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리말(인터넷말) 31] ChosunBiz

 나라밖 사람들이 보라는 누리신문 이름이라면 마땅히 알파벳으로 적어야 합니다. 나라안 사람들이 읽으라는 누리신문 이름이라면 마땅히 한글로 적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누리신문을 펴내거나 종이신문을 내놓는 한국사람치고, 한국사람이 한글로 읽을 신문인 줄 옳게 깨닫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이러다 보니 누리신문 차림판에 ‘Market’이라는 이름까지 있는데, ‘Market’이라는 이름을 붙인 자리에서는 무엇을 이야기할까요. 그런데 ‘오피니언·칼럼’이랑 ‘피플’이랑 ‘컨퍼런스·포럼’은 한글로 적었네요. 이러면서 ‘IT’하고 ‘FOCUS’는 알파벳으로 적습니다. ‘Weekly Biz’도 알파벳이네요. 참말 왜 이렇게 오락가락인가요. 영어로 쓰며 알파벳으로 적고 싶으면 ‘자동차’도 아예 ‘car’라 해야지요. ‘글로벌 경제’는 또 뭔가요. 그냥 ‘global biz’라고 해야 어울리지요. 차림판 이름이 이처럼 뒤죽박죽인 신문은 이 신문이 조선일보이기 때문이지 않습니다. 진보를 밝히거나 개혁을 한다는 신문들도 차림판 이름은 조선일보하고 똑같습니다. 가난한 사람하고 수수한 사람이랑 대학 문턱 안 밟은 사람하고는 사귀려 하지 않는 이 나라 신문들입니다. (4344.2.1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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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50 : 사람이 읽는 책


 충청북도 신니면 광월리에 자리한 부용산 멧기슭에는 이오덕 님 뜻과 넋을 기리는 멧골학교인 이오덕자유학교가 있습니다. 이곳은 일곱∼아홉 살 어린이부터 들어와서 다닐 수 있는 배움터이고, 나이가 더 든 어린이나 푸름이는 사이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어린 나날부터 멧자락에서 숲과 들을 쏘다니면서 제 먹을거리를 손수 흙을 일구어 마련하도록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교과서를 쓰지 않고 교재 또한 쓰지 않으며 정규 교과과정이나 학사과정을 밟은 사람이 교사가 되지 못합니다. 책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사람을 가르치는 곳이고, 책으로 가르치는 데가 아니라 사람으로 가르치는 데이기 때문이에요. 누구나 가르치는 어른이 될 수 있으나 아무나 배우는 어른이 되지 못하는 배움마당인데, 2011년 2월 9일에 새 학기를 여는 날부터 이곳 어린이와 푸름이하고 ‘책이야기’를 날마다 한 시간씩 나누기로 했습니다. 교과서가 없고 교재를 안 쓰니까 어떻게 가르쳐야 좋을까를 저 스스로 살펴야 하는데, 가르친다기보다 함께 ‘책이야기’를 나눈다고 해야 알맞습니다.

 날마다 새로 맞이하는 새벽부터 낮까지 시골집에서 우리 살붙이들이랑 복닥이던 삶을 돌아보면서 이 이야기를 어린 벗님하고 함께 나눕니다. 아버지가 손톱을 깎으니 옆에 붙어서 제 손톱도 깎아 달라는 아이 손톱이랑 발톱을 깎다 보니 아이는 사르르 잠들고, 잠든 아이 옷을 벗기고 기저귀를 채워 눕히고 나서, 아버지는 오른손 손톱을 마저 깎아야 하는 줄 깜빡 잊고 하루를 보냈다는 이야기를 나눕니다. 우리 시골집은 지난 12월부터 어느덧 석 달째 물이 얼어 못 쓰는 터라 학교 씻는방으로 빨래감을 들고 와서 빨래한다는 이야기를 나눕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야기를 조곤조곤 나누면서 이러한 이야기를 빗대어 책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누가 책을 쓰는가를 살핍니다. 나날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듯이 적바림한 책 하나를 들고 와서 어린 벗님하고 돌아가면서 읽습니다.

