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 - 4월에서 8월까지 모든 진보에게 묻는다
손석춘 지음 / 철수와영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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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 아닌 평화를 이룰 삶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51] 손석춘,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

 


- 책이름 :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
- 글 : 손석춘
- 펴낸곳 : 철수와영희 (2012.8.15.)
- 책값 : 1만 원

 


  방바닥을 걸레질합니다. 하루에 몇 차례씩 걸레질을 하거나 비질을 하곤 합니다. 어린 두 아이와 살아가면서 그야말로 쉴 겨를이 없습니다. 이 땅에서 어버이로 살아가는 사람은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도록 하는 보금자리에서 숱한 일을 쉴 틈 없이 하겠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걸레질이 지겹거나 비질이 귀찮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어지르거나 작은아이가 똥오줌을 눈다 하더라도, 닦거나 치울 만하니까 닦거나 치웁니다. 어지른 것을 치우고 똥오줌 또한 치우면서 집안을 한 번 더 쓸거나 닦는 셈이리라 느낍니다.


  집 안팎에서 놀며 땀에 젖거나 지저분해진 옷을 벗겨 씻깁니다. 새 옷을 입힙니다. 아이들 옷가지 빨래는 날마다 수북하게 나옵니다. 한 살을 더 먹으면 빨래가 줄까, 두 살을 더 먹으면 빨래가 가뿐할까, 하고 생각한 지 다섯 해가 흐릅니다. 앞으로 해는 흐르고 흘러 또 다섯 해가 흐를 테고, 거듭 다섯 해가 흐르겠지요. 이동안 아이들마다 팔힘이나 다리힘이 부쩍 붙는다면, 바야흐로 아이들은 저희 옷을 저희가 빨래하거나 건사하거나 보듬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갖은 집일과 빨래와 밥하기에 얽히며 살아가지만, 이처럼 보낼 나날은 아주 짧으리라 느껴요. 무럭무럭 큰 아이들이 저희 삶을 저희 깜냥껏 빛내는 모습을 마주하면서 활짝 웃을 날이 아주 길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 대한민국 찬가를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 가운데는 4월혁명 세대도 있고 가까이는 한총련 세대도 있다. 그들의 찬가는 사뭇 객관적 통계로 뒷받침된다. 헐벗고 굶주린 나라가 산업화에 성공했고 민주화도 이뤘으며 마침내 선진화에 이르고 있다는 논리다. 그래서일까. 진보 일각에서도 마치 박정희를 비판만 하면 낡은 진보, ‘꼴통 진보’ 따위로 매도하는 윤똑똑이들이 나타났다. 박정희가 이룬 경제성장을 인정해야 새로운 진보이고 수구좌파가 아니라는 논리는 사뭇 학문의 옷까지 걸치고 등장했다. 박정희가 일본제국주의에 혈서를 써 가며 충성을 맹세할 만큼 출세를 위해서라면 민족을 배신하길 서슴지 않았다는 사실도, 쿠테타 직후 〈민족일보〉 발행인 처형을 비롯해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숱한 민주 인사들의 생명을 앗아간 살인범이었다는 사실도, 민주공화국 헌법을 유린하고 사실상 총통으로 군림하며 정수장학회니 육영재단, 영남대 재단 따위로 다른 사람 재산을 빼앗거나 축적한 사실도, 국가 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에 ‘채홍사’를 둘 만큼 주색잡기에 빠져 있었다는 증언도 죄다 중요하지 않다 ..  (9∼10쪽)


  빨래를 날마다 너덧 차례나 예닐곱 차례까지 합니다. 겨울철에는 하루 서너 차례 빨래로 마무리지었으나, 여름철에는 예닐곱 차례뿐 아니라 여덟아홉 차례 빨래를 할 때가 있습니다. 후끈후끈 무더운 날에는 아이도 어른도 옷을 자주 갈아입고 자주 씻기고 씻으면서 새삼스레 빨래를 합니다. 무더운 날에는 빨래도 잘 마르니 자주 빨아 바지런히 말립니다.


