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살아가는 말 97] 혼인 기리기

 

  나는 1982년에 국민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이무렵 학교에서는 ‘우리 고장 문화재’라든지 ‘우리 고장 천연기념물’이라든지 ‘우리 고장 기릴 만한 훌륭한 분’이라든지 알아보는 숙제를 내주곤 했습니다. 이런 숙제를 받을 때면 언제나 골머리를 앓습니다. 내가 태어나 자란 인천은 으레 ‘서울로 가려다 못 가고 남은 뜨내기’가 모이는 곳이라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서울과 가깝다 보니, 서울에서 쓰는 물건을 만드는 공장이 동네마다 많았어요. 문화재라든지 천연기념물이 있을 턱이 없으리라 느꼈어요. 동무들은 이래저래 골치를 썩이다가, 갈매기라든지 비둘기라든지 적곤 합니다. 갈매기나 비둘기가 천연기념물일 턱이 없지만, 쓸거리 또한 없거든요. 기릴 만한 훌륭한 분을 찾는 숙제도 힘들었습니다. 조선이든 고려이든 고구려이든 백제이든 옛조선이든, 인천에서 나고 자란 훌륭한 분이 누가 있을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갸우뚱 젓기만 했어요. 오늘날 들어 비로소 ‘한글 점글 만든’ 박두성 님이라든지  ‘진보 정치를 꿈꾸었다’는 조봉암 님이라든지 들곤 하지만, 어릴 적에는 이런 이름을 듣도 보도 알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 아이들과 시골에서 살아가며 가만히 생각합니다. 나는 어릴 적 ‘내 고장 기릴 사람’ 이름을 역사책에서 훑다가 하품만 흘렸는데, 내가 숙제에 적을 훌륭한 분이라면 마땅히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고, 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있어요. 역사책에도 교과서에도 이름을 안 올리지만, 꿈과 사랑을 심은 아름다운 분이기에 넉넉히 ‘기릴’ 만하고 마음으로 되새길 만해요. 해마다 6월 7일을 맞이하면, 나와 옆지기는 서로 함께 살기로 다짐한 뜻, 곧 혼인날을 기립니다. (4345.6.1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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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내가 심은
나무도 좋고

 

남이 심은
나무도 좋으며

 

사람이 안 심고
씨앗으로 퍼져

 

스스로 자라는
나무도 좋다.

 


4345.5.1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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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네 살의 철학 - 십대를 위한 철학 길라잡이
이케다 아키고 지음, 김경옥 옮김, 현놀 그림 / 민들레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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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으로 살고, 생각으로 사랑하고
 [푸른책과 함께 살기 95] 이케다 아키코, 《열네 살의 철학》(민들레,2006)

 


- 책이름 : 열네 살의 철학
- 글 : 이케다 아키코
- 옮긴이 : 김경옥
- 펴낸곳 : 민들레 (2006.3.15.)
- 책값 : 9000원

 


  나 스스로 느긋하게 가다듬는 마음일 때에는 책을 읽으면서 무척 느긋합니다. 하루하루 온갖 일을 치르며 바쁘다 하더라도 마음이 느긋하기 때문에 스물네 시간 가운데 잠은 서너 시간 쪽잠으로 자고 스무 시간을 일에 매인다 하더라도 십 분이나 이십 분 말미를 내어 책을 읽으며 참으로 느긋하다고 느낍니다. 나 스스로 느긋하게 가다듬지 못하는 마음이라면, 아무런 일이 없고 하루 스무 시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다 하지만, 책을 읽지 못할 뿐더러 책을 읽으면서 가슴이 사랑으로 부풀지 못해요. 마음가짐에 따라 책읽기가 달라집니다.


  내가 무엇을 더 배울 때에도 책을 읽는 눈은 달라집니다. 내가 무엇을 더 겪은 뒤에도 책을 읽는 결은 달라집니다. 그런데, 무엇을 더 배우거나 더 겪는다 할 때에도, 내 마음으로 느끼며 스며드는 이야기가 되는구나 싶어요. 마음으로 느끼며 스며들지 않고서는 배우지 못하고 겪었다고 여기지 않아요. 마음으로 느끼며 비로소 배우는구나 하고 느끼고 겪는구나 하고 여깁니다.


  곧, 마음가짐에 따라 삶이 달라집니다. 마음가짐에 따라 생각이 달라집니다. 마음가짐에 따라 꿈이 달라지고, 이야기가 달라지며, 사랑이 달라집니다.