 어제는 《남쪽의 초원 순난앵》(마루벌,2006)이라는 그림책을 함께 읽었고, 다음주에는 《그리운 순난앵》을 함께 읽을 생각입니다. 두 가지 순난앵 그림책은 모두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이 쓴 글을 바탕으로 빚은 그림책으로, 순난앵이라는 마을에서 따사롭게 살아가던 아이들이 가난하고 메마른 터전에서 여러 해에 걸쳐 힘겹게 굶주리며 고된 일에 시달리다가 다시금 따사로우며 사랑스러운 순난앵을 찾아서 포근하게 쉰다는 줄거리입니다. 아마, 굶주리던 아이들은 조용히 눈을 감으면서 ‘하늘나라에 있을 순난앵 마을’로 가서 넉넉한 어머니 품에 안겼겠지요.

 이오덕학교 벗님들은 순난앵을 그리다가 마침내 순난앵으로 들어간 두 아이 이야기가 재미있다고도 하고 슬프다고도 하지만 ‘죽음으로 들어선’ 줄은 깨닫지 못합니다. 어쩌면, 순난앵을 그리워하며 찾아간 아이들 또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살며시 눈을 감을 때에는 ‘죽음’이 아닌 ‘새터’로 간다고 여겼을 테지요. 그러니까, 죽음이란 꼭 슬프지만 않고 얄궂지만 않아요. 내가 살기에 흙과 햇볕과 바람과 물이 고운 목숨을 나누어 주고, 내가 죽기에 흙과 햇볕과 바람과 물은 새 목숨을 거두어들이며 새 거름으로 삼습니다. 사람은 책을 읽고, 흙은 삶과 사람과 사랑을 읽습니다. (4344.2.1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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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우리 말 78] 봄이 왔다

 이오덕자유학교에서는 네 글자 “봄이 왔다.”를 붓으로 써서 문에 붙인다. 그래, 봄이 왔으니 봄이 왔다고 적어서 붙인다. (4344.2.1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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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카밀로의 곤경
조반니노 과레스키 지음, 이선구 옮김 / 새남 / 1994년 12월
평점 :
절판


 (돈 까밀로 책을 우리 말로 처음 옮긴 이선구 님 번역이 아직 하나 살았네...)

다시 태어나는 책과 삶과 사람
― 조반니 꽈레스끼, 《명랑한 돈 까밀로》



- 책이름 : 명랑한 돈 까밀로
- 글 : 조반니 꽈레스끼
- 옮긴이 : 이선구(李璇求)
- 펴낸곳 : 가톨릭출판사 (1969.2.20.)



 조반니노 과레스키(조반니 꽈레스키·죠반니노 과레스끼) 님 책은 1969년에 처음 우리 말로 옮겨졌으나, 이 책은 그다지 많이 안 읽혔습니다. 천주교 출판사에서 나온 터라 천주교 믿는 분들 사이에서 조금 읽혔습니다. 1979년에 ‘백제’ 출판사에서 새옷을 입고 나오면서 비로소 널리 읽히고, 나중에 백제출판사가 문을 닫은 뒤 다른 출판사에서 거듭 펴내며 많이 읽힙니다. 조반니노 과레스키 님 문학은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 다섯 권이 끝은 아니지만, 우리 나라에는 이 다섯 가지 책 테두리에서만 머물고, 좀처럼 다른 문학과 삶을 들여다보는 쪽으로는 이어지지 못합니다. 《비밀일기》(막내집게,2010) 같은 책이 어렵게 우리 말로 옮겨지지만, 막상 이러한 문학을 알아보거나 곰삭이거나 맞아들이는 사람은 퍽 적어요.

 다시 태어나는 책만 다시 태어나고, 다시 읽히는 책만 다시 읽히며, 다시 팔리는 책만 다시 팔립니다.

 출판사도 먹고살아야 하는 만큼, 이 나라 출판사들은 (돈이 있건 없건) 안 팔리거나 덜 팔리거나 못 팔릴 책을 좀처럼 내놓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좋거나 훌륭하거나 아름답다 싶은 책을 내놓아야 하더라도, 먹고살 수 없을 뿐더러 돈이 없다면 좋든 훌륭하든 아름답든 거들떠보기 힘듭니다.

