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량한 말 바로잡기
 (1580) 발견

 

세월이 한참 흘러 이제 그것이 나의 흥미를 끌고 있다. 바로 내가 흙을 밟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후부터다
《카렐 차페크/홍유선 옮김-원예가의 열두 달》(맑은소리,2002) 167쪽

 

  “세월(歲月)이 한참 흘러”는 그대로 두어도 됩니다. 그런데 ‘세월’이란 무엇일까요. “흐르는 나날”을 가리키는 한자말인데, 이 낱말을 꼭 써야 할까 한 번쯤 짚을 수 있기를 빌어요. 흐르는 날이 한참 흐른다고 말하면 어딘가 얄궂거든요. 그래서 “한참 여러 날이 흘러”라든지 “한참 지나고 나서”라든지 “기나긴 나날이 흘러”처럼 새롭게 쓰면 한결 나으리라 느껴요.


  “나의 흥미(興味)를 끌고 있다”는 “나한테 재미있다”나 “내게 재미를 불러일으킨다”나 “내 재미를 끈다”로 손봅니다. “밟고 있다”는 “밟는다”로 바로잡고, ‘사실(事實)’은 ‘줄’이나 ‘대목’으로 다듬으며, ‘후(後)’는 ‘뒤’나 ‘다음’으로 다듬습니다.

  ‘발견(發見)’은 “미처 찾아내지 못하였거나 아직 알려지지 아니한 사물이나 현상, 사실 따위를 찾아냄”을 뜻하는 한자말입니다. 그러니까, 한국말 ‘찾아냄’을 한자로 옮겨적으면 ‘發見’이 되는 셈입니다.

 

 흙을 밟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후부터다
→ 흙을 밟는 줄 알아채고 나서부터다
→ 흙을 밟구나 하고 느낀 뒤부터다
→ 흙을 밟는다고 깨달은 뒤부터다
→ 흙을 밟으며 사는 줄 안 다음부터다

 

  사람들이 여러모로 쓰기에 한자말 ‘발견’이 이래저래 쓰인다고 할 만합니다. 사람들이 낱말뜻을 옳게 깨닫거나 살핀다면, 한자말 ‘발견’은 어느 곳에서 쓸 일이 없으리라 봅니다. 왜냐하면, ‘발견’은 ‘찾아냄’을 가리킬 뿐, 딱히 다른 뜻이나 깊은 뜻이 없어요.


  이를테면, 국어사전에 “유적이 고고학자들에게 많이 발견되고 있다” 같은 보기글이 실리는데, 이 보기글은 글짜임부터 엉성합니다. 한국 말투라 할 수 없는 보기글입니다. “유적이 많이 나온다”라고는 적을 수 있지만, “유적이 고고학자들에게 많이 나온다”라고는 적을 수 없어요. 이 보기글에서 “발견되고 있다”는 “나온다”를 가리키거든요. 그래서 글짜임을 통째로 바꾸어 “유적을 고고학자들이 많이 찾아낸다”나 “유적을 고고학자들이 많이 캐낸다”처럼 고쳐써야 알맞아요.

 

 수많은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고 있다
→ 수많은 새로운 사실이 드러난다
→ 수많은 새로운 이야기가 알려진다
→ 수많은 새로운 모습이 밝혀진다

 

  이 보기글도 국어사전에 실리는데, 여러모로 엉성합니다. ‘수많은 새로운’처럼 적으니 알맞지 않아요. “새로운 이야기가 수없이 알려진다”라든지 “새로운 모습이 수없이 밝혀진다”처럼 더 손질해야겠지요.


  낱말은 낱말대로 알맞고 바르게 적어야 아름답습니다. 말투는 말투대로 가다듬고 추슬러야 어여쁩니다. 어떤 토박이말을 찾거나 사랑하자는 소리가 아니에요. 한국말을 한국말답게 바라보고 느끼며 깨닫자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새로 발견한 법칙” 같은 보기글은 “새로 알아낸 법칙”이나 “새로 찾은 법칙”이나 “새로 찾아낸 법칙”이나 “새로 깨달은 법칙”이나 “새로 캐낸 법칙”이나 “새로 밝힌 법칙”처럼 손볼 만해요. 아니, 이렇게 손볼 때에 비로소 빛이 납니다. 말빛이 환하게 퍼져요.


  생각해 보셔요. 처음부터 ‘찾아내다-알아내다-깨닫다-찾다-알다-밝히다-캐내다-캐다’ 같은 낱말로 나타낼 때에 환하게 빛날 말투인데, 한자말 ‘발견’이 엉뚱하게 끼어든 셈 아닐까 싶어요.

