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2. 13. 충청북도 음성군 읍내리. 

골목밭이 넓게 펼쳐진 골목집 한켠.

 

골목고양이가 쓰레기통에서 먹이를 뒤지려다가 

나를 보고는 얌전히 서서 기다린다. 

얼른 사진 찍고 가야지, 쓰레기통을 뒤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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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향원


 개구진 계집아이는 언제나 있다. 그렇지만 개구진 계집아이는 늘 사람 대접을 못 받았다. 오늘날은 여자 권리가 많이 나아졌다고 하니까, 개구진 계집아이도 사람 대접을 받을까. 개구지기는 사내아이나 계집아이나 짓궂기 마찬가지일 테니까, 요놈들 철 좀 들으라 말해야 옳을까.

 나는 이향원 님 만화를 즐기던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세모’라는 토박이말 이름이 붙는 착하며 몸이 조금 느린 아이를 먼저 떠올린다. 이와 함께 세모 곁에서 늘 힘이 되는 말괄량이이자 개구쟁이요 힘세고 살림도 잘하며 씩씩한 계집아이를 떠올린다. 세모랑 개구진 계집아이는 떼어놓을 수 없는 한동아리이다. 두 아이가 있기에 이향원 님 만화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개구진 계집아이를 만화로 그리는 사람은 늘 있다. 그러나 개구진 계집아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우면서 믿음직한가를 알뜰히 보여주는 사람은 드물다. 앞장서서 공을 차고 앞장서서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며 앞장서서 짐을 나른다. 노상 모든 일에서 스스럼없이 나선다.

 그런데, 개구진 계집아이는 제 이름을 날리려고 앞장서지 않는다. 나는 우리 집 책시렁에 얌전히 꽂힌 이향원 님 만화책을 들추어 넘겨야 비로소 개구진 계집아이 이름이 무엇인지 생각난다. 조용하며 얌전한 사내아이 이름은 만화책을 넘기지 않아도 ‘세모’라고 떠오른다. 왜 그럴까. 덜렁대며 억세며 나대는 아이 이름은 왜 떠오르지 않을까. 어쩌면 개구진 계집아이는 늘 저가 아닌 제 둘레 다른 아이를 돋보이도록 이끌며 슬그머니 뒤로 제 모습과 이름을 숨기면서 기뻐하기 때문은 아닐까. 저 스스로 잘나려고 나대는 개구진 계집아이가 아니라, 저 스스로 힘여리고 착하기만 한 얌전둥이를 도와주려고 힘쓰기 때문에, 나중에는 살며시 발을 빼지 않을까.

 말괄량이 삐삐 영화를 보면, 삐삐는 ‘책읽기 좋아하는 토미’한테 조그맣고 예쁜 책을 슬쩍 선물해 준다. 삐삐한테서 하모니카를 선물받은 아니카는 언제나 하모니카를 갖고 다니면서 틈틈이 하모니카 노래를 부른다. 풀줄기를 나팔처럼 불던 삐삐를 본 토미와 아니카는 성탄절을 맞이하여 삐삐한테 ‘나팔(트럼펫)’을 선물해 준다. 토미와 아니카는 고작 여덟아홉 살 나이인데에도 저희 어머니와 아버지한테 ‘손뜨개’한 옷가지를 선물하고, 아홉 살 삐삐 또한 제 사랑스러운 말한테 손뜨개 목도리를 선물한다. 여느 때 보면, 삐삐와 함께 살아가는 원숭이 닐슨 씨는 삐삐가 손뜨개로 짠 옷을 입는다.

 한국 만화쟁이 이향원 님이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를 뒤늦게 들었다. 문득 생각하자니, 이제 내 나이는 내가 코흘리개였을 때 이향원 님 만화를 좋아하던 ‘그무렵 이향원 님이 우리한테 만화를 그려 주던 그 나이’라 할 만하다. 그러니까, 이향원 할아버지가 되었으며, 조금 일찍 숨을 거두었다 할 만하지만, 흙으로 돌아갈 나이가 되었기에 고요히 흙사람이 된 셈이다.

