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진을 찍고 싶어요 - 전 세계 아이들과 함께한 사진과 글쓰기 교육
웬디 이월드.알렉산드라 라이트풋 지음, 정경열 옮김 / 포토넷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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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에 눈뜨도록 이끄는 사진과 글
 [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40] 웬디 이월드·알렉산드라 라이트풋, 《내 사진을 찍고 싶어요》(포토넷,2012)

 


- 책이름 : 내 사진을 찍고 싶어요
- 글 : 웬디 이월드, 알렉산드라 라이트풋
- 옮긴이 : 정경열
- 펴낸곳 : 포토넷 (2012.11.1.)
- 책값 : 16000원

 


  (1) 사진을 즐기도록 가르치다


  사진을 어떻게 찍어야 한다고 가르칠 수 없습니다. 가르친대서 찍을 수는 없는 사진입니다. 스스로 무엇을 좋아하거나 사랑하거나 아끼는가를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들은 다음, 저마다 좋아하거나 사랑하거나 아끼는 무언가를 사진으로 옮겨 오래오래 즐길 수 있다고 들려줄 수 있습니다.


  사진찍기는 가르치지 못합니다. 사람들마다 삶이 어떠한가를 곰곰이 돌아보면서 저마다 다르게 누리는 삶을 ‘다 똑같은 기계’를 알맞게 써서 저마다 다른 눈빛과 눈길로 빚을 수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사진학교나 사진수업이나 사진강의는 모두 덧없다고 느낍니다. 두말 할 것 없이, 사진은 가르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 곳에서 사진학교가 서고 사진수업이 열리며 사진강의가 이루어져요. 앞으로도 숱한 사진학교가 이어질 테고, 사진수업이 있을 테며, 사진강의가 퍼지겠지요. 스승이나 길잡이가 되는 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사진을 가르치고 싶을까요. 어떤 생각으로 사진을 가르치려 할까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사진수업을 한다 할 적에, 남아프리카에서 살아가는 아이나 어른보다 ‘사진 스승’이나 ‘사진 길잡이’가 남아프리카 삶자락을 사진으로 더 잘 찍거나 더 깊게 찍거나 더 넓게 찍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사진을 배우고 한국으로 돌아온 분이 ‘한국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여느 사람’보다 한국사람 삶자락을 사진으로 더 잘 찍거나 더 깊게 찍거나 더 넓게 찍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사진학교·사진수업·사진강의가 있다면, 사진기 다루는 솜씨와 재주는 가르칠 만하리라 느낍니다. 그렇지만, 사진을 찍는 마음이나 생각까지 가르칠 만하지는 않다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사진을 찍는 마음이건 사진을 찍으려는 생각이건, 사진기를 쥔 사람 스스로 불러일으켜야 하는 마음이요 생각이거든요.

 

 


.. 부모나 교사들은 아이가 유아기를 벗어나면 그들에게 재미있는 시각적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유치원 기간이 지나면 아이들과 함께 시각적 놀이를 하는 것도 그만둔다 … 사진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이미지를 관찰하는 과정으로 시작해, 그 바탕에 깔려 있는 배경을 이해하는 것으로 아이들을 이끌어 간다 ..  (8, 27쪽)


  사진을 어떻게 읽어야 한다고 가르칠 수 없습니다. 사진은 이렇게 찍어야 한다는 법이 없고, 사진은 이렇게 읽어야 한다는 법이 없습니다. 사진은 저렇게 찍어야 한다고 말할 수 없으며, 사진은 저렇게 읽어야 옳거나 바르거나 알맞거나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진찍기도 못 가르치지만, 사진읽기도 못 가르칩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나는 사진을 이렇게 찍어요’ 하는 말이랑 ‘나는 사진을 이렇게 읽어요’ 하는 말 두 가지입니다. 이밖에 달리 할 말이란 없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칠 수 없어요. 어떻게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칠 수 없어요. 스스로 삶을 깨닫고 느끼면서 아낄 뿐입니다. 스스로 사랑을 마주하고 보듬으며 북돋울 뿐입니다.


  젓가락을 쥐도록 가르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밥을 먹으라고 가르칠 수 없어요. 밥을 먹는 맛이 어떻다고 가르칠 수 없어요. 어느 어버이라도 숟가락질이랑 젓가락질을 가르치기만 할 뿐, 수저로 밥을 떠서 먹기까지는 아이 스스로 할 몫입니다. 떠서 먹은 밥을 맛보고 속에서 삭혀 기운을 내는 일 또한 아이 스스로 할 몫이에요.


  저 파랗게 눈부신 하늘을 올려다보라며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는 있어요. 그렇지만, 하늘이 얼마나 파랗고 얼마나 눈부신가를 느끼도록 할 수는 없어요. 스스로 가슴에서 우러나와야 하늘을 느껴요.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별을 시골에서 흐드러지게 보는 동안, 이 별잔치가 어떻게 가슴으로 스며드는가 하는 대목을 가르칠 수 없어요. 스스로 느껴야 느끼고, 스스로 못 느끼면 못 느껴요.


  골짜기 시원한 물을 마시는 맛을 가르치거나 느끼도록 할 수 없어요. 흙집에서 지내는 느낌과 모내기하는 느낌과 낫으로 벼포기 베는 느낌을 가르칠 수 없어요. 스스로 느끼고 스스로 읽으며 스스로 살아갈 뿐이에요.


  손수 매화꽃을 보고, 손수 매화열매를 따서, 손수 매화열매를 먹어야 비로소 매화열매가 어떤 맛이고, 오얏과 살구는 저마다 어떻게 다른 맛인가를 헤아려요. 어떤 감별사나 전문가가 먼저 맛을 보고 알려주지 못해요. 내 혀가 느끼고 내 가슴이 느껴요.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으로 만져요.