 

 자아를 발견하다
→ 나를 찾다
→ 나를 보다
→ 참나를 깨닫다
→ 참된 나를 알다

 

  ‘자아(自我)’라 하는 한자말도 헤아려 봅니다. 이러한 한자말을 꼭 쓰려고 한다면 쓸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한자말이든 저러한 한자말이든 굳이 안 쓰려고 한다면 안 쓸 수 있어요. 아니, 쓸 일이 없어요. ‘자아’라는 한자말로 어떤 모습 어떤 이야기 어떤 생각을 나타내고 싶은가를 살필 일이에요. 스스로 무엇을 보고 싶은가 살펴야 해요. 스스로 무엇을 알려 하는지 깨달아야 해요. 스스로 무엇을 느끼고 싶은지 둘러보아야 해요.


  참다운 나를 찾으며 참다운 말을 찾아요. 참다운 나를 생각하며 참다운 삶을 생각해요. 참답게 사랑할 길을 걸으며, 말도 넋도 삶도 아름다이 사랑할 수 있어요. (4345.11.4.해.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기나긴 나날이 흘러 이제 나도 그것이 재미있다. 바로 내가 흙을 밟으며 사는 줄 깨달은 뒤부터이다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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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개구리 책읽기

 


  이제 개구리 노랫소리 안 들리니 개구리들 모두 겨울잠 들었나 싶을 무렵, 마당가 샘터에서 풀개구리 한 마리를 보았다. 시월 첫머리였나. 그러고서 보름쯤 지나 서재도서관 풀숲에서 폴짝 뛰어올라 내 손가락에 사뿐히 올라탄 풀개구리 한 마리를 보았다. 다시 보름이 지난 십일월 첫머리, 아직 다른 풀개구리가 나한테 찾아오지는 않는다. 나는 다른 풀개구리를 더 만나지 못하지만, 어딘가 풀숲에서 조용조용 숨죽이며 먹이를 찾고 짝꿍을 찾으며 가을볕을 누리는 풀개구리 있을는지 모른다.


  이 작고 가녀린 몸으로 너는 참 예쁘게 살아가는구나. 그렇지만, 사람 몸뚱이로 너를 바라보면 네가 몹시 작지만, 네 눈길로 개미를 바라보면 개미가 더없이 작을 테지. 지구별이라는 마음결로 나 한 사람을 바라본다면 내 몸뚱이 하나란 그지없이 작을 테고.


  밤하늘 가득 빛나는 별을 바라볼 때면, 지구별 하나란 얼마나 작으며 예쁘장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숫자를 가늠할 수 없도록 많은 별들은 저마다 어떤 삶·꿈·사랑을 노래하며 하루하루를 누릴까 궁금하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별들이 온누리를 이루고, 이 가운데 지구별이 하나 있듯, 내 몸뚱이 또한 어마어마하게 많은 세포로 ‘사람누리’를 이루면서, 이 가운데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고 손톱 하나 자라며, 조그마한 풀개구리 하나 살며시 길동무처럼 찾아든다고 할 만할까.


  생각을 가다듬어 내 어린 날을 되새긴다. 인천이라 하는 도시에서 나고 자랐지만, 동네에서 땅강아지를 쉽게 만났고, 아파트 꽃밭이나 동네 텃밭이나 바닷가 풀숲 언저리에서 언제나 여러 개구리를 보았다. 주먹만 한 흙개구리를 보며 네가 잡히나 내가 잡나 하고 숨바꼭질 즐기곤 했다. 2012년 오늘날에도 인천이라 하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은 개구리를 만날 수 있을까. 이 나라 도시 가운데 쉽게 개구리하고 동무 삼으며 놀 만한 터전이나 보금자리가 있을까. 이 나라 시골 가운데에는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개구리랑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면서 하루를 누릴까. 가을이 저물고 겨울이 찾아든 다음, 천천히 봄이 스며들면 시나브로 논개구리 멧개구리 한꺼번에 깨어나 새삼스레 노래잔치를 베풀어 주겠지. 고즈넉하고 조용한 가을이 흐른다. (4345.11.4.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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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쪽지 2012.10.16.
 : 졸린 아이와 풀개구리

 


- 졸린 큰아이가 잠들지 않는다. 졸린 작은아이는 새근새근 잠들도록 재웠다. 이 아이랑 무얼 하며 놀아야 그예 까무룩 잠들까 생각한다. 집에 쌓이는 책을 서재도서관에 갖다 놓으며 자전거를 태울까 싶다.

 

- 큰아이를 불러 자전거에 태운다. 큰아이는 예쁜 인형을 갖고 나온다. “(인형) 침대 갖고 가도 돼요?” “네가 갖고 가고 싶으면 갖고 가면 되지.” 큰아이는 자전거수레에 앉아 인형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벼베기를 마치고 텅 비는 논이 차츰 늘어난다. 논과 논 사이를 달린다. 서재도서관 풀숲에서 폴짝 뛴 개구리 한 마리 ‘자전거 손잡이를 쥔 내 손가락’에 사뿐 내려앉는다. 어라, 너 나한테 무슨 볼일 있니? 너도 슬슬 겨울잠을 자러 땅 파고 곱다시 들어가야 하지 않겠니? 날이 쌀쌀해지면 네 밥거리가 하나둘 사라지지 않겠니?

