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와 사진기와 책읽기


 시골집에 피아노가 들어왔다. 옆지기와 2007년 6월 5일부터 함께 살아온 지 네 해 만에 큰 살림이 하나 들어왔다. 새 피아노를 장만할 만큼 살림돈이 넉넉하지 않아 헌 피아노를 장만한다. 피아노를 장만한 돈은 아버지 어머니가 우리 식구한테 ‘딸아이를 생각해서 앞으로 잘 두라고 한 돈’을 깼다.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 된다거나 노래를 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장만하는 피아노가 아니라, 아이한테 퍽 좋은 놀잇감이 되는 피아노이기 때문에 우리 살림에 마지막 남은 목돈을 깼다.

 옆지기는 우리한테 무언가 목돈이 들어올 때에 ‘내가 바라는 파노라마사진기’를 장만하라고 으레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나 한 번, 두 번, 세 번 목돈을 벌었던 때에 이 목돈은 고스란히 살림살이를 장만하거나 아픈 집식구한테 들이는 돈으로 썼다. 내가 바라는 파노라마사진기는 몇 해 사이에 값이 껑충 올라, 이제는 삼백만 원쯤을 들여야 장만할 수 있는데, 이마저 물건이 없어서 살 수 없단다. 줄서서 기다리든 웃돈을 얹든 만지기 힘들단다.

 짐차에서 피아노를 내린다. 큰방 아이 놀잇감을 놓던 다용도장을 옆으로 밀고 피아노를 놓는다. 아직 피아노 자리를 잡지 않았으나, 아이는 걸상에 척 올라앉아 얼른 눌러 보고 싶다. 아이는 다른 곳에 마실을 갈 때에 피아노가 보이면 어김없이 피아노에 달라붙곤 한다. 우리가 아이한테 피아노를 딱히 가르치거나 보여준 적이 없는데, 용하게 피아노를 좋은 놀잇감으로 삼는다. 다른 어느 악기보다 피아노를 좋아한다. 다른 아이들도 피아노를 좋아할까. 다른 아이들은 피아노를 왜 좋아할까. 건반을 통통 누르면서 나는 다 다른 소리와 느낌을 얼마나 좋아할까.

 시골집으로 옮긴 지 한 해가 거의 다 된 오늘 들어온 피아노 앞에 앉아 본다. 건반을 몇 눌러 본다. 나도 일고여덟 살 때에 피아노학원에 다녔던 일을 아주 어렴풋하게 떠올린다. 아주 못 치지는 않았으나 또 잘 치지도 않았다. 집에서는 종이 건반을 바닥에 놓고 신나게 연습해서 눈을 감고도 얼마든지 칠 수 있게끔 애쓰곤 했다. 학원에 가서 건반을 눌러 볼 차례가 되던 때를 얼마나 기다렸으며, 내가 내 손가락을 놀려 건반을 퉁길 때에 나는 소리가 얼마나 좋고 부드러웠는지 모른다. 잘 쳐서가 아니라, 이런 피아노를 퉁길 수 있는 일이 기뻤다.

 지지난달부터 한 달 벌이가 겨우 백만 원이 되었다. 지지난달까지는 한 달 오십만 원 안팎 벌이로 어찌저찌 살림을 꾸렸다. 시골집에서는 달삯을 내지 않고, 얻은 집에서 살아가니까 밥값하고 보일러 기름값을 댈 수 있으면 살 만하다. 여기에 책을 사느라 들이는 값이 있다. 다달이 오십만 원으로는 퍽 빠듯하지만, 아주 못 살지는 않는다. 책을 내어 받는 글삯은 아직 없지만 올해에는 처음으로 글삯 벌이를 할 수 있을까 하고 꿈을 꾼다. 이런 살림살이였기에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리한테 목돈을 얼마쯤 쥐어 주셨겠지. 그럭저럭 살 만하거나 이냥저냥 버틸 만한 살림이라면 따로 우리한테 도움돈을 줄 사람이 없으리라.

 한낮이 되어 옆지기가 피아노를 친다. 아이는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마당에서 춤을 추며 논다. 볕바라기를 하면서 맞은편 우리 도서관 유리문에 제 모습을 비추면서 논다. 옆지기가 피아노를 쉬면 피아노 쳐 달라고 마당에서 소리를 빽 지른다. 나는 고단한 몸을 쉬려고 누웠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사진기를 쥐고는 두 사람 모습을 이쪽에서 찍고 저쪽에서 찍는다.

 이제 옆지기는 마당으로 나가서 볕바라기를 함께 한다. 아이는 자전거를 탄다. 오늘은 제법 발판을 구른다. 한두 번 앞으로 구르고, 한두 번 뒤로 구른다. 다리도 조금 길어졌고 다리힘도 조금 더 붙었는가 보다. 앞으로 하루하루 더 많이 구를 테고 더 많이 굴릴 수 있겠지. 볕바라기를 하는 옆지기하고 자전거를 타는 아이 모습을 말끄러미 바라보며 사진으로 담는다.

 나는 파노라마사진기를 써서 내가 좋아하는 헌책방이랑 인천골목길을 사진으로 담는 꿈을 꾸며 살았다. 이러한 꿈은 살림집을 시골로 옮기며 더는 못 품는다. 그저 내 손에 쥔 작고 가벼운 사진기로 내가 찍을 수 있는 모든 솜씨를 부려서 내 사랑을 담아서 찍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따지고 보면, 내 사진기가 훨씬 빼어나다 해서 우리 살붙이들 살아가는 모습을 더 사랑스럽게 찍을 수 있거나 더 즐겁게 찍을 수 있지는 않다. 시야율(화각 비율)이 떨어진들 어떠하고, 화소수가 낮으면 어떠한가. 대형사진기를 쓴대서 더 아름답다 싶은 사진을 얻지는 않는다.

 집식구들이 온누리에서 가장 아름답거나 가장 좋은 사람이라고는 여기지 않는다. 다만, 내가 살아가는 이 보금자리에서 누구보다 사랑하며 아낄 사람이라고 느낀다. 서로서로 아끼면서 좋아하고 보듬으며 살아야 즐겁다고 느낀다.

 나는 피아노를 칠 줄 모르고, 피아노를 배울 겨를이 없다. 밥을 하고 빨래를 하며 이모저모 서툴게 살림을 꾸리면서 피아노까지 할 틈이 없다. 옆지기는 사진을 몇 장 찍을 수는 있으나 사진기를 옳게 다룰 줄은 모르며, 사진기를 배울 겨를이 없겠지. 아이는 어머니하고 아버지하고 함께 살아가면서 무엇을 차근차근 배울까. 아이는 어머니랑 아버지랑 함께 지내면서 무엇을 바라보며 하루하루 어떤 생각과 이야기를 쌓을까.

 아이는 어린 나날부터 사진기를 놀잇감으로 삼으며 놀았는데, 이제부터는 피아노를 놀잇감으로 삼으며 놀겠지. (4344.4.20.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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