 


.. 관점을 이해하는 또 다른 방법은 다른 사람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꼬마 아이에게는 어떻게 보일까? NBA 농구선수에게는? … 나는 아이들이 각자 자기의 첫 번째 사진을 구성하거나 현상하고 인화하는 모습을 볼 때, 나도 아이들처럼 사진을 처음으로 배우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 외부에서 보기에 콘크리트로 지어진 낡고 오래된 주택단지는 아이들의 사진 속에선 활기차고 생동감이 있었다. 이 사진을 찍은 아이들 역시 내가 함께 한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처럼 다른 이들이 미처 보지 못한 의사소통에 대한 가치를 꿰뚫고 있었다 ..  (85, 100, 168쪽)


  사진을 어떻게 즐겨야 한다고 가르칠 수 없습니다. 사진찍기도 사진읽기도 가르칠 수 없듯, 사진 즐기는 삶도 가르칠 수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할 수 있어요. 나 스스로 사진을 어떻게 찍고 어떻게 읽으며 어떻게 즐기는가 하는 몸가짐과 매무새를 보여줄 수 있어요. 나는 나대로 이렇게 사진을 즐긴다고 스스럼없이 보여주면서, 다 다른 우리들은 다 다른 삶에 맞추어 다 다른 기쁨과 웃음으로 사진을 맞아들이면 된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삶을 어떻게 즐기라고 가르칠 수 없거든요. 사랑을 어떻게 즐기라고 가르칠 수 없거든요.


  자전거를 어떻게 즐기라고 가르칠 수도 없어요. 헤엄치기를 어떻게 즐기라고 가르칠 수도 없는걸요. 오솔길이든 숲길이든 바닷길이든, 스스로 즐길 뿐이에요. 이렇게 즐겨야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어요. 저렇게 보아야 아름다움을 본다고 말할 수 없어요.


  삶으로 녹이면서 즐기는 사진이에요. 삶으로 녹이면서 즐겁게 부르는 노래요, 즐겁게 추는 춤이며, 즐겁게 쓰는 글이에요.


  글쓰기를 가르치는 사람이란 없어요. 누군가 글쓰기를 가르친다면 거짓말쟁이예요. 글이란 어느 누구라도 스스로 일구며 즐기는 삶을 담는 글인데, 다 다른 사람들 다 다른 삶을 어떤 틀에 맞추어 가르치겠어요. ‘나는 글을 이렇게 쓴다’ 하는 대목만 보여줄 뿐이에요. 누군가 누구한테 글쓰기를 가르친다면 ‘글 울타리에 가두는’ 꼴이에요. 그림을 이렇게 그리라는 둥 저렇게 그리라는 둥 말하지 못하잖아요. 스스로 우러나오는 마음결에 따라 스스로 손을 움직이고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리는 그림이에요. 스스로 우러나오는 마음결을 살피고, 스스로 손을 놀려 사진기를 만지며, 스스로 눈으로 돌아보면서 한 장 찍는 사진이에요.


  다시 말하자면, 사진찍기나 사진읽기를 가르치지 못하고 사진 즐기는 삶도 가르치지 못하지만, 사진을 찍고 읽으며 즐기는 내 삶을 맑은 눈빛으로 기쁘게 보여줄 때에 비로소 ‘사진교육’을 한달 수 있어요. ‘나를 따르라’가 아니라 ‘나를 보라’예요. ‘나처럼 하라’가 아니라 ‘내 마음속 빛줄기를 보라’예요. 나한테도 있고 너한테도 있는 빛줄기예요. 내 마음속 빛줄기도 예쁘고 네 마음속 빛줄기도 예뻐요. 저마다 이녁 마음속 빛줄기를 볼 수 있으면 돼요. ‘나를 보라’란 저마다 이녁 스스로를 보라는 뜻이에요.


  아무런 틀이 없어요. 사진교육뿐 아니라 여느 학교교육에서도 이와 같아요. 교과서 진도를 나가는 일이 교육일 수 없어요. 교과서를 곁에 놓으면서 삶을 읽고 삶을 돌아보며 삶을 느껴 스스로 삶을 일구도록 이끄는 일일 때에 비로소 교육이에요. 어떠한 틀도 세우지 않으면서 ‘사진과 함께 삶을 즐기는 꿈을 스스로 누리는 사람이 이야기꽃을 피울’ 때에 교육 아닌 교육이 이루어지고, 사진교육이 시나브로 꽃을 피운다고 생각해요.

 


  (2) 사진과 함께 글을 쓰다


  웬디 이월드 님과 알렉산드라 라이트풋 님이 엮은 사진책 《내 사진을 찍고 싶어요》(포토넷,2012)를 읽습니다. 이 사진책은 사진학교나 사진수업이나 사진강의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여러 나라 여러 마을 여러 아이들과 ‘사진수업’을 꾸렸다고 여길 수 있을 테지만, 웬디 이월드 님과 알렉산드라 라이트풋 님이 한 일은 ‘사진수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진기를 징검다리로 삼으면서 아이들 스스로 고향마을 삶자락을 가슴으로 느끼도록 돕는 이웃’ 노릇을 했어요.


  겉보기로는 사진수업일는지 모르나 속을 살피면 수업이 아니에요. 스승이나 교사나 길잡이로 아이들 앞에 서지 않아요. 이웃이나 동무로 아이들 곁에 있으면서 함께 길을 걸어요.


