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세탁 애지시선 12
박영희 지음 / 애지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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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밥을 먹는다
[시를 노래하는 시 28] 박영희, 《즐거운 세탁》(애지,2007)

 


- 책이름 : 즐거운 세탁
- 글 : 박영희
- 펴낸곳 : 애지 (2007.5.10.)
- 책값 : 8000원

 


  저녁에 두 아이 재우고 나서 비로소 한숨을 돌리며 느긋하게 책을 조금 읽다가 자리에 눕습니다. 아이들이 잠든 저녁은 더없이 조용합니다. 두 아이는 새근새근 자는데 머리카락과 팔뚝 언저리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기에 틈틈이 부채질을 해서 땀을 식힙니다. 내 몸에도 부치고 아이들 몸에도 부칩니다. 날마다 몇 차례씩 아이들 씻기고 나도 씻습니다. 씻을 적마다 손빨래를 합니다. 기계빨래를 할 만하지만, 더운 여름날은 몸을 씻으며 흐르는 물에 옷가지를 적신 다음 비누를 문지르고, 복복 비벼서 헹굴 무렵 다시 몸에 물을 붓고 씻으며 빨래를 북북 밟아 헹구면 한결 시원합니다. 물은 적게 쓰면서 몸을 씻고 빨래까지 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이래저래 물을 자주 만지니 손에서 물기 마를 틈이 없습니다. 손이 조금 보송보송해질라면 작은아이가 쉬를 누어 기저귀를 갈거나 걸레로 방바닥을 훔칩니다. 오줌을 훔친 걸레는 그때그때 새로 빨래합니다.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며 아이들 씻기고 보면 하루 내내 물이랑 산다 할 만합니다. 손에 물기가 가시지 않으니, 종이로 빚은 책은 펼칠 엄두를 못 냅니다.


.. 된장에 찍어먹으면 딱 좋을 / 풋고추 대롱대롱 달려있고 // 긴 싸움 이겨낸 늠름한 얼굴로 / 석편아짐 좋아하는 가지 몇 실하게 매달려있고 // 찬바람 불면 할마씨들 입맛 돋울 / 대추알들 따글따글 열려있고 ..  (장마 지나간 옥상)


  사내와 가시내가 평등과 평화를 이루어야 아름답다 하는 오늘날이지만, 어느 집으로 마실을 가더라도, 찻상이든 밥상이든 으레 가시내가 차립니다. 사내가 찻상이나 밥상을 차리는 일은 매우 드뭅니다. 서로 집일을 하면서 함께 찻상이나 밥상을 내오는 일 또한 몹시 드뭅니다.


  우리 집으로 마실을 오는 손님은 언제나 아이 아버지인 내가 차리는 밥상을 받습니다. 나는 바지런히 도마질을 하고 밥이랑 국을 끓이며 반찬을 올립니다. 온몸에 땀이 흠씬 돋으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을 새 없습니다.


  내가 밥상을 맛나게 잘 차리는지 그닥 맛없게 차리는지 잘 모릅니다. 즐겁다 싶은 밥상인지 그저 그렇다 할 밥상인지 잘 모릅니다. 다만, 밥을 차리면서 내 가장 좋은 기운이 서리도록 하고 싶다 생각합니다. 내 가장 고운 사랑으로 차려야 나도 식구들도 즐겁게 먹고 즐겁게 기운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먼먼 옛날 옛적 살림집 어머니들은 ‘언제나 밥상 차리기를 도맡’으면서도 밥 한 그릇 한 번 잘못 내오면 꾸중을 듣거나 쫓겨난다 했어요. 숱한 집일을 도맡으면서도 어쩌다 한두 차례 무언가 잘못을 하면 꾸지람을 듣거나 쫓겨난다 했어요. 참으로 수많은 어머니들이 아버지들한테 두들겨맞았어요.


  어느 날 문득 생각합니다. 옛날 옛적 어머니들은 ‘소박 맞는다’고 했으나, 나는 ‘이 집에서 쫓겨나는 일은 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참말이지, 집에서 살림하고 아이 돌보며 밭일까지 다 하는데, 가시내를 그토록 못살게 굴거나 모질게 대접하던 가부장 봉건 사회란 얼마나 끔찍한가 하고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 옮겨가는 자리마다 꽃 피어나신다 ..  (어머니)


  가부장 봉건 사회 그늘은 오늘날까지 사라지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여느 살림집에도, 국회의사당에도, 여느 회사나 공공기관에도, 학교에도, 온통 가부장 봉건 사회 그늘이 드리운다고 느낍니다.


