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쪽지 2011.4.25.
 : 자전거수레에서 잠든 아이


- 거의 새벽부터 일어나서 낮잠 없이 놀던 아이하고 하루 내내 부대끼자니 기운이 다 빠진다. 아이 또한 기운이 다 빠졌겠지. 그래도 아이는 졸음을 꾹꾹 참으면서 논다. 마치 오늘이 제 마지막날이라도 되는 듯 논다. 눈이 벌개서 졸린 아이를 바라본다. 아이가 참 안쓰럽다. 어쩌면, 아이는 ‘나를 더 신나게 놀게 해서 아예 곯아떨어지도록 해야 하지 않아?’ 하고 묻는 듯하다. 아이를 안고 자전거마실을 하자고 생각한다. 봄날이지만 바람이 꽤 불어 쌀쌀하기 때문에 멀리까지는 못 간다. 그저 마을 어귀 보리밥집까지만 달리기로 한다.

- 아버지가 옷을 갈아입는 모습을 본 아이는 어느새 콩콩 뛰면서 “아버지, 나도 같이 가요!” 하고 소리친다. 아이가 서두른다. 아이 어머니가 아이한테 서두르지 말라고, 옷 챙겨 입고 양말 신으라고 이른다. 아이는 혼자서 잘 신는 양말을 영 못 신는다. 졸린데다가 마음이 바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아이 양말을 한 짝씩 천천히 신긴다. 웃옷을 단단히 입힌다. 볼을 토닥토닥 하면서 “자, 이제 가 볼까.” 하고 말한다.

- 도서관에서 수레와 자전거를 꺼낸다. 마당에서 뚜껑을 연다. 아이를 번쩍 안아 자리를 잡고 안전띠를 맨다. 이불을 잘 덮고 여민다. 아이는 싱글벙글 웃지만, 웃음에는 졸음 기운이 고스란히 묻는다.

- 이제 자전거를 몬다. 이웃 논둑을 가로지르며 달리는 길에서 아이는 소리소리 높이며 노래를 부른다. “아버지! 달려요?” “응, 자전거 타고 달리지.” 삐삐 노래를 부르고 이 노래 저 노래를 마음껏 부른다. 시골자락에서 노래하는 아이를 수레에 태운 자전거가 논둑길을 지나고 마을길을 지나 큰길로 접어든다.

- 보리밥집에 닿아 반찬을 조금 얻고 아이 과자를 두어 점 산다. 보리밥집 아주머니가 아이한테 바나나를 하나 떼어 준다. 아이는 방글방글 웃으면서 좋아한다. 인사를 꾸벅 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아이는 한손에 바나나를 쥔 채 수레에 탄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이는 퍽 조용하다. 슬금슬금 뒤를 본다. 아이 눈이 살며시 감길락 말락 한다. 이제 드디어 주무시는구나. 자전거를 천천히 달린다. 봄바람을 살랑살랑 맞으면서 천천히 달린다. 집 앞에 이를 무렵에는 아예 자전거에서 내려 천천히 끈다. 이제 막 잠들었으니까 조금 깊이 잠들 때까지 지켜볼까.

- 집에 다 왔다. 아이를 살며시 안아 방으로 들어가도 아이는 안 깬다. 바나나 쥔 손에서 힘이 풀려 바나나가 톡 떨어진다. 아이를 바닥에 눕힌다. 이불을 덮는다. 깨지 않는다. 한두 시간 자면 일어나겠지 하고 생각하며 저녁에 아이가 일어나면 무엇을 먹일까 생각하며 국을 끓인다. 그렇지만 아이는 깨지 않는다. 저녁 내내 그저 곯아떨어진다. 이러다가 새벽 한 시에 깬다. 오줌이 마렵다며 새벽 한 시에 깨어난 아이는 다시 잠들지 않는다. 새벽 두 시 무렵, 아이 어머니가 일어나서 아이한테 밥을 차려 준다. 새벽 한 시에 깨어 새벽 두 시에 밥을 먹는 아이라니, 참. 아이도 아이 어머니도 아이 아버지도 밤새 잠을 거의 못 자거나 제대로 못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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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넨과 거즈 1
아이자와 하루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빈틈이 많아도 사랑스러운 삶
 [만화책 즐겨읽기 35] 아이자와 하루카, 《리넨과 거즈 (1)》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예쁜 사람은 예쁘게 살아가고, 미운 사람은 밉게 살아갑니다.

 사람들이 사랑합니다. 예쁜 사람은 예쁘게 사랑하고, 미운 사람은 밉게 사랑합니다.

 새로 맞이한 봄날, 논둑을 거닐거나 숲속을 걷거나 멧길을 오르면, 날마다 새로운 봄내를 맡습니다. 집안에 들어앉았어도 창밖으로 펼쳐지는 모습을 보면서 나날이 새로워지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집안에서도 바람소리와 새소리를 듣지만, 집밖으로 나가면 훨씬 드넓은 바람소리와 새소리를 듣습니다. 비가 퍼부을 때에는 빗소리가 얼마나 온 마을을 휩싸는지를 새삼스레 느끼면서 빗소리를 듣습니다.

 지난겨울, 눈이 펑펑 퍼붓던 때에는 온 마을이 고요하게 잠듭니다. 눈은 소리를 잠재웁니다. 눈은 소리를 먹으면서 마을을 조용히 하얗게 묻습니다. 봄날부터 가을날까지는 비가 마을을 씻습니다. 모든 소리를 부딪치게 하면서 비가 내립니다. 눈은 모두를 감싸듯이 덮으며 조용하게 하고, 비는 모두를 깨우면서 시끄럽게 합니다.

 눈이 그치고 나면 이제 이 눈을 쓸어야지 하고 생각하지만, 눈을 쓸기 앞서 아이를 불러 아이와 함께 눈밭을 바라보곤 합니다. 비가 쏟아지면 집에서 조용히 옹크리지만, 집에서 옹크리더라도 텃밭을 내다보며 이 빗결에 씨앗이 잘 자라 주려나 하고 헤아립니다. 엊그제 바람이 참 모질게 불었는데, 모진 바람을 맞은 토마토 모는 뽑힐 듯 말 듯하면서 안 뽑혔습니다. 거센 바람을 맞으며 흙바닥에 머리를 콩콩 박습니다만, 이렇게 머리를 콩콩 박으면서도 뽑히거나 꺾이지 않아요.