  함께 살아가는 이웃인걸요. 서로 사랑하는 동무인걸요.


  낯선 사람을 함부로 사진으로 담지 못해요. 아무것도 모른 채 사진기 단추를 눌러 보았자 ‘그럴듯한 그림’이 나올 뿐, ‘이야기 서린 사진’은 빚지 못해요.


  사진을 찍는다 할 때에는 ‘이야기를 엮는 사진’을 찍지 ‘벽에 큼지막하게 붙여서 예술이나 문화로 삼는 작품’을 찍지 않아요. 작품은 작품일 뿐이에요. 사진은 사진일 뿐이에요. 작품이면서 사진도 있을 테고, 사진이면서 작품도 있을 테지요. 그렇지만, 사진을 하는 마음은 사진을 할 뿐, 작품을 생각하지 않아요. 작품을 하는 이들도 작품을 할 뿐, 사진을 생각하지 않아요.


.. 아이들의 사진은 내 사진보다 더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나는 아이들이 나보다 그곳에 더 가까이 있다고 느꼈다 … 프랭크 삼촌을 사진 한 장으로 남기는 것은 사진을 찍은 사람이 프랭크 삼촌에게 얼마나 풍부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전달하지 못한다 … 지역사회는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디서 끝나는가? 그것을 서로 유지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이유 때문에 지역사회는 사진으로 찍기 힘든 주제이다. 더구나 지역사회는 우리가 한번 잠깐 보거나 자주 보아도 한눈에 다 볼 수 없을 만큼 그 범위가 넓다 ..  (11, 22, 64쪽)

 


  《내 사진을 찍고 싶어요》를 읽다 보면, 웬디 이월드 님과 알렉산드라 라이트풋 님 두 분이 아이들한테 글쓰기를 자주 시킵니다. 언제나 글을 쓰도록 이끕니다. 사진기를 건네서 사진을 찍으라고 말하기 앞서, 사진으로 찍을 ‘이야기’를 차근차근 ‘생각’하고 ‘살펴보’면서 ‘글’로 밝히도록 돕습니다.


  22쪽에 나오는 대목처럼 ‘프랭크 삼촌’을 그럴듯한 작품처럼 사진 한 장을 찍는대서 프랭크 삼촌을 말할 수 없어요. 그럴듯한 작품처럼 사진 한 장 찍은 아이가 프랭크 삼촌을 ‘안다’거나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할 수도 없어요.


  사진을 찍기 앞서 ‘가까이’ 지내야 해요. ‘함께 살아가’며 어우러져야 해요. ‘내 삶으로 녹아드는’ 이야기일 때에 비로소 사진으로 찍을 수 있어요.


  내 보금자리 아닌 곳으로 나들이를 가서 여행사진을 찍을 수 있겠지요. 여행사진이 참으로 많잖아요. 여행사진 찍는 일은 잘못이 아니에요. 여행을 떠났으면 즐거이 여행사진을 찍으면 돼요.


  그러나, 여행사진은 여행사진이지, 내가 여행한 곳을 담은 ‘마을사진’이 되지 못해요. 얼핏 머무르고 스치는 사진을 두고 ‘삶’을 담았다고 할 수도 없으며, ‘이야기’가 감도는 사진이라고도 할 수 없어요. ‘여행하는 내 느낌’만 알뜰히 담는 사진일 뿐이에요. 곧, ‘내가 보는 내 삶’만 담는 사진이 여행사진이에요. 여행사진이 뜻없거나 나쁘다는 소리가 아니라, 나 스스로 내 삶을 돌아보고 싶을 때에는 여행을 다니면서 여행사진을 찍으면 돼요. 내 삶이 어디로 흐르고 내가 살아가는 보람이나 뜻을 돌아보고 싶을 때에는 여행을 다니며 여행사진을 찍을 노릇이에요. 그러니까, 여행사진을 들여다보면서 ‘마을 이야기’를 찾으려 하는 일은 어리석어요. 여행사진을 들여다볼 때에는, 여행하는 사람이 어떤 삶 어떤 넋 어떤 마음 어떤 꿈인가 하는 대목을 읽어야 해요.


  사진책 《내 사진을 찍고 싶어요》는 구경하면서 스쳐 지나가는 사진을 말하거나 다루지 않아요. 어느 한 나라나 어느 한 마을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아이들이 저희 고향나라나 고향마을을 찬찬히 살피고 두루 헤아리면서 꿈과 사랑과 삶을 저희 깜냥껏 아리땁게 일구도록 돕는 사진을 말하거나 다뤄요. 그래서, 사진을 찍기 앞서 글을 써요. 사진을 찍으면서 글을 써요.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하고 말을 섞어요.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하고 같은 마을에서 살아가며 얼크러져요.

 


.. 나는 흥미로운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카메라로 그냥 찍는 것보다 더 많은 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일러주었다. 사진 찍을 대상에 대해 먼저 글을 써 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미지들의 목록을 만들어 보는 것, 이것이 바로 아이들이 밖에 나가서 사진을 찍기 전에 관련된 모든 것을 정리하게끔 도와주는 방법이다 … 사진이나 글을 통해 자기 삶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도록 아이들을 격려할 때, 교사들은 아이들이 자신들에게 가장 중요한 대상임을 깨닫는다 … “아이들은 이것이 단지 연습문제 74번이 아니라 ‘내 자신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깨닫습니다.” ..  (15, 116, 118쪽)


  사진관 일꾼이 사진을 찍을 때에는 작품을 찍을 뿐입니다. 사진관 일꾼이 작품을 찍는대서 잘못일 수 없어요. 우리가 사진관을 찾아갈 때에는 ‘사진’을 찍는다기보다 ‘작품’을 찍거든요. 그럴듯해 보이는 작품을 찍으려고 사진관을 찾아가잖아요.