 오늘 바로 끼니를 굶는데 무슨 책을 사서 읽는다 하겠습니까. 오늘은 끼니를 때웠어도 이듬날 밥끼니가 걱정스러운데 무슨 영화를 찾아 보겠습니까. 이듬날 밥끼니는 때울 만하더라도 글피에는 잠자리가 마땅하지 않은데 무슨 노래를 부르겠습니까.

 요즈막 우리 삶은 온통 먹기·입기·잠자기에 푹 빠집니다. 어른은 어른대로 먹고 입으며 잠자기 고단하다 하고, 아이는 아이대로 먹고 입으며 잠자기 팍팍하다 합니다. 아이들을 낳고 키우기보다는 아이들을 학교와 학원에 보내느라 등허리가 휩니다. 식구들과 살가이 얼크러지기보다는 회사나 공장에 붙들리느라 다른 데에는 마음을 쏟지 못합니다.

 갓 태어난 아이가 어느덧 일고여덟 살이 되고, 어느새 열다섯 살을 지나며, 금세 스물일곱을 지나, 서른다섯 마흔다섯 쉰다섯을 휙휙 달립니다. 이윽고 예순 일흔 여든 고개에 접어들자니, 끽 하고 꺾여 스러집니다. 한삶을 너무 바삐 아주 빨리 달리고 맙니다. 어릴 적에는 돈버는 솜씨를 기르자니 바쁘고, 나이들어서는 돈버는 살림에 매여 빠듯합니다. 참말 복닥복닥 어수선하니까 책이고 뭐고 없습니다. 참으로 고단하며 지치니까 문화이고 예술이고 나 몰라라, 아니 냇물 너머 불구경, 아니 먼 나라 다른 사람 일입니다.


..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의 주인공인 돈 까밀로 신부가 살고 있는 조그만 세계는 뽀오 강 어느 아늑한 골짜기에 박혀 있다. 그것은 저 허리띠처럼 길게 늘어진 북쪽 이태리 가운데 어느 마을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뽀오 강과 아빼닝 산맥 사이에 있는 그 고장은 기후가 항상 똑같다. 따라서 풍경도 변화가 없다. 그러나 강냉이와 삼을 가꾸는 농촌들은 저마다 자기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  (5쪽)


 한갓지거나 돈이 넘치는 사람이 읽는 책이 아닙니다. 한갓진 사람은 책을 읽지 않습니다. 돈이 넘치는 사람 또한 책을 가까이하지 않습니다. 한갓지지 않은 사람이 책을 읽고, 돈이 적은 사람이 책을 가까이합니다.

 이름이 있거나 이름을 날리는 사람은 책을 안 읽습니다. 이름이 없거나 이름을 드날릴 생각을 않는 사람이 책을 읽습니다.

 힘세다며 주먹을 휘두르는 사람들, 이른바 권력자는 책을 읽을 까닭이 없습니다. 힘여리기에 주먹은커녕 아무런 무기조차 들지 않는 사람들, 이를테면 수수한 여느 사람은 종이책이 아닌 사람책을 읽습니다. 종이에 직어야만 책이 아닙니다. 한 사람 몸과 마음에 아로새긴 이야기 또한 책입니다. 수수한 여느 사람들은 서로서로 이웃이나 동무가 되어 도란도란 삶책을 나눕니다.

 대단할 이야기를 담는 책이 아닙니다. 참으로 하잘것없거나 보잘것없는 이야기를 담는 책입니다. 흔하디흔한 이야기가 아닌 수수한 이야기를 담는 책입니다. 하찮다 싶다고들 하는 작디작은 이야기를 담으나, 이 작디작은 이야기란 투박하면서 조촐합니다. 누구나 겪되 누구나 다르게 부대끼는 삶을 담는 이야기입니다.