 김수영 시인은 풀이 눕지만 다시 일어선다고 노래했는데, 김수영 시인이 노래한 풀을 아주 새롭게 다시 보며 느꼈습니다.


- 하늘은 푸르고, 밥은 맛있게 먹을 수 있고, 몸은 건강하고, 난 정말 행복한 사람. (4쪽)
- 바느질하는 시간이 좋아. 아무 생각도 않고 몰두할 수 있거든. 슬픈 일도 까맣게 잊을 수 있지. (22쪽)



 멧길을 거닐면 다람쥐를 곧잘 만납니다. 다람쥐가 저를 아직 알아채지 않았으면 먹이를 찾으며 부산을 떨거나 바위에 앉아 해바라기를 합니다. 이러다가 저를 알아채면 화들짝 놀라며 부리나케 멧골 깊이 내뺍니다.

 논둑길을 거닐면 왜가리나 해오라기를 더러 만납니다. 왜가리나 해오라기가 개구리를 잡아먹느라 바쁘면 가까이에서 지나가도 못 알아채지만, 사람 낌새가 난다 싶으면 제가 손에 아무것도 안 들었어도 깜짝 놀라면서 큰 날개를 펼쳐 탁탁 소리를 내며 멀리멀리 날아갑니다.

 서울에서 찾아온 손님이 타고 온 자동차를 살짝 얻어타고 마을 어귀 밥집에 함께 다녀오면서 곰곰이 생각합니다. 늘 걷거나 자전거로 오가던 이 길을 자동차에 느긋하게 앉아 달리니 아주 빨리 오갈 뿐 아니라 다리힘이 든다든지 등판에 땀이 흐른다든지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바깥 바람이나 소리는 하나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재빨리 지나가는 자동차에서는 길가 나무나 풀이나 꽃을 하나도 알아채지 못합니다. 휙휙 스쳐 지나가기 때문에 눈을 밝히고 쳐다본다 한들 제대로 즐기거나 느낄 수 없어요.


- “여전히 혼자 신선놀음이네. 독신은 속 편해서 좋겠다.” “그런 소리 마. 코코미가 카와노를 어찌나 따르는지 하루 종∼일 붙어 다니는 바람에 그 애, 아무것도 못했어.” (17쪽)
- “코코미가 많이 외로운가 봐. 언니, 코코미와 좀더 함께 있어 주는 게.” “뭐야! 난 말이지! 나도, 코코미와 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너처럼 태평하게 너 좋아하는 일이나 하며 사는 사람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28쪽)



 집에서 집식구 옷가지를 늘 손빨래로 건사합니다. 손으로 빨래해서 널고 말리며 갭니다. 네 살을 먹은 아이는 제 아버지가 빨래를 하거나 옷을 갤 때면 옆에 꼭 달라붙습니다. 아이는 빨래하는 모습이나 옷 개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는 저도 하고 싶다며 엉겨붙습니다.

 집식구 옷가지를 손으로 빨래하다 보면, 어디가 얼마만큼 더러워지거나 헤졌는가를 금세 알아챕니다. 손으로 만지고 손으로 비비며 손으로 헹구니까 한결 잘 깨닫습니다. 빨래기계에 넣는다 하더라도 다 손으로 넣고 손으로 꺼내니, 누구나 느낄 수 있겠지요. 어느 집이든 일거리가 많을 텐데, 빨래를 손으로 한다면 다른 집일이나 집살림을 건사할 겨를이 크게 줄어든다 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아이가 네 살쯤 자라고 보니 아이 옷가지 빨래가 확 줄었습니다. 나중에 아이가 크면 ‘아이 몸크기만큼 옷가지 빨래가 는다’고 할 테지만, 오줌기저귀랑 똥기저귀 빨래하는 품보다는 적지 않겠느냐 하고 어림해 봅니다. 뭐, 빨래거리가 더 많을 수 있겠지요. 더 많아지면 더 많아지는 대로 받아들이면 되고, 더 줄면 더 준 대로 맞아들이면 돼요. 이러거나 저러거나 내 사랑하는 살붙이 옷가지이거든요.

 사랑스러운 옆지기 아프거나 쑤신 허리와 팔다리를 조물조물 주무르듯이 옆지기 옷가지를 조물조물 비비거나 헹굽니다. 사랑스러운 아이를 안거나 어르거나 달래듯이 아이 옷가지를 살며시 비비거나 헹굽니다. 내 옷은 좀 막 빨고 막 입습니다.


- “즐거운 일을 떠올리며 난 행복하다고 생각하려 하는데, 그래도 역시, 좋아하는 사람이 곁에 없는 건, 참 쓸쓸해.” (37쪽)
- “앞으로는 아동복도 시작해 볼까 하고요. 뭘 만들까 하는 생각에 오랜만에 막 설레고 그래요.” (42쪽)


 만화책 《리넨과 거즈》를 봅니다. 손으로 바느질을 하면서 옷이나 여러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 부대끼는 이웃하고 얽힌 삶을 다루는 만화입니다. 손으로 하는 일이든 기계로 하는 일이든 언제나 품이 듭니다. 프레스공장에서 같은 물건을 수없이 빠르게 찍어내듯, 옷가지를 빠르게 똑같이 수없이 뜨거나 짜거나 깁지 못합니다. 한 땀씩 바느질을 하거나 재봉틀을 돌리면서 ‘이 옷을 입을 사람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갈까’를 생각합니다. 천을 고르고 실을 살피면서 ‘어떤 빛깔 어떤 무늬로 예쁘고 쓸모있게 옷 한 벌을 지을까’ 하고 곱씹습니다.