  때로는 빨래만 바지런히 하고, 옷 개기는 미적미적 미룹니다. 예쁘게 개어 옷장에 넣어도 워낙 빨리 옷을 버리고 갈아입으니 다른 일을 할래, 하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다른 집일에 마음을 쓰느라 그만 깜빡 잊곤 합니다. 요즈음에는 마당에서 빨래를 걷을 적에 아예 마당에서 선 채 빨래를 갭니다. 이렇게 개지 않으면 옷가지를 집안으로 들이고서 옷을 못 개리라 느껴요. 옷가지를 들고 집으로 들어오면 다른 집일이 나를 부르는 바람에 옷은 나중에 개도 되지, 하고 여기고 맙니다.


  바로 옆에 수북하게 쌓인 옷가지는 어서 개 달라고 부릅니다. 부러 못 본 척하지는 않으나 가만히 바라봅니다. 아이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은 조금 더 잠을 자 주는구나 싶습니다. 밤새 틈틈이 비가 오더니 아침 일곱 시 즈음에는 햇살이 노오랗게 비치고, 뒤꼍에서 매미가 노래합니다. 아침햇살은 나뭇잎과 풀잎 사이에 곱게 드리웁니다. 물기 머금은 흙은 보들보들 빛납니다. 더위는 한풀 꺾인 듯하다가도 쉬 물러서지 않습니다. 아직 팔월 한복판인걸요.


  어느 논자락에는 벌써 이삭이 맺히고 열매가 익습니다. 이삭 맺힌 논은 얼마 없지만, 남녘나라에서 많이 따사로운 전남 고흥 시골마을 논자락은 조금 더 일찍 노오란 들판으로 바뀌리라 생각합니다. 나뭇잎은 푸르고, 들판은 노오라며, 하늘은 파랗게 눈부실 때에, 이 빛깔 사이사이 하얗게 흐르는 구름이 있을 적에, 네 식구 천천히 들길을 거닐면서 두 팔을 스르르 듭니다. 맑은 빛을 맞아들입니다. 밝은 볕을 받아들입니다. 고운 숨결을 끌어안습니다.


  걸을 수 있어 들길을 걷습니다. 누울 수 있어 풀숲에 눕습니다. 달릴 수 있어 멧길을 낑낑거리며 달립니다.


  바람은 산들산들 붑니다. 빛살은 골고루 퍼집니다. 풀벌레는 곳곳에서 노래합니다. 이 모든 목숨붙이 사이에서 사람은 예쁜 생각을 틔웁니다.


.. 그들의 반발감은 ‘조중동 프레임’을 남용하는 사람들로 인해 더 확고해지기도 했다. 자신의 잘못을 생뚱맞게 조중동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을 우리는 적잖게 목격해 왔다 … 조중동 때문만으로 소통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진보정치 세력과 국민 사이에, 좁게는 진보정치 세력 내부에, 더 좁게는 바로 진보 개개인 내부에 소통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렇다. 먹통은 이명박 정권만이 아니다. 적잖은 진보도 먹통이다 … 문제는 아무리 대안 토론회를 열고 책을 출간해도 국민과의 소통이 막히는 데 있다. 대다수 언론이 대안을 담은 신간 소개조차 모르쇠다 … 진보를 내세운 언론도 진보세력이 내놓는 대안 보도에 인색한 데 있다 ..  (17, 30, 106쪽)


  손석춘 님이 쓴 자그마한 책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철수와영희,2012)를 읽습니다. 진보정치나 진보운동이 걸어온 길을 찬찬히 짚으면서, 옳은 넋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가만히 그리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한국땅에서 나고 자란 젊은 넋이 바라던 옳은 길이란 무엇이었나 하고 밝힙니다. 한국땅에서 아이를 낳고 어버이나 어른이 될 젊거나 푸른 넋이 스스로 붙안을 만한 예쁜 길이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합니다.


