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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세탁 ㅣ 애지시선 12
박영희 지음 / 애지 / 2007년 5월
평점 :
예쁜 밥을 먹는다
[시를 노래하는 시 28] 박영희, 《즐거운 세탁》(애지,2007)
- 책이름 : 즐거운 세탁
- 글 : 박영희
- 펴낸곳 : 애지 (2007.5.10.)
- 책값 : 8000원
저녁에 두 아이 재우고 나서 비로소 한숨을 돌리며 느긋하게 책을 조금 읽다가 자리에 눕습니다. 아이들이 잠든 저녁은 더없이 조용합니다. 두 아이는 새근새근 자는데 머리카락과 팔뚝 언저리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기에 틈틈이 부채질을 해서 땀을 식힙니다. 내 몸에도 부치고 아이들 몸에도 부칩니다. 날마다 몇 차례씩 아이들 씻기고 나도 씻습니다. 씻을 적마다 손빨래를 합니다. 기계빨래를 할 만하지만, 더운 여름날은 몸을 씻으며 흐르는 물에 옷가지를 적신 다음 비누를 문지르고, 복복 비벼서 헹굴 무렵 다시 몸에 물을 붓고 씻으며 빨래를 북북 밟아 헹구면 한결 시원합니다. 물은 적게 쓰면서 몸을 씻고 빨래까지 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이래저래 물을 자주 만지니 손에서 물기 마를 틈이 없습니다. 손이 조금 보송보송해질라면 작은아이가 쉬를 누어 기저귀를 갈거나 걸레로 방바닥을 훔칩니다. 오줌을 훔친 걸레는 그때그때 새로 빨래합니다.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며 아이들 씻기고 보면 하루 내내 물이랑 산다 할 만합니다. 손에 물기가 가시지 않으니, 종이로 빚은 책은 펼칠 엄두를 못 냅니다.
.. 된장에 찍어먹으면 딱 좋을 / 풋고추 대롱대롱 달려있고 // 긴 싸움 이겨낸 늠름한 얼굴로 / 석편아짐 좋아하는 가지 몇 실하게 매달려있고 // 찬바람 불면 할마씨들 입맛 돋울 / 대추알들 따글따글 열려있고 .. (장마 지나간 옥상)
사내와 가시내가 평등과 평화를 이루어야 아름답다 하는 오늘날이지만, 어느 집으로 마실을 가더라도, 찻상이든 밥상이든 으레 가시내가 차립니다. 사내가 찻상이나 밥상을 차리는 일은 매우 드뭅니다. 서로 집일을 하면서 함께 찻상이나 밥상을 내오는 일 또한 몹시 드뭅니다.
우리 집으로 마실을 오는 손님은 언제나 아이 아버지인 내가 차리는 밥상을 받습니다. 나는 바지런히 도마질을 하고 밥이랑 국을 끓이며 반찬을 올립니다. 온몸에 땀이 흠씬 돋으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을 새 없습니다.
내가 밥상을 맛나게 잘 차리는지 그닥 맛없게 차리는지 잘 모릅니다. 즐겁다 싶은 밥상인지 그저 그렇다 할 밥상인지 잘 모릅니다. 다만, 밥을 차리면서 내 가장 좋은 기운이 서리도록 하고 싶다 생각합니다. 내 가장 고운 사랑으로 차려야 나도 식구들도 즐겁게 먹고 즐겁게 기운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먼먼 옛날 옛적 살림집 어머니들은 ‘언제나 밥상 차리기를 도맡’으면서도 밥 한 그릇 한 번 잘못 내오면 꾸중을 듣거나 쫓겨난다 했어요. 숱한 집일을 도맡으면서도 어쩌다 한두 차례 무언가 잘못을 하면 꾸지람을 듣거나 쫓겨난다 했어요. 참으로 수많은 어머니들이 아버지들한테 두들겨맞았어요.
어느 날 문득 생각합니다. 옛날 옛적 어머니들은 ‘소박 맞는다’고 했으나, 나는 ‘이 집에서 쫓겨나는 일은 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참말이지, 집에서 살림하고 아이 돌보며 밭일까지 다 하는데, 가시내를 그토록 못살게 굴거나 모질게 대접하던 가부장 봉건 사회란 얼마나 끔찍한가 하고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 옮겨가는 자리마다 꽃 피어나신다 .. (어머니)
가부장 봉건 사회 그늘은 오늘날까지 사라지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여느 살림집에도, 국회의사당에도, 여느 회사나 공공기관에도, 학교에도, 온통 가부장 봉건 사회 그늘이 드리운다고 느낍니다.
