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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개
박기범 글, 김종숙 그림 / 낮은산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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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네 눈빛을 들여다보지 않을 때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38] 박기범·김종숙, 《미친개》(낮은산,2008)


 쥐를 끈끈이로 잡습니다. 집에 고양이를 키울 수 있으면 쥐잡이는 한결 손쉬울 수 있지만, 시골에서 살아가는 고양이는 금세 멧고양이나 들고양이로 바뀌기 마련입니다. 마을 닭과 병아리를 모조리 잡아 죽이거나 잡아서 먹는 으뜸가는 싸움꾼으로 탈바꿈합니다. 나중에는 먹이를 찾아 산으로 깊이 들어가며 산에 얼마쯤 살아남았던 다람쥐며 작은 새며 온통 잡고야 맙니다. 도시이고 시골이고 사람 아닌 목숨은 살아남지 못하는 마당에, 고양이 같은 짐승하고 맞서 싸울 만한 짐승이란 씨가 말랐습니다. 더욱이, 여느 들짐승이나 멧짐승은 새끼를 많이 까지 못합니다. 너구리나 오소리가 무리를 지어 들고양이들한테 덤비지 못합니다.

 고양이를 기르고 싶어도 마을사람들 닭을 생각하거나 조그마한 멧자락 짐승들을 헤아린다면 도무지 기르지 못합니다. 아니, 한 목숨이 다른 목숨을 기른다는 일이 걸맞지 않겠지요.

 올여름에 멧자락에 깃든 시골집으로 옮기고 나서 어제 아침까지 쥐를 열세 마리 잡습니다. 이 쥐들은 집구석 어딘가에 자꾸 구멍을 내며 기어듭니다. 그냥 벽에서만 살거나 천장에서만 살면 좋으련만, 어김없이 구멍을 내어 방을 돌아다니려 합니다. 하는 수 없이 읍내 약국에서 끈끈이를 사서는 구멍 앞에 가만히 내려놓습니다.

 이 끈끈이에 어른 주먹만큼 큰 쥐가 두 마리 함께 붙들린 적이 있고, 한 마리가 잡힌 뒤에 여러 날 조용하다 싶은 적이 있습니다만, 쥐들은 끈끈이에 발 한쪽이든 꼬리 한쪽이든 붙는 날에는 그예 골로 가고야 맙니다. 쥐 아닌 사람으로서 저는 두 번 끈끈이를 밟았는데, 끈끈이를 밟고 나면 참 안 떨어집니다. 끈끈이 풀을 벗기자면 며칠 걸립니다. 사람조차 끈끈이 떼어내기 힘든데 조그마한 쥐들은 어떠할까요.

 어른 주먹만 한 쥐를 열 마리 잡은 다음에는 어른 엄지손가락만 한 쥐를 세 마리 잇달아 잡습니다. 참으로 조그마한 쥐들은 끈끈이 가장자리에 하나 붙었고, 다른 하나는 끈끈이가 몇 조각 방바닥에 떨어진 자리에 붙었으며, 다른 한 마리는 볼볼 기어다니는 녀석을 손으로 덥석 쥐어서 잡습니다.

 큰 쥐이든 작은 쥐이든 잡힌 녀석은 슬프게 웁니다. 그러나 어찌할 길이 없습니다. 밤에 바깥에 내놓았다가 어스름이 물러나는 새벽녘에 멧자락 구석에 땅을 파서 묻거나, 쓰레기봉투에 담아 읍내 쓰레기통에 넣습니다. 처음에는 땅을 파서 묻자고 생각했는데, 잡히는 숫자가 늘고 또 느니까 땅을 파서 묻기에도 만만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쥐도 딱하고 사람도 딱합니다. 쥐가 되든 사람이 되든 흙으로 돌아가기 어려운 나날입니다.


.. 개는 사람들이 버리는 쓰레기 봉지를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어. 코를 가까이 들이대고 무언가 먹을 만한 게 있는지 살폈지 ..  (8쪽)


 엄지손가락만 한 쥐들은 끈끈이에서 떼거나 한손으로 살짝 쥔 채 사람집하고 멀찌감치 떨어진 멧등성이 한켠에 던져 주었습니다. 추운 겨울날 이들 작은 쥐가 멧자락에서 살아남을는지 모를 노릇이지만, 시골쥐라면 시골쥐답게 멧자락에서 멧쥐로 살아가 주기를 비손합니다. 보드라운 흙을 잽싸게 파헤쳐서 사람집 벽 안쪽이 아니라 구수한 흙내음 물씬한 땅속에서 겨울을 나는 한편, 멧자락에서 먹이를 얻을 수 있기를 비손합니다.

