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과 작은 새 웅진 세계그림책 126
유모토 카즈미 지음, 고향옥 옮김, 사카이 고마코 그림 / 웅진주니어 / 200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고개를 들어 맡는 풀내음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88] 사카이 고마코·유모토 가즈미, 《곰과 작은 새》(웅진주니어,2009)

 


  깊은 밤에 문득 잠에서 깹니다. 옆에 누운 큰아이 몸을 살짝 만집니다. 더운 날씨에 땀이 돋는가를 살핍니다. 땀은 안 돋았는데 바지가 축축합니다. 저런, 자면서 쉬를 누었구나. 이불도 흠뻑 젖었습니다. 곯아떨어진 아이 바지와 속옷을 벗기고 웃도리까지 벗깁니다. 새 바지와 웃옷을 입힙니다. 큰아이는 잠결에 젖은 옷을 잘 벗고 새 옷을 잘 입습니다.


  나는 밤에 일어난 김에 땀으로 젖은 몸을 씻습니다. 찬물로 몸을 씻으면서 큰아이 오줌옷을 빨래합니다. 밤오줌 잘 가리는 큰아이인데 어제 하루 참 많이 뛰놀았는가 하고 돌아봅니다. 큰아이가 낮잠을 자고, 밤에 일찍 자도록 어버이로서 조금 더 마음을 기울여야 할 노릇이라고 깨닫습니다. 아침에 아이가 일어나고 난 다음, 하루 동안 어떻게 보내면 좋을까 하고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혼자 꾸리는 살림이 아니요, 홀로 살아가는 하루가 아닙니다. 네 식구 함께 꾸리는 살림이며, 네 식구 나란히 살아가는 하루입니다. 이 흐름과 결을 곱게 살필 줄 알아야 비로소 어버이라는 이름을 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곰은 숲에 있는 나무를 잘라 조그만 상자를 만들었어요. 나무 열매즙으로 상자를 예쁘게 칠하고, 안에 꽃잎을 가득 깔았지요. 그리고 곰은 작은 새를 살포시 상자 안에 눕혔어요 ..  (4쪽)

 

 


  지난밤 작은아이를 안고 대문 밖으로 나와 논둑에 서서 자장노래를 한참 불렀습니다. 작은아이는 천천히 천천히 잠들어 줍니다. 두 눈을 사르르 감은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고는 노래 몇 가락 더 부른 다음 걸음을 천천히 천천히 옮겨 집으로 들어옵니다. 그런데 집안에서 누나랑 어머니 목소리가 들리니, 이 소리를 듣고는 작은아이가 눈을 번쩍 뜹니다. 다시 재우려 해도 다시 잠들려 하지 않습니다.


  마당에 있는 평상에 눕혀 더 재우고 들어왔으면 되었을까, 내가 더 안고 마을 한 바퀴 빙 돌고 들어왔으면 되었을까, 곰곰이 헤아립니다.


  먹이고 입히며 재웁니다. 먹고 입고 잡니다. 하루를 보냅니다. 하루를 누립니다. 날마다 어떤 일 한 가지를 하자고 생각하는데, 날마다 맞이하거나 치르는 일이 나한테 얼마나 대수로울까 궁금합니다. 어찌 되든 나는 내가 가장 즐겁게 잘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면서 하루를 보낼 노릇이고, 집식구 또한 저마다 가장 즐겁게 누릴 삶길을 맞아들일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 모두 ‘오늘 아침’이야. 그러니까 우리는 늘 ‘오늘 아침’에 있는 거야. 언제나 함께 말이야 ..  (8쪽)

 


  고개를 들면 풀내음을 맡습니다. 집 둘레로는 온통 풀입니다. 이웃집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심은 벼도 풀이고, 푸성귀도 풀입니다. 풀섶에서 풀벌레가 노래합니다. 풀벌레는 살 만한 풀섶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풀약을 치지 않는 데에서 살아가며 노래합니다.


  마을 어르신들이 논이나 밭에 풀약을 치면 풀벌레는 어느새 조용해집니다. 풀벌레는 들풀과 함께 풀약을 마시고 죽습니다. 레이첼 카슨이라는 사람이었던가요, ‘소리가 사라진 숲’을 이야기하면서, 사람들이 풀약(제초제)을 함부로 쓰다가는 사람 스스로 사라지고 만다고 밝혔는데, 이렇게 밝힌 지 쉰 해가 훨씬 지났어도, 오늘날 한국땅 삶자락은 그리 달라지지 않습니다. 아름답고 즐겁게 누리는 삶이 아니라, 오직 숫자와 경제라는 이름과 허울을 따집니다.