.. 한국의 대다수 시민은 ‘노동자’라는 말을 부담스러워 한다. 이해할 수 있다. 초·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에서도 노사 관계를 비롯해 노동 교육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신문과 방송에서 노동자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도 아니다 … 한국은 노동자라는 말은 물론, 노동운동이나 임금협상과 단체협상 그 모든 게 시민권조차 확보하지 못한 나라다 … 진보정당의 분열상은 대서특필하면서, 걱정하는 사람들이 정작 생활 현장에서 실제로 진보 대안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무시하는 모습을 이해하기는 난감하다 ..  (22∼23, 25, 110쪽)


  누구한테나 들려줄 만한 말인데, 억척스레 살아갈 까닭이 없습니다. 힘을 내어 살아갈 때에 즐겁지, 억척스레 살며 즐거울 수 없습니다. 악을 쓰며 살아갈 까닭이 없습니다. 사랑을 나누며 살아갈 때에 기쁘지, 악을 쓰며 사는 동안 기쁠 수 없습니다.


  자가용이 있으면 하루만에 훌쩍 다녀올 만한 길이라면, 자전거를 타면 이틀이나 사흘에 걸쳐 천천히 다녀올 만한 길입니다. 두 다리로 걷는다면 열흘이나 보름이 걸릴 만한 길일 수 있습니다.


  꼭 자가용을 몰아야 좋은 삶이 아닙니다. 자전거를 우악스레 빨리 몰아야 좋은 나들이가 아닙니다. 죽을 동 살 동 쉬잖고 걸어야 좋은 마실이 아닙니다.


  자가용 있어도 즐겁고, 자가용 없어도 즐겁습니다. 돈 넉넉히 있어도 즐거우며, 돈 얼마 없어도 즐겁습니다. 즐거움은 자가용이나 돈에 깃들지 않아요. 즐거움은 오직 내 마음에 깃들어요. 너른 마음에 깃드는 즐거움이에요. 착한 마음에 스미는 기쁨이에요. 맑은 마음에 찾아드는 웃음이에요. 고운 마음에 넘치는 사랑이에요.


.. 김대중이 군사독재 아래서 “경제성장의 열매는 이들과 결탁한 소수 특권층에 의해 거의 독점되어 왔으며 노동자·농민들은 성장의 결실 배분에 참여하는 것으로부터 배제되어 왔다”고 주장했지만, 바로 그 노동자와 농민들이 갈망했던 ‘김대중 대통령’ 아래서도 경제성장의 열매는 소수 특권층이 독점했다 … 최장의 노동시간을 자랑하는 국가에서 국민 대다수가 억척스럽게 살아가면서도 얼마 안 되는 여가시간 대부분을 텔레비전 드라마 시청으로 보낸다. 케케묵은 바보상자론을 펴려는 게 아니다. 다만 차분히 토론해 볼 필요는 있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얼마나 많은 드라마를 보았는가를. 드라마에 나오는 대기업 회장과 그 가족들의 모습은 한결같다 ..  (76∼77, 123쪽)


  나는 진보가 더 좋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진보(進步)’를 한국말로 쉽게 풀자면 ‘나아짐’이나 ‘높아짐’이라 하는데, 한 마디로 ‘발돋움’이라 할 테지요. 한결 앞으로 나아가고 한결 슬기롭게 높아진다는 뜻일 테지요. 아무튼, 나아지거나 높아질 때에 아름다울 수 있지만, 나아지거나 높아진다는 뜻을 꼭 발돋움으로 따져야 하지는 않아요. ‘생활 진보’라 말할 것 없이, 오이꽃이나 수박꽃이나 호박꽃이나 수세미꽃을 보는 하루도 아름답고 즐거우며 놀랍습니다. 감꽃이나 벼꽃이나 매화꽃이나 딸기꽃이나 달맞이꽃이나 나팔꽃이나 오얏꽃을 보는 하루도 예쁘며 빛나고 훌륭합니다.


