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건네줄 수 있을 뿐


 책은 건네줄 수 있을 뿐입니다. 알맹이까지 알려줄 수 없습니다.

 맛있는 밥을 손수 차려서 대접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맛을 제가 느껴 줄 수 없습니다. 밥을 먹는 사람 스스로 느낄 맛입니다.

 자전거를 탈 때에 흐르는 땀이 우리 몸을 얼마나 시원하게 해 주는지 글로 써서 읽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전거를 타는 짜릿함과 힘듦을 제가 모두 느껴 줄 수 없습니다. 스스로 자전거를 타면서 느낄 짜릿함이요 힘듦입니다.

 보는 재미나 구경하는 재미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우리가 몸소 해 보는 재미만큼 클 수 없습니다. 듣는 재미나 읽는 재미가 제아무리 크다 한들 우리가 손수 말하고 쓰는 재미보다 클 수 없습니다.

 논밭에 곡식을 심어서 거두어들이는 보람도 크다고 하지만, 거두기까지 하루하루 땀흘리며 가꾸고 돌본 보람보다 클 수 없습니다. 마지막에 열매를 맺어서 거두는 일이란 그동안 애써 일한 보람 가운데 아주 작은 한 가지입니다.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 봅니다. 우리가 함께 나누거나 즐겁게 읽으면 좋을 책을 얼마든지 추천할 수 있고 알려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중에 가서는 나한테 좋을 책은 나 스스로 골라야 해요. 책읽기뿐 아니라 ‘책 고르기’가 아직 서툴다고 한다면, 처음에는 저나 다른 누가 알려줄 수 있겠지요. 그런데, 저라고 해서 모든 책을 다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저는 제가 아는 만큼만 이야기합니다. 저한테 도움을 받는 분이건 다른 분한테 도움을 받을 분이건, ‘어느 한 사람이 살아오며 좋아하거나 즐기던 책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서로서로 어떠한 삶을 꾸리면서 어떠한 넋으로 어떠한 책을 사랑하는가를 짚으려 한다면, 애써 추천받는 책을 찾아 읽어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이란 누구나 내 삶을 꾸려야지 남 삶을 구경할 수 없습니다. 내 삶을 돌보며 내 삶에 마음을 쏟아야지 남 삶에 기대거나 마음 쏟을 수 없어요.

 아이한테 삶을 가르쳐 주지 못합니다. 아이한테 지식 또한 물려주지 못합니다. 어버이는 아이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을 뿐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는, 어버이 몸가짐 그대로 아이한테 일깨워 주기만 합니다. 아이는 제 어버이를 바라보면서 하나하나 익히되, 아이 몸과 마음에 걸맞게 받아들입니다. 아이 몸과 마음에 걸맞지 않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어버이가 열 마디를 하더라도 이 가운데 한 마디를 알아듣기까지 몇 달 몇 해가 걸립니다. 글을 가르치든 말을 가르치든 여러 해가 걸립니다. 아이가 손수 밥하기를 하도록 이끌자면, 아이가 손수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하며 동생을 돌보도록 이끌자면, 얼마나 기나긴 해에 걸쳐 얼마나 숱한 땀을 흘려야 할까요.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서 홀로 우뚝 섭니다. 책읽기라는 길에 접어들고 싶은 분이라면, 누구나 ‘책을 건네줄 수 있으나 읽도록 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홀로서는 책읽기요, 홀로서는 삶입니다. (4344.1.23.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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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네 개의 눈동자
쓰보이 사카에 지음, 김난주 옮김 / 문예출판사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교사가 되고픈 사람이라면
― 쯔보이 사까에, 《스물네 개의 눈동자》



- 책이름 : 스물네 개의 눈동자
- 글 : 쯔보이 사까에 (쓰보이 사카에)
- 옮긴이 : 추식
- 펴낸곳 : 한일출판사 (1961.9.5.)