  마음을 슬기롭게 쓸 때에, 슬기롭게 책을 읽고 슬기롭게 집일을 하며 슬기롭게 이웃을 사귑니다. 마음을 곱게 쓸 때에, 곱게 말을 하고 곱게 웃음을 지으며 곱게 밥을 차립니다. 마음을 정갈히 가눌 때에, 정갈히 편지를 쓰고 정갈히 밭을 일구며 정갈히 걸레질을 합니다.


.. 산다는 게 멋지다거나 시시하다거나 하는 건 스스로 자기 삶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지 … 관념이 현실을 만들지, 현실이 관념을 만드는 건 결코 아이야 … 사회도 바꿔야겠지만 우선 내가 먼저 변하는 게 중요해 … 사회란 사람들 저마다의 관념인 까닭에 각자가 좋아지지 않고서 사회를 좋게 만드는 길은 어디에도 없어 …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어떻게 타인을 사랑할지도 알 수 없는 법이지 … 과학의 발달을 진보라고 한다면, 진보란 편리해지는 걸 뜻하는 건가? 과연 진보를 ‘편리해지는 것’이라고 정의해도 괜찮을까 ..  (10, 92∼93, 113, 163쪽)


  내 마음이 흔들린다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내 삶은 그저 흔들립니다. 내 마음이 무겁다면, 어디에서 무엇을 하거나 내 삶은 그예 무겁습니다. 내 마음이 아프다면, 어디에서 무엇을 하더라도 내 삶은 그대로 아파요.


  마음 한켠에 응어리를 숨긴 채 활짝 웃으며 뛰놀 수 있겠지요. 마음 한쪽에 피고름이 흐르더라도 짐짓 모르는 척 지낼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마음을 숨기지 못해요.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내 얼굴에 낱낱이 드러나요. 내 몸가짐 구석구석에 마음속 이야기와 움직임이 찬찬히 뱁니다.


  그런데 내 마음은 어떻게 피어날까요. 내 마음에 따라 내 몸이 움직일까요. 내 몸이 움직이는 결에 맞추어 내 마음이 바뀔까요.


  몸을 튼튼하게 돌보며 마음을 튼튼하게 돌볼 수 있을까요.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몸 또한 단단히 추스를 수 있을까요. 몸과 마음은 따로라거나 어느 쪽이 먼저라 할 수 없이 함께 흐를까요.


.. 자연이 만들었고 그 자체가 자연인 몸은 새까맣게 잊은 채, 겉으로 보이는 몸만을 몸이라고 생각하게 된 거지 … 어떤 아이가 태어날지, 누가 태어날지 몰랐는데, 바로 너희들이 태어났다는 이 오묘한 만남의 감동을 잊고 있단 말이지. 단지 타인과 타인이 만났을 뿐이라는 사실은 잊은 채 ‘내 아이’라는 생각에 깊이 빠져 있는 거지. 그래서 종종 당신들(부모) 생각대로 너희(아이)들을 만들려고 하는 거야 … (내 몸을) 내다 팔 수도 있다면 진짜로 소중하게 여기는 건 아니지. 그렇다면 그럴 경우 마음은 소중하게 여기고 있느냐 하면, 몸을 팔 수 있다는 그 생각이 바로 마음을 파는 것이어서 이것 역시 같은 거지 … 뭐 때문에 사는지 사유하지도 않고 어쨌든 살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수명을 늘이기 위한 생명 기술만 엄청나게 발전시키고 있지 ..  (59, 81, 123, 168쪽)


  언제부터였나, 나는 늘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국민학교를 다니던 때에는 개구지게 놀며 ‘다른 동무들과 견주어 힘이 모자라는 내가 어떻게 하면 더 잘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야구 놀이를 할 때에 동무들은 홈런을 뻥뻥 치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칠 힘이 없습니다. 방망이를 짧게 잡고 공을 잘 맞추어 수비가 빈틈으로 보내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축구 놀이를 할 적에 동무들은 으레 공이 있는 데로 우르르 몰리는데, 어차피 축구는 골문으로 가기 마련이니까, 나는 사람도 공도 없는 빈 곳에서 어디로 이 공과 사람이 갈까를 미리 헤아려 좋은 자리를 지킵니다.


