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풍경 - 죽음을 은폐하는 사회에서 생명을 만나다
후쿠오카 켄세이 지음, 김경인 옮김 / 달팽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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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과 죽음은 선물, 일과 놀이는 보배
 [환경책 읽기 25] 후쿠오카 켄세이, 《숨겨진 풍경》


- 책이름 : 숨겨진 풍경
- 글 : 후쿠오카 켄세이
- 옮긴이 : 김경인
- 펴낸곳 : 달팽이 (2010.1.21.)
- 책값 : 12000원


 (1) 어린이와 삶


 어린이문학을 하면서 한삶을 바친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이 내놓은 이야기책 가운데 ‘삐삐’ 이야기가 아주 많이 읽히거나 팔렸습니다. 다른 이야기책도 많이 읽히거나 팔렸는데, 이모저모 헤아리면 ‘삐삐’만큼 사랑받은 이야기는 없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삐삐는 ‘말괄량이’라는 이름이 앞에 붙습니다. 말괄량이 삐삐입니다. 삐삐가 하는 일을 떠올린다면 말괄량이라 할 만합니다. 말괄량이에 주근깨투성이가 맞습니다. 그러면 삐삐는 말괄량이요 주근깨투성이이기만 할까요.

 삐삐네 이웃에서 살아가는 토미와 아니카는 삐삐하고 둘도 없는 동무입니다. 셋은 배를 타고 멀디먼 마실도 다니고 풍선비행기를 타고 날아다니기도 합니다. 돈 한푼 없이 ‘딸기밭 매기 싫어’ 먼길을 나서기도 하는데, 삐삐는 늘 토미와 아니카를 잘 챙겨 줍니다. ‘빌라 빌라 콜라’에서 살 때에도 토미와 아니카가 놀러오면 과자를 구워 주거나 밥을 차려 주기도 해요. 삐삐는 마을 아이들 모두 먹을 만큼 과자를 잔뜩 굽기도 합니다. 집안도 혼자서 잘 치우고 말과 원숭이도 잘 먹입니다. 그렇지만 토미나 아니카는 아직 빵이나 과자를 구울 줄 모릅니다. 날씨가 아주 좋으니까 딸기밭 김매기가 싫다고 하지만, 삐삐처럼 집안일도 잘하면서 놀기도 잘하기까지는 하지 못해요. 삐삐는 갓난쟁이도 잘 돌보고 할머니하고도 이야기를 잘 나눕니다. 씩씩할 뿐 아니라 사랑스럽지요. 튼튼하면서 굳셉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린드그렌 님 이야기책에 나오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집일을 잘 하거나 잘 거듭니다. 스스럼없이 집일을 하고, 또 신나게 밖에서 뛰어놉니다. 풀과 나무와 새와 벌레를 곱게 사랑합니다. 동무를 아낄 줄 알며, 이웃과 어른을 섬길 줄 알아요. 착하면서 참답습니다. 예쁘면서 귀엽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착하면서 참다운 아이들 가운데에는 가난에 찌들리거나 시달리는 가여운 아이가 있어요. 못되거나 못난 어른한테 들볶이거나 꾸중듣는 아이가 있어요. 아이가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이 마음을 읽지 않을 뿐더러, 아이 삶을 사랑하지 않는 어른들이기에, 아이들이 슬프거나 힘듭니다.


.. 누군가가 죽기 때문에 앞으로 태어날 새 생명이 살아갈 여지가 그 자리에 생겨난다. 아무도 죽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머잖아 살아 있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결국은 파괴되고 말 것이다 … 셀 수 없이 많은 ‘죽음’이 있으므로 우리의 ‘생명’이 있다 … ‘죽음’과 생활 속에서 가까이 만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을 계기를 사람들로부터 빼앗아버린 것은 아닐까? ..  (19쪽)


 우리 어린이문학 가운데 이원수 님이 빚은 이야기책을 읽으면, 씩씩하며 당찬 아이들이 늘 나옵니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안 계셔도 씩씩하게 살아가는 아이들이 나옵니다. 어린 동생을 혼자 일해서 먹일 뿐 아니라 가르치는 형이나 누나가 나옵니다.

