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지기 동생들이 새해 첫날을 맞이해 우리 시골집으로 마실을 왔다. 마중을 나가는 길, 우리 마을 들머리 버스 정류장을 바라본다. 

- 2011.1.1. 충북 충주시 신니면 광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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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종이를 머리에 얹다. (__) 

- 2010.12.26. 

 

그러고 나서 눈길에 발자국 내기를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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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나누는 기쁨 ㉣ 삶, 사람, 사랑, 사진
 ― 사진이 태어나는 밑뿌리



 제주섬에 가면 꼭 가 보아야 할 만한 곳으로 여러 군데를 들곤 합니다. 이 가운데 으레 손꼽는 자리인 하나, 누구보다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으레 거치는 자리는 두모악갤러리입니다.

 두모악갤러리를 찾아가 보면, 제주섬 오름을 담은 김영갑 님 사진이 예쁘게 걸린 채 사람들을 기다립니다. 김영갑 님이 당신 사진을 그러모아 선보인 마지막 터전이 이곳 두모악갤러리입니다.

 지난 2010년 11월 13일, 둘째를 밴 옆지기하고 스물여덟 달째 함께 살아가는 딸아이랑 함께 제주섬 마실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제주섬을 찾아가며 올레길을 걷는다든지 바닷가를 거닌다든지 한라산을 탄다든지 합니다. 자가용을 빌려 이곳저곳 쏘다니기도 하겠지요. 우리한테는 자가용이 없고 자가용을 빌릴 돈이 없으며 자가용을 몰 면허증이 없습니다. 그래도 용케 차를 태워 주는 분이 있어 두모악갤러리를 찾아갔습니다. 마침 김영갑 님 사진책 《마라도》가 새판으로 다시 나왔기에 즐겁게 장만합니다. 충주 멧골집으로 돌아와 비닐을 뜯어 책을 펼치니, 앞머리에 사진심리학자 신수진 님 추천글이 달립니다. 신수진 님은 김영갑 님 사진책을 보며 “김영갑의 신작 아닌 신작, 마라도에선 그들의 삶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우리를 압도한다.”고 적습니다.

 사진을 찬찬히 살핍니다. 지난날 눈빛출판사에서 나온 《마라도》에서 본 사진이지만, 새판으로 볼 때에는 느낌이 사뭇 다릅니다. 판짜임과 엮음새가 다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김영갑 님 예전 사진책이든 새 사진책이든 사진은 똑같습니다. 김영갑 님 사진이 베푸는 선물은 매한가지입니다. 제주섬을 사랑하고 사진을 아끼며 삶을 즐기는 가운데 사람을 얼싸안는 따스함은 한결같습니다.

 우리 식구도 제주마실을 하면서 바다를 보기는 했으나, 막상 우리가 거닌 길은 올레길이 아닌 제주섬 골목길이었고, 제주시 이도1동에 자리한 헌책방 〈책밭서점〉에 오래 머물었습니다. 찬바람이 꽤 불어 골목길 마실은 얼마 못했는데, 따순바람이 불 때에 네 식구가 다시금 찾아가 골목길은 골목길대로 거닐며, 올레길이 아닌 여느 시골마을 고샅길을 걷고 싶습니다.

 우리 식구는 어디를 다니든 관광이 아닌 마실이고, 놀러가기가 아닌 나들이입니다. 뜻밖에 우리 식구가 제법 돈을 번다면 일본마실까지 다닐는지 모르는데, 우리 식구들이 일본마실을 한다면 어김없이 일본 헌책방거리와 골목길을 거닐지 않겠느냐 생각합니다. 그러나 도시에서만 다니면 지루한 만큼, 일본 시골자락을 찾아 고샅길을 함께 거닐어야지요. 우리 식구는 따스한 사람과 포근한 삶과 너그러운 사랑과 싱그러운 사진을 좋아하거든요.

 새로운 사진책 《마라도》에 붙은 추천글을 읽을 다른 분들은 무엇을 느낄까 설핏 궁금하지만, 참말로 사람들은 김영갑 님 사진을 들여다볼 때에 “작가의 시선이 우리를 압도한다”고 느낄까 싶어 알쏭달쏭합니다. 왜냐하면, 김영갑 님 사진은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우리한테 어떤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며 내리누르는’ 느낌이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김영갑 님 스스로 사랑하는 삶터에서 사랑하는 사람들 매무새를 사랑하는 사진으로 담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내리누르지(압도) 않습니다. 사랑은 내세우지 않습니다. 사랑은 우쭐거리거나 뽐내지 않아요. 사랑은 살가이 껴안습니다. 사랑은 촉촉히 젖어드는 눈물과 해맑게 빛나는 웃음으로 애틋합니다.