 숨을 거둔 만화쟁이 한 사람이 한창 여러 가지 만화를 그려서 내놓던 무렵은 당신 나이가 가장 펄떡펄떡 살아숨쉬던 나이였고, 나는 이제 내가 코흘리개 때 보던 만화를 그린 분이 펄떡펄떡 살아숨쉬던 나이를 살아간다.

 나는 언제쯤 숨을 거두어 흙으로 돌아갈까. 내가 쓰는 글은 코흘리개 어린이가 읽도록 하는 글은 아니니까, 내가 흙으로 돌아간대서 내 글을 읽던 사람들이 한창 젊거나 바지런히 일할 나이가 되지는 않으리라.

 흔히들, 이향원 님을 두고 야구 만화라든지 강아지 만화를 즐겨 그렸다고들 말한다. 이런 이야기는 틀리지 않으리라. 이향원 님 만화감은 야구나 강아지가 많았으니까. 그렇지만 나한테 이향원 님 만화는 가난한 살림집에서도 개구지며 씩씩하게 살아가며 바지만 입는 계집아이 하나와 착하디착하고 조용한 ‘세모’라는 사내아이가 이루며 빛내는 수수하며 해맑은 고운 삶이야기이다. (4344.2.2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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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1-02-26 08:37   좋아요 0 | URL
말괄량이 이름은 '꼭지'였다. 어느 분 블로그를 보다가 알았다. 마음이 좀 그래서 책꽂이에서 책을 뒤적이지 않았는데, '세모'와 '꼭지'라, 참 잘 어울린다...
 



 찬물 빨래 하고 나서 책읽기


 드디어 더운물이 아닌 찬물로도 빨래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손가락이 차갑게 되기는 마찬가지이다. 다만, 한겨울처럼 손이 찌릿찌릿 아파서 자꾸자꾸 볼이나 팔뚝에 손가락과 손바닥과 손등을 대어야 하지는 않는다. 한겨울에 찬물로 빨래를 하면 손가락과 손바닥과 손등을 녹이면서 비비거나 헹구거나 짜야 한다. 빨래를 마치고도 한 시간쯤은 손이 얼어서 녹지 않는다.

 날이 참으로 폭하니까 찬물 빨래를 하고 나서도 손이 시리기는 해도 손가락이 얼어붙지 않는다. 손가락이 얼어붙지 않으니 손가락이 아프지 않다. 바야흐로 봄이라 할 만한 날씨라고 느낀다. 봄이기는 봄인데 아직 우리 멧골집 물은 녹지 않으니 섣불리 봄이라 여기면 안 된다고 느끼기도 한다. 이제는 기름 걱정을 덜 해도 되지만, 그렇다고 저녁이나 밤에 보일러를 안 돌릴 수 없다. 저녁과 밤 사이 기름 몇 리터 아낀다는 생각에 보일러를 쉬다가 집식구가 밤추위 때문에 몸이 나빠지면 기름값 조금 아낀다면서 몸이 다친다.

 겨울날 때때로 찬물 빨래를 하면서 생각했다. 춥디추운 겨울날에도 때때로 손 시릴 뿐 아니라 손 얼어붙는 찬물 빨래를 하면서 생각했다. 일부러 찬물 빨래를 하지는 않았다. 따뜻한 물을 쓸 수 없는 날은 차가운 물을 써서 빨래를 해야 했다. 물을 따스하게 덥혀서 빨래를 할 수 있는 삶이란 얼마나 고마운가. 우리 집 살림이란 세무서 사람들이 세무조사를 해 보아도 가난하기 이를 데 없기에, 이달부터 아이 키우는 데에 드는 돈을 얼마쯤 면사무소에서 보태 주기로 했다며 알림쪽지가 날아왔다. 정작 얼마를 주는지는 안 적혔지만, 우리 식구가 아이 몫으로 돈을 조금이나마 모아 놓지 못하기 때문에, 이 돈을 푼푼이 모아 나중에 아이가 크면 물려줄 수 있겠구나 생각한다. 뭐, 이러하든 저러하든 가끔 찬물 빨래를 할 뿐, 여느 날에는 더운물 빨래를 할 수 있으니, 가난한 살림이라 하더라도 얼마나 좋은 나날인가.