 오늘날 잣대로 보자면 ‘이렇게나 어린 아이들한테 일을 시킨다구?’ 하면서 ‘아동 노동 착취’라 할는지 모르지만, 어버이가 안 계시거나 몸져누웠는데, 어린이라 해서 마냥 팔짱 낄 수 없습니다. 아홉 살이든 열한 살이든 일을 해야 합니다. 구두를 닦든 신문팔이를 하든 어린이로서 할 만한 일거리를 찾아야 해요. 집에서 밥을 차리고, 그 작은 손으로 겨울날 찬물로 빨래를 합니다. 찬물로 걸레를 빨아 방바닥을 닦습니다. 가녀린 팔뚝일지라도 이불을 잘 들어 탁탁 텁니다. 조그마한 몸뚱이로 조그마한 아기를 등에 업고 달래며 자장노래를 부릅니다.

 이원수 님 이야기책 뒤를 이은 권정생 님 이야기책에도 아이들은 일을 합니다. 일하지 않는 아이는 드뭅니다. 아마, 도시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은 일을 안 하거나 덜 하겠지요. 그러나 도시에도 가난한 살림집이 많아, 이들 가난한 살림집 아이들은 어김없이 제 어버이와 함께 일을 합니다. 물건을 떼어 저잣거리나 길거리에서 팔면서 제 어버이와 나란히 살림을 꾸립니다.

 너무 어린 나이부터 일을 해야 한다면 애늙은이가 될까 걱정스러울 수 있습니다. 참말, 애늙은이나 애어른이 되는 어린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이다움을 고스란히 건사하면서 속깊은 아이로 크기도 합니다. 속이 깊을 뿐 아니라 마음이 넓으며 사랑이 따스한 아이로 자라기도 해요.


.. 동물을 죽이는 행위를 보지 않아도 되게 된 지금, 우리는 그 행위와 더불어 느끼지 않으면 안 되었던 마음의 고통을 전혀 느끼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 고통을 느끼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에, 타인의 입장에 서서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상상력까지도 상실한 인간을 낳고 있다 … 보다 저렴한 것을 보다 많이, 싫은 것은 더 멀리 보이지 않는 곳으로. 그 끝에 우리가 구축한 것은, 어떤 고통도 위로의 감정도 느끼지 않고 내키는 대로 다른 생명을 낭비할 수 있는 사회다 ..  (58, 60, 126쪽)


 예나 이제나 참다우며 착하고 어여쁜 아이들은 ‘일하는 아이들’입니다. 이오덕 님이 밝히기도 한 ‘일하는 아이들’이 사랑스러우면서 귀엽습니다.

 일하는 아이들은 놀이하는 아이들, 곧 ‘노는 아이들’이기도 합니다. 비싼 놀잇감을 갖고 놀아야 놀이가 아닙니다. 흙바닥에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려도 놀이입니다. 아기를 등에 업고 노래를 불러도 놀이입니다. 방아를 찧거나 켜를 까부르며 밥을 지어도 놀이입니다. 마당에서 비질을 하면서 더 어린 동생이랑 노래놀이를 할 수 있습니다. 어버이가 빨래하는 곁에서 빨래를 헹구며 놀 수 있어요. 바느질이나 뜨개질을 배우며 함께 일하는 동안, 어버이한테서 이야기를 듣는 이야기놀이를 할 수 있겠지요.

 일로만 동떨어지지 않습니다. 놀이로만 나뉘지 않습니다. 일하고 놀이는 함께 어우러집니다. 일놀이요, 놀이일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어여쁜 목숨이고, 함께 어깨동무하는 좋은 벗입니다.

 요즈음 아이들은 일을 잊고, 놀이를 하더라도 일하고는 사뭇 갈라지고 만 놀이만 해대기에 아이답지 못할 뿐 아니라, 사람답지 못하지 않느냐 느낍니다. 요즈음 아이들은 일을 안 하는데다가, 일이 무언지를 모르고, 어버이나 어른이 일을 옳게 안 시키기 때문에, 나중에 무럭무럭 자라 푸름이가 되거나 어른이 되어도 일다이 일을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말지 싶습니다. 어린 나날부터 일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일하는 어른’이 못 될 뿐 아니라, 둘레 ‘일하는 어른’을 동무로 삼지 못하고, 일하는 동무 어른이 고달프거나 괴로울 때에 함께 아파하면서 고달픔과 괴로움을 씻어내도록 손을 맞잡지 못한다고 느껴요.

