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씨앗 책읽기

 


  시골마을에는 사람이 손수 심어 돌본 나무가 있고, 씨앗이 스스로 뿌리내려 자란 나무가 있습니다. 손수 돌보아 키운 나무이건, 씨앗이 스스로 자란 어른나무이건, 모두 사랑스럽고 아름답구나 싶습니다. 사람들은 꽃을 보거나 열매를 얻거나 울타리로 삼으려고 나무를 심습니다. 예전에는 옷장을 짜려고 나무를 심기도 했습니다. 스스로 자라나는 나무는 사람들 바람이나 마음하고는 살짝 다르다 할 테지만, 푸른 잎사귀와 밝은 꽃과 예쁜 열매를 맺습니다. 사람이 심은 감나무에서 맺는 감알은 사람도 먹고 멧새도 먹습니다. 사람이 안 심고 나무 스스로 씨앗을 내려 이루는 나무에 맺히는 열매 또한 사람도 먹고 멧새도 먹습니다. 때로는 사람은 안 먹고 멧새만 나무열매를 먹곤 합니다.


  빨갛게 빛나는 나무열매를 바라봅니다. 큰아이는 빨갛게 빛나는 나무열매가 예쁘다면서 톡톡 땁니다. 지난해까지만 하더라도 손이 안 닿는다며 열매를 따 달라고 했는데, 다섯 살이 된 올해에는 웬만한 데까지 손이 닿아 스스로 따서 즐깁니다. 큰아이는 빨간 나무열매를 손바닥에 올려놓고는, “이 열매는 새가 먹는 거야. 새가 맛있게 먹을 거야.” 하고 말하다가는, “나도 먹어야지. 아버지도 먹어 볼래요?” 하고 묻습니다. “아버지는 안 먹어. 새한테 주자.” 하고 대꾸하는데, 큰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싱글벙글 웃다가 슬쩍 혼자 먹습니다. “아, 맛있다.” 하면서 몇 알 집어먹더니, “새들 먹으라고 올려놓아야지.” 하면서 남은 열매를 이웃집 돌울타리 한쪽에 가만히 올려놓습니다. 가을이 빨갛게 무르익습니다. (4345.10.2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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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와 ‘놀라움’
[말사랑·글꽃·삶빛 30] 말이란 무엇일까

 


  국어사전은 국어학자가 엮습니다. 국어학자는 국어를 익힌 사람입니다. ‘국어(國語)’란 무엇일는지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1) 한 나라의 국민이 쓰는 말 (2) 우리나라의 언어. ‘한국어’를 우리나라 사람이 이르는 말이다”라 나옵니다. 국어사전 말풀이에서 “한 나라의 국민”이라 나오는데, ‘국민(國民)’은 “국가를 구성하는 사람”을 뜻한다고 해요. ‘국가(國家)’는 또 무엇인가 하면 “= 나라”입니다. 곧, 나라를 이루는 사람이 ‘국민’이기에 “한 나라의 국민”처럼 적는 뜻풀이는 알맞지 않습니다. “한 나라의 나라의 사람”처럼 뜻풀이한 셈이니까요. 그런데 ‘국민’이라는 낱말을 한국사람이 얼마나 쓸 만한가 알쏭달쏭합니다. 1990년대까지 쓰던 ‘국민학교’라는 이름을 이제 ‘초등학교’로 바꾸었어요. ‘국민’이라는 낱말은 여느 한자말이 아니라, 일본제국주의가 한겨레를 식민지로 삼던 지난날 “천황 폐하를 섬기는 나라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썼거든요. ‘국어’라는 낱말도 이와 같아요. ‘국어’라는 한자말은 일본제국주의가 군대를 앞세워 여러 나라를 식민지로 삼던 때에 ‘일본말’을 가리키려고 썼어요. 중국사람은 ‘중국어’라 했고 한국사람은 ‘조선어’라 했어요. 이때 한국은 나라이름이 ‘조선’이었기에 ‘조선어’였어요. 일본은 나라이름이 일본이니 ‘일본어’로 적을 만했지만, 일본은 아시아를 제국주의를 내세워 윽박지르며 ‘국어’라는 한자말을 새로 지었어요.