  중학교로 들어서며 놀이보다는 공부에서 생각을 기울입니다. 국민학교를 마치기 무섭게 중학교부터 저녁 늦게까지 교실에 붙잡아 가두며 입시공부를 시켰어요. 억지로 붙들리며 시험문제만 달달 외워야 하는 시멘트 감옥에서 ‘교과서로 가르치는 지식과 정보가 얼마나 옳으며, 이 지식과 정보가 앞으로 얼마나 오래 갈까’ 하고 생각합니다. 내가 대학입시까지 마치면, 이렇게 외우는 지식과 정보는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합니다. 고작 시험 한 차례 치르려고 여러 해 시멘트 감옥에 꽁꽁 묶인 채 바보스레 지내야 하나 싶어 딱했습니다.


  이리하여 고등학교에 들어서면서 책읽기를 생각합니다. 대학입시에서 논술 공부를 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교과서 아닌 책을 읽으며 내 생각자리를 넓히려 합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은 나더러 ‘생각을 하라’ 하고 말했지만, 제도권학교 교사가 말하는 ‘생각’은 내가 품는 ‘생각’과 달라요.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 생각을 하고 싶지, 시험성적을 잘 낸다거나 바보스레 시험공부에만 매달리는 다른 동무와 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아요. 똑같은 옷에 똑같은 머리 길이로 바보처럼 되어, 똑같은 교과서를 달달 외우고는 내 꿈과 사랑을 놓치고 싶지 않아요.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며 교과서보다 교과서 아닌 책을 가방에 더 많이 챙깁니다. 자율학습이나 보충수업을 할 적에도 교과서나 참고서나 문제집보다 다른 인문책이나 문학책을 나란히 펼치고 읽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된 때에도 이런 책읽기는 그대로 잇습니다. 문득문득 돌이킵니다. ‘내가 시험문제 하나를 더 풀어 0.01점을 올리는 일’과 ‘오늘 하루 내 삶을 누리는 책으로 생각을 빛내는 일’하고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울까 하고 돌이킵니다. 나는 새벽 다섯 시 사십 분에 집에서 나섭니다. 새벽버스를 타고 학교로 옵니다. 학교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고요한 시멘트 감옥에서 창가에 앉아 가방에서 ‘교과서 아닌 책’을 꺼내고, 동무들이 오기까지 한 시간 반 즈음 ‘교과서 아닌 책’을 호젓하게 읽습니다. 비록, 창가 자리라 하더라도, 내 고등학교 창문 바깥으로는 화학공장 굴뚝이 가득합니다. 화학공장에서 버리는 쓰레기물을 거르는 처리장 매캐한 연기가 교실로 스며듭니다. 햇살은 조각처럼 쪼개어진 채 들어옵니다. 나는 좋은 햇살 누리는 곳에서 살고 싶다는 꿈을 꿉니다. 나는 좋은 모습 바라볼 수 있는 곳에서 삶을 누리고 싶다는 사랑을 헤아립니다.


.. 다른 사람의 아픔을 알지 못하고, 그 마음도 알지 못하는 건 작은 나로만 보고 있기 때문이야 … 도둑질이나 폭행, 살인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은 그런 법이 필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있어도 그게 자기를 구속한다고 느끼지 않아. 그 사람의 자유는 조금도 규제받지 않는 셈이지 … 현실을 움직이는 건 관념이어서 관념이 바뀌지 않으면 현실도 바뀌지 않는 거야. ‘더 나은 사회에서, 더 잘 산다’는 관념이 진정으로 뭘 뜻하는지 자기 스스로 판단하지 않은 사람들이 무리지어 당을 만들고, 자기 자신이 나아지려는 노력 없이 사회만 바꾸려고 한 셈이야. 설령 그런 사회가 실현됐다 하더라도 내용은 그 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을 거란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 ..  (74, 98, 108쪽)


  고등학교를 마치며 고향이던 인천을 떠납니다. 이제 대학교가 있는 서울에서 지냅니다. 인천에서 서울로 한 해 동안 지옥철을 타고 대학교를 다녀 보는데, 이제껏 왜 ‘지옥철’이라 이름을 붙였는가를 온몸으로 깨닫습니다. 선풍기조차 없이 창문만 열어 더위를 식히는 국철은, 인천에서 잠만 자고 서울에서 일하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날마다 새벽과 밤마다 오징어떡처럼 찡기면서도 손에 책을 꼭 쥡니다. 새벽전철에는 꾸벅꾸벅 조는 사람투성이입니다. 이리 밀리고 저리 밟히면서 나는 책을 펼쳐 꿈누리로 빠져듭니다. 몸은 괴롭지만 마음은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밤전철에는 술에 절은 사람투성이입니다. 여기서 비틀거리고 저기서 시끄럽습니다. 나는 책을 펼쳐 온통 시끄러운 소리와 어지러운 냄새를 잊으려 합니다. 아니, 책을 펼치면 어떠한 소리도 냄새도 나한테 스며들지 않습니다. 나는 책과 함께 사랑누리를 생각합니다.