 집에서 살림하는 사람은 날마다 새로 밥을 하고 새로 청소를 하며 새로 설거지를 합니다. 아이하고 날마다 새로 사랑을 나누고 새로 이야기꽃을 피우며 새로 손을 잡고 뛰어놉니다.

 새 끼니에 새로 밥을 차리면서 오늘 이 밥을 함께 먹을 살붙이들이 어떠한 느낌과 맛과 사랑으로 곱고 즐거이 냠냠짭짭 하려나 헤아립니다. 눈 비비고 일어난 아이한테 새로 옷을 입히면서 오늘은 어떤 모습 어떤 얼굴 어떤 이야기로 하루를 보내려 할까를 떠올립니다.

 “뭘 만들까 하는 생각에 오랜만에 막 설레”는 사람처럼 ‘무얼 마련할까 하는 생각으로 늘 설레’는 집일꾼이거나 집살림꾼입니다. 아이하고 날마다 같은 노래를 부르더라도 어제는 어제 느낌이고 오늘은 오늘 느낌이에요. 아이 노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더라도 어제는 어제 모습이고 오늘은 오늘 모습입니다.

 꼭 비싼 바깥밥을 사다 먹여야 사랑스레 크는 아이가 아닙니다. 자가용을 태우거나 놀이동산에 데리고 다녀야 즐거워 하는 아이가 아니에요. 무등을 태워도 좋아하는 아이입니다. 그저 손을 잡고 숲속을 누벼도 좋아하는 아이예요. 아침에 일어난 아이를 불러, 옆에서 아버지가 당근을 갈아 ‘자, 이제 거의 다 됐네. 조금만 기다려. 숟가락 챙기고.’ 하고 말하면서 당근 한 뿌리 다 갈아 그릇에 소복하게 담아서 내밀 때에도 좋아하는 아이입니다.


- “코코미 덧옷이 아주 인기예요. 다들 예쁘다고.” “맞아! 친구들이 다 부럽다, 부럽다 했어.” (55쪽)
- “마침 잘 만났다. 그 덧옷 말이에요. 반 엄마들한테 얘기했더니 다른 사람들도 몇 명 만들어 줬으면 하던데! 그리고 바자회 수제품은 몇 개나 만들 수 있겠어요? 10개 정도는 문제 없죠?” (68쪽)


 만화책 《리넨과 거즈》는 남다를 구석이 없는 여느 사람들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그냥저냥 수수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손뜨개를 하건 발뜨개를 하건 그닥 대수롭지 않습니다. 옷뜨개를 하건 마음뜨개를 하건, 저마다 제 삶을 어여삐 뜰 수 있으면 기쁩니다.

 돈이 많아도 넉넉하면서 즐거운 삶이 될 수 있고, 돈이 없거나 모자라도 넉넉하면서 즐거운 삶이 될 수 있어요. 값있는 물건을 쓰거나 값진 사진기를 갖출 때에도 즐거운 삶이 될 테지만, 값었다는 싸구려 물건을 쓰거나 사진기라곤 아예 없더라도 즐거운 삶이 돼요. 사진은 기계가 아닌 마음으로 찍거든요. 사랑은 돈이 아닌 마음으로 나누거든요.

 만화책 《리넨과 거즈》는 바로 ‘마음으로 나누는 사랑’을 차근차근 펼쳐 보입니다. 빈틈이 많아도 사랑스러운 삶을 일구는 사람들 모습을 조곤조곤 내보입니다. 어쩌면, 빈틈이 많아서 사랑스러운 삶이요 사랑이며 꿈과 보람일는지 모릅니다. (4344.4.27.물.ㅎㄲㅅㄱ)


― 리넨과 거즈 1 (아이자와 하루카 글·그림,최윤정 옮김,학산문화사 펴냄,2011.3.25./4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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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1-04-27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래서 바느질하는 시간이 좋아요.
아무 생각도 않고 몰두할 수 있거든요, 슬픈 일도 까맣게 잊을 수 있고요~

리뷰가 참 사랑스럽습니다.

파란놀 2011-04-27 10:09   좋아요 0 | URL
저는 뜨개질은 못해도 바느질을 할 때라든지, 빨래를 하거나 밥을 하거나 아이를 씻기거나 할 때에 여러모로 즐거워요 ~ ^^

염소자리랩소디 2011-06-17 0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좋아서 관심 가지고 있던 만화인데 리뷰를 보니 역시 재밌을 것 같네요.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파란놀 2011-06-17 10:37   좋아요 0 | URL
그나저나 둘째 권이 안 나오네요... ㅠ.ㅜ
 



 단풍꽃과 책읽기


 단풍꽃을 본다. 국민학교를 다니던 때에 보고는 단풍꽃을 아주 오랜만에 본다. 단풍꽃이 지고 단풍씨가 맺으면 팔랑팔랑 팔랑개비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땅으로 내려온다. 단풍씨가 저절로 떨어지기를 나무 밑에서 기다리기도 하지만, 손으로 단풍씨를 똑 따서는 위로 던져 빙글빙글 돌며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기도 한다.

 이제 이 단풍꽃 봉오리가 흐드러지게 터지고 나면 단풍씨가 알알이 맺힐 테고, 이 단풍꽃이며 단풍씨이며 아이와 함께 가만히 바라보면서 멧자락 나무살이를 껴안으리라 본다.

