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탉 데이지, 집으로 돌아오다!
잰 브렛 글 그림, 하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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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속문화’ 이야기를 책으로 담으려 할 때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45] 잰 브렛, 《암탉 데이지, 집으로 돌아오다!》(문학동네어린이,2005)



 온누리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온누리 여러 나라 삶과 이야기에 걸맞게 그림책을 그린다는 잰 브렛 님입니다. 온누리를 두루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고, 온누리 여러 겨레나 나라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그리는 사람도 많지만, 막상 ‘나라와 겨레마다 다른 삶을 받아들이거나 녹아내어’ 그림책을 그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잰 브렛 님은 중국에서 태어난 며느리하고 중국을 돌아다니면서 중국땅 아름다운 터전과 싱그러운 저잣거리 사람들과 울긋불긋한 옷을 입은 어여쁜 어린이를 마주한 기쁨을 《암탉 데이지, 집으로 돌아오다!》에 담으려 했다고 합니다.

 온갖 빛깔이 눈부시게 빛나는 그림을 보면서 처음에는 ‘이 그림책은 중국사람이 그렸나?’ 하고 생각했지만, 여러 번 다시 읽으며 알아보니 잰 브렛 님은 서양사람입니다. 그림책을 꼼꼼히 찬찬히 거듭 읽다 보면, 잰 브렛 님은 참으로 중국땅과 중국사람과 중국넋을 깊이 헤아리며 그림을 그렸다고 느낍니다. 그렇지만, ‘서양사람 눈과 틀과 넋’에 걸맞게 중국 이야기를 그리는구나 싶습니다.

 마땅하겠지요. 아무리 중국 겨레 넋과 삶과 이야기를 잘 살펴서 그리는 책이라 하더라도 그린 사람은 서양사람이거든요.

 그래서 《암탉 데이지, 집으로 돌아오다!》에 나오는 닭집 아이가 쓰는 바구니에 적힌 중국글 ‘歡樂鷄園’은 퍽 어설픕니다. 그린이가 제아무리 중국 겨레 삶과 넋과 이야기를 잘 굽어살핀다 하더라도 ‘처음 써 보는 중국글’을 잘 쓸 수 없거든요. 서양사람이 한자를 처음 배우거나 보면서 ‘따라서 그린다’고 할 때에 얼마나 어설프겠습니까. 서양사람이든 일본사람이든 한글을 처음 배우거나 보면서 따라 그릴 때에도 얼마나 어설픈가요. 몹시 애를 써서 제법 그럴싸하게 ‘그릴’ 수는 있으나, 막상 한국사람이 한국글을 쓸 때처럼 부드럽거나 매끄러이 ‘쓰’지는 못합니다. 반듯하게 써야 하거나 똑바로 써야 한다는 소리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글’로 느끼기 어려워요.

 서양사람 잰 브렛 님이라든지, 서양에서 살아가는 여느 사람이 보기에는, 《암탉 데이지, 집으로 돌아오다!》에 자꾸자꾸 나오는 ‘歡樂鷄園’이라는 글이 그다지 어설프거나 어수룩하다고 느끼기 어렵습니다. 서양사람이 중국글을 읽거나 만날 일이란 없으니까요. 더구나, 중국사람들 삶을 아주 좋아하지 않고서야 중국사람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마을에서 어떻게 부대끼며 살아가는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서양나라에서 서양 어린이한테 읽히는 그림책으로 나왔을 《암탉 데이지, 집으로 돌아오다!》는 잰 브렛 님이 중국 겨레 삶과 이야기를 더 깊이 파고들어서 그리든, 가볍게 살피며 그리든, 여느 서양 어린이로서는 ‘거의 똑같이’ 여기거나 받아들입니다.

 거꾸로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사람이 일본 겨레 삶과 이야기를 돌아본다든지 독일이나 스웨덴 겨레 삶과 이야기를 돌아보는 그림책을 그린다고 해 볼 때에 어떠하겠습니까. 일본사람이나 독일사람이나 스웨덴사람이 제 나라 삶과 이야기를 그림책에 담을 때처럼 살가우면서 보드라이 엮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 해서 그림책 《암탉 데이지, 집으로 돌아오다!》가 모자라거나 어줍잖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나라와 겨레가 아주 다른 사람이 ‘참으로 다른 나라와 겨레’ 삶과 이야기를 글책으로든 그림책으로든 사진책으로든 담는 일이란 몹시 어려울 뿐 아니라, 스스럼없이 녹아들기까지는 무척 오랜 나날이 걸린다는 소리입니다. 또한 ‘다른 나라와 겨레하고 똑같이 되어’ 글책이나 그림책이나 사진책을 내놓을 수 없다는 소리입니다.