 가난하니까 누군가 우리를 도와주고, 가난하기에 도움을 고맙게 받는다. 가난이 부끄러울 일이란 없다. 돈 많은 사람이라 창피할 까닭이 없듯이 돈 없는 사람이라 남우세스러울 까닭이 없다. 돈이 많으면 돈이 적은 사람한테 보태어 주면 되고, 돈이 없으면 돈이 넉넉한 사람한테서 얻으면 된다. 책을 조금 더 많이 읽은 사람은 책을 못 읽거나 안 읽은 사람한테 책에 깃든 슬기로우며 아름다운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면 된다. 책을 못 읽거나 안 읽은 사람은 책을 많이 읽은 사람한테서 사랑스럽고 믿음직한 이야기를 귀담아들으면 된다. 힘이 센 사람은 힘이 여린 사람을 돕는다. 힘이 여린 사람은 힘이 센 사람한테서 도움을 받는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젊은이가 도와주기에 씩씩하게 삶마무리를 짓는다. 어린이는 어버이가 돌보기에 튼튼하게 자라난다. 지식이란 자랑하고자 쌓는 점수가 아니다. 지식이란 남한테 나누어 주려고 즐겁게 갖추는 밥그릇이다. 마음밥이 모자라 마음굶이를 하는 벗님한테 마음밥을 나누어 주려고 책을 읽어 지식을 갖춘다. 마음밥을 바라는 힘들거나 어려운 이웃을 헤아리려고 애써 책을 읽어 장만하여 갖춘 다음 ‘개인 도서관’을 열든, ‘책 돌려읽기’를 하든 ‘책 선물’이든 한다.

 책을 읽은 사람들이 쓰는 느낌글이란 ‘출판사 책팔이에 보탬이 될 서평’이어서는 안 된다. 책을 읽은 사람들이 쓸 느낌글이란 ‘책을 아직 못 읽었거나 책을 읽을 틈이 없도록 고단하거나 힘겨운 사람들한테 마음밥이 될 좋은 이야기꽃’이 되도록 쓰는 글이어야 한다. 신문기사란 사건이나 사고나 정치나 뭐 이런저런 시시껄렁한 뒷얘기를 다루는 글이어서는 안 된다. 신문기사란 날마다 사람들한테 마음밥과 생각밥과 슬기밥이 될 살가운 이야기열매여야 한다.

 찬물 빨래를 하면서 손가락이 얼어붙으면 눈물이 절로 난다. 손바닥까지 얼어붙으면 눈을 질끈 감으면서 흑흑 소리가 새어나온다. 손등마저 얼어붙으면 몸이 새우처럼 구부러지면서 꼼짝을 못한다. 그러나 빨래는 날마다 마쳐야 한다. 아이 오줌기저귀는 날마다 빨아야 하고, 집식구 옷도 때가 묻었으면 벗겨서 빨아야 한다. 게다가 빨래만 해서야 무슨 집살림을 꾸린다 할 수 있는가. 밥도 하고 집안도 치우며 아이하고도 놀고, 아픈 옆지기 몸을 주물러야 하지 않겠는가. 구부러진 등허리를 얼른 펴고 얼어붙은 손을 쫘악 펼쳐야 한다. 눈물이야 흐르는 대로 두든 슥슥 문질러 닦든 한 다음, 부리나케 국을 끓이고 반찬을 한다. 먼지 쌓인 밥상과 방바닥을 빗자루로 쓸고 걸레와 행주로 닦으며 아이 손에 숟가락을 쥐어 준다. 똥 눈 아이 밑을 물로 닦는다. 아이 변기와 엄마 오줌그릇을 비우며 물로 씻는다. 밤이 되면 그예 털푸덕 드러눕는다. 머리에는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날마다 한 줄이나마 적으려고 용을 쓰는 ‘아이돌봄 일기’조차 못 쓰고 지나가는 날이 제법 된다.