  말뿌리를 살핀다면, ‘국민학교’에 붙던 ‘국민’만 털어낸대서 식민지 찌꺼기를 털 수 있지 않습니다. ‘국민’과 함께 ‘국어’를 털어야 합니다. 이와 맞물려 ‘국(國)-’을 붙인 여러 낱말도 나란히 털 수 있어야 해요. 털어낼 찌꺼기라 한다면 말끔히 털어야 할 노릇이요, 가꾸며 북돋울 겨레얼이라 한다면 찬찬히 살피며 두루 가꾸며 북돋울 노릇이에요.


  그림을 그리는 김원숙 님이 쓴 《그림 선물》(아트북스,2011)이라는 책을 읽다가 132쪽에서 “밤하늘에 달이 떠 있는 건 하나도 놀랄 일이 아닌데, 달은 볼 때마다 새롭고 경이롭다.” 같은 글월을 봅니다. 이 글월에서는 ‘놀랄’과 ‘경이롭다’라는 낱말이 나타납니다. 아마, ‘놀랄’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한국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해요. 그러면, ‘경이롭다’가 무엇을 뜻하는지 제대로 아는 한국사람은 얼마나 있을까요.


  ‘경이(驚異)롭다’는 “놀랍고 신기하게 여기다”를 뜻하는 한자말입니다. 이 말풀이에 나오는 ‘신기(神奇)하다’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색다르고 놀랍다”를 뜻하는 한자말입니다. 곧, ‘경이롭다’란 “놀랍고 놀랍게 여기다”인 셈이면서, ‘경이 = 놀라움 = 신기’인 꼴입니다.


  우리 어른들은 말뜻과 말풀이와 말느낌을 얼마나 옳게 헤아리면서 말을 하며 살아간다고 할 만할까요. 말뜻을 제대로 짚으며 말하는 어른은 얼마나 될까요. 말풀이를 찬찬히 살피는 어른은 얼마나 있을까요. 말느낌을 살가이 살리며 말을 나누는 어른은 얼마나 찾아볼 수 있을까요.


  국어사전에 실린 숱한 한자말은 돌림풀이로 뜻풀이를 합니다. 돌림풀이로 뜻풀이를 붙이는 한자말을 이모저모 살피면, 오랜 옛날부터 한겨레가 쉽고 수수하게 주고받던 낱말을 이래저래 밀어내며 자꾸 쓰이는구나 싶습니다. 한국사람은 한국사람이지만 정작 한국에서 쓸 한국말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는구나 싶습니다. 털며 아름답게 가꿀 말을 털지도 못하고 아름답게 가꾸지도 못합니다. 슬기롭고 올바로 쓸 말을 슬기롭게도 못 쓰고 올바르게도 못 씁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국어’가 아닌 ‘나라말’입니다. ‘국민’이 아닌 ‘나라사람’입니다. ‘국가’가 아닌 ‘나라’입니다. ‘國歌’처럼 적는 한자말 또한 ‘국가’가 아닌 ‘나라노래’입니다. 한 번 더 되돌아보면, ‘나라말’이기 앞서 ‘말’입니다. ‘나라사람’이기 앞서 ‘사람’입니다. ‘나라노래’이기 앞서 ‘노래’예요.


  오늘날 들어서 우리 겨레 이야기를 ‘옛이야기’라 하면서 ‘옛-’을 앞에 붙이지만, 예부터 오래오래 내려온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시골에서 흙일을 하며 부르던 노래는 ‘민요’나 ‘전래민요’가 아닌 ‘노래’일 뿐입니다. 시골이 도시로 바뀌거나 시골에 할머니 할아버지만 남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민요’나 ‘전래민요’ 같은 이름을 붙일까요. 어쩌면, 이런 이름을 일부러 붙이면서 오늘날에도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먼먼 옛날 구닥다리’라도 되는 듯 몰아붙이는 셈 아니랴 싶어요. 오늘도 시골에서 논일을 하고 밭일을 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는 저절로 입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불러요. 할머니 노래는 민요 아닌 노래이고, 할아버지 노래는 전래민요나 전통민요가 아닌 노래예요.


  우리들이 쓰는 말은 ‘한국말’이라 이름을 붙일 만하지만, 이에 앞서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터가 한국이니 ‘한국말’이라 하지만, ‘말’을 나눌 뿐입니다. 나는 내 삶을 담고 내 넋을 싣는 말을 합니다. 내 둘레에서는 내 동무나 이웃이 ‘동무 삶’과 ‘이웃 넋’을 들려주는 말을 합니다.