 사람마다 다르고, 겨레와 나라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저마다 다르고 서로 삶과 몸과 마음이 다르기 때문에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엮습니다.

 그런데 ‘똑같을 수 없는데 똑같아지려’ 하면 말썽이 생깁니다. 똑같을 수 없기에 ‘저마다 다른 빛깔과 느낌과 내음과 무늬’를 사랑하면서 ‘다 다르면서 한결 아끼거나 사랑하려는 눈길과 손길과 마음길’로 나아가도록 힘써야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똑같이 맞추려고 하면 어딘가 뒤틀리거나 흔들릴밖에 없어요.

 한국사람이 스웨덴사람 삶과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담으려 한다면 ‘내가 스웨덴사람으로 살아간다’는 마음으로 그리더라도 똑같을 수 없으나 ‘내가 스웨덴사람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고 지내면서 그려야 합니다. 이렇게 그리면서 ‘스웨덴사람이 보는 스웨덴’이 아니라 ‘한국사람이 보는 스웨덴’인 줄을 느껴야 해요. 왜냐하면 ‘스웨덴사람이 보는 스웨덴’ 그림책이란 스웨덴사람이 그려서 내놓으면 되거든요.

 때때로 ‘서양사람이 바라본 한국’ 이야기가 한국을 한결 깊거나 넓게 들여다보는 이야기라도 되는 듯 말하는 분이 있지만, ‘한국사람이 한국땅에서 한국사람으로 살면서 볼 수 없거나 느낄 수 없는’ 대목이 있기 때문에, 서양사람은 ‘한국에서 한국 국적으로 받고 살더라도 여느 한국사람하고는 다른 눈과 마음과 생각’으로 한국사람 삶과 이야기를 느끼면서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으로 엮습니다. 한국사람이니까 보는 모습이 더 훌륭하지 않고, 한국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보는 모습이 훨씬 훌륭하지 않습니다.

 그림책 《암탉 데이지, 집으로 돌아오다!》에서도 매한가지입니다. 잰 브렛 님은 틀림없이 ‘마치 중국사람이 중국 이야기를 그리기라도 한 듯’하게 느낄 만큼 아주 잘 그렸습니다. 몹시 훌륭하다 여길 만합니다.

 그런데 막상 중국사람들이 그리는 중국 그림책은 이렇지 않아요. 중국사람이 중국 삶과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담는다 해서 ‘애써 오래된 중국 한문책 틀거리’에 맞추듯이 그리지 않습니다. 또한, 중국사람이기 때문에 ‘붉은 빛’을 더 좋아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붉은 빛을 좋아하는 중국사람은 아예 모든 빛을 붉게 물들이기까지 합니다. 그림책 《암탉 데이지, 집으로 돌아오다!》는 중국사람처럼 붉은 빛을 넘실넘실 쓸 수 없을 뿐 아니라 알맞게 가눌 수 없습니다. 오직 서양사람 삶과 이야기에 걸맞게 ‘붉은 빛 씀씀이를 어루만질’ 수 있습니다.


.. “서라!”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어부가 고함을 지르며 메이메이를 뒤쫓았어요. “내 닭 내놔!” “줍는 사람이 임자라면서요!” 메이메이가 고개를 돌려 한 마디 해 주었어요. 메이메이는 데이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꼭 붙잡고 쉬지 않고 달려서 마침내 집에 무사히 도착했답니다 ..  (28∼29쪽)


 《암탉 데이지, 집으로 돌아오다!》라고 하는 그림책은, 서양사람으로서 이토록 놀랍게 중국 겨레 삶과 이야기를 잘 곰삭이며 그렸기에 읽을 만하지 않습니다. ‘중국 겨레 삶과 이야기’를 구성지며 맛깔나게 그린 그림책이 아니라, ‘잘 그린 그림책’이기 때문에 읽을 만합니다. 잰 브렛 님으로서는 당신이 그리는 그림책 가운데 하나로 ‘중국 겨레 삶과 이야기로 스며드는 마음이 되어 그리고 서양 어린이한테 읽히려고 그린’ 그림책이지, 중국사람한테 중국 이야기를 선물해 주려고 그리는 그림책이 되지 않고, 이런 그림책은 될 수 없습니다.

