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바닥 붙임딱지와 책읽기


 언제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이와 내내 복닥이면서 집일을 하다 보면 한낮에 겨우 숨을 돌리는 즈음 쓰러지기 마련. 이무렵에 아이가 함께 낮잠을 자 준다면 더없이 고맙지만, 아이는 졸리면서도 낮잠을 꾸욱 참으며 뗑깡 부리며 놀기 마련.

 큰방 바닥에 털푸덕 쓰러지면서 “이제 이렇게 쓰러질 테니까, 벼리는 더 놀고 싶으면 혼자서 더 놀아.” 하고 말한다. 아이는 살며시 다가와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내 발 뒤꿈치를 쓰다듬으며 “아파? 아야 해?” 하고 묻는다. 발 뒤꿈치를 다친 적 없는데 뭔가 하고 고개를 빼꼼 들고 바라본다. 아, 내 발 뒤꿈치에 굳은살이 잔뜩 배겨 딱딱하니까 아픈 줄 아는가 보다. 하기는, 맨발에 고무신만 신으며 살아가니까 내 발은 온통 굳은살투성이일 테지.

 아이는 어디론가 쪼르르 갔다가 다시 쪼르르 와서는 제 놀잇감 넣은 다용도장 벽에 붙인 붙임딱지를 몇 떼어 내 발 뒤꿈치에 붙인다. “가만 있어 봐. 붙여 줄게.” 응, 아이야, 고거 붙인다고 안 아야거든?

 날이면 날마다 신나게 뛰놀다가 자빠져서 무릎이 깨지는 아이. 웬만하면 깨진 그대로 두지만, 깨진 데가 자꾸 또 깨지면 하는 수 없이 약을 바른 다음 밴드를 붙인다. 아이는 밴드 붙이기를 하면 ‘안 아야’라고 여기며, 제 놀잇감인 붙임딱지를 내 발에다 붙여 주려는 뜻이다. 옆지기가 “벼리야, 그렇게 붙이면 어떻게 걷니?” 하고 말하지만, 들은 척 만 척. 나는 발 뒤꿈치에 붙은 붙임딱지 때문에 그냥 더 드러눕고 쉬기로 한다. 아이는 혼자서 재잘재잘 종알종알 하면서 논다. 모처럼 이십 분쯤 느긋하게 드러누워 책을 읽었다. (4344.4.2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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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아노와 사진기와 책읽기


 시골집에 피아노가 들어왔다. 옆지기와 2007년 6월 5일부터 함께 살아온 지 네 해 만에 큰 살림이 하나 들어왔다. 새 피아노를 장만할 만큼 살림돈이 넉넉하지 않아 헌 피아노를 장만한다. 피아노를 장만한 돈은 아버지 어머니가 우리 식구한테 ‘딸아이를 생각해서 앞으로 잘 두라고 한 돈’을 깼다.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 된다거나 노래를 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장만하는 피아노가 아니라, 아이한테 퍽 좋은 놀잇감이 되는 피아노이기 때문에 우리 살림에 마지막 남은 목돈을 깼다.

 옆지기는 우리한테 무언가 목돈이 들어올 때에 ‘내가 바라는 파노라마사진기’를 장만하라고 으레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나 한 번, 두 번, 세 번 목돈을 벌었던 때에 이 목돈은 고스란히 살림살이를 장만하거나 아픈 집식구한테 들이는 돈으로 썼다. 내가 바라는 파노라마사진기는 몇 해 사이에 값이 껑충 올라, 이제는 삼백만 원쯤을 들여야 장만할 수 있는데, 이마저 물건이 없어서 살 수 없단다. 줄서서 기다리든 웃돈을 얹든 만지기 힘들단다.

 짐차에서 피아노를 내린다. 큰방 아이 놀잇감을 놓던 다용도장을 옆으로 밀고 피아노를 놓는다. 아직 피아노 자리를 잡지 않았으나, 아이는 걸상에 척 올라앉아 얼른 눌러 보고 싶다. 아이는 다른 곳에 마실을 갈 때에 피아노가 보이면 어김없이 피아노에 달라붙곤 한다. 우리가 아이한테 피아노를 딱히 가르치거나 보여준 적이 없는데, 용하게 피아노를 좋은 놀잇감으로 삼는다. 다른 어느 악기보다 피아노를 좋아한다. 다른 아이들도 피아노를 좋아할까. 다른 아이들은 피아노를 왜 좋아할까. 건반을 통통 누르면서 나는 다 다른 소리와 느낌을 얼마나 좋아할까.