 내가 이름을 아는 나무를 바라본다. 내가 이름을 모르는 나무를 바라본다. 내가 이름을 아는 나무는 이름을 아는 대로 반가이 줄기를 쓰다듬으면서 바라본다. 내가 이름을 모르는 나무는 이름을 모르는 대로 살가이 잎사귀를 어루만지면서 바라본다. 새로 돋은 잎을 하나 골라 똑 뜯어서는 입에 넣는다. 살살 씹는다. 그리 멀지 않던 지난날, 먹을거리가 없던 시골사람은 느티나무 잎을 뜯어서 떡으로 쪄서 먹기도 했다고 들었다. 느티나무잎을 뜯어서 먹어 보면 퍽 먹을 만하다. 다른 나뭇잎도 뜯고 풀잎을 함께 뜯어 먹으면 꽤 괜찮다. 그러나 나무도감이나 식물도감에는 나뭇잎을 어떻게 먹으면 되는지, 나뭇잎마다 맛이 어떻게 다른지는 안 적힌다. 단풍잎을 먹어 보면 어떨까. 아직 활짝 펼쳐지지 않은 여린 단풍잎이라면 살짝 뜯어서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어제는 햇살을 듬뿍 받는 단풍꽃을 바라보았고, 오늘은 빗물을 흠뻑 머금는 단풍꽃을 바라본다. 사람들은 가을날 단풍잎이 바알갛게 물든 모습이 곱다며 ‘잎사귀 구경’을 다니는데, 단풍꽃이 감붉은 빛깔로 어여삐 봉오리를 터뜨릴 때에 ‘꽃 구경’을 다니는 일이 없다. 어쩌면, 단풍나무에 단풍꽃이 피는 줄을 모르기 때문은 아닐까. 감나무에는 감꽃이 피고, 느티나무에는 느티꽃이 피며, 오얏나무에는 오얏꽃이 핀다. (4344.4.26.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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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래를 하지 않은 날


 요즈음 들어 아이 옷가지 빨래가 크게 줄었다. 벌써 닷새 남짓인가, 밤나절 아이 오줌기저귀 빨래가 나오지 않는다. 아이 오줌기저귀 빨래가 나오지 않으니 빨래할 일이 크게 줄어든다. 옆지기 빨래라든지 아이 겉옷 빨래야 하루쯤 미루어 몰아서 해도 되니까, 요사이는 빨래를 안 하고 건너뛰는 날이 곧잘 있다. 나는 내 옷을 더디 빤다. 식구들 빨래가 적은 날 내 옷을 한두 점쯤 끼워서 빤다.

 얼마 앞서까지만 하더라도 날마다 한 시간 즈음 빨래를 하지 않으면 하루치 빨래라 하더라도 잔뜩 쌓이는 나날이었는데, 아이가 밤에 오줌을 잘 가리니까 이렇게도 빨래가 줄어드는구나. 놀라우면서 새삼스럽고, 반가우면서 고맙다. 그렇지만 다음달에 둘째가 태어나면 다시금 빨래쟁이 나날을 맞이할 테지. 어쩌면 우리 첫째는 제 어버이가 그동안 빨래살이로 몹시 고되었으니 한동안 쉬게 해 주는지 모른다. 둘째가 태어나면 날이면 날마다 기저귀이며 배냇저고리이며 똥옷 오줌옷, 여기에 이부자리와 물막이깔개까지, 빨래가 넘치고 넘치리라. 첫째와 함께 살아오며 실컷 겪었으니까.

 날마다 빨래살이를 하는 동안 ‘이다지도 많은 빨래를 언제까지나 이렇게 해야 하나. 우리 아이는 언제쯤 혼자서 제 옷을 빨래할 날을 맞이하려나.’ 하고 노래를 했다. 아이가 커서 스스로 제 옷을 빨래할 즈음 된다면, 아이가 더 커서 제 어버이만큼 자라나 사랑하는 짝꿍을 만나고 혼인을 하거나 제금을 나서 제 아이를 낳아 키우며 제 아이 옷가지를 빨래한다면 제 어버이가 저를 낳아 키울 때에 어떠한 빨래살이를 치러야 했는지 몸으로 느낄 테지.

 머리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오로지 몸으로 알 뿐이다. 책을 수없이 읽는달지라도 알 수 없다. 오직 스스로 몸을 바쳐 겪을 때에 알 뿐이다.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는 책으로 낼 수 없다.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는 스스로 하루하루 보내는 나날이 주름살과 꾸덕살에 아로새겨질 뿐이다. (4344.4.26.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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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 - 사진과 삶에 관한 단상
필립 퍼키스 글.사진, 박태희 옮김 / 안목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더 나은 사진장비’를 놓고 망설이는 분한테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33] 필립 퍼키스,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



- 책이름 :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
- 글 : 필립 퍼키스
- 옮긴이 : 박태희
- 펴낸곳 : 안목 (2011.2.8.)
- 책값 :9500원



 (1) 사진이란 무엇인가


 더 나은 사진장비는 있습니다. 좀 떨어지는 사진장비 또한 있습니다. 필름사진기이든 디지털사진기이든 값진 장비가 있고 값싼 장비가 있습니다. 그런데, 더 나은 사진장비이든 좀 떨어지는 사진장비이든, 언제나 ‘사진을 찍도록 이끄는’ 기계입니다.

 더 나은 사진장비를 쓰면 시야율이 높을 뿐 아니라 화질이 한결 뛰어납니다. 화소수가 높은 사진장비를 쓸 때에는 사진 하나를 크게 만든다 하더라도 입자가 덜 깨지거나 안 깨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입자가 보드라운 사진이든 입자가 거친 사진이든, 늘 ‘사진다울 때에 사진’이라고 일컫습니다.


.. 전시장에 간다. 눈길을 끄는 사진 앞에 선다. 그것을 5분 동안 바라본다. 사진에서 눈을 떼지 말아야 한다 ..  (15쪽)


 필름은 감도 50부터 감도 3200까지 있습니다. 필름은 감도 100만 있지 않습니다. 흑백필름을 쓰던 예전 사람들은 감도 400을 곧잘 썼다지만, 흑백필름 또한 감도 100이나 감도 200이 있으며, 감도 800이나 감도 1600이나 감도 3200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감도 100 필름을 400으로 올려서 찍습니다. 누군가는 감도 400 필름을 1600으로 올려서 찍습니다.

