니까. 주인도 머슴도 없는 섬은 앞날이 어떠할까요. 부자와 가난뱅이가 있는 섬은 오늘날로 친다면 경제성장률이 꽤 높고 국민소득 또한 제법 될 테지요. 주인도 머슴도 없는 섬은 경제성장률이 아예 없을 뿐더러 국민소득 또한 숫자로 잴 수 없을 테고요.

 생각해 보셔요. 국민소득이 몇 만 달러라 하는 나라에 거지나 떨꺼둥이가 없는가요. 국민소득이 2만 달러라 하는 이 나라 사람들 살림살이는 어떠한가요. 줄잡아서 2만 달러라 하지만, 2만 달러를 웃도는 사람하고 이 숫자를 밑도는 사람들 살림살이는 얼마나 어떻게 벌어졌는가요.

 이런 숫자를 따지면서 살아야 할 우리들일는지 궁금합니다. 이런 숫자가 아니요 숫자로 따질 수 없는 사랑과 믿음과 나눔을 헤아려야 할 우리들일는지 스스로 잘 가눌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돈을 더 많이 버는 삶을 바라지 말고, 더 즐겁게 어우러지면서 아름다이 지낼 삶을 꿈꾸며 가꿀 노릇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붉은 사금석 밑에서 묵직한 순금이 나왔다는 소식은 눈 깜짝할 사이에 온 섬에 퍼졌습니다. 큰 섬 사람들은 너도 나도 황금을 찾아나섰습니다. 농부들은 이제 밭을 돌보지 않았어요. 어부들은 더이상 바다로 나가지 않았고요. 하인들과 머슴들은 몰래 일터를 빠져나갔지요 ..  (14∼16쪽)


 그림책 《두 섬 이야기》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책입니다. 아이들이 서로서로 따스히 아끼거나 사랑하도록 이끌려는 책입니다. 착한 마음과 참다운 넋과 고운 몸가짐을 익히도록 도우려는 책입니다. 이 나라이든 이웃한 나라이든 어른들은 도무지 제 마음을 차리지 못하는 탓에, 앞으로 우리 누리를 가꿀 아이들한테 슬기로운 얼을 북돋우고 싶어 하는 책입니다.

 틀림없이 적잖은 아이들은 이 그림책을 읽으면서 금이니 돈이니 이름이니 힘이니 하는 부질없는 뜬구름잡기를 달가이 여기지 않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그림책에 나오는 큰섬 임금님이 지나치게 엇나갔기 때문에 이렇게 무너졌다고 생각하며, ‘돈을 긁어모으더라도 좀 알맞게’ 긁어모았어야 한다고 생각할 아이들 또한 꽤 있으리라 봅니다. 비바람이 몰아칠 때에는 일을 쉬게 해 준다든지, 사금석 밑에서 나온 금붙이를 사람들한테 나누어 준다든지 하면 ‘투덜거리는 목소리’를 얼마든지 잠재울 수 있지 않느냐 생각할 수 있어요.

 어느 한편으로는 《두 섬 이야기》 같은 그림책이야말로 어른들이 먼저 읽고 깨우쳐야 한다 여길 만합니다. 아이들하고 사랑스레 어울리는 삶을 사랑하는 마음을 기르도록, 어른들이야말로 이 그림책을 읽으며 당신 삶을 곱씹고 뉘우칠 노릇이라 할 만합니다. 아이들한테 읽히는 그림책이라기보다 어른들한테 읽히는 그림책이라 할 수 있어요.

 아이들 스스로 돈벌레처럼 구는 일이란 없습니다. 아이들 둘레에 있는 어른들이 하나같이 돈벌레처럼 굴 때에 아이들 또한 이런 버릇을 물려받습니다. 아이들을 거느리거나 키우는 어버이가 돈벌레 삶에 얽매여 있을 때에는 아이들은 시나브로 돈벌레 삶에 젖어듭니다. 아이들이 대학입시에 일찍부터 목 매달도록 내모는 어버이와 교사란, 아이들이 돈벌레 삶에서 허덕이도록 내모는 꼴하고 마찬가지입니다.