 이들 잡힌 쥐를 묻거나 멧자락에 던져 놓으려고 들고 갈 때면 어김없이 쥐하고 눈이 마주칩니다. 눈이 안 마주칠 수 없습니다. 미안하구나 말하면서도 집에서 함께 살아가지는 못하겠다고 핑계를 댑니다. 핑계랄지 뭐랄지 모르겠습니다. 땅에 묻은 뒤이든 멧등성이에 던져 준 뒤이든 성호를 그으며 큰숨을 내쉬는데, 애처로운 쥐들 눈망울을 보자면 끈끈이를 놓고 싶지 않으나, 그렇다고 집안이 쥐판이 되도록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식구 깃든 시골집은 맨 처음에는, 아니 우리 집이 들어서기 앞서는 쥐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지내던 곳은 아니었을까요. 이 쥐들이 굴을 파며 오순도순 지내던 자리에 사람들이 ‘여기는 내(사람) 땅이요!’ 하면서 땅을 고르고 시멘트를 붓고 기둥을 세워 집을 짓지는 않았으려나요.

 까치들이 곡식 씨앗을 파먹고 멧돼지가 밭뙈기를 파엎습니다. 이들이 살아가야 할 터전에 먹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멧짐승이 먹이를 얻을 만한 자리는 온통 사람들이 파헤쳤을 뿐더러, 나무열매이든 무슨 뿌리이든 사람들이 온 산과 들을 쑤석거리며 몽땅 캐 가려 하니까 멧짐승은 시골사람 밭뙈기에 뛰어들밖에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사람들 밭뙈기에 들이닥치며 목숨을 잇는 멧짐승들은 더없이 꿋꿋하거나 씩씩하다 할 만합니다. 이들 멧짐승과 날짐승은 온몸뚱이로 사람들한테 무언가 이야기를 건넨다 할 만합니다.


.. 어느 때부턴가 마을 조무래기들도 개만 보면 아무렇게나 팔매질을 하며 쫓으려 했어. 어른들 작대기질을 아이들도 따라 배웠겠지 … 돌 던지는 아이 하나가 있으면 그 곁으로 재미있어 부추기는 아이들이 떼지어 모이곤 했어. 누구 하나 나서서 말리지 않았지. 그 개에게는 다들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 여기는 것처럼 ..  (13, 14쪽)


 그림책 《미친개》를 읽습니다. 전쟁을 싫어하고 평화를 좋아하는 박기범 님이 글을 쓴 작품입니다. 글하고 어울리는 그림은 ‘개’ 아닌 ‘사람’이 그리니까, 또 여느 개 이야기가 아닌 ‘미친’개 이야기이니까, 어둡고 어수선하며 어지럽습니다. 어찌 보면 이 글에는 이 그림이 걸맞는다 할 만한데, 달리 보면 이 글에는 이 그림이 걸맞지 않습니다.

 눈망울을 들여다보고 털빛을 헤아리며 몸놀림을 살핀다면, 사람들이 개한테 그냥 개라는 이름이 아닌 ‘미친개’라는 이름을 붙이듯, 어떠한 이야기를 드러내거나 펼치는 그림이라 할 때에 ‘꼭 이래야 한다’는 틀에 사로잡힙니다. 좁은 울타리 안쪽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살아숨쉬는 목숨이고 살아서 펄쩍펄쩍 뛰는 목숨이며 살아가고파 몸부림치는 목숨을 살가이 얼싸안지 못하고 맙니다.

 살아내는 목숨은 풀처럼 푸릅니다. 이 나라 아이들은 어린이 때를 지나 푸름이 때를 맞이합니다. 푸른 사람 푸른 목숨 푸른 나무 푸른 개입니다. 푸른 들판과 푸른 마을과 푸른 나라를 꿈꾸는 고운 목숨입니다.

 무기를 든 손으로는 전쟁을 막아내지 못합니다. 쟁기를 든 손이 아니고서는 싸움이 끊일 수 없고, 호미와 낫이랑 붓이나 연필을 든 손이 아니고서는 전쟁이 그치지 않습니다.

 전쟁을 일삼는 어른들이기 때문에 아이들은 어른들 흉내를 내며 전쟁놀이를 합니다. 계급과 신분을 나누는 어른들인 탓에 아이들은 저희끼리도 대장이니 졸병이니 나누면서 놀이를 합니다. 사랑과 믿음과 평화를 아끼는 어른들이라면 사랑과 믿음과 평화를 돌보는 아이들로 크도록 손길을 내밀겠지요. 돈바라기로 흐르는 어른이라면 아이들 마음에 돈과 돈과 또 돈이 맴돌도록 몰아세우겠지요.


.. 개는 곧 쓰레기 봉지를 뒤지는 것만큼이나 흙에 코를 대고 킁킁대는 일이 좋다는 걸 알게 되었어 ..  (18쪽)


 개고기를 먹는다든지 개장수를 한다든지 하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 개고기집을 공장처럼 꾸린다든지 개우리를 공장처럼 지어서 꾸릴 때에 나쁩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무엇이 나쁘겠습니까. 감옥처럼 꽉 막히고 틀에 박힌 교과서를 달달 외워 대학바라기만 하도록 내모는 제도권 학교가 되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아이들을 죽이는 꼴입니다. 아이들을 자가용에 태워 학교나 학원에 실어내는 일이 뭐가 나쁘겠습니까. 그러나 아이들이 두 다리로 동네를 사뿐사뿐 거닐며 사람들을 마주하고 삶터를 함께 느끼도록 돕지 못하는 일은 슬플 뿐더러, 어버이가 아이 손을 맞잡고 씩씩하고 신나게 걷지 않는 일은 더욱 슬픕니다.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돈을 바라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사람으로서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더 큰 이름이나 힘을 거머쥐려고 다툼질을 해대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 스스로 사람길을 걸을 때에 개들 또한 개들대로 개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조용히, 다소곳하게, 얌전히, 아름답게 살아갈 사람이며 개이고 목숨입니다.