 헌책방에서 ‘쓰보이 사카에(쯔보이 사까에)’ 님 책을 처음 만났습니다. 2001년이었나 2002년이었나, 서울 대방동에 자리한 〈대방헌책방〉에서 만나지 않았나 떠올립니다. 이럭저럭 책을 다 골랐다 싶어 책값을 셈하고 나올 즈음, 셈대 앞쪽에 꽂힌 퍽 조그마하면서 낡은 책 하나 눈에 뜨였습니다. 책이름 《스물네 개의 눈동자》를 보면서, ‘이 책이름은 뭐냐? 어째 스물네 개의 눈동자 따위로 이름을 붙였담. 토씨 ‘-의’를 이렇게 엉터리로 붙여도 되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언제 적 책인지 구경이나 해 보자 싶어 들춥니다. 1961년에 나온 책입니다. 다시금 생각합니다. ‘우와, 1961년에도 사람들은 토씨 ‘-의’를 이렇게 엉터리로 썼구나.’

 글쓴이나 옮긴이를 잘 모르는 주제에, 또 글쓴이나 옮긴이를 보기 앞서, 책이름을 놓고 혼자 궁시렁댑니다. 이때로서는 낯선 글쓴이요 낯선 일본문학인 만큼, 다시 제자리에 꽂을까 하다가, 애써 집은 만큼 책장을 넘기자 생각합니다. 머리말을 읽고 몸글을 조금 읽습니다. 시골 섬마을 아이들 열둘을 가르친 교사 한 사람 이야기가 주르르 흐릅니다. 옮긴이가 ‘한국땅 꽤 외진 시골 사투리’로 적바림해 줍니다.

 번역글이 참 좋다고 느끼는 한편, 창작글 또한 무척 좋다고 느낍니다. 어, 어, 이런 놀라운 문학이 있었네,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갈 일은 그만 잊습니다. 헌책방 문간에 서서 꽤 오래 책을 읽습니다.

 나중에 인터넷으로 ‘쯔보이 사까에’를 찾아보지만, 이런 이름은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이때에는 이분 문학책이 1961년을 끝으로 다시 못 나왔다고 여깁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데, 1965년 한일협정 때문에, 1960년대 첫머리까지 아주 많이 옮겨지던 일본 문학이며 철학이며 사상이며 책이, 1965년을 고빗사위로 거의 옮겨지지 않습니다. 1980년대로 접어들어야 비로소 일본문학이 차츰차츰 고개를 내밉니다.

 1961년판 《스물네 개의 눈동자》를 읽고 한참 뒤인 어느 날, 다른 헌책방에서 1997년판 번역책을 만납니다. 응? 이렇게 다시 나왔나? 곰곰이 돌이켜보니, 예전에 인터넷으로 찾아보기를 할 때에 ‘쯔보이 사까에’로만 찾아보았기에 알아볼 수 없었고, 책이름으로 찾아보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참 바보로군, 하고 생각합니다. 1997년에 비로소 다시 옮겨졌으니, 자그마치 서른여섯 해 만에 다시 나온 셈인데, 서른여섯 해 만에 새로 빛을 본 책은 거의 사랑받지 못하다가는 2004년에 거듭 나오기는 했으나 이내 사라집니다. 그래도 츠보이 사카에 님 다른 문학 《엄마 없는 아이와 아이 없는 엄마와》(우리교육,2003)라는 책은 판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이 한 가지나마 만날 수 있으니 반갑습니다. 게다가 헌책방에서 퍽 오래 다리품을 팔며 눈을 밝히면 1997년과 2004년에 찍은 판을 만날 수 있으니 고마운 노릇입니다.