  왜 서로 어깨동무하는 길을 걷지 못할까요. 왜 서로 사랑하는 꿈을 꾸지 못하나요. 왜 서로 아끼며 보살피는 사랑을 나누지 못하는가요.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갈려야 할 까닭은 없어요. 모두 같은 사람인걸요.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쪽은 키가 작고 저쪽은 키가 클 테지요. 그런데, 내가 ‘눈을 뜨고’ 바라보면 키가 크거나 작지, 내가 ‘눈을 감고’ 마주하면 키란 덧없어요. 얼굴도 몸매도 덧없어요.


  어른도 어린이도 똑같은 사람이고 똑같은 목숨이에요. 저마다 사랑으로 이루어진 착한 꿈빛이에요.


.. 가만, 저 하모니카는 내 눈에도 익다 / 정 노인은 저 하모니카 덕에 세상구경 / 여러 번 했었다 / 합주단 만들어 여수로 대구로 서울로 대전으로 / 교회초청으로 청주까지 다녀왔었다 / 그러나 예약해 두었다는 호텔에서 잠은 자지 못했다 / 가는 곳마다 퇴짜를 놓았다 / 그들은 믿음이 약한 자들이었다 ..  (소록도, 그 섬의 죽음)


  내가 눈 아닌 마음으로 마주하고, 귀나 코나 입 아닌 마음으로 다시금 마주한다고 하면, 누구보다 나부터 내 생각과 삶이 달라지리라 느껴요. 참말 이런 울타리 저런 그늘을 뒤집어씌운 채 바라보지 말고, 꾸밈없이 마주하면서 가장 깊고 너른 마음과 마음으로 마주한다고 하면, 언제나 나부터 새롭게 거듭나는 예쁜 사람이 되리라 느껴요.


  내가 나이면서 내가 나인 줄 모르는 까닭은 참다운 나를 생각하지 못하거나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구나 싶어요. 내가 나인 줄 옳게 깨닫고 내가 나로구나 하고 슬기롭게 생각하며 살아갈 때에는, 참말 늘 환하게 웃고 밝게 말하며 싱그러이 움직이는 목숨이 되리라 느껴요.


  좋아하는 빛을 누리려고 지구별에 태어났어요. 사랑하는 길을 걸으려고 지구별에 왔어요. 즐겁게 어깨동무하면서 해맑게 빛나려고 지구별에서 살아가겠지요. 흐뭇하게 손을 맞잡으면서 아리땁게 노래하려고 지구별 사람이 되었겠지요.


.. 불도저 지나간 자리는 잡초만 무성하고 / 담배를 꺼내 문 아버지는 / 멍하니, 앞산만 건너다 보시고 / 어쩔끄나 어쩔끄나 이 노릇을 어쩔끄나 / 불도저 지나간 바퀴자국 없애느라 / 어머니는 뼈마다 앙상한 몸으로 / 자근자근 옛 집터를 고르고 계셨습니다 ..  (그 자리)


  아침 햇살 곱게 받는 마당 가장자리 풀포기를 바라봅니다. 이웃 아저씨는 이 풀포기 잎사귀를 보고는 처음에 수박풀이라고 말했는데, 하루하루 흐를수록 ‘어쩐지 수박풀 같지는 않은데’ 싶었습니다. 잎사귀 커지고 꽃이 피며 암꽃이 아물며 열매 맺는 모양새를 보아 하니, 오이도 아니요 아무래도 수세미 같구나 싶습니다.


  꽃잎이 노랗기로는 호박이랑 오이랑 수박이랑 수세미랑 한 갈래예요. 모두 꽃이 소담스레 큼지막합니다. 바람에 한들한들 춤을 춥니다.