 지식만 쌓는 아이들이야말로 애늙은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나날부터 교과서와 교재와 ‘좋다는 책’에만 둘러싸인 채 지식만 가득가득 집어넣는 아이들이 되고 마니까, 이 아이들은 머리로만 보면 아이큐가 높거나 똑똑하달지라도, 사람다움을 잊거나 모르며, 사람다움을 잊거나 모르니 삶을 삶다이 일구지 못하고, 삶을 삶다이 일구지 못하는데, 넋이나 말이 넋답거나 말다울 수 없습니다. 제 밥그릇 하나 손수 흙을 일구면서 거두지 못하고, 제 마음그릇 하나 몸소 사랑을 나누면서 다스리지 못합니다.


.. 내가 읽은 유서의 주인들도 사실은 죽고 싶었던 것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달리 편안해질 방법을 찾지 못하고, 말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리라 ..  (153쪽)


 아이들은 일을 해야 하고, 일다이 일을 해야 합니다. 어른들은 아이한테 일을 시켜야 하며, 일다운 일을 시켜야 합니다. 아니, 어른들은 아이들하고 함께 일해야 합니다. 어른들은 아이들과 함께 살며 함께 일하고 함께 놀다가는 함께 잠자야 합니다. 어른들 일터는 아이들 놀이터가 되어야 하고, 어른들 놀이터는 곧바로 아이들 일터가 되기도 해야 합니다.


 (2) 어른과 삶


 도시물질문명이라 하는 요즈막에 큰도시에 아옹다옹 모여서 복닥이는 어른들 삶을 들여다보면, 그닥 재미나지 않습니다. 이 나라 어른들이 논다는 모습은 놀이라 하기 참 어렵습니다. 아이들에 앞서, 어른들은 무얼 하며 노는가요.

 아이들은 구슬치기도 안 하고 고무줄놀이도 안 하며 금긋기놀이나 소꿉놀이나 술래잡기조차 안 합니다. 돌치기나 숨바꼭질이나 눈싸움을 하는 아이를 만날 수 없습니다.

 어른들은 술마시거나 담배피우는 놀이 말고 무슨 놀이를 하나요. 색시집에 가서 살꽂이하기가 놀이인가요. 술에 절어 해롱거리면서 싸움박질하기가 놀이인가요. 골방에서 인터넷을 누비며 제 이름을 숨긴 채 낄낄대거나 못된 글을 남기는 짓이 놀이인가요. 아니, 그냥저냥 인터넷게임을 한답시고 ‘사람 죽이는 게임’만 해대는 모습이 놀이인가요.

 자가용을 싱싱 모는 일이 놀이인가요. 비싼 사진기를 자랑하듯 내보이며 ‘출사’ 다니는 나날이 놀이인가요. 비행기 타고 나라밖을 다녀온다든지, 스키장을 드나들거나 ‘겨울에도 후끈후끈한 워터파크’ 마실을 하는 모양새가 놀이인지요.

 백화점이나 마트 나들이가 놀이가 되나요. 뭐가 놀이이지요? 오늘을 살아가는 이 나라 이 땅 이 도시에서, 또 시골에서, 어른들은 무슨 놀이를 하나요? 텔레비전 보기가 놀이인가요? 운동경기장에 가서 소리 빽빽 지르는 짓이 놀이인 셈인가요?


.. 그들 애완동물 산업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개고양이는 대량으로 팔리지 않으면 안 된다 … 동물들이 처분되어야 하는 원인은 사람에게 있지 동물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  (55쪽)


 어른이라는 사람들부터 놀이를 잊었다고 느낍니다. 놀 줄 모르는 어른이라고 느낍니다. 놀 줄을 모르니까 아이들을 놀릴 줄 모릅니다. 놀 생각을 안 하니까 아이들이 놀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놀지를 않으니 아이들이 놀도록 지켜보지 못합니다.

 놀지 못하는 어른은 일하지도 못합니다. 어른이 하는 일이란 무엇인가요.

 설마 ‘돈벌기 = 일하기’라고 생각하지 않나 궁금합니다. 돈벌기란 돈벌기입니다. 돈벌기는 일하기가 아닙니다. 일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으나, 일하기는 돈벌기가 아닙니다.

 일이란 놀이와 같은 일입니다. 일이란 내 삶이라 할 만한 일입니다. 쉰다섯에 정년퇴직을 하거나 예순다섯에 정년퇴임을 하는 일은 일이 아닙니다. 그냥 돈벌이입니다. 일이라 할 때에는 내 몸이 굳으며 스르르 눈을 감아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온몸으로 붙잡아서 할 때에 일이라 합니다. 일흔이나 여든에도 즐겁게 해야 비로소 일입니다. 아흔에는 못한다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모든 일은 다섯 살부터 백다섯 살까지 누구나 언제라도 즐거이 할 때에 일입니다. 어릴 적부터 늙을 때까지 신나게 할 수 없으면 일이 아니라 ‘돈벌이’입니다.