.. “선상님!” 이번에는 색다른 이야기나 할 것처럼 불렀다. “엉, 마쓰에는 재미있는 일이 있나 부지? 뭔지 말해 봐.” “저라우, 어무니가 일어나먼이라우 잉, 앙철 벤또 사 준다고 했어라우. 뚜껑에 백합꽃 무늬가 있는 거…….” 푸욱 한숨을 들이키더니 마쓰에는 얼굴에 희열을 띤다. “아이 좋기도 하겠다. 애기 이름도 그렇게 지었니?” 마쓰에는 부끄러움과 기쁨이 뒤섞인 표정을 짓고는, 그것을 몸짓으로 나타내기나 하듯 어깨를 움추려 보인다. “아직 안 지었구나. 그럼 이렇게 지으렴. 백합꽃처럼 고운 이름을 찾아봐.” 마쓰에는 크게 숨을 들이켜, 얼굴을 벙글거렸다. “유리꼬? 유리에? 선상님, 유리에로 하면 좋겄지라우. 유리꼬는 너무 흔해빠즌 이름이지라우.” 마쓰에는 즐거운듯, 선생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마쓰에의 눈이 이렇게도 상냥스러웠던가, 처음 보기라도 하는듯 선생은 그 검은 눈썹에 쌓인 검은 눈동자 속에 자신의 감정을 퍼부었다 ..  (110∼111쪽)


 언제였던가, 일본에서 문학박사라 하던 어느 분이 한국으로 한국문학을 배우러 와서 한글학회 사람들하고 어울리던 자리에 함께한 적 있습니다. 한국말을 곧잘 하기에 일본말을 못하면서도 이분하고 몇 마디 말을 섞었습니다. 이때 《스물네 개의 눈동자》하고 《엄마 없는 아이와 아이 없는 엄마와》라는 책을 떠올리며 “일본에서 쓰보이 사카에 님 문학은 어떤가요? 요즈음에도 사람들이 즐겨 읽는가요?” 하고 여쭙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문학박사라 하는 이분은 쓰보이 사카에라는 이름을 모릅니다. 이름을 모르니 작품을 읽은 적이 없겠지요. 《스물네 개의 눈동자》는 1954년에 영화로도 만들어 꽤 사랑받았다고 덧붙이는데, 도무지 모릅니다.

 속으로 생각합니다. ‘아차, 내가 잘못했나? 아무리 한국에서 한국문학 박사라 할지라도 손창섭 문학이라든지 장용학 문학까지 다 읽었으리라 여길 수는 없잖아. 김학철이나 김석범 문학까지 다 읽어야 한국땅 한국문학 박사이지는 않을 테니까. 문학박사 논문을 내면 박사가 되지, 모든 문학을 두루 꿰거나 읽어야 문학박사가 되지는 않잖아.’


.. “저넌 맏아들이지만, 그래도 군인 되넌 것이 쌀장사버덤은 …….” “엉 그럴가. 잘들 생각해 봐요.”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느끼자, 다음 말을 못 잇고 말없이 남자 어린이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다시가 무엇을 느꼈는지, “선상님은 군인얼 싫어하지라우?”라고 묻는다. “그래, 고기잡이나 쌀장수를 선생님은 더 좋아해.” “우메에. 으째서라우?” “죽는 것이, 억울하니까.” “그라문 선상님은 겁보게라우.” “그래 겁보야.”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뒤숭숭해진다. 그쯤 말을 주고받은 것으로 교감선생님한테서 주의를 받았다. “오오이시 선생, 빨갱이라는 소문이 떠돌고 있는 거 아시는지? 조심해야 합니다.” (도대체 빨갱이라고,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나 같은, 사람을 어디를 보고 빨갱이란 말인가?) 잠자리에 누운 채 생각을 하던 오오이시 선생은 건너방 쪽으로 크게 외쳤다. “어머니! 계세요?” “왜 그러니?” 오지는 않고 미닫이만 바라보고 대답하는 품이 화로불가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이리 좀 빨리 오세요. 의논 드릴 게 있어요.” 발자욱 소리와 함께 미닫이가 열리자, 어머니의 골무 낀 손을 바라보면서 들이대듯 했다. “어머니 아무리 생각해도 선생질 싫어졌어요. 삼월부터 그만둘가 봐요.” “그만두다니, 왜 무슨 일이라도 생겼니?” “그만두고, 푼돈 줍는 과자장수를 하는 편이 나을까 봐요. 날이 날마다 충국애국 따위, 이제 정말이지 진저리가 나요.” “무슨?” ..  (151∼153쪽)