 흔히들 김기찬 님이 일군 《골목 안 풍경》이 ‘골목길을 찍은 사진’이라 일컫지만, 김기찬 님이 내놓은 사진책 《골목 안 풍경》은 ‘골목길을 찍은 사진’이라 할 수 없습니다. 김기찬 님은 ‘골목동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을 ‘풍경으로 담은’ 분입니다. 골목동네에서 살아가는 여느 사람들 수수한 삶을 아낌없이 사랑하면서 꾸밈없이 담은 사진이 차곡차곡 모여 《골목 안 풍경》이 태어났다고 느낍니다.

 골목길 모습 가운데 하나로 ‘골목동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을 꼽을 수 있습니다. ‘골목동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은 골목길을 이루는 숱한 모습 가운데 한 가지입니다. 골목사람이 골목길 모든 모습이 될 수 없고, 되지 않으며, 될 까닭이 없어요. 그렇다고 골목집 담벼락이나 우체통이나 문패나 꽃그릇이 골목길 모든 모습이 되지 않아요.

 사진을 읽으려면 옳게 읽어야 하고, 사람을 마주하며 이야기를 나누려면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며, 사진을 사랑하거나 아끼려면 ‘사진’을 참다이 ‘사랑하’고 ‘아껴’야 한다고 느껴요. 배병우 님 사진을 놓고 ‘소나무’를 찍은 사진이라 하지만, 배병우 님 사진 또한 ‘소나무를 찍은 사진’이 아닙니다. ‘소나무숲에 드리운 빛과 그림자를 찍은 사진’이 배병우 님 사진입니다. 우리들은 사진쟁이 한 분이 어떠한 이야기를 어떠한 사진틀에 담아 어떠한 삶자락을 보여주려 하는가를 찬찬히 돌아보면서 알뜰살뜰 가슴으로 받아들여야지 싶습니다. 사진읽기를 알맞게 하면서 삶읽기를 살가이 하고, 사람과 사랑이 어우러지는 터에서 어떠한 문화꽃과 예술나무가 자라는가를 느껴야지 싶습니다. 비평을 하는 사진이나 소장을 하는 사진이나 전시를 하는 사진이나 보도를 하는 사진이 아닐 테니까요. 내 사랑하는 삶을 보여주는 사진이고, 내 사랑하는 사람을 마주하는 사진이며, 내 사랑하는 꿈을 꿈을 빛그림으로 아로새기는 사진일 테니까요.

 살아가기에 사진에 이야기를 담습니다. 살아가기에 사진에 깃든 이야기를 읽습니다. 나 스스로 사람인 까닭에 사람을 찍는다 하지만, 사람 몸이나 얼굴을 찍지 않더라도 사람 내음 물씬 묻어나는 사진을 이룹니다. 지팡이나 도마나 옷깃이나 장갑이나 굳은살이나 밥그릇을 찍는 사진으로도 사람을 얼마든지 이야기합니다. 사랑하기에 사진을 즐길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담기도 하는 사진이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사진에 담아 둘레 사람들하고 사이좋게 나누기도 합니다.

 삶과 사람과 사랑입니다. 사진이란 다른 무엇보다 이 세 가지를 밑바탕으로 단단하고 참다우며 착하게 다스린 다음에 일구는 문화꽃입니다. 사진이란 바로 이 세 가지를 언제나 곁에 놓으면서 예쁘고 따스하며 넉넉히 아우르는 가운데 이루는 예술나무입니다.

 신문사 기자가 되었기에 보도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사진학과 교수가 되었다 해서 사진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갤러리를 열었다고 사진문화를 나누지 않습니다. 사진잔치를 마련한 작가라 하더라도 사진예술을 꽃피우지 않습니다. 마음과 꿈과 눈물과 웃음과 땀방울이 알알이 영그는 삶·사람·사랑이 만나야 비로소 사진이 태어납니다. (4344.1.1.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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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니다’와 ‘하고 있습니다’


 다시금 새해를 맞이합니다. 새롭게 맞이한 해인 만큼 나이는 한 살 더 먹어 서른일곱이 됩니다. 제 나이 서른일곱이란 대단한 숫자가 아니요, 그리 많은 숫자 또한 아닙니다. 서른일곱이라면 서른일곱에 걸맞게 살아가면서 서른일곱에 걸맞게 생각하고 서른일곱에 걸맞게 말을 하거나 글을 써야 올바릅니다.

