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ㅂㅇ 님 서재에 올라온 글을 읽다가 문득 느껴, 이 같은 글을 적어 봅니다. 광고전화란 참... 그시기 저시기 합니다 ..

 

..


 전화기 울리지 않는 빗소리

 


  문득 깨닫는다. 시골에서 살아간 지 어느덧 이태째 되는데, 시골에서 살아가는 날이 길어질수록 ‘광고전화’가 뜸하다. 도시에서 살 적을 돌이키면, 하루에도 몇 차례 광고전화를 받아야 했다. 손전화 기계 바꾸라는 광고전화부터, 땅을 사라느니, 보험을 들라느니, 새 신용카드를 받으라느니, 그야말로 온통 광고투성이 나날이었다고 느낀다.


  처음 시골로 삶터를 옮긴 뒤에는 심야보일러 들이라는 전화가 뻔질나게 왔다. 그 다음에는 위성방송 달라는 전화가 곧잘 왔는데, 한 달 두 달 지나고 또 지나면서 이 같은 광고전화가 부쩍 줄어든다. 이제는 한 달에 한 차례쯤 광고전화가 올까 말까 한다. 내 전화번호를 빼돌려서 서로 나누는 광고회사들이 느끼기에도 ‘도시사람’ 아닌 ‘시골사람’은 무언가 조잘조잘 떠들며 물건을 팔기에는 어려우리라 보았을까.


  《에미는 괜찮다》라는 책을 읽으면, 이 책에 나오는 할머니는 밭일을 하거나 논일을 하다가 ‘집에서 전화기 울리는 소리’가 들리면 누구한테서 오는 전화라고 곧장 알아챈다고 말씀한다. 나도 이렇게 느낀다. 내 전화기가 울릴 때면, 어디에서 무슨 일 때문에 전화를 거는구나 하고 먼저 느낀다. 쪽글이 왔다며 손전화 기계가 울릴 적에도 어떤 쪽글일는지 어림할 수 있다.


  모든 삶은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모든 일은 마음으로 한다고 느낀다. 광고전화를 걸며 영업을 해야 하는 분들 또한, 당신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회사일’이요 ‘식구들 먹여살리는 밥벌이’인 탓에, 시골 사는 나한테까지 광고전화를 걸며 목이 쉬도록 말을 해야 할 텐데, 제아무리 고되며 싫은 일을 하더라도 당신들 마음이 목소리에 깃든다. 곧, 이 마음이 내 전화기로 스미면서 누가 왜 전화를 하는가를 환히 알아챌 수 있다.


  음성에 사는 내 어버이나 일산에 사는 옆지기 어버이가 전화를 걸 적에도 곧장 알아챈다. 두 어버이가 당신 아이들을 그리고 당신 손자들을 그리는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어느 사외보에서 걸려오는 전화는 우리 시골집 살림을 북돋우려고 일거리를 안겨 주니까 조마조마 두근두근 마음을 건넨다. 내 책을 내놓아 준 출판사에서 걸려오는 전화는 내 책이 어느 만큼 사랑받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니, 이 또한 조마조마 두근두근 마음을 보낸다.


  내가 누군가한테 전화를 걸 적에도 내 마음이 살포시 실릴 테지. 내 전화를 받는 누군가는 어떤 느낌일까. 내가 거는 전화가 따르릉 울릴 적에 이녁은 어떤 마음이 될까. 내 사랑이 전화기라는 기계를 징검다리 삼아 따사롭게 흐를까. 전화기 울리지 않는 이른가을 한낮, 아침부터 듣는 빗소리가 온 집안을 감돈다. (4345.9.9.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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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손으로 글쓰는 어린이

 


  엎드려 놀다가 동생이 팔을 밟고 올라왔다며 오른손이 다쳐 아프다는 큰아이는 오른손 팔뚝에 붕대를 감는다. 오른손을 아예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하루가 지난 뒤 오른손을 멀쩡히 움직인다. 다쳤다기보다 놀라는 바람에 오른손을 안 움직이려 했지 싶다. 아무튼, 오른손을 못 쓰니 글씨쓰기 놀이도 못하리라 여기기에, 그러면 왼손으로 쓰면 돼, 하고 말하면서 아버지부터 왼손으로 글씨를 써서 보여준다. 아이는 아버지가 하는 양을 바라보며 왼손으로 천천히 또박또박 글씨를 쓰며 논다. (4345.9.9.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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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들보라 글쓰고 싶어

 


  글씨를 쓰며 노는 누나 곁에서 볼펜 한 자루 쥐며 저도 글씨를 쓰겠다 하는 산들보라. 그래, 너도 쓰고프면 쓰렴. 다만, 누나가 쓰는 빈책 말고 네 자그마한 빈책에다 쓰렴. (4345.9.9.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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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나르는 전차
리즐 스티히 그림, 제임스 크뤼스 글, 유혜자 옮김 / 베틀북 / 2002년 9월
평점 :
절판