 1990년대 번역판도 장만해서 조금 읽었으나 번역글이 영 가슴으로 스미지 않았습니다. 너무 반듯한 번역글이라 할까요. 《스물네 개의 눈동자》에 나오는 열두 아이를 비롯한 시골사람들은 ‘여 선생이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모습을 보면서 깜짝 놀라 하며, 도시 문명이나 문화란 거의 생각해 보지 못합니다. 그야말로 깊디깊은 시골마을 사람들입니다. 표준말이라든지 표준말하고 가까운 사투리를 쓸 턱이 없습니다. 1990년대 번역판은 사투리 맛이 하나도 안 납니다.

 이제 와 다시금 헤아린다면, 오늘날 사람치고 깊디깊은 시골마을 사투리를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아마, 깊디깊은 시골마을 사투리로 문학을 창작하거나 번역한다면, 이런 글을 읽어 줄 만한 사람은 아예 없다시피 하다고 할 만합니다. 쓸 사람도 없고 읽을 사람도 없어요.

 더욱이, 시골마을 삶자락을 글로 쓰는 사람부터 없고, 시골마을 삶자락이 책이나 글로 나왔을 때에 기쁘고 반갑게 읽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시골마을 삶자락을 헤아리는 사람이 적고, 시골마을 삶자락이란 신문이나 방송이나 인터넷 따위에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시골마을 삶자락이란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풀그림에나 나올 테지요.

 1928년을 무대로 한 작품이라는데, 1928년에 “군인이 싫어.” 하고 말하면서 “충국애국 교육 거부”를 하던 시골 교사란, 게다가 남자 교사도 아닌 여자 교사가 이렇게 가르치며 보낸 삶이란, 온통 전쟁으로 미쳐 돌아가던 일본 제국주의요 군국주의 소용돌이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으랴 궁금합니다. 생각해 보면, 일본에서는 총칼을 내세운 바보가 많았던 한편, 총칼을 뿌리친 착한이 또한 많았습니다. 한국땅에는 독립을 외친 아름다운 사람도 많았으나, 식민지땅에서 부역을 일삼으며 돈과 이름과 힘을 거머쥔 사람 또한 많았어요.

 교사라 한다면, 참말 교사라는 자리에 서려는 사람이라 한다면, 아이들 앞에서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헤아려 봅니다. 교사가 되고픈 꿈을 꾸는 사람이라면, 교사가 되어 아이들하고 함께 배우며 가르칠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무엇을 익히거나 받아들이거나 살피면서 아이들 앞에 서야 할까 곱씹어 봅니다.

 지식을 가르친대서 교사라 할 만한지요. 시험점수 잘 나오게 할 뿐 아니라 서울대학교 많이 보내면 훌륭한 교사라 할는지요. 교사는 어디에서 누구랑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요. (4344.1.22.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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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완서


 1999년 6월 30일, 잘 다니던 출판사를 그만두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내부고발’을 했기 때문에 괘씸죄에 걸렸고, 맨 꼬랑지 일꾼이라며 나한테 막말을 쏟아붓는 사장하고 한솥밥을 먹을 수 없기 때문에, 잘리기 앞서 먼저 사표를 던지고(집어던지고) 그만두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일하기 앞서까지 신문배달을 하면서 먹고살았습니다. 신문배달을 하던 때에는 지국에서 먹고잤기 때문에 밥값과 잠값 걱정을 안 했으나, 막상 출판사를 그만두고 보니 일자리와 돈구멍이 하나도 없습니다. 굶어죽을 수 없는 노릇이기에, 내 보배로 여기던 책 가운데 5000∼7000권을 헌책방에 내다 팝니다. 이 가운데에는 소설쓰는 박완서 님 책이 모두 끼었습니다. 이때, 박완서 님 산문책이며 소설책이며 남김없이 내다 팔았습니다.

