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 - 4월에서 8월까지 모든 진보에게 묻는다
손석춘 지음 / 철수와영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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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 아닌 평화를 이룰 삶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51] 손석춘,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

 


- 책이름 :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
- 글 : 손석춘
- 펴낸곳 : 철수와영희 (2012.8.15.)
- 책값 : 1만 원

 


  방바닥을 걸레질합니다. 하루에 몇 차례씩 걸레질을 하거나 비질을 하곤 합니다. 어린 두 아이와 살아가면서 그야말로 쉴 겨를이 없습니다. 이 땅에서 어버이로 살아가는 사람은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도록 하는 보금자리에서 숱한 일을 쉴 틈 없이 하겠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걸레질이 지겹거나 비질이 귀찮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어지르거나 작은아이가 똥오줌을 눈다 하더라도, 닦거나 치울 만하니까 닦거나 치웁니다. 어지른 것을 치우고 똥오줌 또한 치우면서 집안을 한 번 더 쓸거나 닦는 셈이리라 느낍니다.


  집 안팎에서 놀며 땀에 젖거나 지저분해진 옷을 벗겨 씻깁니다. 새 옷을 입힙니다. 아이들 옷가지 빨래는 날마다 수북하게 나옵니다. 한 살을 더 먹으면 빨래가 줄까, 두 살을 더 먹으면 빨래가 가뿐할까, 하고 생각한 지 다섯 해가 흐릅니다. 앞으로 해는 흐르고 흘러 또 다섯 해가 흐를 테고, 거듭 다섯 해가 흐르겠지요. 이동안 아이들마다 팔힘이나 다리힘이 부쩍 붙는다면, 바야흐로 아이들은 저희 옷을 저희가 빨래하거나 건사하거나 보듬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갖은 집일과 빨래와 밥하기에 얽히며 살아가지만, 이처럼 보낼 나날은 아주 짧으리라 느껴요. 무럭무럭 큰 아이들이 저희 삶을 저희 깜냥껏 빛내는 모습을 마주하면서 활짝 웃을 날이 아주 길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 대한민국 찬가를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 가운데는 4월혁명 세대도 있고 가까이는 한총련 세대도 있다. 그들의 찬가는 사뭇 객관적 통계로 뒷받침된다. 헐벗고 굶주린 나라가 산업화에 성공했고 민주화도 이뤘으며 마침내 선진화에 이르고 있다는 논리다. 그래서일까. 진보 일각에서도 마치 박정희를 비판만 하면 낡은 진보, ‘꼴통 진보’ 따위로 매도하는 윤똑똑이들이 나타났다. 박정희가 이룬 경제성장을 인정해야 새로운 진보이고 수구좌파가 아니라는 논리는 사뭇 학문의 옷까지 걸치고 등장했다. 박정희가 일본제국주의에 혈서를 써 가며 충성을 맹세할 만큼 출세를 위해서라면 민족을 배신하길 서슴지 않았다는 사실도, 쿠테타 직후 〈민족일보〉 발행인 처형을 비롯해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숱한 민주 인사들의 생명을 앗아간 살인범이었다는 사실도, 민주공화국 헌법을 유린하고 사실상 총통으로 군림하며 정수장학회니 육영재단, 영남대 재단 따위로 다른 사람 재산을 빼앗거나 축적한 사실도, 국가 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에 ‘채홍사’를 둘 만큼 주색잡기에 빠져 있었다는 증언도 죄다 중요하지 않다 ..  (9∼10쪽)


  빨래를 날마다 너덧 차례나 예닐곱 차례까지 합니다. 겨울철에는 하루 서너 차례 빨래로 마무리지었으나, 여름철에는 예닐곱 차례뿐 아니라 여덟아홉 차례 빨래를 할 때가 있습니다. 후끈후끈 무더운 날에는 아이도 어른도 옷을 자주 갈아입고 자주 씻기고 씻으면서 새삼스레 빨래를 합니다. 무더운 날에는 빨래도 잘 마르니 자주 빨아 바지런히 말립니다.