 시골집으로 옮긴 지 한 해가 거의 다 된 오늘 들어온 피아노 앞에 앉아 본다. 건반을 몇 눌러 본다. 나도 일고여덟 살 때에 피아노학원에 다녔던 일을 아주 어렴풋하게 떠올린다. 아주 못 치지는 않았으나 또 잘 치지도 않았다. 집에서는 종이 건반을 바닥에 놓고 신나게 연습해서 눈을 감고도 얼마든지 칠 수 있게끔 애쓰곤 했다. 학원에 가서 건반을 눌러 볼 차례가 되던 때를 얼마나 기다렸으며, 내가 내 손가락을 놀려 건반을 퉁길 때에 나는 소리가 얼마나 좋고 부드러웠는지 모른다. 잘 쳐서가 아니라, 이런 피아노를 퉁길 수 있는 일이 기뻤다.

 지지난달부터 한 달 벌이가 겨우 백만 원이 되었다. 지지난달까지는 한 달 오십만 원 안팎 벌이로 어찌저찌 살림을 꾸렸다. 시골집에서는 달삯을 내지 않고, 얻은 집에서 살아가니까 밥값하고 보일러 기름값을 댈 수 있으면 살 만하다. 여기에 책을 사느라 들이는 값이 있다. 다달이 오십만 원으로는 퍽 빠듯하지만, 아주 못 살지는 않는다. 책을 내어 받는 글삯은 아직 없지만 올해에는 처음으로 글삯 벌이를 할 수 있을까 하고 꿈을 꾼다. 이런 살림살이였기에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리한테 목돈을 얼마쯤 쥐어 주셨겠지. 그럭저럭 살 만하거나 이냥저냥 버틸 만한 살림이라면 따로 우리한테 도움돈을 줄 사람이 없으리라.

 한낮이 되어 옆지기가 피아노를 친다. 아이는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마당에서 춤을 추며 논다. 볕바라기를 하면서 맞은편 우리 도서관 유리문에 제 모습을 비추면서 논다. 옆지기가 피아노를 쉬면 피아노 쳐 달라고 마당에서 소리를 빽 지른다. 나는 고단한 몸을 쉬려고 누웠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사진기를 쥐고는 두 사람 모습을 이쪽에서 찍고 저쪽에서 찍는다.

 이제 옆지기는 마당으로 나가서 볕바라기를 함께 한다. 아이는 자전거를 탄다. 오늘은 제법 발판을 구른다. 한두 번 앞으로 구르고, 한두 번 뒤로 구른다. 다리도 조금 길어졌고 다리힘도 조금 더 붙었는가 보다. 앞으로 하루하루 더 많이 구를 테고 더 많이 굴릴 수 있겠지. 볕바라기를 하는 옆지기하고 자전거를 타는 아이 모습을 말끄러미 바라보며 사진으로 담는다.

 나는 파노라마사진기를 써서 내가 좋아하는 헌책방이랑 인천골목길을 사진으로 담는 꿈을 꾸며 살았다. 이러한 꿈은 살림집을 시골로 옮기며 더는 못 품는다. 그저 내 손에 쥔 작고 가벼운 사진기로 내가 찍을 수 있는 모든 솜씨를 부려서 내 사랑을 담아서 찍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따지고 보면, 내 사진기가 훨씬 빼어나다 해서 우리 살붙이들 살아가는 모습을 더 사랑스럽게 찍을 수 있거나 더 즐겁게 찍을 수 있지는 않다. 시야율(화각 비율)이 떨어진들 어떠하고, 화소수가 낮으면 어떠한가. 대형사진기를 쓴대서 더 아름답다 싶은 사진을 얻지는 않는다.

 집식구들이 온누리에서 가장 아름답거나 가장 좋은 사람이라고는 여기지 않는다. 다만, 내가 살아가는 이 보금자리에서 누구보다 사랑하며 아낄 사람이라고 느낀다. 서로서로 아끼면서 좋아하고 보듬으며 살아야 즐겁다고 느낀다.

 나는 피아노를 칠 줄 모르고, 피아노를 배울 겨를이 없다. 밥을 하고 빨래를 하며 이모저모 서툴게 살림을 꾸리면서 피아노까지 할 틈이 없다. 옆지기는 사진을 몇 장 찍을 수는 있으나 사진기를 옳게 다룰 줄은 모르며, 사진기를 배울 겨를이 없겠지. 아이는 어머니하고 아버지하고 함께 살아가면서 무엇을 차근차근 배울까. 아이는 어머니랑 아버지랑 함께 지내면서 무엇을 바라보며 하루하루 어떤 생각과 이야기를 쌓을까.