  왜 논과 밭에 풀약을 쳐야 할까요. 왜 풀을 잡으려 할까요. 먼먼 옛날 사람들도 풀을 잡느라 땀을 흘렸을까요. 풀을 잡는다고 하지만, 정작 ‘김매기’로 뽑아서 버리는 풀이란 모두 ‘먹는 풀’이거나 ‘옷을 짓는 실을 얻는 풀’이기 일쑤예요. 그러니까, ‘돈으로 사고파는 쓸모’가 적다고 여기는 오늘날이기에, 이들 풀을 몽땅 풀약을 쳐서 죽이려 해요.


  논둑에서는 미나리도 모시풀도 질경이도 씀바귀도 모두 잡풀입니다. 밭둑에서는 쑥도 까마중도 피마자도 모두 잡풀입니다. 멀리서 바라보자면 논이나 밭은 온통 ‘한 가지 풀빛’입니다. 논이든 밭이든 한 가지 풀만 심어서 키우니 한 가지 풀빛입니다. 논이든 밭이든 한 가지 풀만 가지런히 심깁니다. 저마다 제 모습을 제 깜냥껏 빛내지 못합니다.


.. 곰은 걷기 시작했어요. 숲 속을 빠져나와 강둑 위에 올라갔어요. 풀은 푸르게 우거졌고, 강물은 반짝반짝 빛났지요 ..  (20쪽)

 


  사람들 스스로 쓸모를 찾지 않으면 대나무는 잡나무가 됩니다. 사람들 스스로 찾을모를 헤아리지 않으면 굴참나무이든 떡갈나무이든 잡나무가 됩니다.


  시골에서는 들판과 멧골이 풀약으로 몸앓이를 합니다. 도시에서는 풀과 나무가 자랄 땅뙈기가 없이 시멘트와 아스팔트입니다. 그래도 풀벌레는 풀약 기운이 사그라드는 즈음 새롭게 태어나서 새롭게 노래를 부릅니다. 풀섶에 그예 꾸준하게 풀약을 치는 사람들한테 새삼스레 새 노래를 불러 줍니다. 사람들이 슬기롭게 꿈을 꾸며, 사람들이 사랑스레 삶을 짓기를 빌듯 노래를 불러 주는 풀벌레입니다.


  고개를 들면 풀내음을 맡습니다. 풀약 기운이 서린 풀내음도 맡고, 풀약 기운이 없는 풀내음도 맡습니다. 풀벌레가 가득 모여 저마다 다른 목청으로 빚는 노래를 듣습니다. 풀벌레 노랫소리는 한여름 밤을 빛내는 소리일 뿐 아니라, 한여름 무더위를 잊고 새근새근 잠들도록 돕는 손길입니다.


.. 숲 속에는 언제나 환하게 볕이 드는 곳이 있습니다. 작은 새와 함께 해바라기를 하던 곳이에요. 곰은 그곳에 작은 새를 묻었지요. “나, 이제 울지 않을래. 작은 새는 앞으로도 계속 내 친구니까.” ..  (38쪽)

 

 


  유모토 가즈미 님 글에 사카이 고마코 님 그림이 어우러진 그림책 《곰과 작은 새》(웅진주니어,2009)를 읽습니다. 곰과 작은 새는 동무입니다. 서로 숲에서 꿈과 사랑과 믿음을 나누던 동무입니다. 숲에서 작은 살림 꾸리며 함께 먹고 입으며 잠자면 넉넉한 삶입니다. 서로 노래하고 같이 춤추며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나날은 즐겁습니다.


  그런데 작은 새가 죽습니다. 날마다 새로 맞이하는 좋은 날이었는데, 곰은 그만 삶동무를 잃고는 넋을 잃습니다. 아, 삶동무는 그예 사라졌을까요. 내 눈앞에 보이지 않는, 핏기 없이 차갑게 굳은 몸뚱이는, 이제 삶동무는 어디에도 없는 곰은 외톨이가 되었을까요.