.. “난 고기를 구워먹을 때면 상당히 까다롭다우. 제 손으로 한 조각 굽고, 그걸 먹은 다음에 다른 고기를 구우루고 말이야. 한꺼번에 몽땅 석쇠에 올려놓고 구우려고 하면, 내가 절대 용서 안 하거든, 허허. 한꺼번에 올리면 너무 타서 못 먹게 되는 것이 꼭 나오게 마련이거든. 고기는 하나씩, 자기 먹을 것은 자기가 구워먹어라. 다들 귀찮다고 하겠지만, 난들 어쩌겠나, 말 않고는 못 배기겠는걸, 허허허!” ..  (도축업자 후지모토/114∼115쪽)


 일을 잊은 어른은 놀이를 잊을밖에 없습니다. 놀이를 잊으니 일도 제대로 모르지만, 삶부터 엉망입니다. 뒤죽박죽이 되겠지요. 어수선할 뿐이겠지요.

 밥하기란 일하기입니다. 아이돌보기란 일하기입니다. 빨래란 일하기입니다. 쓸고닦기는 일하기입니다. 설거지란 일하기입니다. 흙을 일구는 농사짓기는 일하기입니다.

 사람들은 일을 해야 합니다. 사람이 되었다면 일을 해야 합니다. 곰곰이 돌이킨다면, 이 땅에서 살아온 뭇 여자들은 집이라는 울타리에 갇힌 채 살았다지만, 집은 감옥이 아니에요. 집은 수많은 일거리가 가득한 곳이에요. 언제나 일이 기다립니다. 이 일을 끝냈다 해서 참말 끝나지 않습니다. 하루에도 끊이지 않고, 날마다 되풀이되며, 노상 이어집니다. 집일은 그예 일입니다. 그러니가, 예부터 할머니와 어머니는 늘 ‘일을 하며’ 살았어요. 여기에 남자 어른들이 농사를 지었다면 여자 어른과 마찬가지로 ‘일을 하며’ 살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던 우리들이 차츰차츰 돈벌이에 눈이 멀면서 일을 놓거나 버립니다. 어른들이 차츰차츰 일을 버리고 돈을 좇으면서 놀이를 함께 버렸고, 놀이를 버릴 때에는 삶을 버립니다. 어른들이 삶을 버리면서 일놀이가 저절로 버려질 때에, 아이들 또한 일과 놀이와 삶이 가뭇없이 사라집니다. 아니, 아이들은 어른들 때문에 모든 일과 놀이와 삶을 빼앗겨요.

 골목길에서 아이들이 사라지고 아이들 놀이가 사라진 까닭은 아이들 때문이 아닙니다. 어른들이 돈벌이에 눈이 먼 탓입니다. 돈벌이에 눈이 먼 어른들이 자꾸 늘어나다가는, 이제는 이 커다란 도시를 가득 채우며 누비는 어른들이 거의 몽땅 돈벌이에만 얽매였기 때문입니다.


.. 우비를 입고 닭 모가지를 자르던 사람은 페루에서 온 일본계 3세라고 한다. “이런 더러운 일은 아무도 하고 싶어 하지 않거든.” ..  (83쪽)


 어른들은 하루 빨리 일을 찾아야 합니다. 돈벌이가 아닌 일을 찾아야 합니다. 여자 어른들은 여자 어른대로 일을 찾아야 하고, 남자 어른도 남자 어른대로 일을 찾아야 합니다.

 집에서 살림하는 사람은 남자이든 여자이든 아름답습니다. 왜냐하면 ‘살림꾼’이니까요. 사랑스러운 사람인 살림꾼이기 때문에, 살림을 여자가 하든 남자가 하든 어여쁩니다. 살림을 여자한테만 맡기거나 떠넘기는 남자는 스스로 사람됨을 내팽개친다는 뜻입니다.

 조금이라도 눈을 뜨거나 생각을 열었다면, 서둘러 내 일을 찾아야 합니다. 내 일을 찾을 때에 바야흐로 내 놀이를 찾습니다. 내 놀이를 찾아서 즐기면 시나브로 내 삶이 새로우면서 싱그러이 피어납니다.