  작품 아닌 ‘사진’을 찍고 싶을 때에는 언제 어디에서라도 사진기를 손에 쥐고 찰칵 찍어요. 손전화를 꺼내어 찍어도 되겠지요. 참말 사진일 때에는 집에서든 길에서든 마을에서든 버스에서든 스스럼없이 찍어요. 사진이기 때문에 그래요.


  사진을 찍으니까 손을 가위처럼 벌리고 찍기도 해요. 서로 우스꽝스레 보이도록 찍기도 해요. 얌전을 떨며 찍기도 해요. 사진이거든요. 살아가는 결 그대로 찍어요.


  내 하루를 글로 담는다 할 적에도 스스럼없이 글을 써요. 내 마음껏 꾸미고 내 마음껏 옷을 입혀요. 내 마음껏 다듬고 내 마음껏 손질하지요.


  내 하루를 노래로 들려주거나 춤으로 보여줄 때에는 어떠할까요. 아주 마땅한 노릇일 텐데, 내 모든 생각과 꿈과 사랑이 흐드러지도록 땀을 흘리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겠지요.

 


.. 비샤라는 인도의 한 시골마을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 아이들은 찍고 싶어 하는 것이 없었다. 그들은 자기 삶이 사진으로 기억될 만큼 가치 있다고 느끼지 않았다 … 아이들에게 값비싼 카메라를 줄 필요는 없다. 간단한 조작만으로도 찍을 수 있는 작은 디지털 카메라 정도면 적당하다. 아이들이 정작 관심을 갖는 것은 ‘촬영’이다. 아이들은 카메라를 받자마자 찍기부터 한다. 그리고 사진을 확인하면서 좋아한다 … 우리는 이 아이들이 자기 삶에서 병 그 자체를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매우 놀랐다. 그들은 아이들일 뿐이었고,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다 ..  (38, 108, 166쪽)


  아이들은 ‘내 사진을 찍고’ 싶어 합니다. 아이들은 ‘내 놀이를 즐기고’ 싶어 합니다. 아이들은 다른 사람 눈치를 볼 일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다른 사람 눈치를 살피며 자라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다 다른 아이들은 다 다른 넋을 살찌우며 살아가야 합니다. 다 다른 아이들은 다 다른 삶터에서 다 다른 사랑을 꽃피우며 꿈을 일구어야 합니다.


  틀에 맞춘 제도권교육으로는 아이들을 가르치지 못해요. 틀에 박힌 제도권교육으로는 아이들을 몽땅 죽이거나 노예로 길들일 뿐이에요.


  아이들한테 연필과 사진기를 나누어 주는 뜻을 생각해 봐요. 아이들이 연필을 들어 어떤 글을 쓰기를 바라나요. 아이들이 사진기를 쥐어 어떤 사진을 찍기를 바라나요. 아이들이 노벨문학상 탈 만한 글을 쓰면 기쁘겠어요? 아이들이 퓰리처상 탈 만한 사진을 찍으면 기쁘겠어요?


  아이들에 앞서 어른인 내 자리에서 생각해 봐요. 어른인 나는 신춘문예에 뽑힐 만한 글을 쓰면 기쁘겠어요? 무슨무슨 사진대회에서 상 탈 만한 사진을 찍으면 기쁘겠어요?

 


.. 아이들은 필름을 현상하고 인화하는 법을 배우면서 어른들이 잘 하지 못하는 복잡한 과정에 정통할 수 있다. 그들은 개인적인 능력과 관점을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이끌어 낸다 … 아이들의 표현을 가능케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아이들 글에서 불가피하게 빚어진 실수를 편집하면서 잃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얻는 것은 무엇일까? … 어떤 출판사도, 심지어 진보적인 토론지조차도 아이들 사진을 기사화하지 않으려 했다. 물론 몇몇은 얼마간 관심을 가졌지만 말이다. 나는 비록 사진들이 제때에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있더라도(한마디로 기사거리가 되는 사진들) 그 사진들은 너무 복잡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들 사진에는 언론의 명료한 기사거리가 되기 위해 필요한 잘 포장된 선악에 대한 전형성이 없었다 ..  (139, 148, 163쪽)


  아이들이 찍는 사진이 신문이나 잡지나 책에 실리는 일은 매우 드뭅니다. 여느 어른들이 찍는 사진 또한 신문이나 잡지나 책에 실리는 일이 무척 드뭅니다. 신문이나 잡지나 책은 언제나 전문가 사진만 싣습니다. 사진작가들이 빚는 작품만 싣곤 합니다. 전문가랑 사진작가들 작품을 싣는 신문과 잡지와 책을 들여다보면 ‘이야기’ 알맹이가 없기 일쑤입니다. 하루나 이틀쯤 말을 나눌 만한 조그마한 조각 하나쯤 있을는지 모르나, 열 해나 스무 해나 쉰 해나 백 해를 가로지르는 이야기를 보여주지는 못하는 신문이나 잡지나 책에 실리는 ‘사진 작품’이지 싶어요.


  여느 아이들과 여느 어른들이 여느 마을에서 여느 살림을 꾸리며 찍는 여느 사진은 아무런 신문에도 잡지에도 책에도 안 실리겠지요. ‘식구들 사진첩’에 덩그러니 한 장 남는 사진이겠지요. ‘사진을 읽어 주는 사람’이 열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아주 적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 사진첩 사진은 이야기를 오래오래 물려주어요. 이야기에 서린 사랑을 두고두고 북돋아요.