  몸은 무엇이고 마음은 무엇일까요. 주검을 작은 상자에 담아 언제나 건사한대서 삶동무는 노래하거나 춤추거나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고개를 들어야 해요. 고개를 들어 풀내음을 맡아야 해요. 작은 새와 곰이 서로 삶동무일 수 있던 까닭은 ‘몸’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에요. 작은 새와 곰은 서로 ‘마음’으로 만나 ‘사랑’을 빚었기에 삶동무였어요. 온누리를 떠돌던 길고양이가 악기를 켜서 노래를 들려줄 때에, 곰은 비로소 무언가 느낍니다. 곰과 작은 새가 날마다 즐겁게 어우러지며 살아갈 수 있던 까닭은 서로를 ‘눈으로 바라보’며 웃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에요. 몸과 몸이 한 자리에 있기도 했지만, 바로 마음과 마음이 어깨동무를 하면서 사랑을 지었기 때문이에요.


  사랑이 있을 때에는 저 멀다 싶은 곳에 떨어졌어도 삶동무예요. 사랑이 있기에 언제나 그릴 수 있고 생각할 수 있으며 함께할 수 있어요. 마음으로 만나고 마음으로 일구는 삶이요 살림이에요. 이제 곰은 그동안 숲에서 얼마나 좋은 풀내음 맡으며 살았는가를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고운 풀내음을 새롭게 맡으며 살아갈 나날인가를 헤아립니다. 자리를 씩씩하게 털고 일어납니다. 마음속에 꿈씨앗 하나 심습니다. (4345.8.21.불.ㅎㄲㅅㄱ)

 


― 곰과 작은 새 (사카이 고마코 그림,유모토 가즈미 글,고향옥 옮김,웅진주니어 펴냄,2009.4.30./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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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이 쓴 <사과란 토끼야>라는 책이 있는데, 어느 교육출판사에 이 책을 복간해 주기를 바라며 빌려주었다가 잃어버렸다 ... ㅠ.ㅜ 안타깝게도, 이 책을 나한테서 빌린 출판사 사장님은 이 책을 빌린 줄조차 잊으셨다. 헌책으로도 다시 살 수 없는 너무 안타까운 책인데, 일본판 몇 가지 다른 책이 있는 모습을 보니 반갑다. 일본책이라도 사 두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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見えない言葉が聞こえてくる (單行本(ソフトカ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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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0월 1일에 쓴 글. 예전 글을 갈무리하며 곰곰이 되읽다가 걸쳐 본다. 아마 웬만한 사람들은 권정생 할아버지 이 같은 모습을 잘 모르지 않을까?

 

..

 

2005.10.1. 권정생



  누리그물(인터넷)에서 이모저모 살펴보다가 ‘권정생’ 할배 이름을 치니 여러 가지 글이 뜬다. 이 가운데 2005년 8월 26일치 〈한겨레21〉에 실린 ‘우토로 살리기 캠페인 모금’이 눈에 띈다. 남경필(20만 원), 김미화(30만 원), 강맑실(100만 원), 윤도현(30만 원)도 돈을 냈는데, 경북 안동 조탑마을 오막집에서 홀로 살아가는 권정생 할배도 10만 원을 냈다.


  두멧시골에서, 몸 움직이기 수월하지 않다는 분이, 우체국까지 손수 찾아가서 10만 원을 부쳤을 일을 헤아려 본다. 아주 천천히, 느릿느릿 걸어서, 마을 어귀 시골버스 타는 데로 간 다음, 두 시간에 하나쯤 지나가는 시골버스를 타고는 읍내나 면내 우체국으로 가셨겠지. 우체국에서 종이쪽에 슥슥 글을 적어서 돈 조금 부쳤겠지. 버스일꾼이나 우체국일꾼은 천천히 기우뚱 걷는 할배가 누구인지 알까?


  어쩐지 짠해서 눈물을 찔끔하다가, 이처럼 한결같이 이웃하고 눈물을 나누려는 모습을 가만히 그린다. 돈이 많아야 이웃사랑을 할 수 있지 않다. 100만 원을 내거나 1만 원을 내거나 대수롭지 않다. 마음이 반갑고 고맙다.