 입자가 보드라운 결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입자가 거친 느낌을 즐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풍경사진을 찍을 때에는 대형원판으로 찍어야 비로소 ‘먼 곳과 가까운 곳’이 작은 데까지 살아난다고들 말합니다. 틀림없이 맞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풍경사진이기 때문에 언제나 보드라운 결로 사진을 찍어야 하지 않아요. 풍경사진이든 얼굴사진이든 패션사진이든 다큐사진이든 한결같이 ‘사진’이에요. 사진이라는 테두리에서만 같은 울타리일 뿐, 저마다 홀가분하게 제 길을 걸을 노릇입니다. 다 같은 사람이라지만 다 같은 길을 걸어야 하지 않아요. 저마다 좋아하는 길을 저마다 제 힘과 슬기와 삶에 맞추어 걸을 뿐입니다. 농사꾼이 되고픈 사람하고 버스기사가 되고픈 사람이 똑같은 길을 걸을 까닭이 없어요.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고픈 사람이랑 학자나 교사가 되고픈 사람이 비슷한 길을 걸어야 하지 않아요. 돈이 많은 사람하고 돈이 적은 사람하고 꼭 같은 자리에 서야 하지 않습니다.

 무언가 더 누린대서 더 낫거나 좋은 삶이 아닙니다. 무언가 적게 누린대서 덜 떨어지거나 나쁜 삶이 아니에요. 일본사람 미우라 아야코 님은 몸이 아파 죽을는지 모르는 채 오래오래 병자리에 누워 지냈지만, 고마운 하늘 뜻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처음부터 고맙게 받아들이지는 못했다지만, 나중에 고맙게 받아들이면서 당신 삶이 달라졌다고 해요. 아픈 사람은 아프기 때문에 고맙고, 튼튼한 사람은 튼튼하기 때문에 고마운 노릇이에요. 혼자 살아가면 혼자 살아가는 대로 고맙습니다. 여럿이 복닥거리며 살아간다면 이대로 고맙겠지요.

 사진기는 1회용 사진기부터 여러 천만 원에 이르는 사진기까지 있습니다. 몹시 이름나고 아주 잘 팔린 사진기부터 그닥 많이 알려지지 못한 사진기까지 골고루 있습니다. 같은 회사 사진기라 하더라도 기종에 따라 빛느낌이나 질감이 조금씩 다르기 마련입니다. 같은 기계라 하더라도 다루는 사람 손길과 마음에 따라 빛느낌이나 질감이 조금씩 새로워지기 마련입니다.

 사진은 기계 단추만 누른대서 이루어지는 삶이 아닙니다. 기계 단추만 누른대서 이루어지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계 단추를 누르는 사람 넋과 얼이 스미는 사진이에요. 기계 단추를 누르기까지 저마다 제 삶을 어떻게 보듬으며 살아왔는가 하는 꿈과 뜻이 서리는 사진입니다.

 곧, 내가 사랑하는 삶결 그대로 내가 빚는 사진결이 됩니다. 내가 좋아하는 삶무늬 그대로 내가 일구는 사진무늬가 돼요. 내가 보살피는 삶자락 그대로 내가 껴안는 사진자락이 될 테고, 내가 아끼는 삶길 그대로 내가 걸어갈 사진길이 되기 마련입니다.


.. ‘무엇’을 상상하려고 하면 우리는 그 말의 족쇄에 걸려 그 ‘무엇’밖에는 상상할 수 없게 된다 ..  (27쪽)


 인천에서 살던 때, 인천으로 ‘골목길 사진’을 찍으러 찾아오는 사람이 꽤 많았습니다. 이들을 데리고 인천 골목길 골골샅샅 몇 시간씩 누벼 보기도 했습니다. 누구든 혼자서 하루 예닐곱 시간을 천천히 걸어다닌다면 굳이 저 같은 사람하고 함께 골목길을 다니지 않아도 됩니다. 굳이 저 같은 사람하고 함께 골목마실을 해야 하는 까닭이라면, 늘 오붓하거나 호젓하게 오래오래 골목동네를 즐기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골목길 사진을 찍으러 찾아오는 사람들은 늘 ‘골목 사진을 찍어야지!’ 하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더 깊은 골목을 봐야 한다!’라느니 ‘더 골목다운 골목을 봐야 해!’ 하는 생각에서 풀리지 못합니다.

 인천에서 살던 지난날, 저는 날마다 서너 시간씩 옆지기나 아이를 데리고 골목을 구비구비 거닐었습니다. 혼자서 거닐 때에는 날마다 대여섯 시간은 가벼이 걸었어요. 꼭 어느 골목 어느 모습 어느 이야기를 빚으려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따로 무슨 사진을 찍겠다거나 반드시 어디를 다녀 보거나 느껴 보려 하지 않았어요. 집식구하고 골목마실을 하는 동안 꼭 한 가지만 헤아렸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 터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하고 봄·여름·가을·겨울 맑거나 비오거나 눈오거나 바람부는 온갖 삶자락을 함께한다고 헤아렸습니다.

 골목이기 때문에 더 사람내음이 나지 않습니다. 골목이기 때문에 더 가난해 보이지 않습니다. 골목이기 때문에 더 따스한 삶터가 아닙니다. 골목이기 때문에 더 오래되거나 낡아 보이지 않습니다. 골목이기 때문에 더 사진거리가 될 만하지 않습니다. 골목이기 때문에 곧 사라질 추억어린 곳이 될 수는 없습니다.

 골목은 그저 골목입니다. 시골은 그예 시골입니다. 큰도시는 그냥 큰도시입니다.

 골목집도 집이고 아파트도 집입니다. 굴피집도 집이고 풀집도 집입니다. 흙으로 집을 짓고 짚으로 지붕을 이어야 가장 아름다운 집이 되지 않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집이란, 나 스스로 내 삶을 사랑하면서 아름답게 살붙이랑 어울리겠다는 꿈을 꽃피우는 집을 가리킵니다. 아파트도 얼마든지 아름다운 집일 수 있고, 아파트도 얼마든지 아름다운 사진거리가 됩니다.