  삶에 눈뜨도록 이끄는 사진이자 글이에요. 삶에 눈뜨도록 이끌며 빛이 나는 사진이자 글이에요.

  사진은 가르칠 수 없어요. 그러나 애써 사진을 가르치려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사진은 가르칠 수 없지만, ‘사진’을 저마다 다 달리 즐기면서 저마다 다 다른 삶을 차근차근 느끼다 보면, 시나브로 내 꿈에 눈을 뜨고 내 사랑에 눈을 뜰 수 있어요.


  회사원으로 일하는 분들은 회사에서 사장이 되려고 일을 하나요? 집에서 아이들한테 밥을 차려 주는 분들은 집에서 요리사가 되려고 밥을 짓나요? 회사에서 사장이 되면 이제 무얼 하나요? 집에서 요리사가 되면 이제 무얼 하나요?


  살아가는 보람을 스스로 누려야 할 우리들이라고 느껴요. 살아가는 보람과 사랑하는 뜻을 곱게 엮을 우리들이라고 느껴요. 삶과 사랑과 꿈을 잇는 작은 끈인 사진과 글을 생각해 봐요. (4345.11.8.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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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내 초등학교 책읽기

 


  다섯 살 큰아이와 둘이서 읍내 저자를 다녀오는 길에 군내버스에서 초등학교 어린이를 만난다. 시골마을에서 읍내까지 군내버스를 타고 다니던데, 읍내에는 동무가 더 많고 볼거리나 즐길거리가 한결 많다 할 만할까 궁금하다. 이 아이는 학교를 마치고 나면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맞춰 타야 하니 동무들과 더 어울리기 힘든데, 어차피 다닐 초등학교라면 면내 초등학교보다 읍내 초등학교가 나을는지 궁금하다. 2012년 읍내 초등학교는 39학급에 1034명이라 하고, 면내(포두면) 초등학교는 7학급에 114명이라 한다. 원장수마을에서는 읍내나 면내나 어슷비슷한 길인데 이 아이는 읍내로 다닌다. 따지고 보면, 면내 학교로 가고 ‘면소재지보다 시골’ 아이요, 읍내 학교로 가도 ‘읍소재지보다 시골’ 아이라 하리라.


  읍내에서 살며 읍내 초등학교를 다닌다는 아이들이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이웃 순천시로 나아가서 다니면 어찌 될까. 이때에 이 아이들은 ‘시골’ 아이가 될 테지. 읍내 중·고등학교를 다니더라도 전라도 순천이나 여수나 광주 같은 데에서 온 교사들은 이 아이들더러 ‘시골’ 아이라고 부른다. 나중에 대학교를 가든 도시에 있는 공장에 일거리를 얻어 도시로 떠나든, 이 아이들은 언제나 ‘시골’ 사람 소리를 듣는다.


  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무엇을 가르칠까. 학교는 아이들한테 무엇을 가르쳐야 아름다울까. 도시 학교는 아이들한테 무엇을 가르칠 때에 제몫을 다 하는 셈일까. 시골 학교는 아이들한테 어떤 넋을 북돋울 때에 제구실을 다 하는 셈일까. 더 커다랗게 세우는 건물에 시골 아이를 뭉뚱그리며 교육이 이루어지는지 궁금하다. 더 작은 마을에 조그맣게 꾸리는 분교를 두어 시골 아이들이 오래오래 시골 어른 되어 살아가도록 이끌고 사랑하며 보듬을 수 있을 때에 교육이라는 이름이 걸맞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죄 도시로 보내기만 해서는, 죄 읍내나 면내로 보내기만 해서는, 죄 시골을 떠나도록 내몰기만 해서는 무슨 교육 어떤 삶을 나누거나 펼칠 수 있을까. (4345.11.8.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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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을 먹다

 


  저자를 보러 읍내를 다녀오는 길에 감을 산다. 등에 가방 하나 메고 어깨에 천가방 둘을 꿰며 한손으로는 큰아이 손을 잡고 걷다가, 버스역 앞에서 감꾸러미 파는 할머니를 본다. 저녁에 마을로 돌아가는 버스를 탄다며 일어서서 짐을 꾸리시기에 값을 여쭙고는 셈을 치른다. 집에서 따온 감이라 하시는데, 시골 버스역 둘레에서 감을 파는 분들은 으레 당신 집에서 따서 들고 나온다. 할머니 댁은 어느 마을일까. 읍내로 나오는 삯과 집으로 돌아가는 삯을 따질 때에 하루 만 원이나 이만 원쯤 버셨을까.


  버스표를 끊는다. 큰아이가 버스표를 들어 준다. 손이 둘뿐이라 짐꾸러미 들자면 손이 모자라지만, 큰아이가 버스표 들어 주기에 내 손은 넷이라 할 만하다. 감꾸러미 하나 장만하니 큰아이가 감을 먹고 싶다 말한다. 아버지가 바나나송이를 샀으면 아이는 바나나를 먹고 싶다 할 테지. 아버지가 사과꾸러미를 샀으면 사과를 먹고 싶다 할 테고, 귤을 샀으면 귤을 먹고 싶다 하리라.