  이렇게 써야 바른 말이 된다거나 저렇게 써야 고운 말이 된다고 하는 틀은 없습니다. 누구나 스스로 살아가며 나누는 말입니다. 삶에 따라 스스로 빚는 말인 만큼, 삶을 곱게 일구는 사람은 넋이 곱고 말이 곱습니다. 삶을 참답게 가꾸는 사람은 넋이 참다우며 말이 참답습니다. 삶을 즐겁게 누리는 사람은 넋이 즐겁고 말이 즐겁습니다.


  국어사전은 국어학자가 국어학을 익히며 엮습니다. ‘말’은 우리들이 바로 이곳에서 내 보금자리를 알뜰히 사랑하면서 저마다 즐겁게 주고받습니다. (4345.10.2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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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쁜 시골집 빨래

 


  우리 식구 살아가는 시골집 모습을 나 스스로 사진으로 담는다. 왜냐하면 사진을 찍는 내 눈으로 바라보기에 그지없이 어여쁘니까. 골목마실을 하거나 고샅마실을 하며 ‘어여삐 보이는 이웃집 모습’을 으레 사진으로 찍기도 하지만, 이웃집에 앞서 내 보금자리 어여쁜 모습이 즐겁고 고맙기에 가만히 사진으로 한 장 두 장 옮겨 본다.


  생각해 보면, 나는 내 삶자락에서 고운 빛줄기 드리우는 꿈 같은 이야기를 그리고 싶은지 모른다. 내 마음으로 깊이 바라는 삶무늬가 날마다 하나둘 새록새록 내 앞에서 펼쳐지고, 내가 바라는 모습이 늘 펼쳐지니 언제나 사진기를 기쁘게 손에 쥐는지 모른다. 글을 쓸 때에도 이와 같지 않을까. 빨래를 하며 즐겁고, 빨래를 널며 즐거우며, 빨래를 개며 즐겁다. 다만, 때때로 골을 부리거나 고단하다며 빨래개기를 미적미적 며칠 미루곤 한다. ‘보송보송 잘 말린’여러 날치 옷가지가 방 한켠에 수북히 쌓이곤 한다.


  빨래를 바라보면, 처음 대야에 담글 때에도 빛깔이 곱고, 복복 비빌 적에도 빛깔이 고우며, 마당에 하나하나 널면서도 빛깔이 곱다고 느낀다. 그리고, 다 마른 빨래를 걷어 차곡차곡 개면서 옷임자에 따라 나누어 놓으면, 알록달록 빛깔이 새삼스레 곱구나 싶다. 마당 가득 널린 아이들 옷가지가 바람 따라 살랑살랑 춤춘다. (4345.10.25.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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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은 열두 달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176
엘사 베스코브 글.그림, 김상열 옮김 / 시공주니어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날마다 꿈을 꾸다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207] 엘사 베스코브, 《일 년은 열두 달》(시공주니어,2006)

 


  한 해는 열두 달입니다. 열두 달은 저마다 다릅니다. 첫달과 섣달은 다르고 칠월과 팔월은 다릅니다.


  한 달은 얼추 서른 날입니다. 서른 날은 저마다 다릅니다. 1일과 30일이 다르고, 15일과 16일이 다릅니다.


  하루는 스물네 시간입니다. 00시와 23시가 다르고, 12시와 13시가 다릅니다.


  한 시간은 육십 분입니다. 육십 분 또한 모두 다르고, 다 다른 육십 분은 다 다른 일 분으로 이루어지는데, 다 다른 일 분 또한 다 다른 육십 초가 모여요.


  그런데, 사람들은 어느 만큼 느끼며 살아가나요. 1초와 1분을 느끼며 살아가나요. 한 달과 한 해를 느끼며 살아가나요. 또는 한 사람이 나고 죽는다 하는 ‘온삶’을 느끼며 살아가나요. 지구 같은 별 하나가 나고 사라지는 ‘별삶’을 느끼며 살아가나요.


.. 너, 이번 주에 뭐 할 거야? 어휴! 날마다 할 일이 너무 많아. 월요일엔 누렁소와 얼룩소 젖을 짜고 화요일엔 우유에서 크림을 걷어 내고 수요일엔 버터를 만들고 목요일엔 남은 우유로 치즈를 만들고 금요일엔 온종일 빵을 굽고 토요일엔 시내에 나가 버터와 치즈를 팔고 일요일엔 빵에 버터와 치즈를 발라 먹지 ..  (5쪽)


  꽃이 피는 봄이라 하는데, 꽃은 봄에도 피고 여름에도 피며 가을에도 핍니다. 그리고, 겨울에까지 꽃이 피어요.