 나중에 헌책방마실을 하면서 박완서 님 산문책은 다시 한 권 두 권 사들입니다. 그러나 박완서 님 소설책은 다시 사들이지 않습니다. 내 마음을 떠난 분 문학은 웬만해서는 되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박완서 님이 소설쓰던 마음하고, 박완서 님이 〈조선일보〉에 글을 쓰거나 동인문학상 심사위원을 맡는다거나 큼직한 자리를 차지하는 만나보기 기사에 실리는 마음하고 꼭 같다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이 마음은 한길로 이어진다고 느낍니다. 입으로 외치는 좋은 말은 아무리 달콤하게 들릴지라도, 몸으로 보이는 궂은 모습하고는 도무지 어울리지 못합니다.

 여든 나이에 흙으로 돌아간 분 앞에서 고개를 숙입니다. 아무쪼록 따사로우면서 너그러운 흙 품에 안기어 사랑과 믿음을 고이 나누어 주는 어여쁜 씨앗이 되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어머니 품은 사랑이고 할머니 품은 믿음입니다. 어머니는 바보스레 살아가는 불쌍한 아이들도 건사하고, 할머니는 못된 짓 일삼는 딱한 아이들도 보듬어 줍니다. 제아무리 끔찍한 짓을 저지른 전두환 씨 같은 사람일지라도, 참말 모든 재산 다 털려 거렁뱅이가 되었다 한다면, 이를 안쓰러이 여기며 밥과 잠자리를 내어줄 노릇입니다. 그렇지만, 돈과 이름과 힘을 떵떵거리는 슬픈 모습으로 온누리에서 으시대는 사람들한테는 조금도 눈물을 보이기 힘듭니다. 왜 마지막 자리에서나마 내 부끄러운 얼굴을 털어놓으면서 깨끗해지기는 어려울까요. 어쩌면, 마지막 자리까지 부끄러운 얼굴을 털어놓지 못했을지라도, 따순 흙은 곱게 쓰다듬으면서 이제는 차분해지라고, 이제는 내려놓으라고, 이제는 아름다워지자고 이끌어 주겠지요. (4344.1.22.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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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11-01-22 16:23   좋아요 0 | URL
님이 팔았던 박완서님의 책들을 제가 되사고 싶어지는군요..

파란놀 2011-01-22 18:14   좋아요 0 | URL
헌책방 다니시다 보면 어디에선가 만나리라 생각합니다.

진주 2011-01-22 20:40   좋아요 0 | URL
혹시 책에 '된장'이라고 싸인이라도 있나요? ㅎㅎ
저는 몇해전 이사올 때 책을 대거 없앴답니다. 한 3000권, 필요한 곳에 기증도 하고, 선물도 하고, 폐지 줍는 할머니께 리어카로 세 번 갔다 드렸었어요. 책이라면 이제 집에 안 들인다고 작정하지만 된장님이 보시던 박완서님 책은 제 책장에 꽂을 수 있어요^^

파란놀 2011-01-22 22:15   좋아요 0 | URL
그무렵 헌책방에 내놓은 제 책은 금방 다 팔렸어요. 다른 분들이 금방 사 갈 만한 책으로 골라서 내놓았으니까요. 제가 사서 읽은 책에는 '된장'이라고는 안 적고 'ㅎㄲㅅㄱ'라고만 적어 놓습니다. 그때에도 그렇고 요즈음에도 그렇지만, 사람들은 '한입으로 조선일보 비판'을 하면서도 막상 조선일보에 글을 쓰는 문학가들 책을 아무렇지 않게 사서 읽습니다.