 그래도 이렇게 잘 살았고, 추운 겨울 가는 파란하늘을 올려다보며, 날마다 차츰 포근해지는 멧골바람을 느낀다. 봄은 하루하루 가까이 다가온다. 찬물 빨래가 반가울 여름철 무더운 날씨는 멀지 않았다. (4344.2.2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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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탉 데이지, 집으로 돌아오다!
잰 브렛 글 그림, 하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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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속문화’ 이야기를 책으로 담으려 할 때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45] 잰 브렛, 《암탉 데이지, 집으로 돌아오다!》(문학동네어린이,2005)



 온누리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온누리 여러 나라 삶과 이야기에 걸맞게 그림책을 그린다는 잰 브렛 님입니다. 온누리를 두루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고, 온누리 여러 겨레나 나라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그리는 사람도 많지만, 막상 ‘나라와 겨레마다 다른 삶을 받아들이거나 녹아내어’ 그림책을 그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잰 브렛 님은 중국에서 태어난 며느리하고 중국을 돌아다니면서 중국땅 아름다운 터전과 싱그러운 저잣거리 사람들과 울긋불긋한 옷을 입은 어여쁜 어린이를 마주한 기쁨을 《암탉 데이지, 집으로 돌아오다!》에 담으려 했다고 합니다.

 온갖 빛깔이 눈부시게 빛나는 그림을 보면서 처음에는 ‘이 그림책은 중국사람이 그렸나?’ 하고 생각했지만, 여러 번 다시 읽으며 알아보니 잰 브렛 님은 서양사람입니다. 그림책을 꼼꼼히 찬찬히 거듭 읽다 보면, 잰 브렛 님은 참으로 중국땅과 중국사람과 중국넋을 깊이 헤아리며 그림을 그렸다고 느낍니다. 그렇지만, ‘서양사람 눈과 틀과 넋’에 걸맞게 중국 이야기를 그리는구나 싶습니다.

 마땅하겠지요. 아무리 중국 겨레 넋과 삶과 이야기를 잘 살펴서 그리는 책이라 하더라도 그린 사람은 서양사람이거든요.

 그래서 《암탉 데이지, 집으로 돌아오다!》에 나오는 닭집 아이가 쓰는 바구니에 적힌 중국글 ‘歡樂鷄園’은 퍽 어설픕니다. 그린이가 제아무리 중국 겨레 삶과 넋과 이야기를 잘 굽어살핀다 하더라도 ‘처음 써 보는 중국글’을 잘 쓸 수 없거든요. 서양사람이 한자를 처음 배우거나 보면서 ‘따라서 그린다’고 할 때에 얼마나 어설프겠습니까. 서양사람이든 일본사람이든 한글을 처음 배우거나 보면서 따라 그릴 때에도 얼마나 어설픈가요. 몹시 애를 써서 제법 그럴싸하게 ‘그릴’ 수는 있으나, 막상 한국사람이 한국글을 쓸 때처럼 부드럽거나 매끄러이 ‘쓰’지는 못합니다. 반듯하게 써야 하거나 똑바로 써야 한다는 소리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글’로 느끼기 어려워요.

 서양사람 잰 브렛 님이라든지, 서양에서 살아가는 여느 사람이 보기에는, 《암탉 데이지, 집으로 돌아오다!》에 자꾸자꾸 나오는 ‘歡樂鷄園’이라는 글이 그다지 어설프거나 어수룩하다고 느끼기 어렵습니다. 서양사람이 중국글을 읽거나 만날 일이란 없으니까요. 더구나, 중국사람들 삶을 아주 좋아하지 않고서야 중국사람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마을에서 어떻게 부대끼며 살아가는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서양나라에서 서양 어린이한테 읽히는 그림책으로 나왔을 《암탉 데이지, 집으로 돌아오다!》는 잰 브렛 님이 중국 겨레 삶과 이야기를 더 깊이 파고들어서 그리든, 가볍게 살피며 그리든, 여느 서양 어린이로서는 ‘거의 똑같이’ 여기거나 받아들입니다.