  때로는 빨래만 바지런히 하고, 옷 개기는 미적미적 미룹니다. 예쁘게 개어 옷장에 넣어도 워낙 빨리 옷을 버리고 갈아입으니 다른 일을 할래, 하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다른 집일에 마음을 쓰느라 그만 깜빡 잊곤 합니다. 요즈음에는 마당에서 빨래를 걷을 적에 아예 마당에서 선 채 빨래를 갭니다. 이렇게 개지 않으면 옷가지를 집안으로 들이고서 옷을 못 개리라 느껴요. 옷가지를 들고 집으로 들어오면 다른 집일이 나를 부르는 바람에 옷은 나중에 개도 되지, 하고 여기고 맙니다.


  바로 옆에 수북하게 쌓인 옷가지는 어서 개 달라고 부릅니다. 부러 못 본 척하지는 않으나 가만히 바라봅니다. 아이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은 조금 더 잠을 자 주는구나 싶습니다. 밤새 틈틈이 비가 오더니 아침 일곱 시 즈음에는 햇살이 노오랗게 비치고, 뒤꼍에서 매미가 노래합니다. 아침햇살은 나뭇잎과 풀잎 사이에 곱게 드리웁니다. 물기 머금은 흙은 보들보들 빛납니다. 더위는 한풀 꺾인 듯하다가도 쉬 물러서지 않습니다. 아직 팔월 한복판인걸요.


  어느 논자락에는 벌써 이삭이 맺히고 열매가 익습니다. 이삭 맺힌 논은 얼마 없지만, 남녘나라에서 많이 따사로운 전남 고흥 시골마을 논자락은 조금 더 일찍 노오란 들판으로 바뀌리라 생각합니다. 나뭇잎은 푸르고, 들판은 노오라며, 하늘은 파랗게 눈부실 때에, 이 빛깔 사이사이 하얗게 흐르는 구름이 있을 적에, 네 식구 천천히 들길을 거닐면서 두 팔을 스르르 듭니다. 맑은 빛을 맞아들입니다. 밝은 볕을 받아들입니다. 고운 숨결을 끌어안습니다.


  걸을 수 있어 들길을 걷습니다. 누울 수 있어 풀숲에 눕습니다. 달릴 수 있어 멧길을 낑낑거리며 달립니다.


  바람은 산들산들 붑니다. 빛살은 골고루 퍼집니다. 풀벌레는 곳곳에서 노래합니다. 이 모든 목숨붙이 사이에서 사람은 예쁜 생각을 틔웁니다.


.. 그들의 반발감은 ‘조중동 프레임’을 남용하는 사람들로 인해 더 확고해지기도 했다. 자신의 잘못을 생뚱맞게 조중동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을 우리는 적잖게 목격해 왔다 … 조중동 때문만으로 소통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진보정치 세력과 국민 사이에, 좁게는 진보정치 세력 내부에, 더 좁게는 바로 진보 개개인 내부에 소통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렇다. 먹통은 이명박 정권만이 아니다. 적잖은 진보도 먹통이다 … 문제는 아무리 대안 토론회를 열고 책을 출간해도 국민과의 소통이 막히는 데 있다. 대다수 언론이 대안을 담은 신간 소개조차 모르쇠다 … 진보를 내세운 언론도 진보세력이 내놓는 대안 보도에 인색한 데 있다 ..  (17, 30, 106쪽)


  손석춘 님이 쓴 자그마한 책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철수와영희,2012)를 읽습니다. 진보정치나 진보운동이 걸어온 길을 찬찬히 짚으면서, 옳은 넋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가만히 그리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한국땅에서 나고 자란 젊은 넋이 바라던 옳은 길이란 무엇이었나 하고 밝힙니다. 한국땅에서 아이를 낳고 어버이나 어른이 될 젊거나 푸른 넋이 스스로 붙안을 만한 예쁜 길이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합니다.