  마을마다 감나무에 감알이 흐드러진다. 읍내나 면내 어느 가게를 가도 문간에 감꾸러미를 놓고 판다. 가장 너른 먹을거리이면서 무척 맛난 밥거리가 되는 감알이라고 느낀다. 고흥에는 유자도 석류도 참다래도 많이 난다고 하지만, 먼먼 옛날부터 아이 어른 모두 감알 먹으며 가을과 겨울을 따사로이 누렸지 싶다. (4345.11.8.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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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소 아저씨의 꿈 웅진 우리그림책 18
엄혜숙 글, 이광익 그림 / 웅진주니어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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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스로 품고 보살피는 하루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208] 이광익·엄혜숙, 《세탁소 아저씨의 꿈》(웅진주니어,2012)

 


  나는 시골에서 아이들과 지내며 글을 쓰고 사진을 찍습니다. 나는 대학교를 마치지 않았고, 사진 배우는 강의나 글 배우는 수업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배우지 않았어도 스스로 사진기를 장만해서 사진을 찍었고, 배우지 않았지만 스스로 연필을 쥐어 글을 썼어요.


  누구한테서 배운 사진이나 글이 아니기에, 나는 사진동무나 글동무가 따로 없기도 하고, 사진스승이나 글스승 또한 따로 없습니다. 스스로 가장 좋아하는 대로 사진을 찍고, 가장 즐기는 대로 글을 씁니다. 내가 즐겨찾는 헌책방을 사진으로 담고, 내가 즐겁게 타는 자전거를 사진으로 옮기며, 내가 살아가는 보금자리에서 사진을 빚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나날을 글로 쓰고, 내가 즐겨읽는 책을 글로 엮으며, 나와 한솥밥 먹는 살붙이 삶자락을 글로 빚어요.


  가을날 한들한들 춤추는 갈대와 억새를 바라보며 사진을 찍고 글을 씁니다. 따순 남녘땅 논둑에서 가을날 꽃을 피우는 갓과 유채를 바라보며 사진을 찍고 글을 씁니다. 마당에서 맨발로 뛰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고 글을 씁니다.


  하늘을 훨훨 나는 멧새를 올려다봅니다. 저 새는 어떤 새일까 고개를 갸우뚱하다가는, 또 밤하늘 가득한 별을 올려다보며 무슨 별일까 고개를 갸웃갸웃하다가는, 또 휭휭 부는 바람 따라 흔들리는 들풀이 어떤 풀일까 고개를 이리저리 기웃기웃하다가는, 내 마음 가는 대로 이름을 붙여 봅니다. 멧자락 위를 지나가다가 멧등성이에 걸려 꼼짝 않는 구름을 바라볼 때에는 ‘구름이 멧등성이에 앉아서 쉬는구나.’ 하고 노래합니다. 아이들 재우는 저녁나절에는 예쁜 아이 착한 아이 멋진 아이 고운 아이, 하며 노래를 부릅니다.


  바람이 차면 찬 대로 반가운 하루입니다. 햇살이 따스하면 따스한 대로 고마운 하루입니다. 가을이 다가오며 겨울을 그리고, 겨울을 맞이하며 봄을 꿈꿉니다. 봄이 찾아올 무렵 여름을 기다리고, 여름이 깃들면서 가을을 떠올려요. 삶이 온통 웃음이요, 웃음은 고스란히 사진으로 거듭나고 글로 다시 태어납니다.

 


.. 친한 친구도 없고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던 내게 동물들은 가장 먼저 마음을 열어 준 친구였습니다 ..  (10쪽)


  아름다운 말 한 마디는 따로 없다고 느낍니다. 스스로 삶을 아름다이 누릴 적에는, 내가 쓰는 어느 말이든 모두 아름답습니다. 스스로 삶을 슬프게 깎아내리거나 얄궂게 뒤틀 적에는, 내 입에서 나오는 어느 말이든 모두 슬프거나 얄궂습니다. 낱말만 예쁘장하게 꾸민대서 내 말마디가 예쁘게 거듭나지 않습니다. 말투만 그럴듯하게 치레한대서 내 말본새가 그럴듯하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생각을 가다듬습니다. 아이들을 바라보고 들판을 마주하는 생각을 가다듬습니다. 마음을 다스립니다. 살붙이와 부대끼고 빨래를 복복 비비는 마음을 다스립니다.


  하늘에서 똑 떨어지는 꿈이란 없어요. 선물처럼 짠 하고 찾아오는 꿈이란 없어요. 어떠한 꿈이든 생각으로 빚습니다. 모든 꿈은 마음으로 일굽니다. 스스로 꾸리는 삶에서 생각이 자라고 마음이 큽니다. 스스로 누리는 삶에서 생각이 빛나고 마음이 부풉니다.


  아침에 떠오르는 해를 보셔요. 저녁에 지는 해를 보셔요. 봄날 해가 어느 쪽에서 떠서 어느 쪽으로 지는가를 살펴보셔요. 여름날 해가 뜨는 높이와 가을과 겨울에 해가 뜨는 높이를 가늠해 보셔요. 한겨레 옛사람이 집을 지으며 남녘을 등에 지고 마루와 마당에서는 동녘과 서녘을 바라보도록 한 까닭을 헤아려 보셔요.


  해가 움직이는 길을 따라 빨래대를 달리 놓습니다.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에 빨래대 놓는 자리가 바뀝니다. 봄과 여름에는 빨래가 쉬 마르고, 가을과 겨울에는 빨래가 천천히 마릅니다. 철에 맞추어 삶을 맞추고, 삶에 맞추어 생각을 맞추며, 생각에 맞추어 말을 맞춥니다. 내가 읊는 말마디는 내 삶에서 태어납니다. 내가 즐기며 가꾸고 보듬는 삶에 맞추어 말 한 마디 싱그러이 태어납니다.