 거꾸로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사람이 일본 겨레 삶과 이야기를 돌아본다든지 독일이나 스웨덴 겨레 삶과 이야기를 돌아보는 그림책을 그린다고 해 볼 때에 어떠하겠습니까. 일본사람이나 독일사람이나 스웨덴사람이 제 나라 삶과 이야기를 그림책에 담을 때처럼 살가우면서 보드라이 엮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 해서 그림책 《암탉 데이지, 집으로 돌아오다!》가 모자라거나 어줍잖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나라와 겨레가 아주 다른 사람이 ‘참으로 다른 나라와 겨레’ 삶과 이야기를 글책으로든 그림책으로든 사진책으로든 담는 일이란 몹시 어려울 뿐 아니라, 스스럼없이 녹아들기까지는 무척 오랜 나날이 걸린다는 소리입니다. 또한 ‘다른 나라와 겨레하고 똑같이 되어’ 글책이나 그림책이나 사진책을 내놓을 수 없다는 소리입니다.

 사람마다 다르고, 겨레와 나라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저마다 다르고 서로 삶과 몸과 마음이 다르기 때문에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엮습니다.

 그런데 ‘똑같을 수 없는데 똑같아지려’ 하면 말썽이 생깁니다. 똑같을 수 없기에 ‘저마다 다른 빛깔과 느낌과 내음과 무늬’를 사랑하면서 ‘다 다르면서 한결 아끼거나 사랑하려는 눈길과 손길과 마음길’로 나아가도록 힘써야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똑같이 맞추려고 하면 어딘가 뒤틀리거나 흔들릴밖에 없어요.

 한국사람이 스웨덴사람 삶과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담으려 한다면 ‘내가 스웨덴사람으로 살아간다’는 마음으로 그리더라도 똑같을 수 없으나 ‘내가 스웨덴사람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고 지내면서 그려야 합니다. 이렇게 그리면서 ‘스웨덴사람이 보는 스웨덴’이 아니라 ‘한국사람이 보는 스웨덴’인 줄을 느껴야 해요. 왜냐하면 ‘스웨덴사람이 보는 스웨덴’ 그림책이란 스웨덴사람이 그려서 내놓으면 되거든요.

 때때로 ‘서양사람이 바라본 한국’ 이야기가 한국을 한결 깊거나 넓게 들여다보는 이야기라도 되는 듯 말하는 분이 있지만, ‘한국사람이 한국땅에서 한국사람으로 살면서 볼 수 없거나 느낄 수 없는’ 대목이 있기 때문에, 서양사람은 ‘한국에서 한국 국적으로 받고 살더라도 여느 한국사람하고는 다른 눈과 마음과 생각’으로 한국사람 삶과 이야기를 느끼면서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으로 엮습니다. 한국사람이니까 보는 모습이 더 훌륭하지 않고, 한국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보는 모습이 훨씬 훌륭하지 않습니다.

 그림책 《암탉 데이지, 집으로 돌아오다!》에서도 매한가지입니다. 잰 브렛 님은 틀림없이 ‘마치 중국사람이 중국 이야기를 그리기라도 한 듯’하게 느낄 만큼 아주 잘 그렸습니다. 몹시 훌륭하다 여길 만합니다.

 그런데 막상 중국사람들이 그리는 중국 그림책은 이렇지 않아요. 중국사람이 중국 삶과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담는다 해서 ‘애써 오래된 중국 한문책 틀거리’에 맞추듯이 그리지 않습니다. 또한, 중국사람이기 때문에 ‘붉은 빛’을 더 좋아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붉은 빛을 좋아하는 중국사람은 아예 모든 빛을 붉게 물들이기까지 합니다. 그림책 《암탉 데이지, 집으로 돌아오다!》는 중국사람처럼 붉은 빛을 넘실넘실 쓸 수 없을 뿐 아니라 알맞게 가눌 수 없습니다. 오직 서양사람 삶과 이야기에 걸맞게 ‘붉은 빛 씀씀이를 어루만질’ 수 있습니다.