  진보정당일 때에 진보가 된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삶이 아름다울 때에 ‘환하게 웃는 길로 나아간다’고 느껴요. 내가 웃고 네가 웃는 길로 나아가는 사람들은 서로서로 어깨동무를 합니다. 만화책 《도라에몽》에 나오는 ‘이슬이’는 ‘영민이’와 ‘진구’뿐 아니라 ‘퉁퉁이’와 ‘비실이’한테도 손수 구운 과자를 나눕니다. ‘도라에몽’과 ‘진구’는 ‘이슬이’뿐 아니라 ‘퉁퉁이’와 ‘비실이’도 불러 즐겁게 구름을 타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놀이를 즐깁니다.


  함께 나아가는 길이에요. 가을날 누렇게 익은 들판에서 거두는 벼는 이이한테만 먹이고 저이한테는 안 먹여도 되지 않아요. 골고루 나누는 사랑이자 꿈입니다. 다 함께 누리는 밥이자 삶입니다.


  이를테면, 무상급식을 하면 돈있는 집한테든 돈없는 집한테든 골고루 좋겠지요. 무상급식을 할 돈은 세금을 골고루 슬기롭게 거두면 되겠지요. 나는 100원을 벌기에 10원을 세금으로 냅니다. 내 이웃은 10000원을 벌기에 1000원을 세금으로 냅니다. 또는, 나는 10원을 벌기에 세금을 따로 내지 않습니다. 내 동무는 100000원을 벌기에 10000원이나 20000원을 세금으로 냅니다.


  어린 아이들은 작은 손으로 흙을 조금 떠서 나릅니다. 힘센 어른들은 푸대에 흙을 잔뜩 담아 지게로 몇 섬씩 나릅니다. 그런데, 아이한테도 어른한테도 떡을 한 점씩 줍니다. 아이한테도 어른한테도 밥그릇 하나씩 베풉니다. 집에 아이가 있는 어른은 떡을 두 점 받거나 석 점 받습니다. 몸이 아파 드러누운 어른은 흙푸대를 한 섬도 안 날랐으나 떡과 밥을 똑같이 받습니다. 아기를 밴 어머니는 떡과 밥을 둘씩 받기도 합니다. 아기를 밴 어머니 또한 흙푸대는 한 섬도 안 날랐으나 떡과 밥은 외려 더 받는다 할 만합니다.


  너무 마땅한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마땅한 이야기는 이쪽 신문을 읽으며 이쪽 생각을 하든 저쪽 신문을 읽으며 저쪽 생각을 하든 누구한테나 마땅하고 옳으며 똑같습니다. 귀여운 손자는 왼쪽 사람한테도 귀엽고 오른쪽 사람한테도 귀엽습니다. 우리 집 아픈 아이는 왼쪽 사람한테도 보살필 애틋한 아이요 오른쪽 사람한테도 보살필 애틋한 아이예요.


.. 무엇보다 진보가 할 일은 사람에 대한 존중이다. 우리에게 사람과 사회, 역사의 변화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진보운동을 시작했겠는가. 그 첫 마음을 소통해야 옳다 … 진보 대혁신의 출발점은 개개인의 자기성찰과 학습이다 ..  (97, 113쪽)


  우리 삶은 굳이 ‘진보’로 가지 않아도 됩니다. ‘진보’가 굳이 이 땅에 뿌리내리지 않아도 됩니다. 오직 ‘착함·참다움·고움’ 이렇게 세 가지가 이 땅에 뿌리내리면 돼요. 누구한테나 착한 빛과 서로서로 참다운 꿈과 다 함께 고운 사랑이 이 땅에 뿌리내릴 수 있으면 즐거워요.


  고운 아이한테도 미운 아이한테도 떡 한 점씩 나눕니다. 고운 이웃도 미운 이웃도 따로 없이, 저마다 논밭을 푸르게 일굽니다. 능금나무는 모든 사람한테 달콤한 열매를 나누어 줍니다. 복숭아나무는 모든 아이들한테 달콤한 열매를 베풉니다. 포도나무는 모든 어른들한테 달콤한 열매를 선사합니다.


