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물 빨래 하고 나서 책읽기


 드디어 더운물이 아닌 찬물로도 빨래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손가락이 차갑게 되기는 마찬가지이다. 다만, 한겨울처럼 손이 찌릿찌릿 아파서 자꾸자꾸 볼이나 팔뚝에 손가락과 손바닥과 손등을 대어야 하지는 않는다. 한겨울에 찬물로 빨래를 하면 손가락과 손바닥과 손등을 녹이면서 비비거나 헹구거나 짜야 한다. 빨래를 마치고도 한 시간쯤은 손이 얼어서 녹지 않는다.

 날이 참으로 폭하니까 찬물 빨래를 하고 나서도 손이 시리기는 해도 손가락이 얼어붙지 않는다. 손가락이 얼어붙지 않으니 손가락이 아프지 않다. 바야흐로 봄이라 할 만한 날씨라고 느낀다. 봄이기는 봄인데 아직 우리 멧골집 물은 녹지 않으니 섣불리 봄이라 여기면 안 된다고 느끼기도 한다. 이제는 기름 걱정을 덜 해도 되지만, 그렇다고 저녁이나 밤에 보일러를 안 돌릴 수 없다. 저녁과 밤 사이 기름 몇 리터 아낀다는 생각에 보일러를 쉬다가 집식구가 밤추위 때문에 몸이 나빠지면 기름값 조금 아낀다면서 몸이 다친다.

 겨울날 때때로 찬물 빨래를 하면서 생각했다. 춥디추운 겨울날에도 때때로 손 시릴 뿐 아니라 손 얼어붙는 찬물 빨래를 하면서 생각했다. 일부러 찬물 빨래를 하지는 않았다. 따뜻한 물을 쓸 수 없는 날은 차가운 물을 써서 빨래를 해야 했다. 물을 따스하게 덥혀서 빨래를 할 수 있는 삶이란 얼마나 고마운가. 우리 집 살림이란 세무서 사람들이 세무조사를 해 보아도 가난하기 이를 데 없기에, 이달부터 아이 키우는 데에 드는 돈을 얼마쯤 면사무소에서 보태 주기로 했다며 알림쪽지가 날아왔다. 정작 얼마를 주는지는 안 적혔지만, 우리 식구가 아이 몫으로 돈을 조금이나마 모아 놓지 못하기 때문에, 이 돈을 푼푼이 모아 나중에 아이가 크면 물려줄 수 있겠구나 생각한다. 뭐, 이러하든 저러하든 가끔 찬물 빨래를 할 뿐, 여느 날에는 더운물 빨래를 할 수 있으니, 가난한 살림이라 하더라도 얼마나 좋은 나날인가.

 가난하니까 누군가 우리를 도와주고, 가난하기에 도움을 고맙게 받는다. 가난이 부끄러울 일이란 없다. 돈 많은 사람이라 창피할 까닭이 없듯이 돈 없는 사람이라 남우세스러울 까닭이 없다. 돈이 많으면 돈이 적은 사람한테 보태어 주면 되고, 돈이 없으면 돈이 넉넉한 사람한테서 얻으면 된다. 책을 조금 더 많이 읽은 사람은 책을 못 읽거나 안 읽은 사람한테 책에 깃든 슬기로우며 아름다운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면 된다. 책을 못 읽거나 안 읽은 사람은 책을 많이 읽은 사람한테서 사랑스럽고 믿음직한 이야기를 귀담아들으면 된다. 힘이 센 사람은 힘이 여린 사람을 돕는다. 힘이 여린 사람은 힘이 센 사람한테서 도움을 받는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젊은이가 도와주기에 씩씩하게 삶마무리를 짓는다. 어린이는 어버이가 돌보기에 튼튼하게 자라난다. 지식이란 자랑하고자 쌓는 점수가 아니다. 지식이란 남한테 나누어 주려고 즐겁게 갖추는 밥그릇이다. 마음밥이 모자라 마음굶이를 하는 벗님한테 마음밥을 나누어 주려고 책을 읽어 지식을 갖춘다. 마음밥을 바라는 힘들거나 어려운 이웃을 헤아리려고 애써 책을 읽어 장만하여 갖춘 다음 ‘개인 도서관’을 열든, ‘책 돌려읽기’를 하든 ‘책 선물’이든 한다.

 책을 읽은 사람들이 쓰는 느낌글이란 ‘출판사 책팔이에 보탬이 될 서평’이어서는 안 된다. 책을 읽은 사람들이 쓸 느낌글이란 ‘책을 아직 못 읽었거나 책을 읽을 틈이 없도록 고단하거나 힘겨운 사람들한테 마음밥이 될 좋은 이야기꽃’이 되도록 쓰는 글이어야 한다. 신문기사란 사건이나 사고나 정치나 뭐 이런저런 시시껄렁한 뒷얘기를 다루는 글이어서는 안 된다. 신문기사란 날마다 사람들한테 마음밥과 생각밥과 슬기밥이 될 살가운 이야기열매여야 한다.

 찬물 빨래를 하면서 손가락이 얼어붙으면 눈물이 절로 난다. 손바닥까지 얼어붙으면 눈을 질끈 감으면서 흑흑 소리가 새어나온다. 손등마저 얼어붙으면 몸이 새우처럼 구부러지면서 꼼짝을 못한다. 그러나 빨래는 날마다 마쳐야 한다. 아이 오줌기저귀는 날마다 빨아야 하고, 집식구 옷도 때가 묻었으면 벗겨서 빨아야 한다. 게다가 빨래만 해서야 무슨 집살림을 꾸린다 할 수 있는가. 밥도 하고 집안도 치우며 아이하고도 놀고, 아픈 옆지기 몸을 주물러야 하지 않겠는가. 구부러진 등허리를 얼른 펴고 얼어붙은 손을 쫘악 펼쳐야 한다. 눈물이야 흐르는 대로 두든 슥슥 문질러 닦든 한 다음, 부리나케 국을 끓이고 반찬을 한다. 먼지 쌓인 밥상과 방바닥을 빗자루로 쓸고 걸레와 행주로 닦으며 아이 손에 숟가락을 쥐어 준다. 똥 눈 아이 밑을 물로 닦는다. 아이 변기와 엄마 오줌그릇을 비우며 물로 씻는다. 밤이 되면 그예 털푸덕 드러눕는다. 머리에는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날마다 한 줄이나마 적으려고 용을 쓰는 ‘아이돌봄 일기’조차 못 쓰고 지나가는 날이 제법 된다.

 그래도 이렇게 잘 살았고, 추운 겨울 가는 파란하늘을 올려다보며, 날마다 차츰 포근해지는 멧골바람을 느낀다. 봄은 하루하루 가까이 다가온다. 찬물 빨래가 반가울 여름철 무더운 날씨는 멀지 않았다. (4344.2.2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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