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0원


 보일러에 기름 300리터를 넣는다. 기름집에 전화를 넣으니 이날 따라 기름 넣는 집이 많다며 못 갈 수 있다고 말한다. 이듬날 아침에 와도 괜찮다고 이야기한다. 5분쯤 지났을까, 전화가 울린다. 다른 목소리인데 기름집이다. 금방 기름 들고 간다면서 어디인지 묻는다. 같은 기름집 일꾼인데 이렇게 다른 목소리일 수 있을까. 기름차를 모는 일꾼은 어디어디라 하니 금세 알아듣는다. 곧 기름차가 우리 멧골집으로 찾아오고 기름통에 기름바늘을 꽂고는 콸콸콸 넣는다. 기름차를 모는 기름집 일꾼은 고등학생 때까지 이 마을에서 살다가 서울로 가서 마흔 해를 살았고, 이제 다시 고향마을로 돌아와서 늘그막에 기름집 일꾼으로 하루하루 보낸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구나, 그래서 이렇게 금세 알아듣고 쉬 찾아와 주시는구나. “시골에 살면 좋지요. 요새는 시골에도 유치원 차가 다 들어와서 태워다 주고 태워 오잖아요. 도시도 도시대로 좋지만 시골도 시골대로 좋지요.” 어느덧 300리터가 다 찬다. 기름집 일꾼한테 잔돈이 없어 집에 있는 천 원짜리를 어찌저찌 긁어모아 삼십이만 칠천 원을 맞춘다. 기름집 일꾼한테 기름값을 건넨다. 추운 저녁날, 방에 있으라던 아이가 문을 빼꼼 내밀더니 신을 꿰고 마당으로 나온다. “아저씨! 아저씨!” 하면서 웃고 노래하며 춤을 춘다. 기름값을 받던 아저씨가 이 가운데 오천 원을 덜어 나한테 도로 내민다. “아이 과자나 사 주셔요.” “네? 괜찮아요.” “아이가 귀여워서 깎아 드려요.”

 인천에 살던 때, 일곱 살부터 열일곱 살까지 5층짜리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이 아파트는 연탄 때는 아파트였다. 방마다 연탄 한 장 넣어 불을 때니까 이렇게 해 본들 따뜻할 수 없고, 나중에 기름보일러라는 녀석이 한창 나오며 널리 사랑받을 즈음 동네방네 기름보일러 놓는 집이 늘었다. 위아래옆 이웃집이 거의 다 기름보일러로 바꾸며 나무 마룻바닥을 뜯어내고 구리파이프 깔아 시멘트로 다시 덮느니 뭐를 하느니 하고 나서 아주 느즈막히 우리 집도 기름보일러를 놓는다. 기름보일러를 놓는 데에는 여러 날이 걸린다. 먼저 마루를 뜯어내고, 마루에 있던 짐을 방 한쪽에 몰아놓는다. 마루에 파이프 다 깔고 시멘트로 덮어 말린 뒤에 짐을 다시 마루 한쪽으로 죄 몰아놓고, 이제는 방에 있던 옷장이며 짐이며 모조리 붙인 다음 방도 똑같이 바닥을 들어내어 파이프를 깐다. 그런데, 내가 떠올리기로는 처음부터 구리파이프를 쓰지 않고 피브이시인가 플라스틱 같은 파이프를 쓰느라 겨울에 한 번 얼어터져서 다시 구리파이프로 바꾼 줄 안다. 다른 이웃집도 비슷한 일을 숱하게 겪었고.

 이렇게 기름보일러를 들이기까지 집집마다 난로를 방이나 마루에 놓고 살았다. 그런데 난로라 해 봤자 불이 얼마나 세겠는가. 연탄으로는 안 되니 아파트 중앙난방을 한다며 스팀이 나오기는 했으나 창문이 얼지 않을 뿐 거의 도움이 되지 않기 일쑤였다. 그나저나 기름보일러이기 때문에 기름집에서 기름을 사 와야 한다. 우리 집은 아들이 둘, 그러니까 기름을 사다 나를 일꾼이 쏠쏠히 있는 셈. 국민학교 5학년이었나, 이무렵부터 형이랑 나는 주말마다 20리터들이 기름통을 둘씩 들고 기름집으로 가서 기름을 사 왔다. 형은 집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날랐다. 우리 집은 4층인데 계단에서도 쉴 줄을 몰랐다. 어린 꼬맹이가 20리터들이 기름통을 한손에 하나씩 들고 세 살 위 형을 따라가려면 얼마나 벅찼는지. 그러나 조금이라도 뒤처지만 형한테 꿀밤을 맞았기 때문에 손이 얼얼해 떨어질 노릇이었어도 죽어라 좇아갔다.

 예나 이제나 기름을 사다가 보일러를 돌리면서 ‘기름값 에누리’를 받아 본 적이란 없다. 늘 숫자판에 찍힌 그대로 값을 치렀다. 그런데 5000원 에누리라니.

 기름차를 떠나 보낸다. 문을 닫고 들어가려는데 기름차 아저씨가 차에서 내리더니 뭔가를 가슴에 잔뜩 안고 달려온다. “휴지라도 드려야 하는데, 깜빡했네. 재미있게 잘 사셔요.”

 내 나이 예순이 될 2034년 겨울날, 내 고향마을인 인천 골목동네로 다시 찾아가 본다 할 때에, 그곳 그때에 만날 내 딸아들 뻘 될 젊은이한테 나는 무슨 말 무슨 이야기 무슨 꿈을 들려줄 수 있을까. (4343.12.5.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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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10-12-06 08:18   좋아요 0 | URL
전 내 나이 예순에 돌아갈 고향이 없어요. 부럽고 따뜻하고 존경받을 이야기입니다. ^^

숲노래 2010-12-06 12:35   좋아요 0 | URL
오늘 살아가는 그곳을 좋은 고향으로 가꾸어 주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