.. 어쩌면 보이는 것 너머의 것까지 보느라 차가운 마음이 그대로 눈동자에 비추어졌는지도 몰라. 누구라도 한 번쯤 그 눈망울을 봤어야 했어 ..  (48쪽)


 오늘날 사람들은, 또 앞으로 죽 이곳에서 살아갈 사람들은 ‘동네 강아지’ 눈망울조차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웃집 아이들 눈망울조차 들여다보지 않거든요. 골목길에서 둘이나 셋씩 어울리며 공을 차거나 인라인을 타는 아이들 눈망울이나마 들여다볼는지요. 그냥 자동차를 들이밀며 빵빵하며 쫓아내는 어른들이 아닌지요. 붐비는 전철칸에서 옆사람 눈망울을 들여다보기는 하는지요. 그예 냅다 밀어젖히거나 발을 밟는 우리들이 아니온지요.

 그림책 《미친개》에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 ‘떠돌이 들개’만큼이라도 맑거나 티없거나 싱그럽거나 예쁜 눈망울로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림책 이야기이니까 이렇다 친다면, 그림책 바깥 우리 터전에서는 어떠하려나요. 우리들 살아가는 이 나라 이 터전에서 우리들 눈빛과 눈망울과 눈자위와 눈매와 눈동자와 눈빛은 얼마나 밝거나 곱거나 착하거나 빛나거나 깨끗하거나 그윽한가요. (4343.12.20.달.ㅎㄲㅅㄱ)


― 미친개 (박기범 글,김종숙 그림,낮은산 펴냄,2008.2.15./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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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12.16. 인천 동구 금곡동. 

 한겨울 복판에도 꽃은 피고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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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동네
유동훈 글.사진 / 낮은산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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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한 골목’을 사진으로 찍을 때
 [찾아 읽는 사진책 12] 유동훈, 《어떤 동네》(낮은산,2010)


 인천 동구 만석동에는 ‘기차길 옆 공부방’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아이들하고 어우러지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유동훈 님이 사진으로 동네 이야기를 담은 책 《어떤 동네》를 내놓았습니다. 유동훈 님은 인천 동구 만석동 가난한 아이들 삶을 바라보면서 “어떤 아이는 노동자로 성장해 조선소에서 계약직 노동자로 용접을 한다. 또 어떤 친구는 특수교사의 꿈을 꾸고, 어떤 친구는 가게의 점원으로 일을 하며 성실히 자신의 장래를 설계한다(24쪽).”고 이야기합니다. “이곳(만석동)은 볼품없고 가난한 동네. 빼앗기고 힘없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더욱 약하고 여리다(20쪽).”는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가난하게 살아가는 아이와 어른이 있으니 가난한 동네라 할 만하고, 이 아이들은 계약직 노동자도 되고 대학생도 되며 군인도 됩니다. 그런데 이곳 아이들과 어른들은 다른 동네하고 견주면 돈이 좀 적고 집이 좀 비좁다뿐, 한 사람이 살아가며 누릴 모든 것이 없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이 동네 아이들과 어른들한테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기에 ‘기차길 옆 공부방’이 태어날 수 있지, 사랑 한 줌 없는 데에 공부방이든 예배당이든 절집이든 구멍가게이든 태어나지 않습니다.

 가난하기에 도와주어야 하거나, 도와주어야 하기에 여는 공부방이 아닙니다.

 가난하다면, 돈이 적어 가난한 사람이 있다 할 테고, 마음이 텅 비어 가난한 사람이 있다 할 테지요.

 흔히들 ‘공부방’이라 하면 가난하다고 일컫는, 아니, 돈없고 힘없으며 이름없는 사람들 동네라 하는 곳 아이들을 도우려는 마음으로 엽니다. 아무래도 돈이고 힘이고 힘이고 없으니까 우리 사회 따순 손길이 적게 뻗친다 할 만하고, 의료 혜택이나 교육 혜택을 덜 받는데다가, 아이들 어버이는 돈벌러 집을 오래 비울 테니 아이들이 심심하거나 걱정스럽다 할 만합니다. 그러면, 돈 잘 버는 동네 아이들은 어버이하고 오래오래 따숩게 보내려나요. 서울 강아랫마을 아이들은 제 어버이랑 얼마나 오랜 나날 오랜 동안을 보내려나요. 이 마을 아이들은 제 또래나 손위나 손아래 동무하고 얼마나 어울리려나요.