  서울 이문동에 있는 대학교에서 인천 주안역까지 막전철을 타고 오면 으레 밤 한 시 가깝습니다. 주안역에서 내린 다음 마을버스 마지막차를 기다립니다. 이때에도 가로등 불빛에 기댄 채 책을 읽습니다. 새벽에 전철에서도, 낮에 학교에서도, 저녁에 동아리방이나 과방이나 술집에서도, 밤에 전철과 버스역에서, 어느 누구도 손에 책을 안 쥔다고 느낍니다. 아주 드물게, 이 늦은 막버스 기다리는 주안역에서 누군가 손에 책을 쥔 사람이 보이곤 했는데, 이럴 때면 마음속에서 불이 켜집니다. 나는 외롭지 않다고, 나한테는 이렇게 좋은 이웃이 이름도 낯도 모르지만, 어디에선가 즐겁게 살아가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불이 켜져 환합니다.


.. 사람들은 곧잘 ‘우정이 깨졌다’고 말하곤 해. 하지만 깨지고 마는 우정은 진정한 우정이 아니었을 따름이야. 진정으로 중요한 뭔가로 서로 이어져 있었다기보다 이해 관계에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어 … 내가 사는 이곳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너희들이 알아야만 하는 건, 어느 쪽이 옳은가가 아니라 그 상황에서 나는 얼마나 바르게 살아갈까가 아닐까 … 나와 인류 전체는 다른 게 아니기 때문에 내가 좋아지지 않으면 인류 전체도 좋아지지 않는 거야 ..  (112, 148, 170쪽)


  대학교에 들어간 이듬해에 아주 인천을 떠납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새벽전철과 밤전철로 오가느라 지치기도 지치지만, 찻삯이 아깝습니다. 무엇보다 고단한 전철길에서 시달릴 때에 읽는 책은 마음닦이를 하며 읽더라도 제대로 마음을 가다듬기 힘들다 느낍니다. 더욱이, 서울에서 잠잘 데 얻어 지낸다면, 서울 곳곳에 있는 헌책방을 두루 돌며, 내가 아직 모르는 더 깊고 너른 책바다에 뛰어들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어린 날, 내 국민학생 적 내 어머니가 부업으로 하던 신문배달을 떠올립니다. 신문사 지국은 먹고자는 사람이 많다고 했지. 대학교 앞에도 신문사 지국 있지 않을까.


  대학교 과방으로 오는 신문에 끼워진 신문값 고지서에 적힌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겁니다. 신문사 지국으로 갑니다. 국민학생 적부터 신문배달을 했다고 말하며, 이곳에서 먹고자며 신문을 돌리기로 합니다. 이러면서 차츰 학교 전공 과목 수업하고 멀어집니다. 교재 한 권을 내가 먼저 혼자서 하루 동안 읽으면 그만일 텐데, 이 작은 교재로 한 학기나 한 해를 가르치고 배우는 얼거리가 내키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하던 대학교와 몸으로 겪는 대학교가 너무 다릅니다. 고등학생 적을 되새깁니다. 그래, 중학교나 고등학교도 교과서 한 권으로 한 해를 가르치잖아. 그런데, 이때에는 교과서 말고도 문제집과 참고서를 얼마나 많이 보는데. 대학교는 수업도 설렁설렁에다가 교재도 너무 얇고. 이래서 무슨 학문을 하지?