철학과 행동과 문학과 삶이란 다 다르다고 여길 수 있고, 똑같다고 바라보는 일은 위험하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가슴이 개운하지 못해 안타깝고 슬퍼요.

결 곱게 당신 삶을 마무리지을 수 있던 분들, 이를테면 박완서 님뿐 아니라 이문구 님도 마찬가지인데, 왜 이분들은 당신 삶 막바지에 그렇게 슬픈 길을 걸었을까요.

아름다운 글로 아름다운 삶을 나누는 문학길을 걸었다면, 이와 같은 문학길이란, 돈이나 권력하고는 동떨어지면서도 돈이나 이름이나 힘을 따사로이 보듬으며 나누고 즐기는 길이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면, 박완서 님이 당신 글을 한 걸음 더 낮추고 한 계단 더 가난하게 바라볼 수 있었으면, 조선일보하고 사귀면서 안쓰럽게 당신 마지막 걸음을 얼룩지게 하지는 않았으리라 느낍니다.

<지는 꽃도 아름답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일흔 나이에 '첫 책'을 내놓은 '여느 할머니 삶 이야기'를 담은 책이에요. 인천 화평동에서 수채그림을 그리는 '박정희' 할머니 책도 있습니다. 나이 예순이 넘어 비로소 수채그림을 그리며 화가로 등단한 분입니다. 박정희 할머님은 '육아일기'로도 알려졌는데, 이분 박정희 님 아버님은 한글 점자를 만든 박두성 님이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할머니들이란, 참으로 낮고 가난한 자리에서 따순 품으로 얼싸안는 분들이라고 느껴요.

어쩌면, 박완서 님은 '할머니'라기보다 '소설가'로 아로새겨지면서, 더 나은 걸음을 걷지 못했을 수 있겠다 싶습니다.

......
 



 눈쓸기 책읽기


 언제쯤 겨울 날씨 풀려 우리 집 얼어붙은 물이 녹을까 하고 기다립니다. 참말 하염없이 기다립니다. 오늘은 풀릴까 이듬날은 풀릴까 손가락 빨면서 기다립니다. 오늘 아침, 하늘은 찌뿌둥합니다. 이 찌뿌둥한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아침을 맞이하자니, 그래, 또 눈이로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참말 눈은 솔솔 내립니다. 쌓인 눈이 어느 만큼 녹을 즈음 새로운 눈이 곱다시 내립니다.

 겨울눈은 곱습니다. 자동차 복작대지 않는 멧골자락 겨울눈은 아주 곱습니다. 들짐승이나 멧짐승은 눈을 훑어먹습니다. 겨울에는 멧골자락에서 물을 마실 수 없지만, 들짐승이나 멧짐승은 눈을 훑어먹으면 됩니다.

 문득, 오늘 우리 터전 거의 모두를 차지한다는 도시를 떠올립니다. 도시에서는 어느 누구라도 눈을 훑어먹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도시에 깃을 들인 비둘기나 까치나 참새는 눈을 훑어먹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자동차 다니기 좋도록 화학방정식 소금을 잔뜩 뿌려 놓았어도 이렇게 녹은 끔찍한 눈물을 마셔야 합니다.

 겨울날, 시골집에서는 눈을 쓸어야 합니다. 손이 시리도록 눈을 쓸고 거듭 쓸어야 합니다. 겨울날, 시골집에서는 바닥에 이불을 잔뜩 깔아 놓고 손을 녹이며 책을 읽습니다. 겨울에는 딱히 논일 밭일 없으니까요. 겨울에는 겨울잠 자는 멧짐승마냥 사람도 따스한 아랫목을 찾아다니며 옹크리며 지냅니다. (4344.1.22.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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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학교를 뜯어고치자면 서울대학교 안 가면 된다