  그나저나 우리 집 마당 한켠에서 수세미는 어떻게 자랐을까 궁금합니다. 수세미 씨앗을 꽤 곳곳에 뿌리기는 했지만 이렇게 한 포기만 자랄 줄 몰랐어요. 아니, 마음으로는 예쁘게 심고는 잊었달까요. 내가 잊은 한 가지를 이 풀포기는 예쁘게 떠올리고는 날마다 고운 봉오리를 보여준달까요.


.. 한 두둑에서는 속이 들고 / 그 옆 두둑에서는 철이 든다 // 한 두둑은 한 겹 한 겹 속이 차고 / 옆 두둑은 쑥쑥 밑이 든다 ..  (무와 배추)


  노란 꽃봉오리 곁에는 하얀 꽃봉오리가 가득합니다. 부추꽃입니다. 늦봄부터 한여름까지 날마다 신나게 부추풀을 꺾어서 나물비빔을 먹었습니다. 더도 덜도 아니고 한 끼니만큼 그때그때 꺾어서 먹었어요. 오늘은 이쪽에서 꺾고 이듬날은 저쪽에서 꺾고 하면서 먹었어요. 꺾인 부추풀은 이내 새 잎을 올렸고, 새 잎이 어느 만큼 길고 굵어지면 다시 꺾었어요.


  그런데 이 부추풀은 끝까지 씩씩하게 새 잎을 올려요. 그러고는 이렇게 꽃대까지 올린 다음 몽우리를 맺고, 몽우리를 터뜨려 하얀 꽃봉오리를 활짝 베풉니다.


.. 동이나 호, 명함을 모르고 찾아 갔다가는 / 이게 누구네 동네고 저게 누가 사는 집인지 헛갈려 알 수 없는 것이다 ..  (시집)


  좋은 밥을 먹습니다. 좋은 꽃을 봅니다. 좋은 바람을 쐽니다.


  바람이 조용한 한여름 아침나절, 좀 덥구나 하고 생각하니 쏴아 하고 바람이 불며 후박나무 잎사귀며 부추풀 꽃잎이며 건드립니다. 이웃집 밭뙈기 고구마잎을 건드리고 옆집 무논 볏포기를 건드립니다.


  바람은 어떤 빛깔이거나 무늬이거나 냄새인지 느낄 수 없다고 해요. 그런데, 바람은 들을 지날 때에는 들바람이 되어 들내음을 베풀어요. 바람은 멧골을 지나며 멧바람이 되어 멧내음을 베풀어요. 바람은 바다를 지나며 바닷바람이 되어 바닷내음을 베풀어요. 바람은 밭뙈기 사이를 불며 밭바람이 됩니다.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며 나무바람이 됩니다. 풀 사이를 흔들고 지나며 풀바람이 돼요.


  부추풀을 건드리는 바람은 부추바람입니다. 후박나무를 건드리는 바람은 후박바람입니다. 빨래줄을 건드리고 빨래를 건드리는 바람은 빨래바람입니다.


  바람결에 온갖 냄새가 담깁니다. 바람결에 온갖 무늬가 그려집니다. 바람은 하늘빛을 새삼스레 바꾸어 놓습니다. 구름은 하얗기도 하고 잿빛이기도 합니다. 같은 하양이더라도 다 다른 하양입니다. 바람은 구름 모양을 끝없이 바꾸어 놓습니다. 바람은 따숩다 못해 뜨거운 햇살을 받는 풀포기를 하나하나 건드리면서 이 더위에 더욱 씩씩하게 크라며 기운을 북돋웁니다.


.. 시간이 너무 짧다 / 그 많은 역들은 어디에 몸을 숨긴 걸까 // 술래가 보이지 않는다 / 이제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역도 그리 많지 않다 / 저 여승무원은 안전할까? ..  (KTX를 탔다)


  박영희 님 시집 《즐거운 세탁》(애지,2007)을 읽습니다. 빨래는 즐겁습니다. 밥도 즐겁습니다. 아이도 즐겁고, 옆지기도 즐겁습니다. 그야말로 모두 즐겁습니다.


  하루 품삯 5만 원짜리 일도 즐겁고, 품삯 따로 받지 않는 집일도 즐겁습니다.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손자 손녀를 바라보면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어쩜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르겠느냐 싶으나, 두 아이와 살아가며 곰곰이 헤아립니다. 사람은 몸뚱이에도 밥을 넣지만, 마음에도 밥을 넣어요. 사람은 몸으로도 밥을 먹으나 마음으로도 밥을 먹어요.