 어른들이 스스로 땀흘리며 일할 줄 알 때에 아이들 또한 땀흘려 일하는 보람과 값과 뜻을 배웁니다. 아이들이 땀흘려 일하는 보람과 값과 뜻을 배우면, 이제부터 아이들은 놀이가 얼마나 신나며 즐거운가를 깨닫습니다. 놀이를 깨닫고 일을 배우면, 하루하루 놀라운 삶이요 대단한 기쁨이자 멋진 웃음입니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 ‘삐삐’이든, 이원수 님과 권정생 님 숱한 이야기책이든, 바로 이 일과 놀이와 삶이 하나로 모이는 자리에서 태어났습니다.


 (3) 삶을 잊었기에 “숨겨진 풍경”


 《즐거운 불편》을 썼던 후쿠오카 켄세이 님 다른 책 《숨겨진 풍경》을 읽었습니다. 《숨겨진 풍경》은 《즐거운 불편》 못지않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 어른들은 《즐거운 불편》이 왜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았고, 《숨겨진 풍경》은 어떻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실었는가를 옳게 읽지 못하리라 느낍니다.

 두 가지 책은 한결같은 목소리입니다. 누구보다 후쿠오카 켄세이 님 스스로 ‘내 삶이 무엇이지? 내가 하는 일은 뭐지? 나는 무얼 하면서 놀이를 한다고 여기지?’ 하고 끝없이 되물으면서 살았습니다. 이렇게 되묻고 찾아나서면서 살아온 발자국이 두 가지 책, 《즐거운 불편》하고 《숨겨진 풍경》에 스며들어요.


.. 키우기 시작한 지 나흘째, 사마귀가 알을 낳았다. 그것을 발견한 둘째아이는 좋아라 날뛰었다. 하얀 거품 같은 알은, 만지니 아직 부드러웠다. 그리고 알을 낳은 이틀째가 되는 날 아침, 어미사마귀의 시체가 흙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임무를 다 마친 뒤의 편안함 같은 것이 엿보이는 모습으로 ..  (9쪽)


 후쿠오카 켄세이 님이 《즐거운 불편》이랑 《숨겨진 불편》에서 밝히는 이야기는 꼭 한 가지입니다. ‘너무 늦기 앞서 내 삶을 찾아, 살아가는 동안 즐기고, 죽음을 앞둔 자리에서는 고마워 하자.’예요. 살아가는 나날이 얼마나 즐거운가를 헤아리면서, 이제 몸이 딱딱하게 굳으며 흙으로 돌아가야 할 때 얼마나 고마운가를 알아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 닭을 죽일 때 눈물을 흘리고 한 번에 닭의 목숨을 끊지 못해 닭에게 몇 번이나 공포와 고통을 주고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다’고 쓴 전형적인 현대인이라 할 수 있는 고교생들도, 아마 굶주리면 닭이 됐든 소가 됐든 돼지가 됐든 그들의 생명을 빼앗아 먹게 될 것이다. 그리고 들개가 횡행하여 자신들의 신변이 위험해지면 퇴치에 나설 것이다 ..  (137쪽)


 지식이란 참 부질없습니다. 그래서 후쿠오카 켄세이 님은 지식을 다루지 않습니다. 지식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지식을 밝히지 않습니다. 그저 삶만 밝힙니다. 삶이란 곧 죽음이고, 죽음이란 바로 삶이며, 일하고 놀이하는 나날이 고스란히 삶이면서 죽음이라고 알아내면서, 이렇게 알아낸 기쁜 이야기를 책으로 갈무리합니다.

 먹는 즐거움과 함께 똥오줌을 누는 즐거움입니다. 베푸는 즐거움과 나란히 얻는 즐거움입니다. 가르치는 즐거움과 같이 배우는 즐거움이에요.