 아이는 어린 나날부터 사진기를 놀잇감으로 삼으며 놀았는데, 이제부터는 피아노를 놀잇감으로 삼으며 놀겠지. (4344.4.20.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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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브라이, 점자로 세상을 열다 I LOVE 그림책
데이비드 애들러 지음, 존 월너.알렉산드라 월너 그림, 황윤영 옮김 / 보물창고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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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 점자’ 만든 사람 이름은 몰라도 됩니다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4] 데이비드 A.애들러·존 윌너·알렉산드라 윌너, 《루이 브라이, 점자로 세상을 열다》(보물창고,2007)


 역사책에 한 줄로 적히는 이야기가 무척 많습니다. 역사책에 한 줄로조차 안 적히는 이야기 또한 무척 많습니다.

 제가 학교를 다니던 때에 역사를 배우면서 ‘박두성’이라는 이름을 들은 적이란 없습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이야기하던 교사 가운데 박두성이라는 사람을 알거나 말할 수 있던 분은 없었습니다.

 이제는 예전하고 많이 달라졌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나마 인천에 있는 학교에서 교사 노릇을 하는 이들 가운데 몇몇은 박두성이 누구인지를 어렴풋하게나마 이름 석 자쯤은 알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박두성이라는 사람은 인천에서 일제강점기에 ‘한글점자 훈맹정음’을 만들었거든요.


.. 루이는 (네 살에 두 눈을 잃고 나서) 혼자 밥 먹는 법과 어디에도 부딪치지 않고 걷는 법을 다시 배워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루이에게 지팡이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루이는 지팡이로 땅을 두드려 길에 아무것도 없는지 확인하며 걸었습니다. 그리고 어디를 가든 몇 발짝인지 기억해 두었다가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완전히 캄캄한 세상 속에서 루이는 소리와 냄새, 물건의 모양과 감촉을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걸을 때 내는 소리가 저마다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루이는 짐마차의 바퀴 소리만 듣고도 누가 오고 있는지 알아맞혔습니다 ..  (10∼11쪽)


 한국사람으로서 박두성을 알든 모르든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박두성을 안대서 더 나은 사람이지는 않습니다. 박두성을 모르기에 바보이거나 멍청이라 할 수 없습니다. 박두성이라는 사람 이름을 알거나 박두성 위인전을 읽었으니 한결 나은 사람이 되지 않아요. 박두성 이름을 알거나 한글점자를 만든 이야기를 알더라도, 정작 ‘한글점자’를 모르거나 읽지 못한다면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내 아이를 바라보는 어버이가 되건, 학교에서 교사 일을 맡은 어른으로서 바라보는 숱한 아이가 되건, 아이들한테 영어와 한자를 일찍부터 가르치려는 어른은 많아도, 막상 아이한테 점글이나 손말을 가르치려 애쓰거나 마음쓰는 어른은 없습니다.

 제도권학교이든 대안학교이든, 어린이집이든 유치원이든, 특성화고등학교이든 외국어고등학교이든, 어느 곳에서도 점글이나 손말을 정규 수업으로 안 넣을 뿐 아니라,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시중에서 쉽게 찾아볼 만한 ‘점글 배우기 책’이나 ‘손말 익히기 책’ 또한 거의 없거나 아예 없어요.


.. 루이는 귀를 쫑긋 세우고 들으며 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처럼 책을 읽을 수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루이는 기억력이 좋아서 아주 훌륭한 학생이 되었습니다 ..  (16쪽)


 두 번째 외국말(제2외국어)로라도 점글이나 손말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중학교에 들어설 무렵인 아이한테는 영어와 함께 점글이나 손말 가운데 하나를 가르쳐서 익히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장애인을 생각해서 승강기나 자동계단을 마련하는 일은 고맙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설을 처음부터 마련하지 않다가 나중에 꽤나 큰돈을 들여 새로 붙이기 일쑤입니다. 처음부터 어떠한 건물이건 아파트이건 ‘몸이 아프거나 힘든 사람’을 헤아리는 건축설계로 짓지는 않아요. 학교이든 관공서이든 박물관이든 운동경기장이건 똑같습니다. 다들 나중에야 ‘장애인 화장실’ 칸을 얼렁뚱땅 붙이는데, 이 장애인 화장실에 아무나 들어가서 더럽히기 일쑤이기까지 해요.

 생각이 없는 삶입니다. 생각을 잊은 사람입니다. 생각을 버린 사랑이에요.