.. 눈먼 할아버지는 섬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었습니다. 눈먼 할아버지는 자기가 같이 갈 것이며 주민들을 외롭게 버려두지 않겠다고 했지요. “큰 섬 왕은 틀림없이 우리에게 조개껍데기를 품삯으로 줄 거요. 하지만 우리가 조개껍데기를 무엇에 쓰겠소? 그러니 이제는 큰 섬 사람들에게 쓸모없어진 흙을 품삯으로 달라고 합시다. 큰 섬 사람들이 훔쳐갔던 우리 섬의 흙을 말이오.” ..  (21쪽)


 《흙, 문명이 앗아간 지구의 살갗》(삼천리 펴냄,2010.11.)이라는 책이 새로 나왔습니다. 흙을 다루는 그림책이며 이야기책이며 인문책이며 제법 많습니다. 흙을 밟거나 만지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흙을 다룬 책’을 읽을까 궁금한데, 논밭을 일구거나 텃밭을 돌보거나 꽃그릇을 가꾸는 사람은 당신이 늘 만지는 흙이 바로 ‘좋은 책’입니다. 흙을 다룬 책은 ‘흙을 만지는 사람이 날마다 느끼는 삶’을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으로 풀어서 책 하나로 엮습니다. 사랑스레 살아가는 사람은 굳이 책 하나를 더 읽을 까닭이 없고, 믿음직하게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애써 책 하나 더 쥐어 주지 않아도 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자꾸자꾸 사랑을 읽으니까 ‘흙을 다루는 책’을 내놓을밖에 없습니다. 요즈막 사람들이 하나같이 믿음을 버리니까 《두 섬 이야기》 같은 그림책이 나올밖에 없습니다.

 목숨을 살리는 길을 걷는다면, 이와 같이 걷는 내 삶이 곧바로 좋은 책 하나입니다. 목숨을 사랑하는 길을 걷는다면, 이처럼 걷는 내 삶으로 이웃하고 살가이 어깨동무합니다. 목숨을 보살피는 길을 걷는다면, 이렇게 걷는 내 삶으로 나부터 한껏 즐겁기에 내 둘레 벗과 이웃과 살붙이 모두 즐거울 길을 함께 걸을 수 있습니다.

 그림책 《두 섬 이야기》 끝자락을 보면, “작은 섬 사람들은 큰 섬 사람들에게 앙갚음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작은 섬 사람들은 도망 온 큰 섬 사람들이 뭍으로 올라오도록 도와 자기네 집으로 데려갔습니다(29쪽).”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주인과 머슴이 없던 자그마한 섬 사람들은 ‘주인과 머슴’에다가 ‘부자와 가난뱅이’가 갈린 채 툭탁질을 하던 커다란 섬 사람들이 제 고향 터전을 잃고 찾아들었을 때에 ‘언제나 그러하듯’ 똑같은 벗이나 이웃이자 살붙이로 맞아들입니다. 마땅한 일입니다.

 싸움이 아닌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니 평화로이 서로를 맞아들입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한테는 ‘내 편’이니 ‘네 편’이니가 없습니다. 평화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한테는 ‘적군’과 ‘아군’이 나뉘어요. 다 함께 골고루 일놀이를 즐기는 삶일 때에는 밥 한 그릇 넉넉히 나눕니다. 내 밥그릇에서 반을 덜든 얼마를 덜든 내 몫을 기꺼이 덜어 이웃한테 건넵니다. 이웃돕기를 할 마음이 아니라, 마땅히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이웃사랑이 아니라, 으레 이처럼 살아왔어요. 겉치레로 붙이는 이름이 아닌 삶입니다. 사진을 찍느니 방송을 찍느니 할 ‘봉사’나 ‘자선’이 아닌 여느 나날입니다.

 가만가만 이 나라 삶터와 삶자락과 삶무늬를 헤아려 봅니다. 이 나라에는 국민소득과 경제성장률과 대학입시라는 숫자놀음이 판칩니다. 날이면 날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에다가 이주노동자 다툼과 아픔이 불거집니다. 따숩거나 넉넉한 이야기가 불거지거나 샘솟는 일은 몹시 드뭅니다. 신문이고 방송이고 책이고 따숩거나 넉넉한 여느 사람들 수수한 삶은 좀처럼 안 다룹니다. 아무래도, 이쪽 사람이건 저쪽 사람이건 목청 높이는 금긋기를 할 뿐이지, 서로를 내 동무나 이웃이나 살붙이로 여기지 못하는 탓입니다. 삶을 바로세우면서 《두 섬 이야기》를 읽는다면 이 그림책을 ‘지식 교훈 그림책’이 아닌 ‘사랑 믿음 그림책’으로 받아들여 살포시 껴안겠지만, 삶을 바로세우기 앞서 ‘좋은 책’이라는 껍데기만 붙잡으며 그림책을 아이들한테 휙휙 던져 주거나 읽히는 어버이랑 교사만 많은 이 나라가 아닐까 근심스럽습니다.

 책은 안 읽어도 되니까 부디 착하게 살아가면 고맙겠어요. 좋은 책일지라도 애써 안 읽거나 몰라도 괜찮으니까 제발 고운 넋 사랑스레 나누며 살아가면 반갑겠어요. (4343.12.5.해.ㅎㄲㅅㄱ)


― 두 섬 이야기 (요르크 뮐러 그림,요르크 슈타이너 글,김라합 옮김,비룡소 옮김,2003.11.7./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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