  꽃은 봄에도 피었다가 지고, 여름에도 피었다가 집니다. 꽃이 지면서 열매가 맺고 씨를 터뜨립니다. 꽃이 지고 나서 열매는 들새와 멧새도 먹고, 들짐승이랑 멧짐승도 먹습니다. 여기에 사람도 열매를 먹어요.


  능금이란 능금꽃이 지고 난 다음 맺는 열매입니다. 포도란 포도꽃이 지고 난 다음 맺는 열매입니다. 살구란 살구꽃이 지고 난 다음 맺는 열매입니다.


  감자도 그래요. 감자꽃이 지고 나서야 감자알이 맺어요. 오이꽃이 지고 나서야 오이알이 맺고, 호박꽃이 지고 나서야 호박알이 맺어요.


  무도 배추도 당근도 꽃이 핍니다. 부추도 마늘도 파도 꽃이 핍니다. 꽃이 피지 않는다는 무화가 한 가지가 있으나, 느티나무는 느티꽃을 피우고 은행나무는 은행꽃을 피워요. 참나무는 참꽃일까요? 대나무는 대꽃일까요?


  그러고 보면, 사람들도 꽃을 피우겠지요. 사람들도 서로 아끼고 보살피는 넋을 한 자리에 그러모아 사랑꽃을 피우고, 사랑열매를 맺으며, 사랑씨앗 남기겠지요.


  온누리 모든 아이는 사랑으로 태어납니다. 온누리 모든 아이는 사랑을 먹고 자랍니다. 온누리 모든 아이는 사랑을 누리며 무럭무럭 커서 어른이 됩니다. 어른이 된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누린 사랑을 밑바탕으로 다지면서 새로운 사랑을 새삼스럽게 펼칩니다.

 

 

 


.. 밖에는 해님이 웃음지으며 줄줄이 썰매 타고 씽씽 언덕을 내달리는 우리를 내려다보지. 동장군은 아직 물러가지 않았지만 머지않아 자작나무 가지에 움튼 새싹이 봄소식을 전해 줄 거야 ..  (8쪽)


  날마다 꿈을 꿉니다. 날마다 즐겁게 잠들고 즐겁게 일어나서 즐겁게 꿈을 꿉니다. 언제나 사랑을 합니다. 언제나 즐겁게 사랑하고 즐겁게 노래하며 즐겁게 밥을 먹습니다.


  길에서 스치는 할머니마다 우리 아이들한테 사탕 한 알을 쥐어 주더라도, 고맙게 받고 맛나게 먹는 밥이 되겠지요. 내가 아침저녁으로 아이들한테 차려서 내미는 밥상 또한 서로서로 맛나게 누리는 숨결이 되겠지요.


  바람을 마십니다. 아이들이 시골집에서 시골바람을 마십니다. 아이들과 시골집에서 살아가는 어버이인 나 또한 시골바람을 마십니다. 어버이인 내가 마시는 바람을 아이들이 나란히 마십니다. 어버이인 내가 누리는 햇살을 아이들이 함께 누립니다. 어버이인 내가 바라보는 곳을 아이들이 다 같이 바라봅니다.


  아이들 생각한다며 ‘돈을 더 많이 버는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돈을 더 많이 벌어 아이들 옷을 사 입히거나 밥을 해 먹이지는 못 합니다. 서로 얼굴을 보고, 함께 길을 거닐며, 같이 먹고잘 때에 비로소 삶이니까요.


  비싼 밥을 먹는다고 맛나지 않아요. 비싼 밥은 비싼 밥일 뿐이에요. 값싼 밥을 먹는대서 맛없지 않아요. 값싼 밥을 먹더라도, 어버이인 내 손길을 사랑스레 담으면 사랑스레 나눌 밥이 돼요. 비싼 옷을 입힌대서 아이들이 환하게 빛나지 않아요. 값싸거나 비싸거나 하는 금긋기 아닌, 사랑을 어떻게 얼마나 담아 옷 한 벌로 즐거운 삶을 이루는가 하는 대목을 살펴야지 싶어요.