.. 앞을 볼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은 루이의 점자를 쓰는 것에 반대했습니다. 새 점자를 쓰려면 책을 새로 찍어야 해서, 돈이 많이 들기 때문이었습니다. 앞을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전의 도드라진 글자가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였습니다. 자신들은 눈으로 보고 쉽게 읽을 수 있었으니까요. 왕립맹아학교에선 여전히 옛날 책을 썼지만 학생들은 자기들끼리 루이의 점자를 썼습니다. 피녜 교장 선생님도 루이의 점자가 눈먼 사람들을 위한 프랑스의 공식 점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학교 이사들은 반대했습니다. 그들은 학교에서 루이의 점자 책을 사용하는 것을 알고는 피녜 교장 선생님을 쫓아냈습니다. 앞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은 루이의 점자를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눈먼 사람들이 편지를 보내도 읽을 수 없었습니다 ..  (29쪽)


 그림책 《루이 브라이, 점자로 세상을 열다》(보물창고,2007)는 ‘알파벳 점글’을 제대로 만들어 옳게 쓰도록 온힘을 바친 한 사람 삶자락을 가볍게 다룹니다. 어쩔 수 없이 한두 줄로 ‘알파벳 점글에 반대한 눈멀지 않은 사람들 이야기’를 적바림할밖에 없겠지만, 이때에 루이 브라이 님을 비롯해 피녜 교장 선생님이고 왕립맹아학교 아이들이고 수많은 눈먼 이들은 얼마나 오래도록 아프고 힘들며 괴로웠을까요. 이 아픔과 힘듦과 괴로움을 한두 줄로 다룰 때에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이 그림책과 함께 《루이 브라이》(다산기획,1999)를 함께 읽을 수 있으면 눈먼 이들 삶을 조금 더 널리 헤아릴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위인전으로 다루고 말아 제대로 보여주며 밝힐 이야기하고는 좀 동떨어졌지만, 아쉬우나마 한국에도 ‘한글 점글’을 만든 분 이야기를 다룬 《박두성 이야기》(우리교육,2006)가 있습니다. 한글 점글을 만든 박두성 님 딸아이는 2011년 올해로 여든아홉 나이 할머니인데, 씩씩하고 튼튼하게 살아서 인천 화평동에서 ‘평안 수채화의 집’을 꾸립니다.

 나라에서 박두성 님한테 훈장도 주었고, 인천에서는 꾸준히 ‘박두성 기념사업’을 합니다만, 한글 점글을 만든 이한테 훈장을 주거나 한글 점글을 만든 이를 기리는 일이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짚는 사람(문화예술인이나 공무원이나 교육자 모두)은 아직 없습니다.

 루이 브라이 님 알파벳 점글은 ‘돈이 많이 든다’는 까닭 때문에 처음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한참 지나서야 겨우 받아들여졌습니다. 한국에서 한글 점글은 그럭저럭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한글 점글을 박아 책으로 내는 일은 몹시 어렵습니다.

 얼마나 어려운가 하면, 눈먼 이들이 읽을 만한 책은 매우 적고, 거의 다 자원봉사자가 만듭니다. 구멍을 내는 책으로 만들거나 목소리를 담아 ‘소리로 듣는 책’을 만드는데, ‘구멍을 내는 책’을 만드는 솜씨는 많이 발돋움해서, 출판사에서 ‘원고 파일’을 보내 주면 이 파일로 적은 품을 들이고도 점글책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눈멀지 않은 사람들이 널리 읽는 책’을 내놓는 출판사치고 눈먼 이들이 읽을 책을 만드는 도서관이나 협회에 ‘책 원고 파일’을 보내는 곳은 아주 드뭅니다. 그렇다고 출판사 스스로 점글책을 만들지도 않아요. 돈이 꽤나 많이 들거든요. 다루기도 힘들어요. 출판사에서는 저작권과 판권만을 말할 뿐, 눈먼 이들이 책을 읽을 권리는 살피지 않아요. 그러니까, 돈만 생각하는 이 나라입니다.

 알파벳 점글을 만든 사람 이야기로 《루이 브라유》(비룡소,2010)와 《세상 밖으로》(큰북작은북,2008)와 《Who? 루이 브라유》(다산어린이,2010)가 더 있습니다. 이 책들도 루이 브라이 님을 ‘위인전 이야기’로 바라볼 뿐입니다. 눈멀지 않은 사람들이 스스럼없이 책을 마음껏 읽고 즐기며 살아가는 이 터전에서, 눈먼 이들을 이웃이나 동무나 한식구로 여기는 삶자락으로까지 스며들지는 못합니다.