 어버이 되는 어른들은 아이를 낳았으니 아이하고 더 오래도록 어울리면서 아이들 가르치는 몫을 도맡아야 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낳은 어버이 되는 어른들이 바깥에서 돈을 더 벌어들여야 아이들을 한결 잘 키울 수 있다거나, 아이들을 여러 학원이나 학교에 넣는다고 아이들이 더욱 씩씩하고 슬기롭게 자란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땅바닥에 손가락이나 돌멩이로 죽죽 금이나 동그라미를 그리며 하루를 보낸다 해서 심심하기만 하거나 딱해 보인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학교를 열어 꾸리는 삶도 좋으나, 학교 없이 꾸리는 삶 또한 좋습니다. 지내는 사람 스스로 어떠한 삶인가에 따라 즐거운지 안 즐거운지가 갈립니다. 살아가는 사람 스스로 어떠한 넋인가에 따라 아름다운지 안 아름다운지가 나뉩니다. 공부방은 틀림없이 좋은 쉼터일 테고, 뒷간 없는 비좁은 집 자그마한 방 또한 훌륭한 쉼터입니다. 예배당은 어김없이 너그러운 만남터일 테며, 햇볕 반 토막 곱다시 깃드는 비좁은 골목 한켠 또한 재미난 만남터입니다.

 가난함이든 가멸참이든 죄악도 아니요 빛줄기도 아닙니다. 가난한 삶이 구지레할 수 없고, 가멸찬 삶이 지저분할 수 없습니다. 골목집을 어둡거나 사라져 가는 모습으로 깎아내릴 까닭 없고, 아파트를 밝거나 새로운 모습으로 추켜세울 까닭 없습니다. 골목집을 살가웁거나 더 따스한 추억으로 돌아볼 까닭 없고, 아파트를 차디차거나 무시무시한 돈벌레로 내리깎을 까닭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맞아들이면서 오붓하게 손을 잡을 때에 즐겁습니다. 마을솥을 걸어도 좋으나, 전기밥솥을 써도 좋습니다. 너른터에서 줄넘기를 해도 좋고, 좁은터에서 공기놀이를 해도 좋습니다. 살아가는 이야기를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으로 담아도 좋지만,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저 입으로만 읊으며 그날그날 잊고 다시 떠들고 또 잊으며 새삼 주워섬겨도 좋습니다.

 《어떤 동네》를 내놓은 유동훈 님은 말합니다. “미술가들이 가난한 동네의 벽과 집을 꾸민다며 그림 작업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생활과 예술을 결합한다는 의도에 수긍 가는 면도 없지 않지만 골목을 지나다 보게 되는 숨겨진 동네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면 이벤트로 진행되는 전문 예술가들의 그 작업이 동네를 아름답게 꾸민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109쪽).”고. 참으로 맞는 말씀입니다. 미술가이든 예술가이든 제아무리 좋다는 뜻을 내세운달지라도 골목동네 살림집 벽에 그림을 죽죽 그리는 일은 하나도 아름답지 않으며, 조금도 훌륭하지 않고, 터럭만큼도 멋스럽지 않습니다. 그림쟁이들이 할 일은 살림집 벽에 섣불리 페인트를 발라대는 일이 아닙니다. 그림쟁이들은 동네를 건성건성 구경하듯 지나친다면, ‘구경꾼으로 지나친다’고 해서 반드시 나쁜 눈길이 아니기 때문에, 구경꾼 눈길로 지나치는 동안 바라보며 느낀 ‘좋은 삶’을 당신들 붓끝으로 좋게 담아서 즐기면 됩니다. 예술쟁이들은 동네에 뿌리내릴 방 하나 얻어 지낸다면, ‘한동네에서 함께 살아간다’고 해서 꼭 좋은 이웃이 되지는 않기 때문에, 한 동네 사람으로 살아내는 동안 마주하며 느낀 ‘좋은 삶’을 당신들 몸짓으로 좋게 실어서 즐기면 됩니다.