.. 한국의 대다수 시민은 ‘노동자’라는 말을 부담스러워 한다. 이해할 수 있다. 초·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에서도 노사 관계를 비롯해 노동 교육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신문과 방송에서 노동자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도 아니다 … 한국은 노동자라는 말은 물론, 노동운동이나 임금협상과 단체협상 그 모든 게 시민권조차 확보하지 못한 나라다 … 진보정당의 분열상은 대서특필하면서, 걱정하는 사람들이 정작 생활 현장에서 실제로 진보 대안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무시하는 모습을 이해하기는 난감하다 ..  (22∼23, 25, 110쪽)


  누구한테나 들려줄 만한 말인데, 억척스레 살아갈 까닭이 없습니다. 힘을 내어 살아갈 때에 즐겁지, 억척스레 살며 즐거울 수 없습니다. 악을 쓰며 살아갈 까닭이 없습니다. 사랑을 나누며 살아갈 때에 기쁘지, 악을 쓰며 사는 동안 기쁠 수 없습니다.


  자가용이 있으면 하루만에 훌쩍 다녀올 만한 길이라면, 자전거를 타면 이틀이나 사흘에 걸쳐 천천히 다녀올 만한 길입니다. 두 다리로 걷는다면 열흘이나 보름이 걸릴 만한 길일 수 있습니다.


  꼭 자가용을 몰아야 좋은 삶이 아닙니다. 자전거를 우악스레 빨리 몰아야 좋은 나들이가 아닙니다. 죽을 동 살 동 쉬잖고 걸어야 좋은 마실이 아닙니다.


  자가용 있어도 즐겁고, 자가용 없어도 즐겁습니다. 돈 넉넉히 있어도 즐거우며, 돈 얼마 없어도 즐겁습니다. 즐거움은 자가용이나 돈에 깃들지 않아요. 즐거움은 오직 내 마음에 깃들어요. 너른 마음에 깃드는 즐거움이에요. 착한 마음에 스미는 기쁨이에요. 맑은 마음에 찾아드는 웃음이에요. 고운 마음에 넘치는 사랑이에요.


.. 김대중이 군사독재 아래서 “경제성장의 열매는 이들과 결탁한 소수 특권층에 의해 거의 독점되어 왔으며 노동자·농민들은 성장의 결실 배분에 참여하는 것으로부터 배제되어 왔다”고 주장했지만, 바로 그 노동자와 농민들이 갈망했던 ‘김대중 대통령’ 아래서도 경제성장의 열매는 소수 특권층이 독점했다 … 최장의 노동시간을 자랑하는 국가에서 국민 대다수가 억척스럽게 살아가면서도 얼마 안 되는 여가시간 대부분을 텔레비전 드라마 시청으로 보낸다. 케케묵은 바보상자론을 펴려는 게 아니다. 다만 차분히 토론해 볼 필요는 있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얼마나 많은 드라마를 보았는가를. 드라마에 나오는 대기업 회장과 그 가족들의 모습은 한결같다 ..  (76∼77, 123쪽)


  나는 진보가 더 좋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진보(進步)’를 한국말로 쉽게 풀자면 ‘나아짐’이나 ‘높아짐’이라 하는데, 한 마디로 ‘발돋움’이라 할 테지요. 한결 앞으로 나아가고 한결 슬기롭게 높아진다는 뜻일 테지요. 아무튼, 나아지거나 높아질 때에 아름다울 수 있지만, 나아지거나 높아진다는 뜻을 꼭 발돋움으로 따져야 하지는 않아요. ‘생활 진보’라 말할 것 없이, 오이꽃이나 수박꽃이나 호박꽃이나 수세미꽃을 보는 하루도 아름답고 즐거우며 놀랍습니다. 감꽃이나 벼꽃이나 매화꽃이나 딸기꽃이나 달맞이꽃이나 나팔꽃이나 오얏꽃을 보는 하루도 예쁘며 빛나고 훌륭합니다.


  진보정당일 때에 진보가 된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삶이 아름다울 때에 ‘환하게 웃는 길로 나아간다’고 느껴요. 내가 웃고 네가 웃는 길로 나아가는 사람들은 서로서로 어깨동무를 합니다. 만화책 《도라에몽》에 나오는 ‘이슬이’는 ‘영민이’와 ‘진구’뿐 아니라 ‘퉁퉁이’와 ‘비실이’한테도 손수 구운 과자를 나눕니다. ‘도라에몽’과 ‘진구’는 ‘이슬이’뿐 아니라 ‘퉁퉁이’와 ‘비실이’도 불러 즐겁게 구름을 타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놀이를 즐깁니다.