  대학교 옆 헌책방에서 온갖 책을 찾아 읽습니다. 대학교 구내도서관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을 합니다. 내 깜냥껏 50분 일하고 10분 쉬면서 틈틈이 책을 읽습니다. 나는 50분 일한 만큼 내 근무기록일지에 ‘50분 일하고 10분 쉼’이라 숫자를 적는데, 어떤 사람은 일도 안 하면서 근무시간을 되게 길게 적습니다. 도서관에서 일하는 사람은 어디를 둘러보아도 나 말고 없는데, 근무기록일지를 보면 이름은 적히되 얼굴이 안 보이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게 뭔가?’ 싶어 도서관 일꾼한테 여쭙니다. ‘어머, 학생은 그렇게 안 했어요?’ 도서관 일꾼은 근로장학생으로 이름 올린 학생치고 제대로 일하는 사람이 없어, 늘 그러려니 한다고 말합니다. 구내도서관 근로장학생 일은 석 달만 하고 그만둡니다. 그러고 나서 학교 구내서점에서 일합니다. 학교 구내서점에서는 일하는 티가 금세 드러나고, 일하는 보람을 스스로 뿌듯하게 느낍니다. 그렇지만, 나날이 ‘대학교가 참 싫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합니다.


.. ‘생각한다’는 건 다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일이야 … 그렇게 만드는 건 그 사람일 뿐이지. 자기 스스로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고 생각하니, 이상이 현실로 될 수 없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 누구나 내면을 아름답게 가꿔 가야 해. 겉모습이 아름답게 보이고 싶다면 말이지. 겉만 가꿔서는 안 돼. 전부 얼굴에 드러나니까. 이미 다 드러났는데도 눈치 채지 못하는 이는 바로 자기 자신뿐이야 … 사람들의 삶은 그들 자신이 하고 있는 말 그대로가 아닐까 … 살인을 저지르거나 성매매를 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하는 게 자기한테 좋을 거라고 여기니까 그렇게 하는 거지, 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그러지는 않을 거야 … 나쁜 행귀가 결국은 자기한테도 나쁜 일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니까 서슴없이 나쁜 행위를 연달아 저지르게 되지 ..  (11, 104, 134, 151, 175, 176쪽)


  강의를 제대로 안 듣고, 강의 교재 말고는 스스로 다른 책을 찾아 읽지 않으며, 근로장학생 이름은 거짓으로 올리고, 시험을 치를 적에 훔쳐보기를 일삼는데다가, 화장과 술과 살섞기에만 마음을 기울이는 대학교는 몹시 짜증스럽다고 느낍니다. 대학생이 되면 고등학생 때보다 훨씬 더 넓고 깊이 많이 책을 읽을 줄 알면서, 마음과 생각과 꿈과 슬기를 빛내야 하지 않겠느냐 느끼는데, 막상 이렇게 길을 걷는 동무를 만나기 힘듭니다. 선배라 하는 사람은 학년이 위라 하며 높임말을 쓰라고만 시킬 뿐, 모두들 취업이라는 문 앞에서 또다시 영어 공부에만 빠져듭니다. 대학생 선배 가운데 앞사람다운 모습이나 길잡이 같은 매무새나 이슬떨이 같은 넋을 보여주는 이를 만나지 못합니다.


  이제 나는 생각을 굳힙니다. 이런 대학교라면 비싼 돈을 치르며 다닐 까닭이 없다고.


  생각을 갈무리하고 싶어 일찌감치 군대에 들어갑니다. 군대에서는 스스로 아무 생각을 안 하며 살자고 생각합니다. 살아남고 싶으니까, 총칼을 든 살인무기가 되고 싶지 않으니까, 바보스러운 지식이 깃들지 않기를 바라니까, 군대에서는 생각을 잊기로 합니다.


  그런데, 군대에서 스스로 생각을 잊은 채 살아가노라니, 내 마음속에서 무언가 하나 끈이 끊어진 듯 갑갑합니다. 가슴이 꽉 막힌 채 무언가 좀처럼 이어지지 않습니다. 실타래가 엉킨 듯합니다.


  그래요. 생각을 잊은 채 살다 보니, 나한테 무엇보다 아름다우며 대수로운 ‘꿈’과 ‘사랑’을 찾아볼 수 없어요. 내 눈빛에서 꿈이 사라지고, 내 눈길에서 사랑이 스러져요. 생각을 안 하는 사람한테는 꿈이 없고, 생각을 잊는 사람한테는 사랑이 없어요.