 내 옆지기와 밥상을 마주하며 한 마디 두 마디 나누는 이야기가 사랑스러울 때에, 내 아이와 밥상을 마주하며 한 마디 두 마디 주고받는 이야기가 사랑스럽습니다. 오순도순 나누는 이야기를 애써 글로 갈무리해서 일기로 남기거나 책으로 엮을 수 있습니다.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로 흐뭇하기에 그저 이야기꽃 피우는 나날을 고이 이으면서 조용히 흙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저 허리띠처럼 길게 늘어진 북쪽 이태리 가운데 어느 마을” 어디에서나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태어납니다. 그야말로 서울 아닌 시골자락 어느 마을 누군가한테서나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샘솟습니다.

 나날이 돈되는 종이책만 자꾸 다시 태어나지만, 나날이 돈되는 일거리만 붙잡는 사람으로 자꾸 길들여지지만, 사랑을 담은 사랑책과 삶을 담은 삶책과 사람을 담은 사람책은 언제 어디에서나 가만히 피고 지며 바람에 흩날립니다. 햇살을 받으며 방긋 웃습니다. (4343.2.1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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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규항 님과 진보집권플랜


 김규항 님이 〈한겨레〉라는 신문에 “좀더 양식 있게”라는 글을 실었단다. 이 글에서 오연호 님과 조국 님이 낸 책이름 《진보집권플랜》을 걸고 넘어진다. 걸고 넘어질 수밖에 없는 책이름이니 마땅히 걸고 넘어져야 한다. 나는 이런 엉터리 이름은 아예 걸고 넘어질 값이나 뜻이나 보람이 없다고 느꼈다. 누리신문 〈오마이뉴스〉는 처음부터 진보신문도 좌파신문도 개혁신문도 민주신문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보수신문이나 우파신문이나 수구신문이나 짝퉁신문이나 상업신문도 아니다. 그냥 ‘서울 지식인 신문’쯤이라고 하면 될까. 김규항 님은 오연호 님이나 조국 님을 일컬어 ‘개혁적인 중산층 엘리트’라고 하지만, ‘개혁적’과 ‘엘리트’라는 낱말은 걸맞지 않다. ‘중산층’ 하나는 걸맞는다고 느낀다. 이명박 정권을 나무라고 노무현 정권을 추켜세운대서 개혁이지 않다. 무엇을 나무라고 무엇을 추켜세우는가를 돌아보면서 개혁이 참다운 개혁인가 아닌가를 살펴야 한다. 어떤 삶을 바라보면서 이러한 ‘삶바라기’가 참으로 개혁다운가 아닌가를 돌아보아야 한다.

 생각해 보면, 모든 부질없는 말놀이는 다들 ‘서울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생겨난다고 느낀다. 서울에 몰려들어 서울에서 오글오글 권력다툼 이름다툼 돈다툼을 하니까 불거지는구나 싶다.

 가만히 보면 ‘진보 집권’이든 ‘개혁 집권’이든 ‘민주 집권’이든 걸맞지 않다. ‘서울 집권’일 뿐이다. 서울에서 서울시장이나 서울에서 정치하는 사람들 몸짓 발짓 손짓에 따라 춤을 춘다. 큰 틀에서 볼 수 있다면, 조선일보이든 한겨레이든 중앙일보이든 경향신문이든 온통 ‘서울신문’이다. 매일경제이든 파이낸셜뉴스이든 오로지 ‘서울신문’이다. 서울에서 정치하고 장사하며 문화하고 철학하는 사람들 이야기만 다루는 신문들이다.

 기자와 지식인과 교수와 운동가와 시민단체가 ‘서울 아닌 한국땅’에서 ‘서울사람 아닌 지역사람’으로서 살아간다면, 진보집권플랜처럼 껍데기만 잘 씌운 빈수레 이야기는 나올 까닭이 없을 뿐 아니라, 이런 책을 옳게 못 읽는 사람 또한 없으리라 생각한다.

 김규항 님은 서울 또는 서울 둘레에서 살아가지만 서울바라기가 아니다. 이리하여, 진보집권플랜 같은 이름과 책과 속살을 이럭저럭 옳게 짚거나 읽는다. 서울 또는 서울 둘레에서 안 살더라도 서울바라기와 같은 삶매무새라면 진보집권플랜이 뒤집어쓴 껍데기를 알아채지 못한다. (4344.2.1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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