  정치이든 경제이든 문화이든 교육이든 예술이든, 또 집안일이든 집살림이든, 능금나무 같은 길을 걸어가면 좋으리라 느껴요. 복숭아나무처럼, 포도나무처럼, 또 볏포기처럼 배추처럼 무처럼, 누구한테나 맛나고 달콤하며 배부른 숨결을 불어넣는 예쁜 길을 걸어가면 참말 좋으리라 생각해요.
  삶을 배워야지요. 사랑을 얘기해야지요. 꿈을 이루어야지요. (4345.8.16.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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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그림과 닮았어요, 장욱진 그림 보며 놀자 2
문승연 지음 / 길벗어린이(천둥거인)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닮은 그림은 없어요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87] 문승연, 《내 그림과 닮았어요, 장욱진》(천둥거인,2007)

 


  그림쟁이 장욱진 님 삶과 눈길과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엮은 그림책 《내 그림과 닮았어요, 장욱진》(천둥거인,2007)을 읽습니다. 그림책에 붙은 이름 “내 그림과 닮았어요”에서 ‘내’는 어린이입니다. 그런데, 몇 살쯤 되는 어린이일까요. 몇 살쯤 될 어린이하고 장욱진 님 그림이 닮았다고 할 만할까요.


  시골 흙집과 도시 아파트는 다릅니다. 시골에서도 새마을운동을 맞이해 갑작스레 늘어나며 생겨난 슬레트집이랑 여느 풀집은 다릅니다. 흙일꾼이 살던 풀집이나 흙집하고 양반이나 사대부가 살던 기와집은 또 다릅니다.


  흙집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아이가 흙마당에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린다면, 이 아이는 ‘집’을 어떻게 그릴까 궁금합니다. 나무문살에 창호종이 바른 문이 있는 흙집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아이는 ‘집’을 이루는 대문이나 창문을 어떻게 그릴는지 궁금합니다.


  아이들은 아이답게 그림을 그리지만, 아이들은 저마다 바라보고 느낀 대로 그림을 그립니다. 아이들은 어른처럼 금을 곧게 긋지 못한다지만, 아이로서는 가장 곧은 금을 긋습니다. 아이들은 굴뚝을 그립니다. 아이들은 섬돌을 그립니다. 아이들은 툇마루와 대청마루와 기둥과 처마를 그립니다. 처마 밑 제비집도 그림으로 담을 테지요.


  아이들은 아이 삶 그대로 그림을 그립니다. 얼굴을 그리며 눈과 눈썹과 코와 입과 귀를 그립니다. 점을 눈여겨보았으면 점을 그립니다. 머리카락을 그립니다. 스스로 바라보며 느낀 결을 그림 하나에 살뜰히 담습니다.


  문승연 님이 엮은 《내 그림과 닮았어요, 장욱진》을 곰곰이 들여다봅니다. 문승연 님은 ‘어른’ 눈높이에서 장욱진 님 그림을 읽습니다. 아이들한테 읽히려는 그림책입니다만, 이야기풀이와 말투와 글짜임 모두 어른 눈높이입니다. 아이들 눈높이가 아니에요.

 

 

 


.. 아이가 서 있던 녹색 언덕은 동그란 모양을 하고 있었네요. 녹색의 동그라미는 무엇일까요? 지구 위에 집들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녹색 별 같기도 하고 ..


  아이들은 “녹색(綠色) 언덕”을 말하지 않습니다. 시골 아이 또한 “녹색 언덕”을 말할 일이 없습니다. 풀과 나무가 푸른 언덕은 그저 “푸른 언덕”입니다. 푸른 언덕이 동그란 모양이라면, 동그란 푸른 언덕은 “푸른 동그라미”일 테지요. 더욱이,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할매나 할배는 “녹색의 동그라미” 같은 말을 하지 않아요. 말을 하자면 “푸른 동그라미”이지, 일본 한자말 ‘녹색’과 일본 말투 ‘の’를 딴 ‘-의’를 함부러 넣지 않아요.


  그야말로 푸른 물결인 시골 들판입니다. 논도 밭도 멧자락도 모두 푸른 바다입니다. 푸른 잎사귀가 넘실거리는 위에는 파란 물결이 넘실거립니다. 널따란 파란 바다에 하얀 구름이 조각배처럼 둥실둥실 흐릅니다. 아이들은 푸른 들판과 파른 하늘과 하얀 구름과 푸른 나무를 그림으로 그립니다. 다만, 이렇게 빛깔을 또박또박 나누어 온누리를 그리는 어린이라면 나이가 좀 들어야겠지요.


