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님
리영희 님이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놀라지는 않는다. 올 일이 왔다고 생각한다. 문득 궁금해서 몇 군데 누리신문으로 들어가 보니 첫 쪽에 큼지막하게 ‘궂긴 이야기’를 적바림해 준다. 그렇구나, 이렇게 숨을 거두고 나서야 첫 쪽에 큼지막하게 실어 주는구나. 살아 있는 동안 당신 말씀을 조금 더 귀담아 들어 주면서 첫 쪽에 큼지막하게 실어 줄 수는 없었겠구나. 여느 때마다 덧없는 정치다툼이나 부질없는 경제성장 숫자를 잔뜩 싣던 신문들이기 때문에, 여느 때에 우리들 마음밭을 곱게 일구는 데에 밑거름이 될 이야기는 싣기 어려울는지 모른다. 아무렴.
다들 리영희 님을 놓고 ‘실천하는 지식인’이었다고 읊는다. 그래, 틀린 말은 아니다. 리영희 님은 말을 앞세우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실천하는’ 사람이다. 리영희 님은 글을 쓸 때에 허투루 쓰는 법 없이, ‘글 한 줄 쓰느라 책 다섯 권을 읽는다’고 했으니 참다운 지식인이다.
그러면, 이렇게 말을 앞세우지 않고 몸으로 살아내면서 글 한 줄 쓰느라 책 다섯 권을 읽는 매무새는 어떤 사람이 보여주는 모습인가.
아무도 따를 수 없는 하느님 같은 사람 모습인가.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보여주는 모습인가. ‘지식인’이라면 밑바탕으로 갖출 모습인가.
리영희 님은 내 아버지 같은 사람이다. 리영희 님은 당신 아들을 걱정하고 사랑하는 매무새로 글을 쓰고 말을 나누었기 때문에 내 아버지 같은 사람이다. 리영희 님이 쓴 책을 읽을 때면, 리영희 님이 온삶을 바쳐 알알이 영근 알뜰한 넋을 아로새길 수 있었기에 당신은 내 아버지 같은 사람이다. 아버지가 당신 아들을 어떻게 헤아리면서 사랑하는가를 돌아볼 노릇이다. 아버지다운 길을 걷는 사람이라면 어떠한 매무새일는지 살필 노릇이다.
히유. 아이야, 날이 차다만 자전거 타고 살짝 마실을 다녀오자. 찬바람 좀 잔뜩 쐬어야겠다. (4343.12.5.해.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