 서울대학교를 뜯어고치자면 서울대학교에 안 가면 됩니다. 서울대학교에 눈길 한 번 안 두면 됩니다. 우리한테 참답게 보배로운 일을 찾으면 됩니다. 참답게 학문을 갈고닦을 수 있는 곳을 찾으면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각해 봅니다. 썩어문드러진 출판사 문제를 푸는 일은, 이처럼 썩어문드러진 출판사에서 내는 책을 안 사 읽으면 됩니다. 아는 척을 할 까닭이 없고 손가락질을 할 까닭이 없습니다. 땅장사를 하든 선인세 장난을 하든 베스트셀러 휘젓기를 하든, 이런 썩어문드러진 출판사에서 내는 책이 아니고도 ‘죽는 날까지 읽으려 해도 미처 못 읽는 좋은 책’은 대단히 많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알아보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 삶을 밝히고 깨우는 훌륭한 책은 참으로 많아요. 이런 책을 내는 작은 출판사는 아주 많습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삶이든 일이든 책이든 사람이든 사랑이든 이와 마찬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코딱지만 한 나라에서는 서울대학교가 가장 훌륭하(?)고 학문을 갈고닦기에 좋은 곳처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알고 보면 하나도 옳은 소리가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참답고 아름다우며 좋은 배움터’를 알아보지 않았으니 잘 모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책도 우리가 알아보고 찾아보아야 보이듯, 좋은 배움터 또한 우리가 알아보고 찾아보아야 보입니다. 매출이나 이익이 가장 큰 출판사가 가장 훌륭한 책을 내나요? 사람들한테 인기 높은 출판사가 가장 좋은 책을 내나요? 우리 사회를 주무르는 권력자가 많고, 학력수준이 가장 높다고도 하는 서울대학교이지만, 이 학교를 마친 사람들 됨됨이나 마음 씀씀이는 어떠한가요? 그러니까, 우리는 차근차근 생각하고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읽을 책은 베스트셀러가 아닙니다. 스테디셀러 또한 아닙니다. 그럼 무슨 책을 읽느냐고요? 나한테 알맞는 책입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고 반길 만한 책입니다. 남들한테 추천받는 책이 아니라, 나 스스로 찾아나서고 알아보아서 즐길 수 있는 책입니다. 제아무리 훌륭한 스승한테서 배운다고 하더라도 모든 쓸모있고 값어치있으며 알뜰한 앎과 슬기를 얻을 수 없듯, 제아무리 많은 사람이 읽은 책이거나 읽으면 좋다고 하는 책이라 해도 우리들 모두한테 도움이 되거나 아름다울 수 있는 책은 아닙니다. 눈을 기르고 마음을 닦으며 몸을 움직여야 합니다. 가게에서 사 입는 옷이 아무리 좋아도 우리가 몸크기를 하나하나 살피고 따지며 손수 지어 입는 옷만큼 좋을 수 없듯, 우리가 먹는 밥, 사는 집, 읽는 책, 하는 일, 즐기는 놀이 모두 우리 스스로 찾아내고 빚어내며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나(개인)도 살고 우리(단체,사회,나라)도 삽니다. (4338.5.10.불.처음 씀/4344.1.22.흙.말투 손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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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1-23 23:59   좋아요 0 | URL
뭐 제일 좋은 방법은 프랑스처럼 집 근처 대학에 학생들을 보내는 것이지요.물론 전제 조건이 각 대학에 예산이 공평하게 배분되야 한다는 점인데 영국을 제외한 유럽은 대학이 순수 학문의 전당이어서 그런가 봅니다.

파란놀 2011-01-24 05:00   좋아요 0 | URL
아이들이 굳이 대학교라는 데를 갈 까닭이 없어요.
누구나 즐겁게 살아갈 터전이면 넉넉하고,
졸업장 때문이라면
초중고등학교 모두 부질없는 노릇이라고 느껴요.
대학교를 나왔대서 훌륭하게 살거나
훌륭하거나 좋다 싶은 책을 쓰지도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