 위인전은 이제 됐고, 지식책 또한 이제 됐습니다. 루이 브라이 님 책은 점글책으로 만들어 주든지, 점글책을 함께 만들어 내든지, 아니면 어린이와 푸름이가 점글을 배우는 길잡이책을 만들어 주십시오. (4344.4.20.물.ㅎㄲㅅㄱ)


― 루이 브라이, 점자로 세상을 열다 (데이비드 A.애들러 글,존 윌너·알렉산드라 윌너 그림,황윤영 옮김,보물창고 펴냄,2007.8.30./9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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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버트로스의 똥으로 만든 나라 - 누구나 꿈 꾸는 세상
후루타 야스시 지음, 요리후지 분페이 그림, 이종훈 옮김 / 서해문집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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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을러서 무너지는 나라는 없다
 [책읽기 삶읽기 53] 후루타 야스시·요리후지 분페이, 《앨버트로스의 똥으로 만든 나라》(서해문집,2006)



 나우루공화국 이야기를 다룬 책으로 《낙원을 팝니다》(여름언덕,2006)와 《나우루공화국의 비극》(에코리브르,2010) 두 가지가 한국말로 옮겨졌습니다. 한국사람 스스로 나우루 이야기를 살피며 책으로 쓰지는 못합니다. 그래도 두 가지 책이 한국말로 옮겨졌으니 고마운 노릇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온누리 모든 이야기를 언제나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사람 눈길에 걸맞게 써내야 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러나 언제나처럼 나라밖 사람들이 빚은 이야기만 찾아서 듣다 보면, 나 스스로 온누리를 바라보는 눈썰미가 한쪽으로 길들거나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오늘날 영어를 무엇보다 도드라지게 다루면서 초등학교뿐 아니라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까지 영어를 가르치지만, 정작 초등학교뿐 아니라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까지 ‘우리 말글’을 옳고 바르게 가르치지 못하거든요.

 나우루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나우루라는 섬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잊었습니다. 스스로 잊었다기보다 나우루섬에서 큰돈을 얻어내려는 이웃나라에서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와서 나우루를 차지하고 이곳 사람들을 식민지 노예로 다루었으니 오랜 나날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바보처럼 되고 말았다 할 수 있을 텐데, 나우루섬에서 살아가던 사람은 모자라지도 않았고 넘치지도 않았어요. 나우루섬이 온누리에서 가장 아름다울 섬인지 아닌지 모를 노릇입니다만, 나우루섬은 나우루섬에 깃들어 오래오래 살아온 사람한테는 가장 알맞거나 몹시 아름다울 섬이었습니다.

 돈이 없어도 배를 곯는 사람이 없던 나우루섬입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없어도 전쟁이나 다툼이 일어나지 않던 나우루섬입니다. 경찰이나 학교나 군대가 없어도 도둑이나 미움이나 따돌림이 생기지 않던 나우루섬입니다.

 서양 나라와 일본이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와서 인광석을 캐낼 때부터 나우루섬은 평화가 깨지고 사랑과 믿음이 사라졌으며 아름다운 빛줄기가 스러졌습니다.

 나우루사람을 함부로 탓할 수 없습니다. 오랜 나날 식민지살이를 하면서 제 땅을 잃고 노예가 되어 인광석을 캐는 일만 해야 한 사람들한테 ‘너희는 왜 너희 섬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못 깨달았는가?’ 하고 따질 수 없습니다. 광부로만 일해야 하면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던 일이나 흙을 일구어 푸성귀와 곡식을 얻던 일을 모조리 빼앗기거나 잃은 사람한테 ‘너희는 왜 너희 삶터를 어여삐 지키면서 작고 착하게 사는 길을 걷지 않았느냐?’ 하고 따질 수 없어요. 땅임자라 하는 이는 땅임자대로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니까 나우루섬을 망가뜨리고, 땅임자 아닌 여느 사람은 ‘탄광 품팔이꾼(임금노동자)’이 되어야 했기에 고기잡이와 흙일구기를 잃었습니다.


.. 인광석을 탐내는 나라들이 세계 곳곳에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맨 처음 이곳에 도착한 나라는 독일이었습니다. 그 다음엔 영국이 들어와서 인광석을 운송하기 위해 철도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섬에 사는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바다 저편에서, 본 적도 없는 나라들이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습니다. 그 틈에 오스트레일리아 군대가 들어와 이 섬을 점령했습니다 ..  (14∼15쪽)


 《앨버트로스의 똥으로 만든 나라》(서해문집,2006)는 짧은 글에 단출한 그림을 붙여 나우루섬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낙원을 팝니다》하고 《나우루공화국의 비극》은 글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찌 보면, 굳이 글로 길디길게 나우루섬 앞뒤 발자취와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아도 된다 할 수 있어요.