 새해 첫날, 내 글투는 어떠한가 하고 새삼스레 곱씹어 봅니다. 지난날 내 글투가 어떠했는가 가만히 헤아립니다. 1998년에 한글학회에서 주는 ‘한글공로상’을 참 어린 나이에 받기는 했으나, 이때에는 신나게 팔뚝질을 하듯이 운동을 했을 뿐, 참다이 말사랑이나 글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사회가 사회이다 보니 팔뚝질 아니고서는 사람들이 귀나 눈을 열지 않기도 했다지만, 차분하게 말사랑 글사랑을 펼치지 못했어요. 이무렵 제가 쓴 글을 돌아보면 ‘것’을 얼마나 자주 썼는지 모릅니다. “그러한 것도 그저 지나간 일이 되고 마는 것인지” 같은 글을 곧잘 썼어요. 이제는 이렇게 글을 쓰지 않고 말도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이 또한 그저 지나간 일이 되고 마는지”처럼 글을 쓰고 말을 합니다. 아니면 “이마저 한낱 지나간 일로 삼고 마는지”처럼 글을 쓰거나 말을 해요.

 1998년에 쓴 글을 되짚으니 “먼저 풀어야 한다. 더불어,” 같은 글투도 보입니다. 이 대목도 엉터리입니다. ‘더불어’를 글 맨앞에 외따로 쓸 수 없어요. “이와 더불어”처럼 적어야 올바릅니다.

 2007년부터 2009년 첫머리 사이에는 ‘자기(自己)’와 ‘자신(自身)’이라는 낱말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를 놓고 오래도록 머리앓이를 했습니다. 이러한 낱말은 한자말 아닌 우리 말로 삼아서 그대로 써야 하지 않겠느냐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 낱말을 쓰고 다시 쓰다 보니 어쩐지 저 스스로 초라하지 않느냐 싶더군요. 고작 이런 낱말조차 우리들이 지난날부터 곱게 쓰던 말투를 살피어 새로운 오늘날에 알맞게 담아내지 못한다면 말사랑 글사랑이란 덧없지 않겠느냐 생각했어요. 이러는 동안 ‘자신’이나 ‘자기’라는 낱말이 깃드는 자리를 곰곰이 돌아보았습니다.

 ┌ 자신은 착한 일인 줄 알고 했어도
 │
 │→ 나는 착한 일인 줄 알고 했어도
 │→ 나로서는 착한 일인 줄 알고 했어도
 │→ 당신은 착한 일인 줄 알고 했어도
 │→ 그때에는 착한 일인 줄 알고 했어도
 └ …


 적잖은 사람들은 ‘자신’과 ‘자기’뿐 아니라 다른 낱말을 옳게 다듬거나 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말과 말은 1:1로 맞추어 고치거나 다듬을 수 없는데, 이 낱말이 이런 자리에 쓰이든 저런 자리에 쓰이든 1:1로만 생각해 버릇하거든요. ‘자신’ 한 가지를 다듬을 때에도 마찬가지예요. 맨 처음으로는 ‘나’로 다듬습니다. 글흐름을 살피다 보면 ‘나로서는’처럼 ‘-로서’를 사이에 넣어야 한결 부드럽기도 하고, ‘당신’이나 ‘이녁’이나 ‘그 사람’이라고 넣어야 알맞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때에는’이나 ‘그무렵에는’을 넣어 줍니다. 그야말로 때와 곳에 따라 다듬을 말투가 다릅니다.

 ┌ 이름을 소중히 여기고
 │
 │→ 이름을 소담스레 여기고
 │→ 이름을 대수로이 여기고
 │→ 이름을 알뜰히 여기고
 │→ 이름을 아름다이 여기고
 │→ 이름을 고맙게 여기고
 │→ 이름을 보배로이 여기고
 └ …


 ‘소중(所重)’이라는 한자말을 놓고도 퍽 오래도록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이만 한 한자말 또한 구태여 한자말로 갈라야 한다면 사람들이 ‘우리 말 운동이라더니 아주 막 나가는군’ 하고 여길까 싶었습니다.

 이태쯤 앞서부터 ‘소중’이라는 낱말은 되도록 안 쓰지만, 서너 해쯤 앞서까지는 이 한자말을 그대로 쓰곤 했습니다. 이제는 이 낱말을 아예 안 써요.