  자가용 없이 두 다리로 숲길을 걷거나 들길을 거닐면서 삶을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마음껏 두 다리로 이리 달리고 저리 뛰면서 숲을 느끼고 들을 받아들입니다. 햇살은 아이들 등허리와 내 팔다리로 스며듭니다. 바람은 아이들 머리카락과 내 고무신으로 감겨듭니다.


  비행기를 타고 멀디먼 어느 나라로 다녀야 나들이가 되지 않아요. 아이들 손을 잡고 들길을 걸어도 나들이가 돼요. 세발자전거를 타는 아이가 마당을 빙빙 돌아도 자전거마실이 돼요. 꼭 전국순례나 세계여행을 할 때에 자전거마실이 되지는 않아요. 텃밭에서 풀을 뜯어서 먹고, 감나무 한 그루에서 감알을 얻어서 먹어요. 들에서 나는 벼를 반가운 쌀밥으로 나누어 먹고, 이웃 밭에서 자라는 마늘이며 무이며 배추이며 즐거이 나누어 먹어요.

 


.. 자작나무 부인님! 어두운 얼굴로 서 있지 말고 연둣빛 댕기를 늘어뜨려 보세요. 개암나무 꽃을 보세요. 샛노란 앵초도 보세요. 숲바람꽃도 활짝 피었지요. 공손히 인사하는 버드나무가 보이나요? 연둣빛 잎사귀들을 수천수만 개 펼쳐 보세요. 그러면 세상 모든 것이 기쁨에 넘쳐 반짝반짝 빛날 거예요 ..  (14쪽)


  햇살이 노래하는 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습니다. 바람이 춤추는 무늬를 바라보며 책을 읽습니다. 엘사 베스코브 님은 《일 년은 열두 달》(시공주니어,2006)이라는 그림책을 빚습니다. 스웨덴 봄날과 겨울날이 물씬 묻어나는 그림책입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아이들은 어머니와 아버지 일손을 거드느라 부산하고, 어머니와 아버지하고 숲에서 노느라 구슬땀을 흘립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아이들은 나무하고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아이들은 풀과 어깨동무하고, 꽃이랑 인사를 나눕니다.


  그림책을 펼치며 문득문득 ‘참 어여쁘네’ 하는 말이 절로 튀어나옵니다. 저마다 산뜻하게 웃고 상큼하게 노래합니다. 서로서로 시원스레 속삭이고 싱그러이 뛰놉니다.


.. 사과야, 빨간 사과야, 넌 힘든 일 한번 없었지? 저 높이 나뭇잎에 둘러싸여 빨갛게 익어 가며 즐겁기만 하잖아. 우리처럼 학교 다닐 필요도 없고. 하지만 오래가진 못할걸. 바닥으로 툭 떨어지거나 갑자기 바구니 속에 담기게 될지도 몰라. 그럼 친구들끼리 서로서로 부딪혀 시퍼런 멍이 들 거고. 사과야, 빨간 사과야, 내 말 듣고 있니? 어서 사뿐히 뛰어내려! 내가 널 받을 테니. 내 호주머니 속에 들어가 우리와 함께 학교에 가면 얼마나 좋니 ..  (22쪽)


  과학자가 될 아이들이 아닙니다. 연예인이나 가수나 배우가 될 아이들이 아닙니다. 축구선수나 야구선수가 될 아이들이 아닙니다. 9급공무원이나 5급공무원이 될 아이들이 아닙니다. 국회의원이나 군수가 될 아이들이 아닙니다. 과일장수나 옷장수가 될 아이들이 아닙니다.


  삶을 빛낼 아이들입니다. 삶을 사랑할 아이들입니다. 삶을 꿈꿀 아이들입니다. 삶을 노래할 아이들입니다.


  그리고, 우리 어른들은 누구나 ‘아이들’이었어요. 어제도 아이들이었고 오늘도 아이들은 우리 어른들입니다. 어른들 가슴에도 ‘어린이 넋’이 감돕니다. 삶을 빛낼 아이들처럼 삶을 빛낼 어른들입니다. 삶을 사랑할 아이들마냥 삶을 사랑할 어른들입니다. 삶을 꿈꿀 아이들하고 나란히 삶을 꿈꿀 어른들입니다. 삶을 노래할 아이들하고 오순도순 삶을 노래할 어른들입니다.