  몸으로만 밥을 먹고 마음으로는 밥을 안 먹는다면, 사람 스스로 곧은 사람으로 사랑스레 살아가지 못해요. 곧, 밥을 먹고 사랑을 먹습니다. 국을 먹고 믿음을 먹습니다. 반찬을 먹고 꿈을 먹습니다. 이윽고, 밥을 나누고 사랑을 나눕니다. 국 한 그릇 서로 나누고 믿음 한 자락 골고루 나눕니다. 반찬 한 점 다 함께 나누며, 꿈 한 꾸러미 다 같이 나눠요.


.. 새들은 대체 어디까지 쫓겨난 것일까? ..  (그 산에는 새가 울지 않는다)


  사랑이 있을 때에 사람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사랑을 빚습니다. 사랑을 생각하기에 사람입니다. 사람으로 살아가기에 사랑을 일굽니다.


  작은아이는 어머니젖을 물고 잠듭니다. 어머니젖은 몸을 살찌우는 밥이면서 마음을 보살피는 사랑입니다. 식구들은 서로서로 밥상 앞에 둘러앉아 밥을 먹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마음을 살찌웁니다.


  들새는 들에서 들밥을 먹고, 멧새는 메에서 멧밥을 먹습니다. 사람이 있고, 들이 있으며, 새가 있습니다. 사람이 있고, 풀이 있으며, 벌레가 있습니다. 사람이 있고, 나무가 있으며, 숲과 바다와 하늘이 있습니다. 저마다 예쁜 밥을 먹으며 예쁜 목숨을 아낍니다. (4345.8.20.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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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산 좀 봐요.
나무가 짙푸르게 우거졌어요.
나는 나무가 되고 싶어요.
석류나무
뽕나무
감나무
무화과나무
살구나무
밤나무
잣나무
배롱나무
벚나무
소나무
떡갈나무
느티나무
모두 좋아요.

 


4345.6.1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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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을 죽이는 외마디 한자말
 (68) -발發 1 : 가우하티 발 열차

 

우리는 가우하티 발 열차에 승차해서 러크나우까지 갈 예정이었다
《쿤가 삼텐 데와창/홍성녕 옮김-티벳전사》(그물코,2004) 278쪽

 

  ‘승차(乘車)해서’는 ‘타서’나 ‘올라서’로 다듬고, “갈 예정(豫定)이었다”는 “가려고 했다”나 “갈 생각이었다”로 다듬을 수 있습니다.


 ‘-발(發)’은 “그곳에서 떠남 또는 그 시간에 떠남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라고 합니다.


  어느 유행노래는 끝자락을 “대전발 영 시 오십 분” 하면서 맺습니다. 노래이름은 안 떠오르지만, 마지막 대목은 떠오릅니다. 모르는 노릇인데, 이 노랫말이 아니더라도 기차역이나 버스역에서는 ‘-발’을 붙여, 어느 곳에서 떠나는 기차나 버스라고 밝히리라 생각해요.

 

 가우하티 발 열차
→ 가우하티에서 오는 열차
→ 가우하티에서 떠난 열차
 …

 

  노랫말에서는 글잣수를 따질 테니 “대전에서 떠나는 영 시 오십 분”처럼 적을 수 없습니다. 다만, 노랫말이기에 “대전‘서’ 영 시 오십 분”처럼 적을 수 있어요. 대전‘서’ 온다는 뜻으로 ‘-서’만 붙일 수 있어요.


  국어사전을 살피면, “3월 12일발 내외 통신”이나 “열 시발 열차”나 “서울발 연합통신” 같은 보기글이 있습니다. 이 글월들은 “3월 12일치 내외 통신”이나 “3월 12일에 나온 내외 통신”으로 다듬고, “열 시에 떠나는 열차”나 “열 시에 가는 열차”로 다듬으며, “서울서 온 연합통신”이나 “서울에서 띄운 연합통신”이나 “서울에서 들어온 연합통신”으로 다듬으면 돼요.