  함께 나아가는 길이에요. 가을날 누렇게 익은 들판에서 거두는 벼는 이이한테만 먹이고 저이한테는 안 먹여도 되지 않아요. 골고루 나누는 사랑이자 꿈입니다. 다 함께 누리는 밥이자 삶입니다.


  이를테면, 무상급식을 하면 돈있는 집한테든 돈없는 집한테든 골고루 좋겠지요. 무상급식을 할 돈은 세금을 골고루 슬기롭게 거두면 되겠지요. 나는 100원을 벌기에 10원을 세금으로 냅니다. 내 이웃은 10000원을 벌기에 1000원을 세금으로 냅니다. 또는, 나는 10원을 벌기에 세금을 따로 내지 않습니다. 내 동무는 100000원을 벌기에 10000원이나 20000원을 세금으로 냅니다.


  어린 아이들은 작은 손으로 흙을 조금 떠서 나릅니다. 힘센 어른들은 푸대에 흙을 잔뜩 담아 지게로 몇 섬씩 나릅니다. 그런데, 아이한테도 어른한테도 떡을 한 점씩 줍니다. 아이한테도 어른한테도 밥그릇 하나씩 베풉니다. 집에 아이가 있는 어른은 떡을 두 점 받거나 석 점 받습니다. 몸이 아파 드러누운 어른은 흙푸대를 한 섬도 안 날랐으나 떡과 밥을 똑같이 받습니다. 아기를 밴 어머니는 떡과 밥을 둘씩 받기도 합니다. 아기를 밴 어머니 또한 흙푸대는 한 섬도 안 날랐으나 떡과 밥은 외려 더 받는다 할 만합니다.


  너무 마땅한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마땅한 이야기는 이쪽 신문을 읽으며 이쪽 생각을 하든 저쪽 신문을 읽으며 저쪽 생각을 하든 누구한테나 마땅하고 옳으며 똑같습니다. 귀여운 손자는 왼쪽 사람한테도 귀엽고 오른쪽 사람한테도 귀엽습니다. 우리 집 아픈 아이는 왼쪽 사람한테도 보살필 애틋한 아이요 오른쪽 사람한테도 보살필 애틋한 아이예요.


.. 무엇보다 진보가 할 일은 사람에 대한 존중이다. 우리에게 사람과 사회, 역사의 변화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진보운동을 시작했겠는가. 그 첫 마음을 소통해야 옳다 … 진보 대혁신의 출발점은 개개인의 자기성찰과 학습이다 ..  (97, 113쪽)


  우리 삶은 굳이 ‘진보’로 가지 않아도 됩니다. ‘진보’가 굳이 이 땅에 뿌리내리지 않아도 됩니다. 오직 ‘착함·참다움·고움’ 이렇게 세 가지가 이 땅에 뿌리내리면 돼요. 누구한테나 착한 빛과 서로서로 참다운 꿈과 다 함께 고운 사랑이 이 땅에 뿌리내릴 수 있으면 즐거워요.


  고운 아이한테도 미운 아이한테도 떡 한 점씩 나눕니다. 고운 이웃도 미운 이웃도 따로 없이, 저마다 논밭을 푸르게 일굽니다. 능금나무는 모든 사람한테 달콤한 열매를 나누어 줍니다. 복숭아나무는 모든 아이들한테 달콤한 열매를 베풉니다. 포도나무는 모든 어른들한테 달콤한 열매를 선사합니다.


  정치이든 경제이든 문화이든 교육이든 예술이든, 또 집안일이든 집살림이든, 능금나무 같은 길을 걸어가면 좋으리라 느껴요. 복숭아나무처럼, 포도나무처럼, 또 볏포기처럼 배추처럼 무처럼, 누구한테나 맛나고 달콤하며 배부른 숨결을 불어넣는 예쁜 길을 걸어가면 참말 좋으리라 생각해요.
  삶을 배워야지요. 사랑을 얘기해야지요. 꿈을 이루어야지요. (4345.8.16.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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