  안동 할배는 어느 ‘수재 의연 모금’에도 돈 10만 원을 낸 자국이 있다. 이오덕 어른 큰아드님이 권정생 할배한테 언젠가 ‘수재 의연 모금’을 놓고서 빙그레 웃으면서 말을 여쭌 적이 있다. “정생 형님, 신문사에 10만 원 내셨습니까?” “봤냐? 10만 원 냈지.” “돈이 10만 원밖에 없어서 10만 원을 내셨습니까? 신문에 이름이 실리고 싶으셨나요?” “허허, 그래. 내 이름 좀 신문에 나라고 냈지. 수재 의연금이라고 돈있는 사람들은 1억도 내고 5000만 원도 내서 얼굴이 실리던데, 〈한겨레〉에서는 1억을 내든 10만 원을 내든 얼굴 사진 없이 이름만 싣잖냐?” “거기는 그렇게 하지요.” “나 같은 동화작가도 10만 원을 내는 줄 사람들이 보면, 작은 아주머니도 작은 아저씨도 1만 원씩 내서 같이 이름이 실릴 수 있지 않겠니?” “요새 어른들은 동화를 안 읽어서 정생 형님 이름이 신문에 실려도 누구인지 모를 텐데요?” “그럴까? 그러면 안 되는데. 허허. 먼저 동화부터 읽으라고 해야겠네. 허허.”


  곰곰이 돌아본다. 어쩌면, 권정생 할배는 ‘나 아직 우체국으로 버스 타고 나가서 이렇게 돈 부칠 수 있을 만큼 몸 튼튼해’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셈이지 싶다. 적잖은 사람들이 할배 몸이 아픈 일을 걱정하지만, 그런 걱정일랑 말고, 즐겁고 아름답게 꿈을 그리고 사랑을 생각하라면서 속삭이는 10만 원이리라 느낀다.


  어떻게 살아갈 때에 삶다울까. 아름답게 살아갈 때에 삶답겠지. 어떻게 살아가야 즐거울까. 사랑스레 살아갈 때에 즐겁겠지. 밥 한 그릇을 나누고, 책 한 자락을 나누고, 마음 한 움큼을 나눈다.


ㅅㄴㄹ. (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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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월 어느 날 쓴 글. 예전 글을 갈무리하다가 눈에 뜨여서 옮겨 본다. 요사이도 이 비슷한 일을 으레 저지르곤 합니다. 바깥마실을 하다가 어딘가에 '읽던 책'을 멀쩡히 놓고 집으로 돌아오느라, 두 번 다시 못 찾는 일이 가끔 있어요... -_-;;;;; 술을 안 마셔도 바보스러운 짓을 합니다 @.@

 

..

 


 잃어버린 책

 


  잃어버리고 말았구나.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네. 그날은 가방에 온갖 책이 잔뜩 들어 무거운데다 더 넣을 자리가 없어, 책 두 권은 어쩔 수 없이 손에 들었는데. 그 책 두 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구나. 처음엔 어디에 둔 줄 알았는데. 그런데 그렇게 두었음직한 곳에 이 책이 없네. 아무래도 전철에 놓고 내렸는가 보다. 전철 짐칸에. 글쎄, 그날 술을 잔뜩 마셔서 몸을 가누기도 쉽지 않았지만 그 책 두 권은 품에 꼬옥 안았다고 떠올리는데. 아닌가?


  앞으로 다시 만날 수도 있겠지. 다시 만날 날이 언제일는지 모르지만, 꼭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다른 책으로도 읽을 수 있지만 그 낡은 책, 그 낡은 종이, 예전에 그 책을 보던 사람 손길이 좋았는데. 책은 좀 뒤틀리고 낙서도 있고 먼지도 많이 먹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술기운 오른 몸으로도 그 책에 담긴 이야기가 참 가슴에 와닿아서 밑줄을 죽죽 그으면서 아주 즐겁게 보았다. ‘참 말을 곱게 썼군. 이만 한 글이니 사람들이 널리 사랑하겠군. 그러나 이만 한 글을 찬찬히 즐길 줄 아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아, 얼마 없으면 어떤가. 내가 즐길 수 있으면 되지. 나라도 즐기면이 아니라 내가 즐기면 되지. 책은 어느 한 사람만 즐기라고 나오지는 않으나, 제대로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면, 또는 많이 사라졌다면, 그 어느 날에라도 한 사람이 알아볼 수 있으면 되지 않나? 느낄 수 있으면, 가슴으로 껴안을 수 있으면, 마음 깊이 사랑할 수 있으면 되지 않나?’ 하고 생각하며 읽었는데. 모처럼 서울마실을 하며 즐겁게 만난 책 두 권을, 가방도 손도 무겁다며 살짝 숨을 돌리려고 짐칸에 놓았다가 그만 잊고 내렸구나.