왜 서로 어깨동무하는 길을 걷지 못할까요. 왜 서로 사랑하는 꿈을 꾸지 못하나요. 왜 서로 아끼며 보살피는 사랑을 나누지 못하는가요.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갈려야 할 까닭은 없어요. 모두 같은 사람인걸요.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쪽은 키가 작고 저쪽은 키가 클 테지요. 그런데, 내가 ‘눈을 뜨고’ 바라보면 키가 크거나 작지, 내가 ‘눈을 감고’ 마주하면 키란 덧없어요. 얼굴도 몸매도 덧없어요.
어른도 어린이도 똑같은 사람이고 똑같은 목숨이에요. 저마다 사랑으로 이루어진 착한 꿈빛이에요.
.. 가만, 저 하모니카는 내 눈에도 익다 / 정 노인은 저 하모니카 덕에 세상구경 / 여러 번 했었다 / 합주단 만들어 여수로 대구로 서울로 대전으로 / 교회초청으로 청주까지 다녀왔었다 / 그러나 예약해 두었다는 호텔에서 잠은 자지 못했다 / 가는 곳마다 퇴짜를 놓았다 / 그들은 믿음이 약한 자들이었다 .. (소록도, 그 섬의 죽음)
내가 눈 아닌 마음으로 마주하고, 귀나 코나 입 아닌 마음으로 다시금 마주한다고 하면, 누구보다 나부터 내 생각과 삶이 달라지리라 느껴요. 참말 이런 울타리 저런 그늘을 뒤집어씌운 채 바라보지 말고, 꾸밈없이 마주하면서 가장 깊고 너른 마음과 마음으로 마주한다고 하면, 언제나 나부터 새롭게 거듭나는 예쁜 사람이 되리라 느껴요.
내가 나이면서 내가 나인 줄 모르는 까닭은 참다운 나를 생각하지 못하거나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구나 싶어요. 내가 나인 줄 옳게 깨닫고 내가 나로구나 하고 슬기롭게 생각하며 살아갈 때에는, 참말 늘 환하게 웃고 밝게 말하며 싱그러이 움직이는 목숨이 되리라 느껴요.
좋아하는 빛을 누리려고 지구별에 태어났어요. 사랑하는 길을 걸으려고 지구별에 왔어요. 즐겁게 어깨동무하면서 해맑게 빛나려고 지구별에서 살아가겠지요. 흐뭇하게 손을 맞잡으면서 아리땁게 노래하려고 지구별 사람이 되었겠지요.
.. 불도저 지나간 자리는 잡초만 무성하고 / 담배를 꺼내 문 아버지는 / 멍하니, 앞산만 건너다 보시고 / 어쩔끄나 어쩔끄나 이 노릇을 어쩔끄나 / 불도저 지나간 바퀴자국 없애느라 / 어머니는 뼈마다 앙상한 몸으로 / 자근자근 옛 집터를 고르고 계셨습니다 .. (그 자리)
아침 햇살 곱게 받는 마당 가장자리 풀포기를 바라봅니다. 이웃 아저씨는 이 풀포기 잎사귀를 보고는 처음에 수박풀이라고 말했는데, 하루하루 흐를수록 ‘어쩐지 수박풀 같지는 않은데’ 싶었습니다. 잎사귀 커지고 꽃이 피며 암꽃이 아물며 열매 맺는 모양새를 보아 하니, 오이도 아니요 아무래도 수세미 같구나 싶습니다.
꽃잎이 노랗기로는 호박이랑 오이랑 수박이랑 수세미랑 한 갈래예요. 모두 꽃이 소담스레 큼지막합니다. 바람에 한들한들 춤을 춥니다.
그나저나 우리 집 마당 한켠에서 수세미는 어떻게 자랐을까 궁금합니다. 수세미 씨앗을 꽤 곳곳에 뿌리기는 했지만 이렇게 한 포기만 자랄 줄 몰랐어요. 아니, 마음으로는 예쁘게 심고는 잊었달까요. 내가 잊은 한 가지를 이 풀포기는 예쁘게 떠올리고는 날마다 고운 봉오리를 보여준달까요.
.. 한 두둑에서는 속이 들고 / 그 옆 두둑에서는 철이 든다 // 한 두둑은 한 겹 한 겹 속이 차고 / 옆 두둑은 쑥쑥 밑이 든다 .. (무와 배추)
노란 꽃봉오리 곁에는 하얀 꽃봉오리가 가득합니다. 부추꽃입니다. 늦봄부터 한여름까지 날마다 신나게 부추풀을 꺾어서 나물비빔을 먹었습니다. 더도 덜도 아니고 한 끼니만큼 그때그때 꺾어서 먹었어요. 오늘은 이쪽에서 꺾고 이듬날은 저쪽에서 꺾고 하면서 먹었어요. 꺾인 부추풀은 이내 새 잎을 올렸고, 새 잎이 어느 만큼 길고 굵어지면 다시 꺾었어요.