.. “서라!”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어부가 고함을 지르며 메이메이를 뒤쫓았어요. “내 닭 내놔!” “줍는 사람이 임자라면서요!” 메이메이가 고개를 돌려 한 마디 해 주었어요. 메이메이는 데이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꼭 붙잡고 쉬지 않고 달려서 마침내 집에 무사히 도착했답니다 ..  (28∼29쪽)


 《암탉 데이지, 집으로 돌아오다!》라고 하는 그림책은, 서양사람으로서 이토록 놀랍게 중국 겨레 삶과 이야기를 잘 곰삭이며 그렸기에 읽을 만하지 않습니다. ‘중국 겨레 삶과 이야기’를 구성지며 맛깔나게 그린 그림책이 아니라, ‘잘 그린 그림책’이기 때문에 읽을 만합니다. 잰 브렛 님으로서는 당신이 그리는 그림책 가운데 하나로 ‘중국 겨레 삶과 이야기로 스며드는 마음이 되어 그리고 서양 어린이한테 읽히려고 그린’ 그림책이지, 중국사람한테 중국 이야기를 선물해 주려고 그리는 그림책이 되지 않고, 이런 그림책은 될 수 없습니다.

 토를 한 마디 단다면, 중국땅에도 ‘서양 흰닭’이 들어와 널리 퍼졌달 수 있지만, 이 그림책에 나오는 깊은 두멧자락 시골마을이라면 ‘서양 흰닭’이 아니라 ‘한국 토박이 닭’처럼 ‘중국 토박이 닭’을 그려야 올바릅니다. 두멧자락 시골마을 사람들은 도시내기처럼 자주 말끔하게 씻지 않고 자주 씻을 일이 없습니다. 두멧자락 시골마을 사람들은 한국이든 중국이든 베트남이든 라오스이든 태국이든 버마이든 살결이 ‘살구빛’이나 ‘노란빛’이 아니라 ‘구리빛’이나 ‘흙빛’입니다. 늘 해를 바라보며 일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황인종’이라 하기보다는 ‘흙빛 겨레’라 해야 알맞습니다. 진흙탕에서 노는 오리들이 ‘하얀 빛깔 오리’일 수 없습니다. 바구니이며 흙벽으로 지은 집이나 닭우리이며 너무 ‘말끔’해서 흙 하나 안 묻을 수 없습니다.

 그림책 작품으로 보자면 그지없이 어여쁘며 살갑다 할 만합니다. 위쪽에는 그림을 넣고 아래쪽에는 글을 담는데, 위쪽과 아래쪽을 나누는 무늬에 ‘금 간 모습’을 넣기까지 하면서, 작은 대목까지 아주 꼼꼼하며 찬찬합니다. 그렇지만 횟대에 나란히 앉은 암탉 발바닥이 ‘발을 깨끗이 씻은 도시사람’처럼 너무 깨끗할 뿐 아니라 횟대에 흙이 하나도 안 붙었습니다. 두멧자락 시골마을 사람들 이야기인데 정작 ‘흙’이 잘 안 보여요.

 도시사람 이야기를 그린다면 도시는 자동차 배기가스며 건물마다 냉난방을 하며 뿜는 연기며 해서 자동차를 바깥에 세워 두면 먼지가 뽀얗게 앉습니다. 날마다 자동차 겉을 번쩍번쩍 닦아야 비로소 ‘깨끗’해 보입니다. 시골은 이런 먼지가 없으나 어디에나 흙이 있습니다. ‘삶과 이야기를 살펴’ 그린다 할 때에는 줄거리를 잘 잡아채며 담는 데에도 마음을 쓰는 한편, 여느 사람 여느 삶을 보여주는 자리에서는 여느 사람 여느 삶이란 어떠한가에 한결 눈길과 손길과 마음길을 쏟을 때에 훨씬 아름다이 거듭난다고 느낍니다.