 외길이란 없고 외통수란 없어요. 산울림이 아닌 메아리입니다. 삶과 죽음은 하늘이 내려준 선물입니다. 일과 놀이는 땅에서 베푸는 보배입니다. 돈을 많이 벌었거나 이름값 드날리거나 권력을 휘두른다고 웃어 보았자 그리 오래 끌지 않습니다. 밥 한 끼니는 한 나절입니다. 날마다 밥끼니 여러 그릇을 비우며 채워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과 즐길 놀이란 밥그릇을 바지런히 비우며 채우기를 되풀이하는 수수한 여느 나날입니다. 수수한 여느 삶이 선물이면서 보배입니다. (4344.2.1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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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말(인터넷말) 31] ChosunBiz

 나라밖 사람들이 보라는 누리신문 이름이라면 마땅히 알파벳으로 적어야 합니다. 나라안 사람들이 읽으라는 누리신문 이름이라면 마땅히 한글로 적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누리신문을 펴내거나 종이신문을 내놓는 한국사람치고, 한국사람이 한글로 읽을 신문인 줄 옳게 깨닫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이러다 보니 누리신문 차림판에 ‘Market’이라는 이름까지 있는데, ‘Market’이라는 이름을 붙인 자리에서는 무엇을 이야기할까요. 그런데 ‘오피니언·칼럼’이랑 ‘피플’이랑 ‘컨퍼런스·포럼’은 한글로 적었네요. 이러면서 ‘IT’하고 ‘FOCUS’는 알파벳으로 적습니다. ‘Weekly Biz’도 알파벳이네요. 참말 왜 이렇게 오락가락인가요. 영어로 쓰며 알파벳으로 적고 싶으면 ‘자동차’도 아예 ‘car’라 해야지요. ‘글로벌 경제’는 또 뭔가요. 그냥 ‘global biz’라고 해야 어울리지요. 차림판 이름이 이처럼 뒤죽박죽인 신문은 이 신문이 조선일보이기 때문이지 않습니다. 진보를 밝히거나 개혁을 한다는 신문들도 차림판 이름은 조선일보하고 똑같습니다. 가난한 사람하고 수수한 사람이랑 대학 문턱 안 밟은 사람하고는 사귀려 하지 않는 이 나라 신문들입니다. (4344.2.1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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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50 : 사람이 읽는 책


 충청북도 신니면 광월리에 자리한 부용산 멧기슭에는 이오덕 님 뜻과 넋을 기리는 멧골학교인 이오덕자유학교가 있습니다. 이곳은 일곱∼아홉 살 어린이부터 들어와서 다닐 수 있는 배움터이고, 나이가 더 든 어린이나 푸름이는 사이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어린 나날부터 멧자락에서 숲과 들을 쏘다니면서 제 먹을거리를 손수 흙을 일구어 마련하도록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교과서를 쓰지 않고 교재 또한 쓰지 않으며 정규 교과과정이나 학사과정을 밟은 사람이 교사가 되지 못합니다. 책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사람을 가르치는 곳이고, 책으로 가르치는 데가 아니라 사람으로 가르치는 데이기 때문이에요. 누구나 가르치는 어른이 될 수 있으나 아무나 배우는 어른이 되지 못하는 배움마당인데, 2011년 2월 9일에 새 학기를 여는 날부터 이곳 어린이와 푸름이하고 ‘책이야기’를 날마다 한 시간씩 나누기로 했습니다. 교과서가 없고 교재를 안 쓰니까 어떻게 가르쳐야 좋을까를 저 스스로 살펴야 하는데, 가르친다기보다 함께 ‘책이야기’를 나눈다고 해야 알맞습니다.

 날마다 새로 맞이하는 새벽부터 낮까지 시골집에서 우리 살붙이들이랑 복닥이던 삶을 돌아보면서 이 이야기를 어린 벗님하고 함께 나눕니다. 아버지가 손톱을 깎으니 옆에 붙어서 제 손톱도 깎아 달라는 아이 손톱이랑 발톱을 깎다 보니 아이는 사르르 잠들고, 잠든 아이 옷을 벗기고 기저귀를 채워 눕히고 나서, 아버지는 오른손 손톱을 마저 깎아야 하는 줄 깜빡 잊고 하루를 보냈다는 이야기를 나눕니다. 우리 시골집은 지난 12월부터 어느덧 석 달째 물이 얼어 못 쓰는 터라 학교 씻는방으로 빨래감을 들고 와서 빨래한다는 이야기를 나눕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야기를 조곤조곤 나누면서 이러한 이야기를 빗대어 책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누가 책을 쓰는가를 살핍니다. 나날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듯이 적바림한 책 하나를 들고 와서 어린 벗님하고 돌아가면서 읽습니다.