 이름을 남기려는 삶이 아닌 사람들을 마주하면서 내 이름이 남을 만한 일을 한다면 미술도 예술도 사진도 창작도 교육도 사회운동도 봉사활동도 아닙니다. 손이 시려 죽을 판인데도 그물을 꿰매고 굴을 까는 삶을 꾸리며 하루하루 밥벌이를 해 온 이들을 가만히 보자면, 참 고단하거나 괴롭거나 슬퍼 보일 만합니다. 매캐한 공장 연기를 잔뜩 들이마시면서 공동뒷간에서 한참 줄을 서야 하는 삶이란 더없이 팍팍하거나 메마르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가난한 삶을 왜 ‘가난’이라는 굴레로 옥죄며 바라보아야 하는가를 잘 모르겠습니다. 제 어린 나날 살림살이가 제 동무보다 나았는지 모자랐는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그저, 우리 어버이 살림살이는 이웃보다 나았다면 나았고, 모자랐다면 모자랐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저런 느낌을 하나도 모릅니다. 살림살이가 나았더라도 어릴 적부터 아버지하고 말을 섞은 일은 거의 없습니다. 살림살이가 나았달지라도 어머니는 하루 내내 집안일뿐 아니라 할아버지 병수발에다가 부업에 바빴습니다. 제 동무들 집에 놀러가 보면, 동무들 어머님은 우리 어머니처럼 언제나 부업을 하셨고, 집안일이든 집안 어르신 병수발이든 바쁘셨습니다. 누구네 아버지가 한 달 일삯을 몇 만 원 더 번다고 더 잘난 살림이 아니지만, 누구네는 아버지 없이 어머니 혼자 일해서 한 달 살림돈이 몇 만 원 더 적다고 더 못난 살림이 아닙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이웃한테서 얻습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이웃한테 나눕니다. 곗돈이라는 이름으로 돈이 돌기도 하지만, 무슨 성금이다 무슨 회비(육성회비 따위)다 하며 돈을 갖다 바쳐야 할 때면 으레 집집마다 돈 빌러 다니느라 바빴습니다. 한 집에서 빌린 돈이 또 다른 집으로 빌려지는 일이 잦고, 반찬통이나 접시에 고작 김치나 지짐이 몇 점 담았을 뿐인데 여러 집을 쉬 돌 뿐 아니라, 아이들 옷은 푸름이 나이가 되어도 온갖 집을 거치곤 합니다. 어느 집 어린이이든 두어 집이건 서너 집을 거친 옷을 입기 마련입니다. ‘내 옷’이 아니라 ‘함께 입는 옷’입니다. 딱히 어느 단체나 시설이나 동회나 관청에서 도와주러 온 일이 없으나, 애써 도와주라 바란 적이 없습니다. 쪼물딱쪼물딱 쪼그랑뱅이 사람들끼리 쪼물쪼물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림쟁이라 하든 예술쟁이라 하든, 벽그림 그리기가 내키지 않는 까닭은 이런 데에서 비롯합니다. 뭣보다 삶이 없는 한편, 하나도 안 예쁘거든요. 그나마 예쁘게라도 그리면 낫지요. 예쁘게 그릴 줄 모르면서 페인트 찍찍 발라 봤자 한두 해쯤 되면 빛이 바래고 너덜너덜해지며 더 볼썽사납습니다.

 사진책 《어떤 동네》를 생각해 봅니다. 책겉을 아로새기는 사진부터 내 마음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왜 아이들을 벽에 세워 놓고 사진을 찍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저냥 수수하거나 투박하게 살아가거나 해바라기를 하거나 꾸벅꾸벅 졸거나 하는 모습을 조용히 사진으로 담아도 넉넉할 텐데요.

 이 사진책 《어떤 동네》란 ‘기차길 옆 공부방’ 아이들을 담은 사진책인지요? 사진을 찍은 유동훈 님은 당신 소개글에든 책 몸글에든, 이 사진책에 실린 아이들이 ‘공부방 아이들’인지 아닌지를 또렷하게 밝히지 않으나, 거의 모든 아이들은 공부방 아이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해맑게 웃는다든지 수수한 낯빛으로 가만히 담벼락에 기댄다든지 하는 사진들을 보면, 아이들이 공부방에서 배우거나 놀거나 살아내는 모습을 소담스럽거나 조촐하거나 꾸밈없이 담아내지 못했습니다(유동훈 님은 공부방에서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분입니다). ‘가난한 동네 아이들이지만 활짝 웃는다’는 느낌은 있습니다. 그러면, 이 아이들이 뒤로 하는 모습을, 아이들 뒷자리 살림집이 골목동네가 아닌 아파트라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사진책이 되려나요. 이 아이들 얼굴빛하고 살림집과 골목과 동네는 이 사진책에서 얼마나 살갑거나 알뜰히 어우러지려나요.

 가난한 동네 공부방 아이들을 담은 사진을 그러모았다고 해서 일부러 ‘뒷모습이 될 동네 삶자리’가 꾀죄죄해 보이거나 어두워 보여야 할 까닭이란 없습니다. 어두운 가운데에서도 밝게 살아간다는 뜻으로 아이들이 활짝 웃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을 까닭 또한 없습니다.

 《어떤 동네》라는 사진책을 처음부터 ‘공부방 아이들을 담은 사진책’이라고 또렷이 밝히면서 ‘공부방 아이들과 보낸 나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면 또다른 이야기를 길어올릴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너무 뻔한데다가 틀에 박히게 찍는) 맑게 웃는 얼굴을 담는 사진에 그치지 말고, 맑게 웃는 얼굴이 살아가는 동네 모습을 꾸밈없이 보여줄 수 있는 사진으로 거듭나야 비로소 공부방이든 만석동이든 골목동네이든 가난한 동네이든, 더 낫거나 덜 떨어지거나 한 삶이 아니라, 서로 사랑스러우며 살가운 이웃을 보듬을 이야기가 피어나는 삶터로구나 하고 느끼도록 나아가는 사진으로 자리잡을 수 있습니다.