 

 


 숲에서 마음껏 노는 아이들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91] 리즐 스티히·제임스 크뤼스, 《행복을 나르는 전차》(베틀북,2002)

 


  숲에서는 날마다 마음껏 놀고 언제까지나 싱그러이 살아갈 수 있다고 느껴요. 숲에서 노는 아이들은 물리지 않아요. 숲에서 아이들하고 지내는 어버이는 질리지 않아요. 숲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숲에서 밭을 일구어요. 숲마실을 하고 숲내음을 맡으며, 숲열매를 얻고 숲기운을 누려요.


  깊숙한 숲이든 얕은 숲이든, 숲에 머물 때에는 숲이 베푸는 사랑을 받아먹습니다. 숲에서 들려주는 노래를 듣고, 숲에서 풍기는 냄새를 맡으며, 숲에서 속삭이는 이야기를 들어요.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자면 어느 삶터라 하든 숲을 일구어야지 싶어요. 숲이 없는 데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마음이 메마르거나 생각이 자라지 않으리라 느껴요.


.. 전차는 날마다 똑같은 길로만 다녔어요. 그러던 어느 날, 더 이상 어떤 전차도 다니지 않는 길로 들어섰어요 ..  (3쪽)


  ‘놀이공원’이라 이름 붙은 데이든, ‘PC방’이라는 데이든, 아이들이 마음을 놓고 몇 날 며칠 몇 달 몇 해 온삶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헤아려 봅니다. 놀이공원에서 하루를 묵거나 이틀을 묵거나 이레를 묵으면서 놀 만할까요. 인터넷게임을 하는 피시방에서 여러 날 묵으면서 놀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따로 지은 시설에서는 하루 내내 놀기에도 힘든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엑스포 같은 데이든 박물관 같은 데이든 놀이공원 같은 데이든, 한 달이나 한 주는커녕 하루조차 마음껏 뛰놀 만하지는 않다고 느낍니다. 몸이 받치기 힘들기도 하지만 돈도 아주 많이 들겠지요. 놀이공원에서는 밥을 따로 사다 먹어야 할 텐데, 아이와 어버이 몸을 헤아릴 만한 밥을 마련해서 먹기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틀에 갇힙니다. 울타리에 사로잡힙니다. 톱니바퀴에 얽매입니다.


  그러나 놀이공원으로 놀러 가는 아이와 어버이가 무척 많아요. 피시방으로 놀러 다니는 아이들이 매우 많아요. 컵라면도 먹고 빵도 먹으며 과자도 먹어요. 닭고기도 먹고 세겹살도 먹으며 떡볶이도 먹어요. 주머니에 돈이 있으면 딱히 걱정하지 않아요. 놀이기구를 타야 비로소 노는 줄 여겨요. 놀잇감을 손에 쥐어야 비로소 놀 만하다고 여겨요.


  어떻게 놀아야 즐거울까를 스스로 생각하지 못해요.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놀이요,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일이에요. 남이 만든 놀잇감과 놀이시설을 찾아야 비로소 놀 수 있는 줄 생각합니다. 남이 마련한 일자리를 붙잡아야 비로소 일할 수 있는 줄 생각합니다.


  어떻게 놀 때에 신날까를 스스로 살피지 못하도록 사회와 나라가 가로막아요. 제도권 사회와 제도권 교육으로 사람들 생각힘을 가로막아요. 모두들 톱니바퀴 가운데 하나가 되어 굴러가도록 내몰아요. 사람들 저마다 빛낼 꿈과 사랑 아닌 다 똑같은 틀과 울타리에 스스로 갇히도록 등을 떠밀어요.


.. 그 날 따라 전차는 이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나도 푸른 나무가 있는 들판으로 나가고 싶어!’ ..  (5쪽)

 

 


  리즐 스티히 님 그림과 제임스 크뤼스 님 글이 어우러진 그림책 《행복을 나르는 전차》(베틀북,2002)를 읽으며 곰곰이 돌아봅니다. 독일에서 1965년에 처음 나온 그림책 《행복을 나르는 전차》에 나오는 ‘전차’는 도시에서 더는 달리고 싶지 않아 도시를 떠나요. 회사나 학교에 가느라 바쁜 도시사람을 멀리 팽개치고 숲으로 들어서요. 숲을 달리며 숲짐승이나 들짐승을 태워요. 전차는 나무와 풀과 꽃 사이를 달리며 즐거워요. 여러 짐승을 태우며 즐거워요. 짐승들은 전차에 타고는 노래를 불러요. 바람도 노래를 부르고, 해님도 노래를 불러요. 풀도 꽃도 나무도 모두 노래를 함께 불러요.