..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바로 마음이 하는 거지. 그래서 진짜인가 가짜인가 하는 건 그걸 만든 사람의 마음가짐, 다시 말하면 ‘그 사람’이 ‘진짜인가 가짜인가’와 다르지 않아 … 누군가가 자기답게 자기 모습 그대로 있다는 사실에 반했다는 걸 가짜는 알지 못하지. 자기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게 뭔지 알지 못해서 다른 사람 흉내를 내거나 인기몰이에만 신경 쓰게 되는 거야 … 우주 전체라는 게 어쩌면 사유하는 정신인 내가 그렇게 사유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건 아닐까 … 누군가 그릇된 사유를 한다면 그것 역시 자기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일 거야 ..  (140, 141, 159, 203쪽)


  이케다 아키코 님이 쓴 푸른책 《열네 살의 철학》(민들레,2006)을 읽었습니다. 열네 살부터 열일곱 살 푸름이들이 생각밭을 키우도록 이끄는 책이라 하는데, 《열네 살의 철학》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청소년이 생각을 키우도록 하기’에 그치지는 않는다고 느낍니다. 푸른 나날을 보낸 어른 가운데 푸르던 그무렵 생각을 못하던 이들한테 이제부터 즐겁게 생각을 빛내자 하는 이야기를 함께 들려줍니다. 푸른 나날을 보내고 어른이 되어 아이들을 낳으며 이 아이들이 푸름이가 된 사람한테도, 아이들한테만 읽히는 책이 아니라 푸름이를 돌보는 어버이 또한 나란히 읽으면서 오늘을 사랑하는 생각을 가다듬자는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줍니다.


.. 자기한테도 타인한테도 좋은 것을 말하기 때문에 언론은 자유로워야 해. 자기한테도 타인한테도 좋은 건 누구한테나 옳은 말이야. 누구한테나 옳은 말을 하는 경우에는 그 말을 할 ‘내 자유’를 굳이 주장하지 않아도 돼. 곧, 사람은 옳은 말을 할 자유를 가지지, 옳지 않은 말을 할 자유를 갖고 있지 않아. 그래서 그런지 세상에서 보면 누군가 옳지 않은 말을 할 때면 꼭 ‘언론에는 자유가 있다. 이렇게 말하는 건 내 자유다.’ 하고 주장하곤 해 … 느끼지 못하면 알았다고 할 수 없어. 머리로 알았을 뿐인 지식이나 어딘가에서 꾸어 온 지식 따위에 어떻게 한 사람의 삶을 바꿀 만한 힘이 담겨 있겠어 ..  (188, 221쪽)


  책을 꼭 읽어야 하지는 않습니다. 영화를 꼭 봐야 하지는 않습니다. 회사원이 반드시 되어야 하지는 않습니다. 돈을 반드시 벌거나, 혼인을 반드시 하거나, 아이를 반드시 낳아야 하지는 않아요.


  다만,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내가 왜 이러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인가 하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내가 이루려는 꿈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나누고픈 사랑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린이책은 왜 어린이책이라는 이름이 붙는가 하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린이책은 누가 읽으라는 책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푸른책은 누가 읽으면 좋을 책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책을 쓰는 넋은 무엇이고, 책을 읽는 뜻은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목숨을 건사하는 밥 한 그릇은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햇살 한 조각을 생각하고, 바람 한 점을 생각하며, 풀 한 포기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각하기에 살아갑니다. 생각하기에 사랑합니다. 생각하기에 꿈꿉니다. 생각하지 않기에 ‘몸뚱이는 어엿이 있어도 죽은 목숨’과 같습니다. 생각하지 않으니 사랑은 메마르고 미움과 시샘과 헐뜯기와 비아냥이 춤춥니다. 생각하지 않는 만큼, 어떻게 내 삶을 빛낼까 하는 꿈은 어디에도 자라지 않아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생각으로 사랑합니다. 마음으로 온누리를 빛냅니다. 생각으로 지구별을 보살핍니다. 마음으로 내 몸을 살찌웁니다. 생각으로 내 이웃과 살붙이와 동무를 어깨동무합니다. (4345.6.1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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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노이에자이트님의 "표범과 범은 어떻게 다른가?"

'호랑이'라는 말은, 곰곰이 살피면 잘못 쓰는 말이에요.

 

왜냐하면, '虎'와 '狼'은 '범'과 '이리'를 가리키는 한자거든요.

