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월 어느 날 쓴 글. 예전 글을 갈무리하다가 눈에 뜨여서 옮겨 본다. 요사이도 이 비슷한 일을 으레 저지르곤 합니다. 바깥마실을 하다가 어딘가에 '읽던 책'을 멀쩡히 놓고 집으로 돌아오느라, 두 번 다시 못 찾는 일이 가끔 있어요... -_-;;;;; 술을 안 마셔도 바보스러운 짓을 합니다 @.@

 

..

 


 잃어버린 책

 


  잃어버리고 말았구나.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네. 그날은 가방에 온갖 책이 잔뜩 들어 무거운데다 더 넣을 자리가 없어, 책 두 권은 어쩔 수 없이 손에 들었는데. 그 책 두 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구나. 처음엔 어디에 둔 줄 알았는데. 그런데 그렇게 두었음직한 곳에 이 책이 없네. 아무래도 전철에 놓고 내렸는가 보다. 전철 짐칸에. 글쎄, 그날 술을 잔뜩 마셔서 몸을 가누기도 쉽지 않았지만 그 책 두 권은 품에 꼬옥 안았다고 떠올리는데. 아닌가?


  앞으로 다시 만날 수도 있겠지. 다시 만날 날이 언제일는지 모르지만, 꼭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다른 책으로도 읽을 수 있지만 그 낡은 책, 그 낡은 종이, 예전에 그 책을 보던 사람 손길이 좋았는데. 책은 좀 뒤틀리고 낙서도 있고 먼지도 많이 먹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술기운 오른 몸으로도 그 책에 담긴 이야기가 참 가슴에 와닿아서 밑줄을 죽죽 그으면서 아주 즐겁게 보았다. ‘참 말을 곱게 썼군. 이만 한 글이니 사람들이 널리 사랑하겠군. 그러나 이만 한 글을 찬찬히 즐길 줄 아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아, 얼마 없으면 어떤가. 내가 즐길 수 있으면 되지. 나라도 즐기면이 아니라 내가 즐기면 되지. 책은 어느 한 사람만 즐기라고 나오지는 않으나, 제대로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면, 또는 많이 사라졌다면, 그 어느 날에라도 한 사람이 알아볼 수 있으면 되지 않나? 느낄 수 있으면, 가슴으로 껴안을 수 있으면, 마음 깊이 사랑할 수 있으면 되지 않나?’ 하고 생각하며 읽었는데. 모처럼 서울마실을 하며 즐겁게 만난 책 두 권을, 가방도 손도 무겁다며 살짝 숨을 돌리려고 짐칸에 놓았다가 그만 잊고 내렸구나.


  나중에 그 책을 다시 사자면 적잖은 돈이 들겠지. 그날은 참 고맙게 아주 싼값, 5000원인가 4000원에 샀지만 앞으로는 그 책을 여러 만 원을 줘야 겨우 살 수 있을 테지. 그러나 그만 한 돈이 있어도 못 살 수 있어. 오늘 내 주머니에 100만 원이 있다 해도(100만 원은커녕 10만 원도 없지만. 1만 원이나 있나?) 그 책이 다시 내 손에 쥐어지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어. 돈이 있다고 이녁이 바라는 모든 책을 다 살 수 있나? 못 사지. 안 팔지. 어느 책 하나를 살뜰히 사랑하고 아끼며 돌보고 즐길 줄 모르는 사람한테는 헌책방 임자들이 책을 안 팔기도 하잖은가?


  아, 그래도 그 책을 누군가 손에 쥐고 살뜰히 읽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비록 이제 내 곁을 떠나서 어디로 갔는 줄 알 길도 없지만, 내가 그 책을 길에 흘렸다면, 틀림없이 누군가 그 책을 주워서 알뜰히 여겨 주면 좋겠다. 그이가 “그야말로 어떤 얼빠진 놈이 책을 흘리고 다녀?” 하고 빈정거려도 좋다. 그렇게 빈정거리더라도 내가 잃어버린 그 책을 알뜰히 보살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그 책 두 권을 쓰레기통에 처넣지 않아만 주어도 좋다.


  아니, 이제 내 곁에 그 책들이 없는데 무슨 그런 이야기를 하나? 책을 줍는 이가 있으면 그 사람 마음대로 하면 되지. 뭘 그리 바라나? 나는 이제 내 곁에, 내 손에 있는 책을 이야기하자. 그 책은 그 책대로 제 길을 갔으니, 마음으로도 떠나 보내자. 아쉽다 여길 까닭도 슬프다 느낄 까닭도 없다.

 

  내가 잃은 책 둘은 ‘이효석 소설전집’이었다. ‘능금’이란 낱말이 여러 작품에 숱하게 나온 낡은 책. ‘사과’라는 낱말은 한 번도 말하지 않고 오로지 ‘능금’만을 말하는데, 그 능금이 이 소설 저 소설에도 나오는 그 책. 능금 냄새, 능금 맛이 나는 그 소설, 이효석 소설을 그 책으로 다시 만나고 싶다. 세로쓰기로 된, 1960년대에 나온 책 종이로는 제법 좋은 종이를 쓴 그 책, 그러나 오래된 책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 책, 오래되고 눌리고 해서 책 한쪽이 뒤틀렸던 그 책, 껍데기에 적힌 ‘이효석 소설전집’이란 이름도 더께를 먹어 거의 안 보이고, 그예 시커멓게만 보이던 그 책. 어디로든 잘 가라. (4339.1.12.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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