 


.. 나는 동물을 좋아해서 대학에서 생물학을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동물원 사육사가 될 수는 없었어요. 사육사는 공무원인데, 재일 조선인은 공무원이 될 수 없었거든요 ..  (20쪽)


  아침밥을 짓고 저녁밥을 짓습니다. 한솥밥을 지어 다 함께 먹습니다. 밥짓는 내 손길은 사랑을 담아 목숨을 건사하는 손길입니다. 숨결을 푸르게 북돋우고 마음결을 곱게 살찌웁니다.


  후끈후끈 뜨거운 국물을 마십니다. 김 모락모락 나는 국물을 아이한테 먹입니다. 따스한 밥을 먹고, 따스한 밥을 먹입니다. 무를 썰고 오이를 썹니다. 날푸성귀를 흐르는 물에 헹군 다음 물기를 빼내고서 톡톡 썹니다. 알맞게 썬 날푸성귀를 골고루 섞으며 된장이나 양념장으로 버무립니다. 때때로 감자와 양파를 볶거나 버섯이나 양배추를 볶습니다. 푸성귀는 날로 먹어도 맛나고, 감자와 양파를 볶은 다음 떡볶이떡을 넣어 자글자글 끓인 다음 함께 넣어 먹을 때에도 맛납니다.


  졸린 아이를 재우고 이불깃을 여밉니다. 나란히 드러누워 하루를 돌아봅니다. 아이들은 날마다 새롭게 자라고, 어른들은 나날이 새롭게 생각을 가다듬습니다.


  내 몸을 씻기고 아이들 몸을 씻깁니다. 내 머리를 감고 아이들 머리를 감깁니다. 아이들 뒤를 닦고 나도 뒤를 눕니다. 다섯 살 큰아이는 스스로 양말을 꿰고 옷을 입을 뿐 아니라, 식구들 옷가지를 혼자서 척척 갭니다. 두 살 작은아이는 스스로 양말을 꿰거나 단추를 꿰거나 신을 꿰려면 좀 멉니다. 그래도 오래지 않아 작은아이 스스로 옷을 꿰고 신을 꿸 텔지요. 자꾸자꾸 옷을 새로 꺼내어 입고 자꾸자꾸 옷더미를 만들는지 모릅니다. 누나하고 둘이서 끝없이 뛰고 기고 날고 하면서 하루를 보내겠지요.


  가만히 돌아보면, 아이나 어른이나 스스로 품고 보살피는 하루입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란 없습니다. 스스로 즐겁게 품는 하루요, 스스로 기쁘게 맞는 하루입니다. 스스로 예쁘게 마무리하는 하루요, 스스로 곱게 돌아보는 하루예요.

 


.. 아저씨가 내게 악수를 청하셨다. “나는 사육사가 되고 싶었지만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했어. 그렇지만 넌 꼭 훌륭한 사육사가 되길 바란다.” 아저씨 손은 참 크고 따뜻했다. 세탁소에서 늘 다림질을 하고 있어서 손이 크고 따뜻한가 보다 ..  (32쪽)


  이광익 님이 그리고, 엄혜숙 님이 글을 쓴 《세탁소 아저씨의 꿈》(웅진주니어,2012)이라는 그림책을 읽습니다. 일본에서 나고 자라며 살아가는 ‘김황’이라는 분 이야기를 적바림한 그림책입니다. 재일조선인으로 나고 자라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기쁨으로도 슬픔으로도 금긋지 않고 차분하게 들려주는 그림책입니다.


  김황 님이 남녘이나 북녘에서 태어났으면 어떠한 삶을 꾸렸을까요. 김황 님이 일본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어떠한 나날을 보냈을까요. 재일조선인으로 나고 자라며 살아가는 하루란 어떤 뜻과 값과 보람과 빛과 웃음이 될까요.


  누구보다 스스로를 사랑하고 아낄 수 있기에, ‘삶을 돌보는’ 글쓰기를 하며 하루를 빛내는 김황 님이리라 생각합니다.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하듯 들짐승을 아끼고 사랑하는 넋을 건사하기에, 세탁소 일꾼으로 지내면서 글을 쓰고 책을 펴내는 삶을 북돋우는구나 싶습니다.


  예쁘게 살고 싶으면 예쁘게 꿈을 꿉니다. 참답게 살고 싶으면 참답게 꿈을 꿉니다. 생각이 꿈으로 거듭납니다. 꿈은 삶으로 나타납니다. 삶은 이야기로 꽃을 피웁니다. 이야기는 널리널리 퍼지며 두루두루 즐거운 노래로 흘러넘칩니다. (4345.11.7.물.ㅎㄲㅅㄱ)

 


― 세탁소 아저씨의 꿈 (이광익 그림,엄혜숙 글,웅진주니어 펴냄,2012.7.30./11000원)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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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11-08 19:22   좋아요 0 | URL
요즘 동화책에 빠져 있어요. 재밌어요.
된장 님도 동화를 쓴다면 잘 쓰실 것 같은데... ㅋ
위와 같은 동화그림도 좋아합니다.

파란놀 2012-11-08 20:05   좋아요 0 | URL
음... 언젠가 쓰리라 생각해요~~~ ^^
 

‘벽지’와 ‘시골’
[말사랑·글꽃·삶빛 34] 살아가는 생각이 나타나는 말

 


  ‘도시(都市)’라는 곳은 언제 처음 생겼을까 헤아려 봅니다. 국어사전 말풀이를 살피면 “일정한 지역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이 되는, 사람이 많이 사는 지역”이 도시라고 일컫는데, 신라 때 서라벌이 도시라 할 만할까요. 고구려 때 개성이나 평양은 도시라 할 만한가요. 4300년 앞서 옛조선에서 서울로 삼은 데는 도시라고 할 만할까요.