  도시 한복판을 날마다 똑같이 달려야 하던 전차는 스스로 노래를 부르지 못했어요. 전차에 타는 사람들도 노래를 부르지 않았어요. 모두 시계만 들여다봐요. 시계를 안 들여다볼 때에는 꾸벅꾸벅 졸아요. 전차는 사람들을 실어 나르면서 하나도 즐겁지 않아요. 노래도 햇살도 바람도 숲도 없는 매캐한 도시에서 언제나 쳇바퀴처럼 빙빙 돌자니 스스로 지겹고 따분하며 슬퍼요.


.. 푸른 초원으로 들어선 전차는 쉬지 않고 달렸어요. 마침내 나무들이 울창하게 들어찬 숲이 나타났어요 ..  (15쪽)


  1960년대 한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헤아려 봅니다. 1965년 언저리에 《행복을 나르는 전차》 같은 그림책이 한국말로 옮겨졌다면 얼마나 많은 한국사람이 이 그림책을 아끼거나 사랑했을까 궁금합니다. 아니, 2002년에 처음 옮겨지던 때에는, 또 판이 끊어져 새책방 책시렁에서는 사라지고 헌책방 책꽂이에서 찾아야 하는 이 그림책을 읽을 오늘날 한국사람은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며 사랑할 만할까 궁금합니다.


.. 그 뒤로 전차는 다시 시내만 다녀요.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언제나 강아지와 당나귀, 고양이와 수탉을 그리워한답니다 ..  (25쪽)


  이제 독일사람은 조금은 즐거운 삶을 찾았을까요? 그림책 《행복을 나르는 전차》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아로새기면서 ‘쳇바퀴 삶’이나 ‘울타리에 갇힌 일’이나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놀이’에서 스스로 벗어날 줄 알까요? 예나 이제나 독일사람은 스스로 바보스레 숲을 잊거나 모르거나 등진 채 살아갈까요? 아름다운 꿈이나 사랑은 잊으면서 살아갈까요? 어른과 아이 모두 가장 깊은 사랑과 가장 너른 꿈과 가장 따사로운 믿음으로 어깨동무할 때에 가장 즐거운 줄 깨달을까요?


  아이들은 숲에서 가장 마음껏 뛰놀 수 있어요. 어른들은 숲에서 가장 실컷 일할 수 있어요. 숲은 따사로운 어머니 품입니다. 숲은 너그러운 아버지 어깨입니다. 숲은 보드라운 할머니 치마폭입니다. 숲은 슬기로운 할아버지 주름살입니다. 숲은 해맑은 아이들 노랫소리입니다. (4345.9.9.해.ㅎㄲㅅㄱ)

 


― 행복을 나르는 전차 (리즐 스티히 그림,제임스 크뤼스 글,유혜자 옮김,베틀북 펴냄,2002.9.10./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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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글씨는 얼마나 예쁠까

 


  음성 할아버지 생일에 맞추어 나들이를 했기에, 음성집에서 달력종이를 펼쳐 큰아이하고 글쓰기 놀이를 했다. 마침 음성에 왔으니까 ‘음성’이라 적고, 우리가 온 ‘고흥’을 적으며, 구월로 접어든 철이니 ‘가을’이라 적은 뒤, 아침저녁으로 시원스레 바람이 부니까 ‘바람’이라 적는다.


  다섯 살 큰아이는 아직 글을 읽지 못한다. 그때그때 소리내어 읊으며 내가 먼저 적을 때에만 알아본다. 큰아이는 아버지 글씨를 바라보며 흉내내는 글쓰기를 하는 셈이라 할 테지만, 큰아이 글씨는 아버지 글씨하고 다르다. 그리고 참 예쁘구나 싶다.


  내 어릴 적 처음 글을 익혀 글씨를 쓸 때에는 어떠했을까 궁금하다. 그무렵에도 이토록 예쁘게 글을 쓸 수 있었을까. 내 옆지기는 어린 날 글씨가 어떠했을까. 사내라 해서 글씨가 밉거나 삐뚤빼뚤이거나 엉성하리라고는 느끼지 않는다. 기울이는 마음에 따라 달라지고, 쓰는 생각과 사랑에 따라 바뀌겠지.


  어느덧 스무 해째 글쓰기를 하며 살아오는 내 나날이요, 손글을 쓸 때가 퍽 많아서, 어쩌면 내 밉던 글씨가 차츰차츰 고운 글씨로 거듭나지 않았을까. 나는 스무 해 앞서 글쓰기 한길을 내 삶으로 가닥 잡으면서, 바로 오늘 이곳에서 큰아이한테 곱게 글씨를 쓰도록 이끄는 꿈을 꾸지 않았을까. (4345.9.9.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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