 어떤 동네는 수수한 동네이고, 어떤 동네는 흔한 동네이며, 어떤 동네는 여느 동네입니다. 가난하다고 나쁜 삶이 아니요, 가난하다고 즐겁지 않은 삶이 아닙니다. 아픈 사람이기에 늘 괴롭거나 고단한 나날이 아닙니다. 안 아픈 사람들은 언제나 즐겁거나 신나는 나날이 아닙니다.

 제가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도화1동 624번지이고, 주안1동과 주안2동을 거쳐 신흥동3가에서 살았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지는 않습니다. 제 동무나 다른 살붙이들이 용현1·2·3동이나 숭의1·2·3·4동이나 선화동이나 신흥동1가·2가·3가, 율목동, 도원동, 송월동3가, 만석동에 살았거나 살기에 이처럼 말하지는 않습니다.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아 이웃한 어른들이 창영동, 금곡동, 송림1·2·3동, 송현1·2동, 내동, 경동, 화평동, 화수1동에 산다고 이처럼 말할 까닭은 없습니다. 다만, 가난하면 가난하다뿐입니다. 집이 좀 낡았으면 낡았다뿐입니다. 가난한 이웃들한테서 사랑을 느끼면 사랑을 느끼는 대로 반가우며 즐겁습니다. 집이 좀 낡았으면 낡은 대로 살 만하며 재미나고 구수한 보금자리입니다.

 ‘콘트라스트를 강렬하게’ 한다든지 ‘흑백으로 찍는다’든지 ‘밤에 작은 등불에 기댄 모습을 담는다’든지 ‘입자를 거칠게 한다’든지 해야 골목동네 모습이 아니요, 가난한 골목동네 삶자락이 아닙니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이라는 동화책이 나왔을 적에 ‘가난한 동네 사람들 삶이라 해서 늘 꾀죄죄하거나 못날 까닭이 없는데, 그예 이렇게 못박아 버린다는 느낌’ 때문에 적잖이 못마땅했지만, 책장을 넘길 때에는 두근두근했습니다. ‘사람들이 사람을 바라볼 때에 가난이라는 굴레가 아닌 삶이라는 아름다움을 바라본다’면 《괭이부리말 아이들》이건 다른 이야기책이건 사뭇 다른 틀로 거듭날 텐데, 이렇게 되기는 참 힘든 듯합니다. 그래도 내 동무가 살아가고 내 동무와 즐겁게 돌아다니며 노는 동네 이야기가 어린이책 무대로 나타난 대목은 반가웠습니다. 만석동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내 동무와 동무네 누나와 동무네 어머님과 동무네 아버님 삶을 어디에서 엿볼 수 있을까 하면서 조마조마했습니다. 동화책을 다 읽고 나서 갑갑하며 답답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했지만, 만석동 동무한테 책을 한 질(1·2권) 사다 주었습니다. 동무네 식구들이 돌려가며 읽었다지만, 읽었다뿐, 책이야기는 나누지 않았습니다. 아니, 책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습니다. 나눌 만한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글감(소재)’은 그리 크게 돌아볼 대목이 아닙니다. ‘글감’이 아니라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이야기가 무엇인가를 크게 돌아볼 노릇입니다. ‘사진감’ 또한 그다지 크게 돌아볼 만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찍든 매한가지입니다. 인천 만석동을 찍든 서울 상계동을 찍든 똑같습니다. 가난한 동네 아이들을 찍든 부잣집 아이들을 찍든 다를 바 없습니다.

 아픈 사람은 ‘가난하다는 동네’ 만석동에서도 아프지만 ‘새로 지은 큰 아파트들 가득하다는 동네’ 연수동에서도 아픕니다. 슬픈 아이들은 만석동하고 이웃한 북성동이나 화수동에서도 슬프지만, 연수동하고 맞닿은 선학동이나 관교동에서도 슬프겠지요. 아픔을 다루거나 슬픔을 다룬다고 해서 더 빛날 문학이 아닙니다. 가난을 담는다 해서 다큐사진이 되거나 ‘사진이 되지’ 않아요.

 세바스티앙 살가도 님이 가난한 사람들이나 아픈 사람들을 담은 사진을 내놓았지만, 막상 당신 사진을 읽을 때에 ‘아, 가난한 사람이구나!’라든지 ‘아, 아픈 사람이구나!’라고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그냥 ‘아, 사람이구나!’라고만 느낍니다. 사람이구나 하고 느끼면서, 이 사람들마다 다 달리 꾸리는 삶과 이야기를 느낍니다.

 사진책 《어떤 동네》는 나라안에서 ‘가장 가난하다’는 이름이 높다는 인천 동구 만석동 한켠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내어 보여준다는 대목에서는 놀랍다고 여길 만합니다. 그렇지만, 놀랍다고 여길 만한 대목 하나로 내보이는 사진책이라면 쓸쓸합니다. 사랑을 나누고 믿음을 나누는 사진책으로 거듭난다면 더 반가울 텐데요. 사랑을 얻고 믿음을 보낼 사진책으로 태어난다면 참말 기쁠 텐데요.