 처음에는 ‘소담스럽다’라는 낱말을 써 보았습니다. 국어사전에 실린 ‘소담스럽다’는 두 가지 뜻풀이가 달립니다. 첫째는 “생김새가 탐스러운 데가 있다”이고 둘째는 “음식이 풍족하여 먹음직한 데가 있다”입니다. 왜 이 낱말 ‘소담스럽다’를 ‘소중하다’와 맞추었느냐 하면, 어느 날 ‘탐(貪)스럽다’라는 외마디 한자말 뜻풀이를 헤아리니, “마음이 몹시 끌리도록 보기에 소담스러운 데가 있다”로 나오더군요. 이 말풀이에 나오는 ‘소담스러운’이라는 낱말이 눈에 확 들어왔고, “소담스럽게 쌓인 눈”이라는 보기글을 곰곰이 생각하니까, “소담스럽다 : 마음이 몹시 끌리도록 좋다”라는 느낌으로 쓸 만한 낱말이구나 싶었어요.

 “소중하다 = 매우 귀중하다”입니다. “귀중하다 = 귀하고 중요하다”입니다. “귀하다 = 아주 보배롭고 소중하다”입니다. “중요하다 = 귀중하고 요긴함”입니다.

 여느 사람들은 ‘소중하다’가 무슨 뜻이요 어떤 쓰임인지 제대로 모릅니다. 그냥저냥 쓰는 낱말입니다. ‘보배롭다’가 토박이말인 줄 모르는 사람도 아주 많아요. 아니, 생각조차 않겠지요. 그래, ‘보배로이’는 ‘소중하게’하고 거의 똑같은 낱말이에요. 이 낱말을 쓰면 ‘소중하게’는 퍽 말끔히 털어낼 만합니다.

 다만, 모든 자리에 ‘보배로이’를 쓰기는 어렵습니다. 어느 때에는 ‘보배로이’를 쓰고, 어느 자리에는 ‘소담스레’를 씁니다. 국어사전은 예나 이제나 ‘소담스럽다’ 말풀이를 두 가지로 못박지만, 얼마든지 세 가지 네 가지 말풀이와 쓰임새가 늘어날 만합니다. 우리 스스로 다섯 가지 여섯 가지 말풀이와 쓰임새를 북돋우면 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소담스럽다’ 같은 낱말을 더욱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고 느껴요. 그리고 ‘알뜰히’나 ‘살뜰히’나 ‘알뜰살뜰히’를 쓰면서 ‘소중히’를 털 수 있고, ‘아름다이’나 ‘고이’, 여기에 ‘대수로이’를 쓰면 거의 모든 자리에서 깔끔하게 다듬을 수 있습니다.

 ┌ 펼쳐 보이고 있으니까요 (x)
 └ 펼쳐 보이니까요 (o)

 지난 2010년 여름께부터는 ‘있다’라는 말투를 되짚습니다. “하고 있다” 꼴로 쓰는 ‘있다’를 톺아봅니다.

 “보이고 있으니까요”처럼 적는다 해서 이 말투를 못 알아듣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니, 거의 모두라 할 만한 이 나라 사람들 누구나 이렇게 말을 하거나 글을 씁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이 말투가 영 낯설다고 느낍니다. 무엇보다 학교교육이라든지 책이나 방송하고 동떨어진 채 살아오던 사람들 ‘말을 담은 글’을 읽으면서 이런 말투를 하나도 찾아보지 못했어요.

 ┌ 바깥말 자리에만 머물고 있습니다 (x)
 └ 바깥말 자리에만 머뭅니다 (o)

 제가 쓴 예전 글을 다시금 읽으며 “하고 있다”나 “-고 있다” 꼴 말투를 살펴봅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우리 말법을 영어 말법에 끼워맞추면서 이런 말투가 자꾸 퍼지지 않느냐 싶습니다. 사람들이 영어를 널리 배우거나 가르치면서 이런 말투를 스스럼없이 쓰는구나 싶습니다.

 우리 말글을 조금 배운 사람은 알 텐데, 우리 말에는 ‘지난날 때매김’이 없습니다. ‘현재진행형’ 또한 없습니다. 영어이든 다른 서양말이든 때매김이 똑부러지게 나뉘고, 현재진행형 말투가 참 잦아요. 서양책을 한국말로 옮기며 현재진행형 말투인 “하고 있다”와 “-고 있다”가 저절로 튀어나옵니다.

 ┌ 토박이말로 짓고 있다면 (x)
 └ 토박이말로 짓는다면 (o)


 어찌 보면, 이제는 우리 말글에도 ‘지난날 때매김’을 넣거나 ‘현재진행형’을 달아도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굳이 예스러운 말투로 말해야 할 까닭이 없다 여길 수 있어요.

 다른 한편으로 보면, 우리는 우리 이웃하고 우리 말글을 나누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들 넋과 얼을 보듬으면서 말을 하거나 글을 쓰면 넉넉합니다. 괜시리 서양 말법처럼 우리 말법을 다루어야 하지 않아요. 한국사람은 한국땅에서 한글로 글을 쓰면 되고, 일본사람은 일본땅에서 가나로 글을 적으면 돼요. 서양사람은 로마자라 하는 알파벳을 쓰면 되겠지요.