 기찻길이든 뱃길이든 하늘길이든 땅밑길이든 골목길이든 매한가지입니다. 오솔길이든 멧길이든 물길이든 바닷길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더 나은 모습이란 없습니다. 덜 떨어질 모습이란 없습니다. 예쁘장하다는 모델을 세워 놓고 찍어야 예쁜 얼굴 사진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값진 옷을 입히고 찍어야 패션사진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가난하거나 따돌림받는 사람들을 애써 찾아다니며 찍어야 다큐사진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사진은 언제나 사진이 될 때에만 사진입니다. 야구 경기를 하는 이들이 1등을 해야만 야구를 하고 막등이나 가운데쯤 자리할 때에는 야구를 안 한다 할 수 없습니다. 2등이나 3등쯤은 차지해야 비로소 농구를 하거나 배구를 한다고 하겠습니까. 1등을 했다지만 참말 1등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하겠습니까.

 사진은 늘 사진이어야 합니다. 사진으로 장난을 쳤으면 ‘사진 장난’이지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사진으로 돈벌이를 한다면 ‘사진으로 하는 돈벌이’이지 사진이 될 수 없습니다. 사진으로 이름값을 높인다든지 특종을 노린다든지 무슨 왜곡을 한다면 모두 ‘이름값 높이기’나 ‘특종 노리기’나 ‘왜곡 보도’에 머물 뿐, 사진이라는 데에 이르지 못해요.

 이리하여, 사진기자일 때에 사진을 찍는 기자라고 할 수 있기도 하지만, 사진기자이면서 사진 노릇도 기자 노릇도 못한다 할 수 있습니다. 사진작가라는 이름을 내건다지만 막상 사진을 빚는 사람 노릇을 못하는 사람이 대단히 많습니다.

 책을 읽었다 해서 다 책읽기가 되지 않습니다. 짝꿍하고 사귀며 혼인을 했대서 다 혼인살이가 아닙니다. 사랑이 없이 읽은 책이라면 앎조각만 갖다 맞추는 ‘지식쌓기’입니다. 사랑이 없이 맺은 짝꿍이라면 혼인이 아닌 ‘계약 동거’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사랑이 있을 때에 사진입니다. 사랑이 없는데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사랑을 담은 손길로 기계를 매만지며 일구는 사진입니다.


 (2) 두 번째 나오는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노트》


 2007년 6월에 인천에서 ‘사진책 도서관’을 연 뒤부터 곧잘 ‘사진작가’나 ‘사진즐김이’를 만났습니다. 사진책 도서관이라는 곳을 열기 앞서까지는 ‘사진작가’를 만날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언제나 만나는 사람이라면 ‘사진즐김이’뿐이었습니다.

 2010년 6월에 인천살림을 모두 추슬러서 충주 멧골마을로 옮겼습니다. 도시에서는 더 달삯을 버틸 수 없을 뿐더러, 집식구들 몸을 생각해서 시골로 옮기기로 했습니다. 시골마을로 깊이 들어가니까 이제는 사진작가라 하든 사진즐김이라 하든 거의 만나지 않습니다. 이제는 언제나 집식구하고 어울리면서, 집식구하고 복닥이는 사진을 시골자락에서 혼자 즐깁니다.

 인천에서 지낼 때이든 충주 멧골마을로 들어온 뒤이든, 사진과 얽힌 사람을 드문드문 만나는 자리에서 ‘책 하나 소개’해 달라는 이야기를 듣거나 ‘책 하나 선물로 사 주는’ 때에는 으레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노트》를 꼽곤 했습니다. 사진길을 처음 밟는 사람한테이든, 사진길을 퍽 오래 밟았다는 사람한테든,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노트》만큼 사랑스러운 사진동무는 드물다고 느꼈습니다.

 이러던 어느 날, 2005년에 눈빛출판사에서 처음 나온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노트》가 판이 끊어졌다는 이야기를 문득 듣습니다. 깜짝 놀랍니다. ‘참말인가? 이런 책이 참말 판이 끊어질 수 있나? 출판사 누리집에서 이 책이 꽤 잘 팔린다고 늘 밝혔다고 떠오르는데?’ 하고 생각하면서, 헌책방마실을 할 때에 이 책이 나오는가를 눈여겨보았습니다. 그러고는 두 번 이 책을 다시 장만합니다. 왜냐하면 새책방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요. 2005년에 처음 나왔을 때에 장만한 책은 내 도서관 책시렁 ‘사진책 자리’에서 왼쪽 끝 즈음에 꽂고, 새로 장만한 책은 사진책 자리에서 오른쪽 끝 즈음에 떨어뜨려서 꽂습니다. 다른 한 권은 나한테 반가운 사진즐김이 한 분한테 선물로 드립니다.


.. ‘문화적 의미’를 담으려 하지 마라 … 사진이 찍혀지는 순간까지 그것과 함께 머물러야 한다 … 이름을 주지도, 상표를 붙이지도, 재 보지도, 좋아하지도, 증오하지도, 기억하지도, 탐하지도 마라. 그저 바라만 보아라 … 그러나 그저 보이는 게 찍힐 뿐이다 … 사진가가 열린 마음과 지성으로 사물을 충분히 관찰한 다음 그 주제를 온전한 매체로 기록할 때,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무언가가 튀어나올 가능성이 있다 … 사진의 이미지란 결코 창조물이 아니며, 무지개나 우박처럼 오히려 어떤 식으로 환경이 조성되었을 때 일어나는 자연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  (19, 57, 64쪽)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노트》를 쓴 필립 퍼키스라는 분은 미국에서 사진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미국사람으로서 미국에서 사진길을 걸으려 하는 이들한테 도움말을 들려주려고 엮은 책이라 할 만합니다.

 일본사람이 사진강의노트를 썼다면 일본사람 눈길과 넋으로 일본 ‘사진 새내기’한테 도움말을 들려주려고 책을 엮을 테지요. 필립 퍼키스 님은 미국에 있는 대학교에서 사진을 가르친 기나긴 나날을 되짚으면서 책 하나를 갈무리했습니다.

 사진을 가르치던 첫무렵부터 이와 같은 사진강의노트를 내놓지는 못합니다. 사진을 오래오래 가르친 끝에 이와 같은 사진강의노트를 내놓습니다.