.. 생명을 키우는 나무. 하늘과 우리를 이어 주는 새. 낮과 밤을 합친 모든 시간. 그 속에서 우리는 모두 한 가족이에요 ..

 


  장욱진 님은 어떤 넋으로 그림을 그렸을까 헤아려 봅니다. 장욱진 님은 ‘어린이 흉내’를 내며 그림을 그렸을까요. 꼭 어린이처럼 보이려고 시늉을 했을까요.


  아니에요. 장욱진 님은 장욱진 님 삶결대로 그림을 그렸어요. 누군가는 장욱진 님 그림을 바라보며 ‘아이들 그림을 닮았네’ 하고 여길는지 모르나, 참말 모르는 소리예요. 장욱진 님 그림은 아이들 그림을 닮지 않아요. 아이들은 이렇게 그림을 그리지 않아요. ‘어른’이니까 이렇게 그림을 그려요. 아이들은 아이들답게 살아가는 꿈과 사랑으로 그림을 그려요. 장욱진 님은 어른으로 살아가는 사람답게 어른으로서 꿈꾸는 이야기와 사랑하는 이야기를 단출하게 갈무리하면서 그림 하나로 빚어요.


  그림을 풀이하는 길은 누구나 홀가분하게 할 만합니다. 문승연 님은 문승연 님 나름대로 장욱진 님 그림을 풀이하며 즐길 만합니다. 이렇게 즐겨도 좋고 저렇게 즐겨도 기쁩니다. 어느 한 가지 틀로 그림을 즐기란 법이 없어요. 이이 그림은 이렇게 읽고 저이 그림은 저렇게 읽어야 한다는 법이 없어요.


  가만히 살피면, 그림을 그리는 이도 그림쟁이 삶대로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읽는 이도 그림을 바라보는 삶대로 그림을 읽어요. 저마다 선 자리에 따라 그림을 읽어요. 그러니까, 옳은 눈길은 없어요. 바른 눈썰미는 없어요.


  좋아하는 눈길이고 아끼는 눈썰미예요. 이러한 흐름과 결을 좋아하며 누릴 수 있어요. 저러한 빛깔과 무늬를 아끼며 누릴 수 있어요.


  나무는 목숨을 키우기도 하지만, 나무는 스스로 고운 목숨이에요. 나무는 목숨을 키운다고도 하지만, 나무는 바로 지구예요. 나무한테서 숨결을 나누어 받는 사람은 고맙게 선물을 받지만, 사람들은 스스로 맑은 눈길과 마음길을 나무한테 나누어 주면서 서로 예쁘게 얼크러져요. 따사로운 눈빛으로 나무를 바라봐요. 따사로운 손길로 나무를 쓰다듬어요. 따사로운 마음길로 나무를 생각해요.


  장욱진 님은 장욱진 님한테 가장 넓은 꿈과 깊은 사랑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아이들은 누구나 아이로서 가장 넓은 꿈과 깊은 사랑을 빛내어 그림을 그립니다. 어른들 또한 스스로 가장 좋아하며 즐기고 아끼는 한편 빛낼 만한 넋을 북돋우면서 그림을 그려요.


  잘난 그림이 없고 못난 그림이 없어요. 잘 쓴 글이나 못 쓴 글이 없어요. 잘 찍은 사진이나 못 찍은 사진이 없어요. 스스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아요. 스스로 누리는 빛을 보여줘요. 스스로 어깨동무하는 삶을 들려줘요.