민간어원이랄지, 어쩌다가 이렇게 퍼졌을는지 알쏭달쏭하지만,

범이나 이리나 여러 짐승을 아울러 가리켰을 '호랑'이었을 텐데,

이제 얼추 뭉뚱그려서 쓰는 셈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옳고 바르게 쓰자면 '범'이라고만 해야 해요. 그

래서 저는 제 어릴 적 기억으로도,

나이 많이 자신 어르신들이 '아이들이 호랑이라 말할 때'면

으레 꾸짖으면서 '범'이라고 해야지 말을 엉터리로 한다고

바로잡아 주셨어요.

 

범띠 아닌 호랑이띠라 말하면 그야말로 무식하고 바보로 여기기도 했어요.

1988년 올림픽 상징물로 '호돌이'를 썼을 때에도

나이 있는 분들은 모두 어처구니없다고 여겼어요.

왜냐하면 '호랑이'가 잘못 쓰는 말이니

이런 낱말로 상징물을 삼는 일은 가뜩이나 독재정권이면서

말까지 엉망진창으로 삼는다 했어요.

 

마땅한 노릇이지만, '범돌이'라고 해야 올바릅니다.

 

 ..

 

그저 그렇습니다...

예전 대중가요에 '범띠'라고 나오는 까닭은

아주 마땅히 '범띠'였기 때문이에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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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에도 이벤트
[말사랑·글꽃·삶빛 14] 한 해에 한 번 기리기 때문일까

 


  한국은 처음부터 서양 예수님이나 하느님을 믿는 나라가 아니었으나, 이제 아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나 하느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도 해마다 십이월 이십오일 즈음 되면 ‘예수님 나신 날’을 기린다고 하는 잔치로 시끌벅적할 뿐 아니라, 여느 살림집에서도 ‘오붓한 잔치’를 벌인다고 케익을 마련하곤 합니다. 종교가 없는 사람조차 이날을 맞이하면 마음이 들뜬다고 얘기하는데, 종교가 있는 사람이라면 마음이 두근두근하겠지요. 그러나, 오직 하루 이날만 기다리며 종교를 믿을 사람은 없습니다. 한 해 삼백예순닷새 언제나 그분을 마음으로 모시고 내 삶을 사랑으로 돌보며 지내리라 생각합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기리는 사람한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이 오셨다는 날 하루만 기리지 않습니다. 한 해 삼백예순닷새 내내 곰곰이 헤아립니다. 부처님이 왜 이 땅에 오셨고, 부처님이 사람들하고 어떤 넋과 얼을 나누면서 지구별을 따사롭게 돌보려 했는지를 돌아보려고 힘쓰리라 생각합니다.


  한 해에 한 차례, 시월 구일에 찾아오는 ‘한글날’도 늘 이와 같다고 여깁니다. 한 해에 한 차례 찾아오니까, 이날 하루만 한글을 기릴 만하다고 느끼지 않아요. 한글날이 달력에 굵직하게 적힌 ‘기림날’이라 한다면, 참말 한 해 삼백예순닷새 언제나 한글이란 무엇이고 한국말은 어떠한가를 살뜰히 살피고 알뜰히 돌보며 지내야 알맞고 아름다우리라 느껴요.


  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일한 삶을 적바림한 책 《서울 여자, 시골 선생님 되다》(살림터,2012)를 읽다가 75쪽에서 “한글날이다. 아이들은 오늘이 공휴일이 아닌 것을 너무나 아쉬워 한다. 한글날 이벤트를 한다고 한다. 한글에 대한 사랑과 소중함을 전하는 내용을 순 우리 말로 표현해 핸드폰 문자 보내기다.” 같은 글월을 봅니다. 고등학교 아이들이 한글날을 맞이해 한글날을 기리려고 ‘한글날 이벤트’를 스스로 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참 깜찍한 생각이로구나 하고 느끼다가 한글날에 이 아이들이 벌인다는 ‘이벤트(event)’란 무얼까 궁금합니다. 아이들로서는 ‘이벤트’는 영어가 아니라 할 만하겠지요. 둘레 어른 누구나 이 말을 쓰니까, 아이들로서는 이 낱말을 깊이 살피기 힘들겠지요. 텔레비전에서도, 마을 가게에서도, 인터넷에서도 온통 ‘이벤트’를 해요. 한글날을 맞이하는 어른들부터 이벤트만 하니까, 아이들 또한 이벤트를 따라할 뿐이에요.