  아이는 어른을 바라봅니다. 어른은 아이를 바라봅니다. 아이는 어른하고 사랑을 주고받습니다. 어른은 아이하고 사랑을 주고받습니다. 새 하루가 찾아오고, 새 하루가 저뭅니다. 밤이 깊으며 별이 빛나고, 별이 가물가물 스러지며 햇살이 뿌옇게 밝는 새벽이 다가옵니다. (4345.10.25.나무.ㅎㄲㅅㄱ)

 


― 일 년은 열두 달 (엘사 베스코브 글·그림,김상열 옮김,시공주니어 펴냄,2006.12.12./8000원)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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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속 책읽기

 


  도서관은 어디나 무척 조용합니다. 아니, 조용하게 지내도록 하는 데가 도서관이라고 느낍니다. 흔히들, 책이 있는 터는 조용해야 한다고 여기고, 책을 읽는 사람은 조용히 있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아무래도, 다른 시끄러운 소리가 없어야 책 하나에 깊이 마음을 쏟을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나는 이제껏 도서관에서 책을 읽어 본 적 없습니다. 도서관에서 일한 적 있고, 도서관에 나들이를 한 적 있으나, 도서관에 갈 적마다 ‘일부러 만든 조용함’ 때문에 외려 몸이 움츠러들고, ‘만들어진 조용함’이 감도는 데에서는 졸음이 쏟아지곤 했습니다.


  책을 읽으려 한다면 자동차 시끄러이 오가는 길가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만나기로 한 누군가를 기다리며 복닥복닥 어수선한 찻집 앞에서도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전철이나 버스나 기차를 타고 움직이면서도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마당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조용해야 책을 읽기에 알맞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억지로 조용한 터를 만든대서 책을 잘 읽을 만하리라 느끼지 않아요. 책을 읽을 만한 데는 ‘사람이 살아가는 터’라고 느껴요. 곧, 사람이 사람다운 꿈을 키우거나 사랑을 북돋울 수 있는 데가 비로소 책을 손에 쥐어 즐겁게 삶을 누릴 만하다고 느껴요.


  아이들과 숲마실을 합니다. 작은아이는 곯아떨어집니다. 작은아이 곁에 앉아 시집 한 권 읽습니다. 시집을 다 읽고는 나도 작은아이 곁에 눕습니다. 큰아이는 숲속 이곳저곳 어머니와 함께 돌아다닙니다. 이제 작은아이 일어나고 다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모두들 숲길을 걸어 천천히 집으로 갑니다. 문득 멧자락을 올려다봅니다. 하늘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가을숲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습니다. 가을숲에서 풍기는 냄새를 맡습니다. 가을숲에서 베푸는 빛깔을 봅니다.


  사람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고 이야기하는데, 나는 좀 다르게 느낍니다. 사람은 숲에서 태어나 숲에서 살아간다고 느낍니다. 죽으면 숲으로 돌아가는가? 스스로 죽음을 생각한다면 죽음을 맞이하면서 숲으로 돌아간달 수 있겠지만, 숲에서 태어난 사람은 숲으로 돌아간다고 느끼지 않아요. 사람은 스스로 숲이고, 숲은 곧 사람입니다. 새로 태어난 사람은 새로운 숲결 하나요, 새로운 숲결이 목숨을 다해 스러진다면, 가만히 몸뚱이가 녹아들면서 다른 새 숲결로 거듭나겠지요. 나무 한 그루 이천 해를 살며 스스로 숲이 되었듯, 스스로 숲이 되던 나무가 스러지며 스르르 숲결로 녹아들듯, 사람 또한 숲에서 태어나고 살아가며 언제나 숲넋을 건사하는구나 싶어요.


  숲을 읽으며 삶을 읽고, 숲에서 삶을 읽으며 책을 빚습니다.


  숲속에 깃들어 ‘나무로 빚은 종이책’을 펼쳐 읽습니다. 숲속에서 ‘나무책(나무가 종이로 다시 태어났기에)’을 헤아리며 내 숨결을 돌아봅니다. 내 둘레에서 온갖 벌레가 꼬물락거립니다. 내 곁에서 온갖 새가 지저귑니다. 내 언저리에서 아이들이 뒹굴며 놉니다. 나를 둘러싼 풀과 흙과 나무와 돌이 가을볕을 듬뿍 받으면서 싱그럽고 푸른 숨결이 되어 내 마음속으로 스며듭니다. 숲속에 깃들어 책을 읽는 동안 내 가슴속에서 자라는 숲넋 한 자락 곱다시 돌봅니다. (4345.10.25.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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