  그림을 좋아하는 넋을 아이였을 적부터 곱게 이으며 한결같이 살아가려 하던 장욱진 님이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닮은 삶이 없기에 닮은 그림이 없고, 닮은 빛깔이 없기에 닮은 사랑이 없습니다. (4345.8.16.나무.ㅎㄲㅅㄱ)

 


― 내 그림과 닮았어요, 장욱진 (문승연 엮음,천둥거인 펴냄,2007.11.13./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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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87 : 낮은 목소리 책읽기

 


  한여름에는 집에서도 덥습니다. 더운 날씨에 파리들은 마음껏 날갯짓합니다. 밤잠을 자든 낮잠을 자든, 파리들은 몇 마리씩 내 발가락이나 허벅지나 콧잔등에 앉곤 합니다. 파리가 내려앉을 때면 간질간질하는 바람에 제대로 잠들지 못합니다. 아주 작은 벌레가 아주 살짝 내려앉을 뿐이지만, 나는 파리 움직임이 성가시다고 느낍니다.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살랑거립니다. 나뭇잎이 살랑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바람을 쐽니다. 이야, 시원하구나, 하고 느끼면서 이야, 시원한 소리네, 하고 느낍니다. 바람은 살결과 귓결로 시원스레 찾아듭니다.


  바람은 드넓은 들판 푸른 볏포기를 가로지르곤 합니다.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무럭무럭 익는 벼는 사람들한테 좋은 밥으로 거듭납니다. 한겨레는 한여름 햇살 듬뿍 받은 벼에서 얻은 열매인 쌀을 먹으면서 여름을 헤아리고 봄을 살피며 가을을 노래합니다. 모든 곡식에는 철이 담기고 날씨가 담깁니다.


  루이제 린저 님 책 《낮은 목소리》(덕성문화사,1992)를 읽습니다. 2001년에 《내가 아닌 사람과 사는 지혜》(지식공작소)라는 이름으로 새로 나온 이 책은 짤막하게 적바림한 생각을 그러모읍니다. 이를테면, “사람이 완전히 겸허한 가운데 스스로 작고 충실하고 초라한 하느님의 심부름꾼 이외에는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때에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는지를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58쪽)?”라든지 “내가 그 돈을 그들에게 주기 전까지 금고는 텅 빈 채로였으나, 그들은 조바심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그날의 일용할 양식만을 기원했고, 언제나 그것은 채워졌기 때문입니다(135쪽).” 같은 이야기가 잔잔하게 흐릅니다.


  차분하게 흐르는 생각은 아름답게 일구는 마음이 됩니다. 가만히 이어지는 사랑은 찬찬히 빛나는 믿음이 됩니다.


  진보를 바라는 이들이 슬기롭게 꿈꾸기를 바라는 손석춘 님이 쓴 작은 책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철수와영희,2012)를 훌쩍 읽습니다. 아버지가 책을 읽는 곁에서 다섯 살 어린이는 《도라에몽》 만화책을 읽습니다. 손석춘 님은 맺음말로 “정치를 바꾸는 길, 국민 대다수의 정치경제 생활, 곧 삶을 바꾸는 길이다. 모든 진보에게 고한다. 아니, 호소한다. ‘학습하라, 토론하라, 소통하라.’(134쪽)” 하는 외침을 꾹꾹 눌러 씁니다. 참말 누구라도 ‘배우고, 얘기하고,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 진보를 바라는 이들이든, 보수나 수구를 꾀하는 이들이든, 사회주의나 공화주의나 자본주의나 민주주의나 무슨무슨 주의를 외치려는 이들이든, 모두 ‘배우고, 얘기하고, 나눌’ 줄 알 노릇입니다.


  참답게 살아갈 길을 배웁니다. 착하게 어우러질 길을 얘기합니다. 아리땁게 사랑할 길을 나눕니다. 높은 목소리도 없으나 낮은 목소리도 없습니다. 아리따운 목소리가 있고, 곧바른 목소리가 있습니다. 빛나는 목소리가 있으며, 슬기로운 목소리가 있습니다. 서로를 아끼는 목소리가 있고, 서로서로 보살피는 목소리가 있어요. 어깨동무할 벗님과 즐겁게 웃음을 나누는 책입니다. (4345.8.15.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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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른 손과 젖은 손

 