 여러 차례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노트》를 읽었고, 2011년 2월에 새옷을 입고 다시 살아난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노트》를 새삼스레 읽으며 곰곰이 생각합니다. 사진길을 처음 밟는 이한테나 사진길을 오래 밟았던 이한테나 더없이 도움이 될 만한 사진동무인 작은 책 하나이지만, 이 작은 책 하나를 알뜰히 여기며 사랑할 만한 사진쟁이가 한국에 얼마나 있을까 살짝 알쏭달쏭합니다.


.. 이 사진은 재미있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소름이 끼치기도 한다. 한 마디로 걸작이다. 오직 사진만이 표현할 수 있는 세계다. 이런 식의 은유와 애절함은 사진이라는 독특한 매체의 직접성에서 비롯된다 … 시를 쓰는 단 하나의 이유는 산문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있기 때문이다 … 누군가 바닐라 맛에 대해 최상의 표현으로, 지적이고 우아하게 설명하는 것을 듣는다고 치자. 나는 여전히 바닐라 맛을 모른다. 그러나 난생 처음으로 바닐라 맛을 본 후에 설명을 듣는다면, 그제서야 ‘맞아, 바로 이 맛이야’라며 무릎을 칠 것이다. 처음으로 그랜드 캐니언에 가 보거나 예술 작품을 보았을 때도 마찬가지다 … 그러나 이름이 없는 것은 상도 안 준다. 오로지 이름을 붙이는 것만이 관건이다. 읽기와 산수로만 지능이 평가된다. 감수성과 관찰력이 뛰어난 학생이 장학금을 받았던 적은 언제였던가? ..  (25, 35∼36, 66∼67쪽)


 사진길을 걷겠다고 하는 이들치고 ‘어떤 사진장비’를 갖출까로 망설이거나 근심하거나 마음쓰는 사람만 많을 뿐입니다. 말 그대로 ‘어떤 사진길을 걸을까’ 하는 대목에 생각을 기울이거나 마음을 쏟는 이가 퍽 드뭅니다.

 야구선수한테 ‘어떤 방망이’나 ‘어떤 공’이나 ‘어떤 장갑’을 쓰느냐고 여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방망이 가운데에도 더 낫다 하는 방망이가 있겠지요. 더 질기며 튼튼하고 손에 잘 맞는 장갑이 있을 테지요. 그런데, 어느 야구선수도 방망이 탓이나 장갑 탓을 하지 않습니다. 할 수 없겠지요.

 축구선수가 더 낫다 하는 축구신을 신고 더 낫다 하는 공을 발로 차야 더 이름을 드높이거나 더 멋지거나 더 신나게 축구를 할 수 있지 않습니다. 배구선수가 더 낫다 하는 공을 써야 배구를 더 잘 하겠습니까.

 100원짜리 연필이든 100만 원짜리 연필이든, 글을 쓸 때에 달라질 대목이란 없습니다. 좀 싸구려 연필이나 좀 싸구려 볼펜을 쓰면 손목이 더 아프거나 어깨가 더 결릴까 궁금합니다. 좀 싸구려 자판을 두들기면 글쓰기를 더 못할는지 궁금합니다.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똑같습니다. 사진을 찍든 노래를 부르든 똑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더 낫다 하는 장비가 있대서 글을 더 잘 쓰거나 그림을 더 잘 그리지 않습니다. 마음이 없고서야 글이고 그림이고 태어날 수 없습니다.

 장비는 좋다지만 마음이 없으면 사진이 태어날 수 없습니다. 무대가 좋다지만 마음이 없으면 노래가 태어날 수 없습니다.

 사진길을 걸으려는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한 가지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어떤 사진길을 걸으려 하는가’ 한 가지만 생각해야 합니다. 사진장비란 내 살림돈에 맞추어 장만할 뿐입니다. 사진기 만드는 회사는 참 고맙게도, 값싼 사진기부터 값진 사진기까지 골고루 만들어 베풉니다. 어느 사진기를 쓰든 어찌 되건 돈이 있어야 하지요. 돈이 없고서야 사진을 찍지 못해요. 그러나, 돈이 아주 넉넉하기 때문에 사진을 걱정없이 할 수 있지는 않아요. 돈이 참 없어 밥굶기를 자주 한다 하더라도 사진을 못 할 수 없어요. 내 마음가짐에 따라서 할 수 있는 사진일 뿐입니다.


.. 늘 같은 렌즈를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렌즈가 제공하는 시야에 익숙해지면 ‘전체’를 훨씬 빨리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프레임은 사진가가 조작한 시각이지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 기술이 중요한 게 아니다. 문제는, 보고 느끼는 사진 속에서 사진의 내용이 되는 질감과 명도를 제대로 살릴 수 있도록 사진가의 섬세함을 기르는 일이다 … (내가 찍은 사진을 내 손으로 갈무리하는) 편집을 하는 까닭은 내 사진을 발전시키기 위한 훈련이 필요해서다 … 작품의 정신은 예술가의 내면으로부터 나오고, 창조적 행위는 우리가 숨을 쉬며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슬프고 기쁘고 지치고 죽는 그 모든 과정과 서로 맞물려 이루어진다 ..  (41, 81, 95, 114쪽)


 필립 퍼키스 님은 사진을 오래오래 가르쳤습니다. 사진을 오래오래 가르친 열매가 담긴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노트》입니다. 저는 이 책을 2005년에 처음 만나고 2011년에 새책으로 다시 만나면서, 예나 이제나 한결같이 생각합니다. ‘사진은 가르칠 수 없고, 사진은 누구한테서 따로 배울 수 없다’고 예나 이제나 한결같이 생각합니다.

