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에도 이벤트
[말사랑·글꽃·삶빛 14] 한 해에 한 번 기리기 때문일까
한국은 처음부터 서양 예수님이나 하느님을 믿는 나라가 아니었으나, 이제 아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나 하느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도 해마다 십이월 이십오일 즈음 되면 ‘예수님 나신 날’을 기린다고 하는 잔치로 시끌벅적할 뿐 아니라, 여느 살림집에서도 ‘오붓한 잔치’를 벌인다고 케익을 마련하곤 합니다. 종교가 없는 사람조차 이날을 맞이하면 마음이 들뜬다고 얘기하는데, 종교가 있는 사람이라면 마음이 두근두근하겠지요. 그러나, 오직 하루 이날만 기다리며 종교를 믿을 사람은 없습니다. 한 해 삼백예순닷새 언제나 그분을 마음으로 모시고 내 삶을 사랑으로 돌보며 지내리라 생각합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기리는 사람한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이 오셨다는 날 하루만 기리지 않습니다. 한 해 삼백예순닷새 내내 곰곰이 헤아립니다. 부처님이 왜 이 땅에 오셨고, 부처님이 사람들하고 어떤 넋과 얼을 나누면서 지구별을 따사롭게 돌보려 했는지를 돌아보려고 힘쓰리라 생각합니다.
한 해에 한 차례, 시월 구일에 찾아오는 ‘한글날’도 늘 이와 같다고 여깁니다. 한 해에 한 차례 찾아오니까, 이날 하루만 한글을 기릴 만하다고 느끼지 않아요. 한글날이 달력에 굵직하게 적힌 ‘기림날’이라 한다면, 참말 한 해 삼백예순닷새 언제나 한글이란 무엇이고 한국말은 어떠한가를 살뜰히 살피고 알뜰히 돌보며 지내야 알맞고 아름다우리라 느껴요.
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일한 삶을 적바림한 책 《서울 여자, 시골 선생님 되다》(살림터,2012)를 읽다가 75쪽에서 “한글날이다. 아이들은 오늘이 공휴일이 아닌 것을 너무나 아쉬워 한다. 한글날 이벤트를 한다고 한다. 한글에 대한 사랑과 소중함을 전하는 내용을 순 우리 말로 표현해 핸드폰 문자 보내기다.” 같은 글월을 봅니다. 고등학교 아이들이 한글날을 맞이해 한글날을 기리려고 ‘한글날 이벤트’를 스스로 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참 깜찍한 생각이로구나 하고 느끼다가 한글날에 이 아이들이 벌인다는 ‘이벤트(event)’란 무얼까 궁금합니다. 아이들로서는 ‘이벤트’는 영어가 아니라 할 만하겠지요. 둘레 어른 누구나 이 말을 쓰니까, 아이들로서는 이 낱말을 깊이 살피기 힘들겠지요. 텔레비전에서도, 마을 가게에서도, 인터넷에서도 온통 ‘이벤트’를 해요. 한글날을 맞이하는 어른들부터 이벤트만 하니까, 아이들 또한 이벤트를 따라할 뿐이에요.
아마, ‘깜짝잔치’쯤 되겠지요. 한글날 하루만 맞이해서 깜짝스럽게 벌이는 잔치가 될 테니까요. 생각을 조금 기울인다면, ‘한글날 기쁨잔치’라든지 ‘한글날 기림잔치’라든지 ‘한글날 누림잔치’라든지 ‘한글날 멋잔치’라든지 ‘한글날 솜씨잔치’ 같은 이름을 지을 수 있습니다. 또는 ‘한글날 말잔치’라든지 ‘한글날 이야기마당’이라든지 ‘한글날 놀이마당’을 마련할 수 있어요.
어찌 본다면, 한 해에 고작 하루만 기리고 그치는 한글날이기 때문에, 고등학교 아이들뿐 아니라 이 나라 어른들 모두 한글날을 옳고 바르며 예쁘고 아름다이 돌아보기는 힘들는지 모릅니다. 누군가는 한 해에 고작 하루조차 한글을 생각하지 않을 뿐더러, 아예 마음에 안 담으니까, 한글날을 맞이하건 말건 한국말과 한국글을 엉터리로 쓰거나 아무렇게나 쓰거나 바보스레 쓸는지 모릅니다.
마음을 찬찬히 가다듬을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고등학생이 되어 대학입시를 바라보는 아이들은 한 해 삼백예순닷새 내내 대학입시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온통 대학입시 생각이 가득합니다. 어느 하루라고 대학입시 생각에서 홀가분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늘 쓰는 말글을 이런 얼거리로 생각하는 일은 슬픈 노릇이 되겠으나, 참말 한글날을 기리려 한다면 이 같은 매무새일 때에 비로소 참다이 기릴 만합니다. 하느님을 섬기거나 부처님을 모시듯, 아니 하느님 뜻을 내 삶에 펼치거나 부처님 넋을 내 삶으로 녹이듯, 한국말과 한국글을 알뜰살뜰 사랑하고 따사롭게 돌볼 때에 예뻐요.
어버이는 아이들 밥을 차립니다. 한 해 삼백예순닷새 언제나 아이들 밥을 날마다 세 끼니씩 꼬박꼬박 챙깁니다. 어버이는 아이들 옷가지를 날마다 챙깁니다. 어버이는 아이들이 어느 하루이든 뜻있고 즐겁게 누릴 수 있도록 애씁니다.
햇살은 언제나 따사롭게 내리쬡니다. 햇살은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겨울에도 따뜻하게 지구별을 감쌉니다. 구름이 끼건 비가 내리건 햇살은 늘 지구별을 어루만져요.
바람은 늘 솔솔 붑니다. 물은 언제나 졸졸 흐릅니다. 흙은 풀씨를 북돋웁니다. 나무는 한결같이 그늘을 드리우고 열매를 나눕니다.
어버이가 아이들과 살아갑니다. 자연은 뭇목숨을 어루만집니다. 사람들은 날마다 말과 글로 생각을 주고받습니다. 이 나라에 한국말이 있고 한국말을 담는 그릇인 한국글, 곧 ‘한글’이 있는 일은 더없이 고마운 사랑입니다. 오늘날 숱한 사람들은 바람 한 점과 물 한 방울이 얼마나 고마운지 못 느끼며 살아간다지만, 막상 바람 한 점과 물 한 방울이 아주 살짝이라도 사라지면 모두 숨을 거두고 말아요. 사람들이 서로 생각을 나누는 말이랑 글이 없을 때에는, 사람들 누구나 넋을 잊거나 잃겠지요.
말은 넋을 보듬습니다. 글은 얼을 빛냅니다. 하나하나 따지면, 너무 바쁘게 몰아치며 제자리를 못 찾는 오늘날 사람들이 스스로 제 삶과 넋부터 알뜰히 사랑하지 못하는 판에 제 말을 알뜰히 사랑하기를 바라기란 힘들 수 있어요. 사람들 스스로 제 삶과 넋부터 알뜰히 사랑한다면 사람들 스스로 제 말과 글 또한 알뜰히 사랑할 수 있겠지요. 말과 글도, 그러니까 한국사람이 늘 쓰는 한국말과 한국글도 알뜰히 사랑한다면 기쁠 텐데, 이에 앞서 참다이 누릴 고운 삶과 착하게 다스릴 고운 넋부터 따사롭고 너그러이 추스를 수 있기를 빌어요. 좋은 삶에 좋은 넋이 깃들며 좋은 말이 빛나요. 고운 삶에 고운 넋이 감돌며 고운 글이 샘솟아요. (4345.6.11.달.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