 셈틀을 쓰며 인터넷으로 국어사전을 살필 때에는 국립국어원에 들어갑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창을 보면 “표준국어대사전에 대한 다양한 여러분의 의견을 기다립니다. 답변은 드리지 않습니다.” 하고 적혔습니다(지난해 첫머리까지만 해도 저는 이 대목에서 “적혀 있습니다”라 글을 썼으나, 이제는 “적혔습니다”라 글을 씁니다). 말글을 다루는 공공기관이자 정부부터 글을 이렇게 써요. “표준국어대사전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란 무엇이려나요.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말투이고, 이런 글은 어느 나라 글이라 할 만한가요. “표준국어대사전이 어떠한지 여러분 생각을 들려주셔요. 따로 답변하지는 않습니다.”처럼 적어야 할 글이 아닌지요. 그나저나 답변도 안 해 주면서 표준국어대사전이 어떠한가 하고 알려 달라고 적은 모양새가 쓸쓸해 보입니다. 이러쿵저러쿵 말이 있으면 대꾸를 해야 할 텐데, 귀는 있되 입이 없으면 어떡하나요. (4344.1.1.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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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해 첫날 첫글 (아톰 사랑)


 새해 첫날을 맞이한 아침나절, 어떠한 글을 쓰며 새 하루와 새 해를 열면 좋을까 하고 한참 생각합니다. 책 이야기를 쓰나 헌책방 이야기를 쓰나 멧골자락 아이키우기 이야기를 쓰나 하다가, 아무래도 내가 걸어가는 길은 다른 무엇보다 우리 말글을 다루는 사람으로 부대끼는 삶이니까, 우리 말글 이야기를 쓰자고 생각합니다.

 말부터 옳고 바르게 할 줄 알아야 생각을 옳고 바르게 합니다. 생각을 옳고 바르게 할 때에 삶을 옳고 바르게 꾸리는 길을 찾고, 삶을 옳고 바르게 꾸리는 길을 찾아야 비로소 책다운 책을 옳고 바르게 살핍니다. 책다운 책을 옳고 바르게 살피는 사람은 책 하나 장만하고자 새책방과 헌책방을 알뜰히 사랑하거나 아끼는 매무새를 가다듬습니다.

 맨 처음은 마땅히 말이요 글입니다. 가장 작은 말마디 하나를 보살피고, 가장 여린 글줄 하나를 보듬습니다. 가장 힘여린 살붙이를 돌보는 나날을 사랑하고, 더없이 어리며 예쁜 딸아이와 함께 지내는 오늘을 좋아해야겠다고 느낍니다. 엊저녁 《우주소년 아톰》 만화책 6권째를 읽습니다. 만화영화로 그린 아톰은 만화책으로 처음 나온 아톰 이야기를 알뜰히 살렸습니다. 2003년에, 그러니까 데즈카 오사무 님이 돌아가신 뒤 다른 이들이 새롭게 그린 아톰 만화영화는 《우주소년 아톰》 만화책을 알뜰히 살리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톰 캐릭터’ 예쁘게 꾸미고 ‘쓰리디 멋스러이 다듬는’ 데에 눈길을 맞추었습니다. 아톰은 예쁘장한 로봇이 아니라 사람보다 더 사람다운 마음을 사랑하는 착한 어린이인데, 이 대목을 살리거나 살피지 못한다면, 제아무리 뛰어난 솜씨와 빼어난 손길로 아톰 만화영화를 다시 그린달지라도 재미있을 수 없고 값있을 수 없으며 보람찰 수 없어요. 만화책 아톰을 보면, 사람들은 거의 웃지도 울지도 않으며 살아가는데, 아톰만큼은 늘 웃고 웁니다. 아톰만큼은 착하게 웃고 해맑게 웁니다.

 올 새해에 헤아릴 내 말글이든 올 새해에 장만할 내 책이든 올 새해에 찾아들 헌책방이나 골목길이든, 저로서는 데즈카 오사무 님이 1951년에 처음 《아톰대사》를 그리며 담은 넋을 사랑하거나 아끼는 매무새를 곱게 잇고픕니다. (4344.1.1.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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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1-02 00:25   좋아요 0 | URL
항상 좋은 글을 올려주시네요.된장님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파란놀 2011-01-02 08:05   좋아요 0 | URL
좋게 읽어 주시는 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좋은 글을 쓴다기보다..

고마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