 어제는 《남쪽의 초원 순난앵》(마루벌,2006)이라는 그림책을 함께 읽었고, 다음주에는 《그리운 순난앵》을 함께 읽을 생각입니다. 두 가지 순난앵 그림책은 모두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이 쓴 글을 바탕으로 빚은 그림책으로, 순난앵이라는 마을에서 따사롭게 살아가던 아이들이 가난하고 메마른 터전에서 여러 해에 걸쳐 힘겹게 굶주리며 고된 일에 시달리다가 다시금 따사로우며 사랑스러운 순난앵을 찾아서 포근하게 쉰다는 줄거리입니다. 아마, 굶주리던 아이들은 조용히 눈을 감으면서 ‘하늘나라에 있을 순난앵 마을’로 가서 넉넉한 어머니 품에 안겼겠지요.

 이오덕학교 벗님들은 순난앵을 그리다가 마침내 순난앵으로 들어간 두 아이 이야기가 재미있다고도 하고 슬프다고도 하지만 ‘죽음으로 들어선’ 줄은 깨닫지 못합니다. 어쩌면, 순난앵을 그리워하며 찾아간 아이들 또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살며시 눈을 감을 때에는 ‘죽음’이 아닌 ‘새터’로 간다고 여겼을 테지요. 그러니까, 죽음이란 꼭 슬프지만 않고 얄궂지만 않아요. 내가 살기에 흙과 햇볕과 바람과 물이 고운 목숨을 나누어 주고, 내가 죽기에 흙과 햇볕과 바람과 물은 새 목숨을 거두어들이며 새 거름으로 삼습니다. 사람은 책을 읽고, 흙은 삶과 사람과 사랑을 읽습니다. (4344.2.1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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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우리 말 78] 봄이 왔다

 이오덕자유학교에서는 네 글자 “봄이 왔다.”를 붓으로 써서 문에 붙인다. 그래, 봄이 왔으니 봄이 왔다고 적어서 붙인다. (4344.2.1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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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카밀로의 곤경
조반니노 과레스키 지음, 이선구 옮김 / 새남 / 1994년 12월
평점 :
절판


 (돈 까밀로 책을 우리 말로 처음 옮긴 이선구 님 번역이 아직 하나 살았네...)

다시 태어나는 책과 삶과 사람
― 조반니 꽈레스끼, 《명랑한 돈 까밀로》



- 책이름 : 명랑한 돈 까밀로
- 글 : 조반니 꽈레스끼
- 옮긴이 : 이선구(李璇求)
- 펴낸곳 : 가톨릭출판사 (1969.2.20.)



 조반니노 과레스키(조반니 꽈레스키·죠반니노 과레스끼) 님 책은 1969년에 처음 우리 말로 옮겨졌으나, 이 책은 그다지 많이 안 읽혔습니다. 천주교 출판사에서 나온 터라 천주교 믿는 분들 사이에서 조금 읽혔습니다. 1979년에 ‘백제’ 출판사에서 새옷을 입고 나오면서 비로소 널리 읽히고, 나중에 백제출판사가 문을 닫은 뒤 다른 출판사에서 거듭 펴내며 많이 읽힙니다. 조반니노 과레스키 님 문학은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 다섯 권이 끝은 아니지만, 우리 나라에는 이 다섯 가지 책 테두리에서만 머물고, 좀처럼 다른 문학과 삶을 들여다보는 쪽으로는 이어지지 못합니다. 《비밀일기》(막내집게,2010) 같은 책이 어렵게 우리 말로 옮겨지지만, 막상 이러한 문학을 알아보거나 곰삭이거나 맞아들이는 사람은 퍽 적어요.

 다시 태어나는 책만 다시 태어나고, 다시 읽히는 책만 다시 읽히며, 다시 팔리는 책만 다시 팔립니다.

 출판사도 먹고살아야 하는 만큼, 이 나라 출판사들은 (돈이 있건 없건) 안 팔리거나 덜 팔리거나 못 팔릴 책을 좀처럼 내놓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좋거나 훌륭하거나 아름답다 싶은 책을 내놓아야 하더라도, 먹고살 수 없을 뿐더러 돈이 없다면 좋든 훌륭하든 아름답든 거들떠보기 힘듭니다.

 오늘 바로 끼니를 굶는데 무슨 책을 사서 읽는다 하겠습니까. 오늘은 끼니를 때웠어도 이듬날 밥끼니가 걱정스러운데 무슨 영화를 찾아 보겠습니까. 이듬날 밥끼니는 때울 만하더라도 글피에는 잠자리가 마땅하지 않은데 무슨 노래를 부르겠습니까.