그런데 이 부추풀은 끝까지 씩씩하게 새 잎을 올려요. 그러고는 이렇게 꽃대까지 올린 다음 몽우리를 맺고, 몽우리를 터뜨려 하얀 꽃봉오리를 활짝 베풉니다.
.. 동이나 호, 명함을 모르고 찾아 갔다가는 / 이게 누구네 동네고 저게 누가 사는 집인지 헛갈려 알 수 없는 것이다 .. (시집)
좋은 밥을 먹습니다. 좋은 꽃을 봅니다. 좋은 바람을 쐽니다.
바람이 조용한 한여름 아침나절, 좀 덥구나 하고 생각하니 쏴아 하고 바람이 불며 후박나무 잎사귀며 부추풀 꽃잎이며 건드립니다. 이웃집 밭뙈기 고구마잎을 건드리고 옆집 무논 볏포기를 건드립니다.
바람은 어떤 빛깔이거나 무늬이거나 냄새인지 느낄 수 없다고 해요. 그런데, 바람은 들을 지날 때에는 들바람이 되어 들내음을 베풀어요. 바람은 멧골을 지나며 멧바람이 되어 멧내음을 베풀어요. 바람은 바다를 지나며 바닷바람이 되어 바닷내음을 베풀어요. 바람은 밭뙈기 사이를 불며 밭바람이 됩니다.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며 나무바람이 됩니다. 풀 사이를 흔들고 지나며 풀바람이 돼요.
부추풀을 건드리는 바람은 부추바람입니다. 후박나무를 건드리는 바람은 후박바람입니다. 빨래줄을 건드리고 빨래를 건드리는 바람은 빨래바람입니다.
바람결에 온갖 냄새가 담깁니다. 바람결에 온갖 무늬가 그려집니다. 바람은 하늘빛을 새삼스레 바꾸어 놓습니다. 구름은 하얗기도 하고 잿빛이기도 합니다. 같은 하양이더라도 다 다른 하양입니다. 바람은 구름 모양을 끝없이 바꾸어 놓습니다. 바람은 따숩다 못해 뜨거운 햇살을 받는 풀포기를 하나하나 건드리면서 이 더위에 더욱 씩씩하게 크라며 기운을 북돋웁니다.
.. 시간이 너무 짧다 / 그 많은 역들은 어디에 몸을 숨긴 걸까 // 술래가 보이지 않는다 / 이제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역도 그리 많지 않다 / 저 여승무원은 안전할까? .. (KTX를 탔다)
박영희 님 시집 《즐거운 세탁》(애지,2007)을 읽습니다. 빨래는 즐겁습니다. 밥도 즐겁습니다. 아이도 즐겁고, 옆지기도 즐겁습니다. 그야말로 모두 즐겁습니다.
하루 품삯 5만 원짜리 일도 즐겁고, 품삯 따로 받지 않는 집일도 즐겁습니다.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손자 손녀를 바라보면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어쩜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르겠느냐 싶으나, 두 아이와 살아가며 곰곰이 헤아립니다. 사람은 몸뚱이에도 밥을 넣지만, 마음에도 밥을 넣어요. 사람은 몸으로도 밥을 먹으나 마음으로도 밥을 먹어요.
몸으로만 밥을 먹고 마음으로는 밥을 안 먹는다면, 사람 스스로 곧은 사람으로 사랑스레 살아가지 못해요. 곧, 밥을 먹고 사랑을 먹습니다. 국을 먹고 믿음을 먹습니다. 반찬을 먹고 꿈을 먹습니다. 이윽고, 밥을 나누고 사랑을 나눕니다. 국 한 그릇 서로 나누고 믿음 한 자락 골고루 나눕니다. 반찬 한 점 다 함께 나누며, 꿈 한 꾸러미 다 같이 나눠요.
.. 새들은 대체 어디까지 쫓겨난 것일까? .. (그 산에는 새가 울지 않는다)
사랑이 있을 때에 사람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사랑을 빚습니다. 사랑을 생각하기에 사람입니다. 사람으로 살아가기에 사랑을 일굽니다.
작은아이는 어머니젖을 물고 잠듭니다. 어머니젖은 몸을 살찌우는 밥이면서 마음을 보살피는 사랑입니다. 식구들은 서로서로 밥상 앞에 둘러앉아 밥을 먹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마음을 살찌웁니다.
들새는 들에서 들밥을 먹고, 멧새는 메에서 멧밥을 먹습니다. 사람이 있고, 들이 있으며, 새가 있습니다. 사람이 있고, 풀이 있으며, 벌레가 있습니다. 사람이 있고, 나무가 있으며, 숲과 바다와 하늘이 있습니다. 저마다 예쁜 밥을 먹으며 예쁜 목숨을 아낍니다. (4345.8.20.달.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