 토를 한 마디 단다면, 중국땅에도 ‘서양 흰닭’이 들어와 널리 퍼졌달 수 있지만, 이 그림책에 나오는 깊은 두멧자락 시골마을이라면 ‘서양 흰닭’이 아니라 ‘한국 토박이 닭’처럼 ‘중국 토박이 닭’을 그려야 올바릅니다. 두멧자락 시골마을 사람들은 도시내기처럼 자주 말끔하게 씻지 않고 자주 씻을 일이 없습니다. 두멧자락 시골마을 사람들은 한국이든 중국이든 베트남이든 라오스이든 태국이든 버마이든 살결이 ‘살구빛’이나 ‘노란빛’이 아니라 ‘구리빛’이나 ‘흙빛’입니다. 늘 해를 바라보며 일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황인종’이라 하기보다는 ‘흙빛 겨레’라 해야 알맞습니다. 진흙탕에서 노는 오리들이 ‘하얀 빛깔 오리’일 수 없습니다. 바구니이며 흙벽으로 지은 집이나 닭우리이며 너무 ‘말끔’해서 흙 하나 안 묻을 수 없습니다.

 그림책 작품으로 보자면 그지없이 어여쁘며 살갑다 할 만합니다. 위쪽에는 그림을 넣고 아래쪽에는 글을 담는데, 위쪽과 아래쪽을 나누는 무늬에 ‘금 간 모습’을 넣기까지 하면서, 작은 대목까지 아주 꼼꼼하며 찬찬합니다. 그렇지만 횟대에 나란히 앉은 암탉 발바닥이 ‘발을 깨끗이 씻은 도시사람’처럼 너무 깨끗할 뿐 아니라 횟대에 흙이 하나도 안 붙었습니다. 두멧자락 시골마을 사람들 이야기인데 정작 ‘흙’이 잘 안 보여요.

 도시사람 이야기를 그린다면 도시는 자동차 배기가스며 건물마다 냉난방을 하며 뿜는 연기며 해서 자동차를 바깥에 세워 두면 먼지가 뽀얗게 앉습니다. 날마다 자동차 겉을 번쩍번쩍 닦아야 비로소 ‘깨끗’해 보입니다. 시골은 이런 먼지가 없으나 어디에나 흙이 있습니다. ‘삶과 이야기를 살펴’ 그린다 할 때에는 줄거리를 잘 잡아채며 담는 데에도 마음을 쓰는 한편, 여느 사람 여느 삶을 보여주는 자리에서는 여느 사람 여느 삶이란 어떠한가에 한결 눈길과 손길과 마음길을 쏟을 때에 훨씬 아름다이 거듭난다고 느낍니다.

 생각해 보면, 아직 우리 나라에서는 ‘한국 겨레 스스로 한국 겨레 삶과 이야기가 어떠한가’를 낱낱이 짚으며 찬찬히 담는 그림책이 없다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전통놀이’나 ‘민속문화’를 말한다는 그림책이야 많기는 많아요. 그러나, 전통놀이이든 민속문화이든 언제나 양반 계급이나 궁중사람들 전통과 문화에서 맴돕니다. 여느 농사꾼들 삶과 이야기하고 가까이 다가서지 못합니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사람들 이야기조차 ‘땅 넓고 집 있는’ 사람들 이야기에 머물 뿐, 정작 이 나라 농사짓는 사람 거의 모두를 차지하던 ‘땅 없고 집 작은(소작농)’ 사람들이 하루하루를 어떻게 맞이하고 설과 한가위를 어떻게 보냈으며, 여느 살림집 여느 부엌자리가 어떠했을까를 차근차근 곱씹는 데까지는 뻗지 못합니다.

 곧, 우리 스스로 우리 이야기를 적바림할 때에도 ‘내가 선 곳’이나 ‘내가 사는 곳’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못 담습니다. ‘내가 선 곳’이 아닌 ‘다른 사람이 선 곳’을 자료와 책과 취재로 알아보며 그리기 일쑤입니다. ‘내가 사는 곳’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사는 곳’을 찾아다니면서 담기 일쑤예요.

 이야기는 먼 곳을 찾아다니며 얻을 수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바로 내가 사는 곳’으로 이야기를 얻으러 찾아옵니다. 나는 내가 사는 곳을 떠나 ‘내가 사는 곳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사는 곳’으로 이야기를 얻으러 찾아갑니다. 서양사람은 서양사람 스스로 서양 삶과 이야기를 잘 담으면서 나라밖 이야기도 찾아나선다지만, 우리는 우리 이야기를 얼마나 잘 찾아보거나 알아보거나 느끼면서 나라밖 마실을 이렇게 자주 많이 뻔질나게 다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4344.2.25.쇠.ㅎㄲㅅㄱ)


― 암탉 데이지, 집으로 돌아오다! (잰 브랫 글·그림,하연희 옮김,문학동네어린이 펴냄,2005.3.21./9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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