 모르는 노릇입니다만, 필립 퍼키스 님이 사진을 가르칠 수 있다고 여겼다면 ‘사진강의노트’가 아닌 ‘사진강의’라고만 이름을 붙이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무슨무슨 ‘예술개론’이라든지 무슨무슨 ‘이론과 실제’라는 이름을 붙이는 책이 있는데, ‘사진미학’이든 ‘영화미학’이든 있을 수 없다고 느낍니다. 주의주장이 아니라 느낌으로 받아들입니다. 사진은 ‘사진예술’이나 ‘사진문화’라는 덧옷을 입힐 수 없구나 싶어요. 글을 놓고 ‘글예술’이나 ‘글문화’라 할 수 없어요. ‘수필예술’이나 ‘소설문화’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저 글이고 수필이며 소설입니다. 사진은 그저 사진이지 사진 앞에 무슨무슨 꾸밈말을 붙이거나 사진 뒤에 어떤저떤 덧말을 달 수 없습니다.

 패션사진을 한다는 사람들은 패션도 사진도 하지 않습니다. 오직 돈벌이만 합니다. 다큐사진을 한다는 사람들은 다큐도 사진도 하지 않습니다. 오직 구경꾼 노릇만 합니다. 누군가 예술사진을 한다고 말한다면 이이는 예술도 사진도 못 하거나 안 하는 셈입니다. 예술은 예술이고 사진은 사진입니다. 패션은 패션이고 사진은 사진입니다. 패션을 하면서 사진을 즐길 수 있고, 사진을 하면서 패션을 즐길 수 있어요. 다큐를 이루면서 사진을 받아들일 수 있고, 사진을 하면서 다큐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가르칠 수 없는 예술이고, 배울 수 없는 예술입니다. 문화를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습니까. 그저 살아낼 뿐인 문화이자 예술입니다. 사랑을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습니까. 그저 사랑할 뿐인 내 삶입니다.

 사진은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한테 가르치지 못합니다. 사진을 배우겠다며 대학교에 갈 수 없고 사진학교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필립 퍼키스 님은 대학 강단에서 오래도록 몸담으면서 바로 이 대목, ‘사진은 가르칠 수 없구나’ 하고 깨달으면서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노트》를 썼다고 느낍니다. 가르칠 수도 배울 수도 없는 사진인 줄을 사람들이 알아채기를 바라면서 이 책을 썼다고 느껴요. 그래서, 이 책은 필립 퍼키스 님이 ‘대학교 사진 강단’에서 물러날 즈음이 되어서야 비로소 내놓을 수 있습니다.

 사진은 내가 살아내는 하루만큼 그날그날 찍는 이야기입니다.


.. 세월이 흐르면서 사진도 돈벌이로 부상했다. 사진가가 죽거나, 대형 사진이거나, 비평가들에게 쓸거리가 풍부한 내용일 때 값은 더욱 올라갔다 … 권세 있는 자들이 사진을 예술이라고 선고한 후부터 많은 사진가들이 예술 안에서 사진의 개념을 확장하려는 노력이나 예술로서의 사진에 대한 진지한 고민보다는 그저 예술처럼 보이는 그럴싸한 사진을 만드는 데에만 죽을힘을 다해 애쓰고 있다. 머릿속에 든 생각이 점점 빈약해질수록 사진의 크기는 점점 커져만 간다 … 희한하게도 새로운 기술이 발전하고 접근이 용이해질수록 플라티늄, 팔라디움, 카브로, 사이아노타이프 같은 ‘과거의’ 기법들이 기승을 부린다 … 인물 사진의 최신 경향은 영리하고 재능 있고 의욕에 찬 사진가들이 영민한 머리로 온갖 재주를 부려 사람들을 찍는 것이다. 특히 최근의 경향은 얼굴의 땀구멍이 불쾌하게 보일 정도로 가깝게 촬영한다(어떤 감정이든 불러만 오면 된다는 식이다). 지금 잘나가는 인물 사진가들이 사람들의 시선을 유혹하는 방식에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는 패션 사진가들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  (59, 91, 102, 109쪽)


 사진이 처음 태어나던 지난날에도 사람들은 사진을 했고, 사진이 널리 퍼진 요즈음에도 사람들은 사진을 합니다. 옛사람이 더 빼어난 사진을 하지 않았습니다. 새사람이 더 훌륭한 사진을 하지 않습니다. 예전 사람이건 요새 사람이건, 그저 사진을 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사진을 하건 사진을 즐기건 사진을 누리건, ‘내가 좋아하는 사진을 내 삶에 걸맞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나눈다’고 하는 마음을 잊거나 처음부터 안 품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 시인에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오늘 시를 몇 편이나 쓰셨오?” … 결코 ‘순수’사진이라고 불릴 만한 사진은 한 장도 없다 … 모든 사진은 무엇인가를 ‘기록하고’ 있으며, 모든 사진은 사진가가 결정을 내린 순간 찍혀지기 때문에 얼마간 사진가의 의도가 ‘표현된’ 것이다. 선을 그어 놓고 한쪽만을 취하도록 학생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해악이다 ..  (93, 121, 125쪽)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노트》는 사진길을 걷는다는 사람들한테 나누어 주는 선물입니다. 사진을 찍는 내 삶이 어떠한 삶인가를 저마다 스스로 즐거이 돌아보자는 뜻으로 나누어 주는 선물입니다.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으면서 사진을 하는 마음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으면서 글을 쓰는 마음을 되새길 수 있습니다. 초·중·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일을 맡은 사람이라면 ‘교육이란 무엇이고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마음을 짚을 수 있습니다. 집에서 살림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는 동안 살림하는 마음을 깨달을 수 있어요.

 우리가 저마다 살아가는 터전에서 망설여야 할 대목이라면 다문 한 가지입니다. ‘날마다 새롭게 맞이하는 내 하루를 오늘은 얼마나 더 사랑스럽거나 즐겁거나 신나게 맞아들이려 하는가’입니다.

 삶은 덜도 더도 아닙니다. 사랑은 덜도 더도 아닙니다. 사람은 덜도 더도 아닙니다. 사진은 덜도 더도 아닙니다. 삶은 삶이고, 사랑은 사랑이며, 사람은 사람이겠지요. 사진은 사진입니다.

 좋은 삶·사랑·사람을 이야기하는 책 하나를 알뜰히 여미어 되살린 박태희 님이 참 고맙습니다. (4344.4.26.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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