 줄거리를 살핀다면, 세 권 모두 이렇게 엮습니다. (1) 나우루섬은 아름답고 살기 좋았다. (2) 유럽 나라들이 식민지를 넓히는 전쟁을 벌이며 나우루섬 인광석을 알아냈다. (3) 인광석을 ‘거저로’ 빼앗을 수 있는 나우루섬을 식민지로 삼으려고 유럽 나라끼리 다투었다. (4) 일본이 세계대전에 끼어들며 나우루섬에 전쟁과 식민지가 그치지 않았다. (5)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오스트레일리아가 식민지 정책을 이었다. (6) 나중에 나우루섬이 독립을 하지만, 서양 나라들은 나우루섬 역사와 문화를 헤아리지 않고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나우루섬에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정치와 행정 조직을 세운다. (7) 정부 공무원을 꾸리면서 경제개발을 외쳐야 했고, 경제개발을 앞세워 나우루공화국도 문화와 교육과 복지를 키우려 하다 보니 돈이 많이 있어야 했다. (8) 인광석을 캐서 팔면 돈이 된다. (9) 조용히 작게 살아가는 길을 잊고, 서양 민주주의 틀을 그대로 받아들인 나우루공화국은 인광석 장사를 이어 나간다. (10) 나우루섬이 공화국으로 독립하기 앞서 유럽과 일본과 오스트레일리아 제국주의자들이 인광석을 많이 캐 갔다. 그래도 꽤 인광석이 남았기에 나우루공화국 정치꾼은 걱정하지 않았다. (11) 드디어 인광석이 바닥났다. (12) 나우루공화국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13) 이제 나우루섬에는 아름다운 자연도 넘치는 돈도 사라졌다.


.. 나우루 사람들은 줄곧 노동자였습니다. 그들이 받은 임금은 생산된 인광석의 5퍼센트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 채소나 과일을 재배하던 경작지는 점차 광석 채굴장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이 섬에서는 어느 곳을 파더라도 인광석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경작지가 없어져도 맛 좋은 통조림을 살 수 있는 돈이 엄청나게 들어왔습니다 ..  (16, 26쪽)


 줄거리를 헤아리자며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나우루섬을 다루는 세 가지 책 또한 줄거리를 곱씹자며 읽을 수 있습니다. 나우루공화국에서 일어난 일을 발판 삼아 우리 터전을 곰곰이 돌아보며 거울로 삼자고 할 수 있겠지요. 경제개발이나 황금만능주의나 자연보호를 곱씹는 좋은 밑거름으로 여길 만합니다. 아니면, 또다른 지식이나 상식 하나로 나우루 이야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이야기를 펼치고, 이와 같이 줄거리를 마무리지어도 좋을는지 궁금합니다. ‘조용히 착하게 살던 사람들’을 식민지로 부리며 괴롭히던 사람들을 찬찬히 꿰뚫는 이야기를 옳게 다루지 못한다면 무슨 보람이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나우루섬 사람들은 돈에 길드는 바람에 제 보금자리를 잃거나 잊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땅 사람들은 얼마나 제 보금자리를 아끼거나 돌보거나 사랑한다 할 수 있으려나요. 한국땅 사람들은 돈에 안 길든 착하거나 참답거나 아름다운 사람이라 할 만한지요.

 이 나라 사람들은 하나같이 도시로 몰려듭니다. 도시로 몰려든 이 나라 사람들은 도시에서 일자리를 얻습니다. 이 나라 사람들이 도시에 몰려들어 얻는 일자리란 ‘돈을 더 많이 벌어 돈으로 집을 사고 옷을 사며 밥을 사는 삶’을 꾸리는 일자리입니다. 한국사람 스스로 허구헌날 ‘아름다운 우리 강산’이라고 외친들 무엇 하겠습니까. 제주 삼다수 물을 마시고 강원 평창 물을 마시며 깊은 동해 물을 마시면 무엇 하려나요. 정작 어느 도시사람이고 물을 맑게 아끼거나 돌보는 삶이 아니잖아요.