 요즈막 우리 삶은 온통 먹기·입기·잠자기에 푹 빠집니다. 어른은 어른대로 먹고 입으며 잠자기 고단하다 하고, 아이는 아이대로 먹고 입으며 잠자기 팍팍하다 합니다. 아이들을 낳고 키우기보다는 아이들을 학교와 학원에 보내느라 등허리가 휩니다. 식구들과 살가이 얼크러지기보다는 회사나 공장에 붙들리느라 다른 데에는 마음을 쏟지 못합니다.

 갓 태어난 아이가 어느덧 일고여덟 살이 되고, 어느새 열다섯 살을 지나며, 금세 스물일곱을 지나, 서른다섯 마흔다섯 쉰다섯을 휙휙 달립니다. 이윽고 예순 일흔 여든 고개에 접어들자니, 끽 하고 꺾여 스러집니다. 한삶을 너무 바삐 아주 빨리 달리고 맙니다. 어릴 적에는 돈버는 솜씨를 기르자니 바쁘고, 나이들어서는 돈버는 살림에 매여 빠듯합니다. 참말 복닥복닥 어수선하니까 책이고 뭐고 없습니다. 참으로 고단하며 지치니까 문화이고 예술이고 나 몰라라, 아니 냇물 너머 불구경, 아니 먼 나라 다른 사람 일입니다.


..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의 주인공인 돈 까밀로 신부가 살고 있는 조그만 세계는 뽀오 강 어느 아늑한 골짜기에 박혀 있다. 그것은 저 허리띠처럼 길게 늘어진 북쪽 이태리 가운데 어느 마을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뽀오 강과 아빼닝 산맥 사이에 있는 그 고장은 기후가 항상 똑같다. 따라서 풍경도 변화가 없다. 그러나 강냉이와 삼을 가꾸는 농촌들은 저마다 자기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  (5쪽)


 한갓지거나 돈이 넘치는 사람이 읽는 책이 아닙니다. 한갓진 사람은 책을 읽지 않습니다. 돈이 넘치는 사람 또한 책을 가까이하지 않습니다. 한갓지지 않은 사람이 책을 읽고, 돈이 적은 사람이 책을 가까이합니다.

 이름이 있거나 이름을 날리는 사람은 책을 안 읽습니다. 이름이 없거나 이름을 드날릴 생각을 않는 사람이 책을 읽습니다.

 힘세다며 주먹을 휘두르는 사람들, 이른바 권력자는 책을 읽을 까닭이 없습니다. 힘여리기에 주먹은커녕 아무런 무기조차 들지 않는 사람들, 이를테면 수수한 여느 사람은 종이책이 아닌 사람책을 읽습니다. 종이에 직어야만 책이 아닙니다. 한 사람 몸과 마음에 아로새긴 이야기 또한 책입니다. 수수한 여느 사람들은 서로서로 이웃이나 동무가 되어 도란도란 삶책을 나눕니다.

 대단할 이야기를 담는 책이 아닙니다. 참으로 하잘것없거나 보잘것없는 이야기를 담는 책입니다. 흔하디흔한 이야기가 아닌 수수한 이야기를 담는 책입니다. 하찮다 싶다고들 하는 작디작은 이야기를 담으나, 이 작디작은 이야기란 투박하면서 조촐합니다. 누구나 겪되 누구나 다르게 부대끼는 삶을 담는 이야기입니다.

 내 옆지기와 밥상을 마주하며 한 마디 두 마디 나누는 이야기가 사랑스러울 때에, 내 아이와 밥상을 마주하며 한 마디 두 마디 주고받는 이야기가 사랑스럽습니다. 오순도순 나누는 이야기를 애써 글로 갈무리해서 일기로 남기거나 책으로 엮을 수 있습니다.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로 흐뭇하기에 그저 이야기꽃 피우는 나날을 고이 이으면서 조용히 흙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저 허리띠처럼 길게 늘어진 북쪽 이태리 가운데 어느 마을” 어디에서나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태어납니다. 그야말로 서울 아닌 시골자락 어느 마을 누군가한테서나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샘솟습니다.

 나날이 돈되는 종이책만 자꾸 다시 태어나지만, 나날이 돈되는 일거리만 붙잡는 사람으로 자꾸 길들여지지만, 사랑을 담은 사랑책과 삶을 담은 삶책과 사람을 담은 사람책은 언제 어디에서나 가만히 피고 지며 바람에 흩날립니다. 햇살을 받으며 방긋 웃습니다. (4343.2.1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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