  알맞게 쓸 말투를 생각하고, 슬기롭게 넣을 말마디를 헤아립니다. 기차나 버스가 처음 이 나라에 들어올 적에는 사람들이 으레 한자로 적었어요. 이를테면, “서울 가는 기차”라 하지 않고 “京城行 汽車”라 했겠지요. 가만히 보면, 이런 옛 한문 말투를 한글로만 고쳐서 “서울행 기차”로 쓰는 셈이라 할 텐데, 껍데기만 한글이 아니라, 알맹이까지 살가우며 푸근하고 아름다운 한국말이 되도록 마음을 기울이기를 빌어요. “서울 가는 기차(← 서울행)”요, “서울서 오는 기차(← 서울발)”예요. (4338.1.14.쇠./4345.8.19.해.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우리는 가우하티에서 오는 열차에 타서 러크나우까지 갈 생각이었다

 

..

 


 우리 말을 죽이는 외마디 한자말
 (1297) -발發 2 : 베이징발

 

베이징발 모스크바행 국제열차가 / 얼렌호트역에 도착한 건 23시 45분
《박영희-즐거운 세탁》(애지,2007) 80쪽

 

  “도착(到着)한 건”은 “닿은 때는”이나 “들어간 때는”이나 “다다른 때는”으로 다듬을 수 있습니다. 한국말 ‘닿다’나 ‘다다르다’나 ‘이르다’를 잘 살펴서 쓰면 좋겠어요.

 

 베이징발 모스크바행 국제열차
→ 베이징에서 모스크바 가는 국제열차
→ 베이징을 떠나 모스크바로 가는 국제열차
→ 베이징부터 모스크바까지 가는 국제열차
→ 베이징과 모스크바 잇는 국제열차
 …

 

  요사이 태어나는 아이들은 어떤 말로 생각을 나타낼까 궁금합니다. 요사이 태어나는 아이들이라 하더라도 ‘예전에 태어나 살아온 어른’이 낳고, 이 어른들이 쓰는 말을 늘 들으면서 말을 익힐 테니까, 요사이 태어나는 아이들도 ‘옛날 옛적 말’을 그대로 이어받아 쓴다고 할까요. 이 보기글에 나오듯 ‘-發 -行’ 같은 말투를 예전 어른들뿐 아니라 오늘날 아이들도 널리 쓴다고 할 만한지, 요즈음 아이들은 이러한 말투는 안 쓴다고 할 만한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말투라 하더라도 쓸 만할 때에는 쓰고, 안 쓸 만할 때에는 안 씁니다. 스스로 좋다고 여기는 말투라면 쓰고, 스스로 안 좋다고 여기는 말투라면 안 써요. 남들이 안 좋은 말투라고 밝히거나 따져도, 스스로 못 느끼거나 안 받아들이면 어떠한 말투라도 쓰기 마련입니다. 바르거나 알맞다 싶은 말투라 하더라도 스스로 즐겁게 맞아들이지 않으면 안 쓰기 마련이에요.


  생각을 담는 말이고, 삶이 드러나는 말입니다. 생각을 비추는 말이며, 삶을 나누는 말입니다. 내가 어떤 어른한테서 어떤 말을 이어받는지 돌아보고, 내가 우리 아이들한테 어떤 말을 물려주는지 짚을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4345.8.19.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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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에서 모스크바 가는 국제열차가 / 얼렌호트역에 닿은 때는 23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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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과 얽힌 낱말

 


  나는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습니다. 나 스스로 안 좋아하는 책을 굳이 읽을 까닭이 없습니다. 누가 선물해 주기 때문에 읽는 책은 없습니다. 내가 읽고 싶기에 읽는 책입니다.


  나는 글로 된 책을 읽습니다. 그림으로 된 책도 읽습니다. 사진으로 된 책도 읽습니다. 책은 다 같은 책이라는 울타리에 들지만, 여러 갈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무엇으로 엮었느냐에 따라 나눌 수 있고, 줄거리에 따라 나눌 수 있으며, 읽는 사람 나이에 따라 나눌 수 있습니다. 이밖에도 새것인가 헌것인가에 따라 나누기도 하며, 쓰임새에 따라 나눌 수 있어요.