 원자력발전소와 화력발전소 열폐수도 바닷물을 더럽힙니다. 수많은 공장에서 흘리는 폐수도 바닷물을 더럽힙니다. 주한미군 기지도 땅을 더럽히지만, 한국사람이 살아가는 여느 살림집에서 버리는 똥오줌과 생활폐수도 땅을 더럽힙니다. 이제는 유기농(친환경) 먹을거리를 먹어야 하고, 초·중·고등학교에서 친환경무상급식을 해야 한다고 외치기는 하지만, 정작 내가 날마다 누는 똥오줌을 거름으로 삼도록 하는 시설이나 제도란 하나도 없을 뿐더러, 어느 새 아파트도 똥오줌을 거름으로 삼도록 시설을 갖추지 않을 뿐더러,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사람 스스로 내 똥오줌을 거름으로 일구려고 땀흘리지 않습니다. 내 똥오줌은 물에 흘려 버리면서 유기농이나 친환경을 말하는 삶이란 얼마나 엉터리인 줄을 깨닫지 않고, 깨닫지 않으니까 고치거나 바로잡지 않아요.


.. 앨버트로스의 똥으로 만들어진 나라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쳐야겠습니다. 약 100년 사이에 이 섬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사람들은 풍요로운 생활을 누린 반면 경작지와 고유한 문화는 많이 잃었습니다 ..  (114쪽)


 나우루섬 사람들은 고작 백 해 사이에 아주 다르게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백 해가 아닌 쉰 해 만에 바뀌었다 해도 틀리지 않고, 서른 해 만에 바뀌었다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한국땅 사람들은 오늘날 어떤 모습 어떤 삶 어떤 나날인가를 돌아볼 노릇입니다. 하루하루 일구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 되새길 노릇입니다. 불쌍하거나 딱한 나우루공화국일 수 없습니다. 어리석거나 게으르다 할 나우루공화국일 수 없어요.

 이 나라 대한민국은 식량자급율이 30%가 되지 않습니다. 콩이 몸에 좋다느니 무어라느니 하지만, 콩 자급율은 10%나 될까요. 밀 자급율은 1%가 안 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맥주를 그렇게도 많이 마시지만, 보리 자급율은 몇 %가 될까요. 한국에서 거둔 보리로 맥주를 만드는 술 회사가 한 군데라도 있겠습니까. 제아무리 맑은 물을 땅에서 퍼서 빚는 맥주라 하더라도, 어떤 보리를 어느 나라에서 사들여 쓰는지를 살필 줄 아는 한국사람은 없습니다.

 나우루공화국은 사람들이 게을러터졌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석유로 돈을 버는 나라 또한 사람들이 게을러지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전쟁무기를 어마어마하게 만들 뿐 아니라 군대 또한 어마어마하게 꾸려서 끝없이 전쟁을 일으키면서 먹고사는 몇몇 나라들 또한 사람들이 돈이 넘쳐 게을러지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아요.

 스스로 내 삶을 사랑하지 못할 뿐 아니라, 내 삶이 무엇인 줄을 깨닫거나 느끼지 못하니까 무너집니다. 톨스토이 말이 아니더라도, 나와 내 식구한테 땅이 얼마만큼 있으면 스스로 흙을 일구어 먹고살 만한가를 모를 뿐더러, 돈을 벌며 살더라도 내가 갖출 돈이 얼마쯤이면 내 삶과 삶터를 예쁘며 알차게 일굴 수 있는가를 깨닫지 못하고 느끼지 않으니 무너집니다. 나우루섬은 공화국도 식민지도 관광지도 아닌 그저 나우루섬입니다. (4344.4.20.물.ㅎㄲㅅㄱ)


― 앨버트로스의 똥으로 만든 나라 (후루타 야스시 글,요리후지 분페이 그림,이종훈 옮김,서해문집 펴냄,2006.5.15./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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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 업고 곰취 뜯기


 지난 목요일에 숲에 들어가 뜯은 곰취를 거의 다 먹었기에 오늘 새로 뜯으려고 아이를 데리고 숲으로 들어간다. 아이는 한낮이 될 무렵부터 졸립다 했으나 세 시까지 안 자고 버텼다. 몹시 졸립지만 숲으로 간다니 좋다며 따라나선다. 그러나 조금 걷지 않았어도 힘들다며 안아 달라 한다. 아이를 안고 숲길 오르막을 오른 다음, 내리막과 판판한 길에서는 내린다. 여느 때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아하겠지만, 퍽 졸리니까 조금만 좋아한다. 그래도 잘 뛰고 잘 걷는다.