 생각해 보면, 아직 우리 나라에서는 ‘한국 겨레 스스로 한국 겨레 삶과 이야기가 어떠한가’를 낱낱이 짚으며 찬찬히 담는 그림책이 없다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전통놀이’나 ‘민속문화’를 말한다는 그림책이야 많기는 많아요. 그러나, 전통놀이이든 민속문화이든 언제나 양반 계급이나 궁중사람들 전통과 문화에서 맴돕니다. 여느 농사꾼들 삶과 이야기하고 가까이 다가서지 못합니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사람들 이야기조차 ‘땅 넓고 집 있는’ 사람들 이야기에 머물 뿐, 정작 이 나라 농사짓는 사람 거의 모두를 차지하던 ‘땅 없고 집 작은(소작농)’ 사람들이 하루하루를 어떻게 맞이하고 설과 한가위를 어떻게 보냈으며, 여느 살림집 여느 부엌자리가 어떠했을까를 차근차근 곱씹는 데까지는 뻗지 못합니다.

 곧, 우리 스스로 우리 이야기를 적바림할 때에도 ‘내가 선 곳’이나 ‘내가 사는 곳’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못 담습니다. ‘내가 선 곳’이 아닌 ‘다른 사람이 선 곳’을 자료와 책과 취재로 알아보며 그리기 일쑤입니다. ‘내가 사는 곳’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사는 곳’을 찾아다니면서 담기 일쑤예요.

 이야기는 먼 곳을 찾아다니며 얻을 수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바로 내가 사는 곳’으로 이야기를 얻으러 찾아옵니다. 나는 내가 사는 곳을 떠나 ‘내가 사는 곳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사는 곳’으로 이야기를 얻으러 찾아갑니다. 서양사람은 서양사람 스스로 서양 삶과 이야기를 잘 담으면서 나라밖 이야기도 찾아나선다지만, 우리는 우리 이야기를 얼마나 잘 찾아보거나 알아보거나 느끼면서 나라밖 마실을 이렇게 자주 많이 뻔질나게 다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4344.2.25.쇠.ㅎㄲㅅㄱ)


― 암탉 데이지, 집으로 돌아오다! (잰 브랫 글·그림,하연희 옮김,문학동네어린이 펴냄,2005.3.21./9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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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말(인터넷말) 40] Inside 중앙일보

 영어를 쓰든 중국말을 쓰든 일본말을 쓰든 저마다 쓰고 싶은 대로 쓸 노릇입니다. 흔히 하는 말로 ‘자유’입니다.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 누구나 ‘권리’만큼 ‘책임’을 생각해야 하지는 않습니다만, 자유와 권리를 누리려 하는 만큼 책임과 의무를 지라고 하는 사람들이라면, 스스로 말하는 삶 그대로 ‘영어를 쓰는 자유’만큼 ‘영어를 마음껏 쓰기 때문에 벌어지는 책임’을 지거나 ‘영어를 쓰는 권리’만큼 ‘우리 말글을 옳고 바르게 쓰는 의무’도 져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Inside 중앙일보”가 있으면 “outside 중앙일보”도 있을까요. ‘고객프리미엄’은 무엇을 하는 곳일까요. 그저 ‘손님’을 뜻하는 한자말인 ‘고객’인데, 왜 오늘날 우리들은 마치 ‘손님’은 낮춤말이고 ‘고객’은 높임말인 듯 여길까요. ‘손님’이라는 낱말부터 ‘손 + 님’이기에 높임말인데, 우리는 우리 말을 어쩌면 이렇게 제대로 살피지 못하거나 깨닫지 못할까요. 아니, ‘Inside’를 우리 말로 옮겨 적을 줄 모른다거나, “북한네트”에서 ‘네트’를 한국말로 적바림하는 슬기가 하나도 없는 셈일는지요. (4344.2.2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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