 

- 마을을 휘 돈다. 큰아이가 아버지더러 왜 면내로 안 가고 도느냐고 투정을 한다. 면내로 달리면 가게에 들를 테고, 가게에 들르면 까까 하나 살 테니까, 이래저래 골 내는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자전거 모는 아버지는 못 들은 척 시골길만 천천히 달린다. 어느새 큰아이는 노래를 멈추고는 눈이 슬슬 감긴다. 고개를 이리저리 까딱까딱 하다가 몸을 옆으로 누인다. 그래, 인형도 침대에 누워 코 자고, 너도 담요 덮고 가을볕 받으며 시골 들판에서 코 자렴. 씩씩하게 자고 일어나서 또 씩씩하게 놀고, 다시금 즐겁게 잠들어 새삼스레 즐겁게 일어나서 놀렴.

 

(최종규 . 2012 - 자전거와 함께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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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을 떠나 밖에서 하루만 지내도

 


  집을 떠나 밖에서 하루만 지내도 시골집으로 돌아오면 여러 날 고단한 기운을 씻어야 합니다. 왜 이렇게 바깥마실이 고단할까 하고 헤아리고 보면, 시골집에서 아이들과 부대끼던 사랑이 없는 탓 아닌가 싶습니다. 고작 하루라 하더라도 아이들 삶과 사랑과 꿈을 내 마음과 눈과 몸에서 잊은 채 바깥일에 따라 움직이니, 밖에서는 으레 고단하거나 지치지 싶어요.


  집을 떠나 밖에서 하루만 지내더라도 ‘아이들 찍는 사진’이 하루치 없습니다. 날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이들 뒹구는 모습을 꾸준하게 사진으로 담다 보니, 고작 하루라 하더라도, 아니 한 시간이라 하더라도 아이들을 지켜보지 않거나 아이들이랑 부대끼지 않으면 몹시 허전하거나 서운합니다. 어버이 없으면 아이들이 밥을 굶거나 못 사는 셈 아니라, 아이들 없으면 어버이로서 허전하고 쓸쓸하달까요.


  아이들을 예쁘게 바라보며 내 마음 예쁘게 다스립니다. 어버이로서 예쁘게 살아가며 아이들은 어버이랑 뒹굴 적에 예쁜 꿈을 받아먹습니다. (4345.11.4.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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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보기
― 흔들리는 사진에

 


  애써 찍은 사진이 흔들리면 어딘가 서운하다고 여깁니다. 흔들린 사진이라 해서 값어치가 떨어질 까닭은 없지만, 나는 흔들린 사진을 바라지 않습니다. 어두운 곳에서 사진을 곧잘 찍으면서도, 또 집에서 저녁나절 아이들 뒹구는 모습을 으레 찍으면서도, 셔터값 1/15초나 1/8초나 1/4초로도 안 흔들리는 사진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가만히 따지면, 1/4초마저도 안 되는 1/0.3초나 1/0.08초로 찍으면서 안 흔들리기란 몹시 어렵다 할 만합니다. 이렇게 사진을 찍자면 세발이를 받칠 만합니다. 그렇지만, 이리 놀고 저리 움직이는 아이들을 찍자며 집안에서 세발이를 받치고 움직일 수 없어요. 내가 사진을 즐겨찍는 곳인 헌책방에서 세발이 대고 사진을 찍기도 매우 까다롭습니다.


  나는 내 몸을 세발이로 삼습니다. 숨을 훅 들이마시고는 한동안 숨을 멈춥니다. 마시지도 내뱉지도 않는 채 퍽 오래 기다립니다. 손끝 떨림 하나 없도록 몸을 다스리고는 차아알칵 하고 한 장 찍습니다. 벽에 기대어 찍기도 하지만 벽 없는 데에서 찍기도 하고, 바닥에 쪼그려앉거나 거의 엎드리다시피 찍기도 합니다.


  안 흔들리는 사진을 바라면 참말 안 흔들리는 채 사진을 얻는구나 싶기도 합니다. 한편, 아주 가끔 그런데, 흔들린 사진 가운데 ‘어, 이 사진 훨씬 마음에 드네.’ 싶기도 합니다. 왜 ‘흔들린 사진 하나가 더 마음에 드는’지는 잘 모릅니다. 다만, ‘사진으로 찍히기로는 흔들린 사진’이지만, 이 사진을 찍던 때 내 마음이 아주 너그럽거나 따사롭거나 즐겁거나 예쁘기에, ‘흔들리건 안 흔들리건’ 내 마음이 촉촉하게 젖으며 반갑구나 하고 여기지 싶어요. 흔들리는 사진에 내 마음이 사로잡힌달까요. (4345.11.4.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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