 사진을 찍은 분은 인천 만석동에서 좋은 넋과 마음으로 좋은 공부방을 아기자기하게 꾸리는 줄 압니다. 그러면, 이곳에서 담는 사진 또한 ‘좋은 넋과 마음으로 담는 좋은 사진’이기만 하면 됩니다. 굳이 ‘가난한 동네를 더 가난하게’ 보이도록 한다든지, ‘가난한 동네니까 더 눈여겨보거나 사랑해야 한다’는 느낌이 들도록 사진을 찍을 일이 아닙니다.

 가난하건 가난하지 않건 모두 사랑스러운 이웃입니다. 내 집이 있건 삯집에서 얹혀 지내건 따스한 동무입니다.

 가난하다는 동네 골목 한켠 시멘트 틈을 뚫고 꽃 한 송이 피어납니다. 흙 한 줌 없는 시멘트 골목바닥인데, 골목이웃이 꽃그릇 조촐히 마련해서 꽃밭과 텃밭을 일굽니다.

 구멍가게 작은 평상에서든, 볕바른 골목 한켠 돗자리에서든, 할매와 할배가 모여 이야기꽃을 나누는 모습이란 굳이 사진으로 담지 않아도 어여쁩니다. 굳이 사진으로 담아서 보여줄 모습이란 나부터 아름답게 살아가는 하루요, 나와 내 이웃이 아름다이 웃는 얼굴이요, 나 스스로 디딘(동네 살림꾼으로든 지나치는 구경꾼으로든) 이 마을 이 터전에서 아름다이 피어나는 풀과 꽃과 나무입니다. (4343.12.18.흙.ㅎㄲㅅㄱ)


― 어떤 동네 (유동훈 사진·글,낮은산 펴냄,2010.11.30./13000원)
 

 

 

......  

(만석동 사진을 몇 장 붙여 본다. 책에는 이런 사진이 안 실린다. 내가 찍은 사진들이다. 만석동 동무를 만나러 오가던 길에 담은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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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0 16: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놀 2010-12-21 11:17   좋아요 0 | URL
아... 저는 맞춤법이랑 띄어쓰기를 좋아하지 않아요 ^^;;;
우리가 살아가는 결에 맞추어 알맞게 새말을 잘 지어서 쓰면 되리라 생각하거든요.

jooferry 님 말마따나, 저는 이분이 예전부터 하던 활동과 성과를 익히 알고 있지만,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예전과 다를 바 없는 '가난한 동네를 돕는 이름'을 너무 앞세운 나머지, 동네사람 수수한 아름다움하고 자꾸 멀어지기만 했어요.

참 슬프답니다. 그래서 일부러, 제가 이 동네에서 살아가는 동무를 만나러 오가던 길에 찍은 사진을 주루룩 걸쳐 놓았답니다.... ㅠ.ㅜ

댓글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
 



 사진책 읽는 즐거움 ㉦ 사진책 선물하기
 ― 좋은 벗님이기에 좋은 사진책 하나를



 헌책방에서 사진책 한 권을 25만 원을 치르며 산다면 깜짝 놀랄 사람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25만 원이든 15만 원이든 5만 원이든, 사진책다우면서 사진하고 책이 아름다울 때에는 주머니에서 돈이 나가는 느낌을 쉬 잊습니다. 사진하고 책이 어우러진 이 사진책 하나를 장만하는 데에 든 돈은 언제든지 다시 벌 수 있다고 느끼며 기꺼이 장만합니다. 두 번 다시 마주하기 힘들다 싶은 사진책 한 권을 헌책방에서 25만 원을 치러 장만하는 일은 하나도 놀랍다거나 대단하다고 할 만하지 않습니다.

 고작 2500원을 주고 장만하는 사진책 하나라지만, 앞으로 헌책방에서고 도서관에서고 찾아볼 수 없는 책이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어느 책이든 두 번 다시 마주하기 힘들지 않나 싶습니다. 값이 좀 싸다 싶은 책이라서 자주 만난다거나, 값이 좀 비싸다 싶은 책이라서 가끔 만나지 않아요. 저마다 사람들이 얼마나 잘 알아볼 수 있느냐에 따라 자주 보느냐 가끔 보느냐가 갈립니다. 무엇보다 나 스스로 사진이랑 책이랑 어느 만큼 아끼거나 사랑하느냐에 따라 내 눈길과 마음길로 찾아드는 사진책이 달라집니다.

 돈이 아주 많다고 모든 ‘좋다는 사진책’을 다 장만할 수는 없습니다. 돈이 얼마 없다고 웬만큼 ‘괜찮다는 사진책’ 하나 장만하기 벅찰 수는 없습니다. 돈은 있으나 마음이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요. 돈은 없으되 마음이 있는 사람 또한 얼마나 많나요.