  아마, ‘깜짝잔치’쯤 되겠지요. 한글날 하루만 맞이해서 깜짝스럽게 벌이는 잔치가 될 테니까요. 생각을 조금 기울인다면, ‘한글날 기쁨잔치’라든지 ‘한글날 기림잔치’라든지 ‘한글날 누림잔치’라든지 ‘한글날 멋잔치’라든지 ‘한글날 솜씨잔치’ 같은 이름을 지을 수 있습니다. 또는 ‘한글날 말잔치’라든지 ‘한글날 이야기마당’이라든지 ‘한글날 놀이마당’을 마련할 수 있어요.


  어찌 본다면, 한 해에 고작 하루만 기리고 그치는 한글날이기 때문에, 고등학교 아이들뿐 아니라 이 나라 어른들 모두 한글날을 옳고 바르며 예쁘고 아름다이 돌아보기는 힘들는지 모릅니다. 누군가는 한 해에 고작 하루조차 한글을 생각하지 않을 뿐더러, 아예 마음에 안 담으니까, 한글날을 맞이하건 말건 한국말과 한국글을 엉터리로 쓰거나 아무렇게나 쓰거나 바보스레 쓸는지 모릅니다.


  마음을 찬찬히 가다듬을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고등학생이 되어 대학입시를 바라보는 아이들은 한 해 삼백예순닷새 내내 대학입시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온통 대학입시 생각이 가득합니다. 어느 하루라고 대학입시 생각에서 홀가분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늘 쓰는 말글을 이런 얼거리로 생각하는 일은 슬픈 노릇이 되겠으나, 참말 한글날을 기리려 한다면 이 같은 매무새일 때에 비로소 참다이 기릴 만합니다. 하느님을 섬기거나 부처님을 모시듯, 아니 하느님 뜻을 내 삶에 펼치거나 부처님 넋을 내 삶으로 녹이듯, 한국말과 한국글을 알뜰살뜰 사랑하고 따사롭게 돌볼 때에 예뻐요.


  어버이는 아이들 밥을 차립니다. 한 해 삼백예순닷새 언제나 아이들 밥을 날마다 세 끼니씩 꼬박꼬박 챙깁니다. 어버이는 아이들 옷가지를 날마다 챙깁니다. 어버이는 아이들이 어느 하루이든 뜻있고 즐겁게 누릴 수 있도록 애씁니다.


  햇살은 언제나 따사롭게 내리쬡니다. 햇살은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겨울에도 따뜻하게 지구별을 감쌉니다. 구름이 끼건 비가 내리건 햇살은 늘 지구별을 어루만져요.


  바람은 늘 솔솔 붑니다. 물은 언제나 졸졸 흐릅니다. 흙은 풀씨를 북돋웁니다. 나무는 한결같이 그늘을 드리우고 열매를 나눕니다.


  어버이가 아이들과 살아갑니다. 자연은 뭇목숨을 어루만집니다. 사람들은 날마다 말과 글로 생각을 주고받습니다. 이 나라에 한국말이 있고 한국말을 담는 그릇인 한국글, 곧 ‘한글’이 있는 일은 더없이 고마운 사랑입니다. 오늘날 숱한 사람들은 바람 한 점과 물 한 방울이 얼마나 고마운지 못 느끼며 살아간다지만, 막상 바람 한 점과 물 한 방울이 아주 살짝이라도 사라지면 모두 숨을 거두고 말아요. 사람들이 서로 생각을 나누는 말이랑 글이 없을 때에는, 사람들 누구나 넋을 잊거나 잃겠지요.


  말은 넋을 보듬습니다. 글은 얼을 빛냅니다. 하나하나 따지면, 너무 바쁘게 몰아치며 제자리를 못 찾는 오늘날 사람들이 스스로 제 삶과 넋부터 알뜰히 사랑하지 못하는 판에 제 말을 알뜰히 사랑하기를 바라기란 힘들 수 있어요. 사람들 스스로 제 삶과 넋부터 알뜰히 사랑한다면 사람들 스스로 제 말과 글 또한 알뜰히 사랑할 수 있겠지요. 말과 글도, 그러니까 한국사람이 늘 쓰는 한국말과 한국글도 알뜰히 사랑한다면 기쁠 텐데, 이에 앞서 참다이 누릴 고운 삶과 착하게 다스릴 고운 넋부터 따사롭고 너그러이 추스를 수 있기를 빌어요. 좋은 삶에 좋은 넋이 깃들며 좋은 말이 빛나요. 고운 삶에 고운 넋이 감돌며 고운 글이 샘솟아요. (4345.6.1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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