  내가 쓰는 필름스캐너는 2004년부터 씁니다. 퍽 오랫동안 한 가지 기계로만 필름을 긁기에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래 즐겁게 쓸는 지 모르는데, 필름 한 통을 다 긁자면 얼추 한 시간 즈음 걸립니다. 그래서 필름 여섯 장을 스캐너에 앉히고서 다른 일을 합니다. 이를테면 방바닥을 비질하고 걸레질합니다. 빨래를 하기도 하고, 밥을 하기도 합니다. 필름 여섯 장이 다 긁힐 무렵 손에서 물기를 텁니다. 다 긁힌 파일을 셈틀에 갈무리합니다. 새로 필름 여섯 장을 앉히려고 아직 덜 마른 물기를 옷에 북북 비비며 닦습니다. 그러나 집일을 하면서 필름을 긁자면 손에서 물기 마를 새 없습니다. 밥을 하거나 빨래를 하며 필름을 앉힐 때면 필름에 물기 묻을까 조마조마합니다.


  필름이 긁히도록 앉히고서 집일을 해야 한다면, 차라리 사진관에 필름을 파일로 만들어 달라 맡길 만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진관에서 긁어 주는 파일 크기는 내가 집에서 긁는 크기보다 작습니다. 필름 한 통 긁는 데에 드는 돈도 돈이라 할 테지만, 집일을 하는 틈틈이 필름을 긁는 일을 헤아린다면, ‘필름을 디지털 파일로 만드는 데에 쓰는 돈’은 얼마 안 돼요. 고마운 품값입니다.


  밥을 다 해서 차립니다. 아이들과 옆지기를 불러서 함께 먹습니다. 필름 다 긁힌 소리가 들리면 셈틀 앞으로 달려가 파일을 갈무리하고 새로 필름을 앉힙니다. 이제 스캐너가 드르륵 움직이면 다시 밥상 앞에 앉습니다. 이러기를 여러 차례 되풀이하면 비로소 필름 한 통을 다 긁습니다. 밥을 먹는 동안에는 손에 물기가 안 묻으니 걱정 없이 필름을 만집니다. 집에서 어린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며 필름을 만지자면 퍽 바쁘며 힘들다 할 수 있겠다고 느낍니다. 참말, 사진을 하건 글을 하건 그림을 하건 무엇을 하건, 집안 어른 한 사람이 어느 전문 일을 할 때에는 그야말로 누군가 곁에서 크게 도와주지 않을 때에는 몹시 벅차겠구나 싶습니다. 그래도 나는 집일을 도맡으며 사진도 찍고, 밥을 차리면서 필름을 긁습니다. 이런 아버지를 바라보던 다섯 살 큰아이가 아버지 곁에 붙어서 부채질을 해 줍니다. (4345.8.15.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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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옆을 바라보면

 


  옆을 바라보면 들판입니다. 앞을 바라보아도 들판입니다. 오늘날 들판에는 온갖 풀약이 뿌려지지만, 푸른 빛깔 싱그러이 나부끼는 모습을 바라보며 좋네, 하고 생각합니다. 옆지기도 아이들도 나도 푸른 들판을 바라봅니다. 굳이 이곳을 바라보거나 저쪽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우리 삶터는 들판이기에 들판을 바라봅니다.


  들판을 바라보며 들바람을 쐽니다. 들마음을 생각하며 들마실을 합니다. 식구들 다 함께 멧길을 오르내리며 멧바람을 쐽니다. 멧마음을 생각하며 멧마실을 합니다.


  봄에는 봄바람이고 여름에는 여름바람입니다. 마을에는 마을바람이고, 나무 밑에서는 나무바람입니다. 참깨밭 앞에 서면 참깨바람이 붑니다. 잠자리가 떼를 지어 날아가면서 잠자리바람을 일으킵니다. 제비는 제비바람을 일으키고, 나비는 나비바람을 일으킵니다.


  스스로 보고 싶은 곳을 보겠지요. 스스로 살고 싶은 대로 살겠지요. 볏포기는 천천히 푸른 빛깔을 벗으면서 노란 빛깔을 입습니다. (4345.8.14.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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