 아버지가 곰취와 쑥을 뜯느라 바쁘니 자꾸자꾸 안아 달라 한다. 하는 수 없이 볕이 잘 드는 곳에 앉으라 한 다음 쑥이랑 곰취를 뜯는다. 바람소리와 새소리만 들리는 숲속에서 노래를 부른다. 흥얼흥얼 노래를 하면서, 아이가 해바라기를 해 주기를 바란다. 쑥을 뜯든 곰취를 뜯든 온갖 풀내음을 잔뜩 느낀다. 내가 아는 풀내음이 있을 테지만 내가 모를 풀내음이 훨씬 많겠지. 아이도 아버지도 온갖 풀내음과 바람소리를 맞아들이면서 낮나절을 보낸다.

 아직 나물을 얼마 못 뜯었는데 아이는 졸립다며 그예 안아 달라는 말뿐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걱정스럽다. 어차피 나물을 뜯느라 쭈그려앉았으니 아버지 등에 엎어지라고 말한다. 아이는 등판에 찰싹 달라붙는다. 한동안 이러고 나물을 뜯다가 아이를 업는다. 업은 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나물을 더 뜯는다. 쑥은 오늘 저녁 먹을 만큼도 못 뜯었고 곰취도 이틀쯤 먹을까 말까 싶을 만큼밖에 못 뜯었기 때문에.

 그렇지만 등허리가 결린다. 아침부터 아이하고 복닥이는 하루이니까, 낮나절 십 분 남짓 아이를 업고 나물을 뜯어도 등허리가 버겁다. 포대기가 있어 아이를 꽉 업을 수 있으면 좀 오래 나물을 뜯을 수 있겠지. 이제 아이가 많이 크기는 했지만, 포대기이든 깔개이든 챙길 수 있는 어버이 노릇을 해야 하지 않겠나. 이래서야 집살림 맡은 사람이라 말하기 부끄럽기만 하다.

 졸린 아이는 등에 업혔으나 잘 생각은 않는다. 나물 뜯는 모습을 등판에서 내려다보기만 한다. 누런 빛깔, 흙빛 멧개구리가 폴짝 나온다. 아이는 올들어 처음 보는 개구리이다. 그런데, 지난해에는 개구리를 보았던가? 모르겠다. “여기 개구리 있네.” “개구리?” “응, 개구리. 자 봐. 여기 있지?” “어, 개구리야.”

 더 나물을 뜯다가는 아이도 힘들고 아버지도 힘들겠다고 느껴 숲에서 나오기로 한다. 멧길을 걸어 집으로 내려온다. 숲에서 빠져나오니 아이는 걷겠다고 한다. 집까지는 내리막이니 콩콩콩 달리고 싶은가 보다.

 아이는 집에 닿으면서 어머니를 부르고, 집으로 들어가서 이내 어머니 곁에 눕는다. 아버지는 아이 낯과 손과 발을 씻기고 새 옷을 입힌다. 새 옷으로 갈아입은 아이는 다시 눕는다. 그러고는 곧바로 곯아떨어진다. 두 시간쯤 낮잠을 자 주면 얼마나 좋을까 꿈을 꾼다. 다음달에 둘째를 낳을 어머니는 힘들어 자리에 눕고, 아버지는 첫째 아이 오줌기저귀를 삶고, 빨래 몇 점을 한다. 첫째 아이 오줌기저귀를 다 삶은 다음 둘째 아이한테 쓸 새 기저귀를 삶는다. 이 사이에 저녁으로 먹을 쌀을 씻어 불린다. 뜯은 나물은 저녁밥을 안칠 때에 흙을 씻기로 한다. 아이가 실컷 자고 일어나면, 마을 어귀 큰길가에 있는 보리밥집(이자 마을 구멍가게)으로 아이를 자전거에 태우고 가서 보리술 두 병쯤 사올까 생각한다. 오늘 하루도 어설프지만 이모저모 애쓴 나한테 주는 선물로.

 아이는 저녁나절에 자전거에 붙인 수레에 태워 준다고 하면 신나서 함박웃음을 짓겠지. 첫째 아이도 둘째 아이도 자전거수레를 오래오래 즐길 수 있도록 나 스스로 더 몸을 다스리며 잘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아버지가 몸이 오래오래 튼튼해야 아픈 옆지기 몸을 틈틈이 주무를 수 있다. (4344.4.19.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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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4-19 19:37   좋아요 0 | URL
ㅎㅎ 시골에 사시니 이런 정취도 있네요.그나저나 개구리는 참 오랫만에 보는것 같군요^^

파란놀 2011-04-20 07:06   좋아요 0 | URL
요사이는 시골에서도 개구리가 많이 사라지거든요... 약을 많이 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