 

 ㄱ. 헌책 그림책 만화책 잡지책 소설책 지도책 이야기책 역사책
 ㄴ. 새책 사진책 인문책 철학책 어린이책 청소년책 노래책 수필책

 

  책을 (ㄱ)과 (ㄴ)처럼 나누어 봅니다. 이렇게 나누는 뜻이 없다 할 수 있으나, 이렇게 나누어 볼 수도 있습니다. 나는 굳이 이처럼 나누고 싶지 않지만, 국어사전을 뒤적이며 (ㄱ)과 (ㄴ)으로 나누어 봅니다. 그러니까, (ㄱ)은 ‘국어사전에 실린 책 낱말’입니다. (ㄴ)은 ‘국어사전에 안 실린 책 낱말’입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한국에서는 국어사전에 실린 낱말은 붙여서 적도록 하고, 국어사전에 안 실린 낱말은 띄어서 적도록 하는 맞춤법이 있어요. 그래서, (ㄱ)처럼 국어사전에 실린 낱말이라면 걱정없이 붙여서 쓰면 되는데, (ㄴ)처럼 국어사전에 안 실린 낱말일 때에는 골머리를 앓아요.


  ‘헌책’은 ‘헌책’처럼 붙여서 씁니다. 그런데 오래된 책과 갓 나온 책을 함께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헌책과 새 책”처럼 띄어서 써야 한다면 어딘가 얄궂지 않나 궁금합니다. ‘그림책’과 ‘만화책’은 한 낱말이지만 ‘어린이책’과 ‘청소년책’은 한 낱말로 다루지 않으니 알쏭달쏭해요.


  책을 말하는 적잖은 분들은 ‘그림책’이 한 낱말인 줄 모르고 ‘그림 책’처럼 띄어서 쓰기도 합니다. ‘이야기책’이 한 낱말인 줄 아는 분은 얼마나 될까요. 요즈막에 ‘인문책’을 살리자는 목소리가 드높지만, 이 낱말 또한 국어사전에 안 실렸으니 ‘인문 책’처럼 적어야 올바르다 할 텐데, 이렇게 띄어서 쓰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더욱이, ‘인문책’ 가운데 ‘역사책’은 붙여서 적도록 하나, ‘철학책’은 띄어서 적어야 올바르다고 해요. 문학을 다루는 책에서 ‘소설책’은 붙여서 적어야 올바르다 하면서, ‘수필책’은 띄어서 적어야 올바르다고 해요. 지도를 보여주는 ‘지도책’은 한 낱말이지만, 노래를 담은 ‘노래책’은 한 낱말이 아니라고 해요.


  수많은 책이 나오고 온갖 책이 태어나는 흐름을 살핀다면, 책을 가리키는 한국말 또한 새롭게 거듭나야지 싶습니다. 국어사전 한 권을 앞에 놓고 이 낱말은 이렇게 적고 저 낱말은 저렇게 적도록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일은 없어야지 싶습니다. 이제 ‘환경책’이라는 낱말을 널리 쓰고, ‘사진책’은 퍽 일찍부터 한 낱말처럼 많은 사람들이 씁니다. ‘과학책’이나 ‘놀이책’ 같은 낱말도 퍽 자주 써요.


  ‘-책’을 뒤에 붙이는 낱말도 날개를 달 노릇이요, ‘책-’을 앞에 붙이는 낱말도 날개를 달아야지 싶어요. 이를테면, ‘책날개’나 ‘책마을’부터, ‘책밭’이나 ‘책나라’나 ‘책누리’나 ‘책사랑’이나 ‘책마음’이나 ‘책씨’나 ‘책꽃’이나 ‘책지기’나 ‘책터’처럼, 마음을 북돋우고 생각을 여는 낱말을 알맞고 아름답게 쓰는 길이 환하게 터야지 싶어요. (4345.8.19.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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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님은 시인이지만, 시집보다 산문집이 훨씬 자주 나온다. 시집이 읽히기보다는 산문집이 한결 잘 읽히기 때문일까. 사람들은 시보다 산문을 좋아하기 때문일까. 어찌 되었든, 사람들 살아가는 이야기를 '글'로 꾸준하게 담으면서 사랑을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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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의 아이들- 부모를 한국으로 떠나보낸 조선족 아이들 이야기
박영희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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