 돈이 있어 더 값나가는 장비를 갖춘 사람이 더 값나가는 사진을 찍지 못합니다. 돈이 없어 더 값싼 장비를 쥔 사람이 더 값없는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사진은 삶이요, 사진찍기란 삶찍기이며, 사진읽기란 삶읽기입니다. 내 삶을 사랑하는 만큼 사진을 즐기고, 내 삶을 아끼는 대로 사진을 찍으며, 내 삶을 어루만지는 결에 따라 사진을 읽습니다. 나 스스로 내 삶을 사랑하는 만큼 사진책을 마주합니다. 나 스스로 내 삶을 아끼는 대로 사진책을 장만합니다. 나 스스로 내 삶을 어루만지는 결에 따라 사진책을 선물합니다.

 저는 누구보다 저한테 사진책을 선물합니다. 나 스스로 사진을 한결 잘 읽고 싶어 사진책을 나한테 선물합니다. 우리 옆지기하고 아이랑 사진을 한껏 즐기고 싶기에 사진책을 장만합니다. 좋은 사진은 좋은 마음이 담겼고, 좋은 넋이 넘치며, 좋은 꿈이 빛납니다. 좋은 사진을 일군 사람들은 좋은 마음으로 좋은 삶을 가꿀 뿐더러 좋은 넋으로 좋은 사랑을 나누는 삶이며 좋은 꿈으로 좋은 이야기를 펼치는 삶이에요.

 그림이 그럴듯하다고 해서 모으는 사진이나 책이나 사진책이 아닙니다. 내 삶으로 애틋하게 받아안고 싶어 한 권씩 꾸준하게 장만하는 사진책입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사진으로 어떤 삶을 담아내면서 이야기꽃을 피우는가 궁금해서 한 권씩 차근차근 사들이는 사진책입니다. 이 사람한테서는 이 눈길에 따라 이 삶을 보고, 저 사람한테서는 저 손길에 따라 저 삶을 만납니다.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곳에서 다 다른 마음밭을 돌보면서 다 다른 사진기로 다 다른 이야기를 다 다른 사진에 담아 다 다른 책으로 엮습니다. 사진책을 보는 재미는 다 다른 삶에 있습니다.

 좋은 벗을 만날 때면 으레 책을 한두 권 선물하곤 합니다. 만화책도 선물하고 글책도 선물하지만 사진책도 선물합니다. 만화책이라 해서 돈이 더 적게 든다든지, 글책이라서 그렁저렁 알맞춤하다고 느낄 선물이 아닙니다. 만화책을 한꺼번에 여러 권 선물하기도 합니다. 판이 끊어져 사라진 책을 헌책방 책시렁을 뒤져 선물하기도 합니다. 사진을 하는 사람이건 아니건, 사진 하나에 영근 빛나는 보배를 소롯이 오래오래 느껴 주기를 마음속으로 빌면서 사진책을 선물합니다.

 사진책을 선물하면서 책갈피로 쓰라며 사진 한 장 살짝 곁들일 수 있습니다. 또, 이렇게 해 보면 더 즐겁습니다. 선물받는 사람 모습을 찍어 준 사진이든, 우리 집 아이를 담은 사진이든, 골목동네 삶자락이나 헌책방 책시렁을 담은 사진이든, 내가 손수 찍어 종이로 뽑아 놓은 사진 한 장을 슬며시 끼워 넣고 뒤쪽에 짤막히 편지를 적바림해 보곤 합니다.

 아직 몇 번만 해 보았는데, 혼인잔치를 하는 동무나 후배한테 도톰한 사진책 하나 선물하는 일도 꽤 괜찮다고 느낍니다. 남자들이 여자친구한테 으레 꽃다발을 선물한다고들 하는데, 백한 송이 장미이든 몇 송이 장미이든 선물해 보아도 좋을 텐지만, 다달이 사진책 한 권씩 선물해 보는 일도 퍽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요즈음처럼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진찍기를 즐긴다 할 때에는 다달이 십만 원쯤 사진책 선물하는 값으로 써 본다면 꽤 남다를 뿐더러 훨씬 돋보이리라 생각합니다. 여자친구나 남자친구한테뿐 아니라 할머니하고 할아버지한테도 사진책을 선물할 수 있어요. 중학교 다니는 딸한테든 대학생인 아들한테든 얼마든지 사진책을 선물할 만합니다. 생일잔치를 한다거나 학교 입학·졸업 선물로도 사진책은 참 좋은 선물감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나라밖으로 다녀오면서 사진책 하나를 선물로 사 올 수 있겠지요. 나라밖으로 볼일을 보러 나가는 길에 한국 사진책을 몇 권 사들고는, 나라밖 벗님한테 선물해 볼 수 있어요.

 그림책과 만화책과 사진책 세 가지는 나라와 겨레를 넘나들면서 살갑고 애틋하게 나눌 수 있는 좋은 징검다리요 이음고리라고 느낍니다. (4343.12.1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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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온'이라는 말을 잘 살려서 쓰는 대목이 반갑습니다만, '기름'처럼 흔한 말부터 살필 수 있다면, 또 '누런쌀'이라 적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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