  나중에 그 책을 다시 사자면 적잖은 돈이 들겠지. 그날은 참 고맙게 아주 싼값, 5000원인가 4000원에 샀지만 앞으로는 그 책을 여러 만 원을 줘야 겨우 살 수 있을 테지. 그러나 그만 한 돈이 있어도 못 살 수 있어. 오늘 내 주머니에 100만 원이 있다 해도(100만 원은커녕 10만 원도 없지만. 1만 원이나 있나?) 그 책이 다시 내 손에 쥐어지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어. 돈이 있다고 이녁이 바라는 모든 책을 다 살 수 있나? 못 사지. 안 팔지. 어느 책 하나를 살뜰히 사랑하고 아끼며 돌보고 즐길 줄 모르는 사람한테는 헌책방 임자들이 책을 안 팔기도 하잖은가?


  아, 그래도 그 책을 누군가 손에 쥐고 살뜰히 읽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비록 이제 내 곁을 떠나서 어디로 갔는 줄 알 길도 없지만, 내가 그 책을 길에 흘렸다면, 틀림없이 누군가 그 책을 주워서 알뜰히 여겨 주면 좋겠다. 그이가 “그야말로 어떤 얼빠진 놈이 책을 흘리고 다녀?” 하고 빈정거려도 좋다. 그렇게 빈정거리더라도 내가 잃어버린 그 책을 알뜰히 보살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그 책 두 권을 쓰레기통에 처넣지 않아만 주어도 좋다.


  아니, 이제 내 곁에 그 책들이 없는데 무슨 그런 이야기를 하나? 책을 줍는 이가 있으면 그 사람 마음대로 하면 되지. 뭘 그리 바라나? 나는 이제 내 곁에, 내 손에 있는 책을 이야기하자. 그 책은 그 책대로 제 길을 갔으니, 마음으로도 떠나 보내자. 아쉽다 여길 까닭도 슬프다 느낄 까닭도 없다.

 

  내가 잃은 책 둘은 ‘이효석 소설전집’이었다. ‘능금’이란 낱말이 여러 작품에 숱하게 나온 낡은 책. ‘사과’라는 낱말은 한 번도 말하지 않고 오로지 ‘능금’만을 말하는데, 그 능금이 이 소설 저 소설에도 나오는 그 책. 능금 냄새, 능금 맛이 나는 그 소설, 이효석 소설을 그 책으로 다시 만나고 싶다. 세로쓰기로 된, 1960년대에 나온 책 종이로는 제법 좋은 종이를 쓴 그 책, 그러나 오래된 책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 책, 오래되고 눌리고 해서 책 한쪽이 뒤틀렸던 그 책, 껍데기에 적힌 ‘이효석 소설전집’이란 이름도 더께를 먹어 거의 안 보이고, 그예 시커멓게만 보이던 그 책. 어디로든 잘 가라. (4339.1.12.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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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하게 살려고 애쓰면 착한 책을 만날 수 있겠지

 


  좋지 않은 줄거리를 담은 책이 얼마나 될까? ‘돈·이름·힘’에 매이지 않고 홀가분한 넋과 뜻으로 내놓는 책치고 아름답지 않은 책은 없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제도권 사회에서 제 앞가림에 너무 매이고 시달리면서 참답고 털털하며 수수한 깊이를 담은 책하고 자꾸만 멀어지는구나 싶다. 책이 제대로 읽히고 제값을 하자면, 무엇보다도 나 스스로 나한테 참살길이 무엇인지 느끼고 찾고 살피는 한편, 제 몸과 마음을 다부지게 다독이고 갈고닦으며 키워야지 싶다. 나 스스로 참된 아름다움을 찾으려 애쓴다면 아름다운 책 하나 만날 수 있다. 나 스스로 알뜰히 살고자 애쓰면 알뜰한 책을 만날 수 있다. 나 스스로 착하게 살고자 애쓰면 착한 책을 만날 수 있겠지. (4338.10.7.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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