  오늘날 한국에서 ‘서울’은 땅이름 한 가지로만 많이 쓰지만, ‘서울’은 땅이름이기 앞서 어느 한 나라에서 정치와 경제가 모이는 한복판인 데를 가리키는 낱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서울’하고 서울 아닌 ‘시골’ 두 가지로 삶터를 나누었어요. 한겨레 삶자락을 돌아본다면, ‘도시 = 서울’이라고 할 만합니다. 이를테면, 시골서 사는 분들은 도시에서 찾아온 손님을 바라보며 언제나 “서울에서 오셨어요?” 하고 묻습니다. 부산에서 오든 대구에서 오든, 인천이나 대전에서 오든 ‘도시 = 서울’이라 ‘서울사람’이라고 바라봅니다. ‘도시사람 = 서울사람’인 셈이니까요.


  정진국 님이 쓴 《사진가의 여행》(포토넷,2012)이라는 책을 읽다가 196쪽에서 “폴은 이렇게 프랑스 벽지 사람들을 보여준다.”와 같은 대목을 봅니다. 책을 읽다가 문득 멈춥니다. 국어사전을 펼칩니다. ‘벽지(僻地)’ 말풀이를 찾아보니, “외따로 뚝 떨어져 있는 궁벽한 땅.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교통이 불편하고 문화의 혜택이 적은 곳을 이른다” 하고 나옵니다. ‘벽지’와 비슷하게 쓰는 ‘오지(奧地)’라는 낱말도 찾아봅니다. ‘오지’ 말풀이는 “해안이나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대륙 내부의 땅. ‘두메’로 순화” 하고 나오는군요.


  새삼스레 한국말 ‘시골’과 ‘두메’ 뜻풀이가 궁금합니다. 이 낱말도 국어사전에서 찾아봅니다. ‘시골’은 “도시에서 떨어져 있는 지역. 주로 도시보다 인구수가 적고 인공적인 개발이 덜 돼 자연을 접하기가 쉬운 곳을 이른다” 하고 나오네요. ‘두메’는 “도회에서 멀리 떨어져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변두리나 깊은 곳”이라고 나와요.


  다시 책을 읽습니다. “프랑스 벽지 사람들”이란 “프랑스 시골 사람들”이겠구나 싶습니다. 한국말로 ‘시골’을 한자말로 ‘벽지’라 적은 셈이로구나 싶습니다. 한국말로 ‘두메’를 한자말로 ‘오지’라 적는 셈이고요.


  그런데, 시골서 살아가는 사람은 ‘교통이 불편’할까 알쏭달쏭합니다. ‘문화 혜택’을 못 누리는 시골사람일까 아리송합니다. 교통이란 무엇이고 문화란 무엇인가요. 자동차로 오가기 좋거나 기차와 비행기가 다녀야 교통이 좋다 할 만할까요. 자전거로 다니기에 넉넉하고 두 다리로 걸어다니며 한갓진 데는 교통이 어떻다고 말해야 할까요. 극장이 있거나 병원이 있어야 문화가 될까 헤아려 봅니다. 극장도 병원도 없지만 삶을 아름다이 누린다면, 또 나무와 꽃과 벌과 새와 나비를 실컷 누린다면, 어느 쪽이 문화를 즐긴다고 할 만할까 헤아려 봅니다.


  누군가한테는 극장이나 편의점이나 옷가게나 찻집이 문화 혜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한테는 숲과 골짜기와 들판과 바다가 문화 혜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파트도 문화요 흙집도 문화예요. 한쪽은 도시 문화이고 한쪽은 시골 문화입니다. 한쪽은 서울살이요 한쪽은 시골살이예요.


  아이들은 맨발로 뛰놀기를 좋아합니다. 나도 어릴 적에 맨발로 뛰놀기를 즐겼습니다. 온통 시멘트와 아스팔트뿐이라 하더라도 맨발이 훨씬 즐거워요. 시골 아이들은 맨발로 뛰놀 흙이 곳곳에 널립니다. 오늘날은 풀약을 잔뜩 치기는 하지만, 풀밭이 있고 흙땅이 있어요. 논밭을 거닐 수 있고, 바닷가와 갯벌을 오갈 수 있어요. 참으로 문화란 무엇이고, 문화를 누리는 삶이란 무엇이며, 문화가 아름다운 터란 무엇일까요.


  우리들이 주고받는 말은 삶자리에 따라 다릅니다. 도시사람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결대로 말을 하고, 시골사람은 시골에서 살아가는 무늬대로 말을 해요. 서울사람은 서울말이요, 시골사람은 시골말입니다. 어느 쪽이 다른 쪽보다 낫거나 뛰어나거나 훌륭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삶을 어여삐 일굴 때에는 어여쁘다 여길 말이 태어납니다. 스스로 삶을 알차게 돌볼 때에는 알차게 샘솟는 말이 흐드러집니다. 스스로 삶을 기쁘게 누릴 때에는 서로 기쁘게 나눌 말을 새롭게 짓습니다.


  오늘날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제대로 안 씁니다. 예전에는 대학교수나 지식인이 되려고 사자성어를 비롯한 온갖 한자말을 일본이나 중국에서 빌어 학문을 했습니다. 이제는 대학교수나 지식인, 또 기자와 학자와 작가가 되려고 미국에서 영어를 빌어 학문을 하고 글을 쓰며 문학과 책을 빚습니다. 초등학교에서도 영어를 가르치고,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도 영어를 가르쳐요. 어떤 삶이요 어떤 문화인가를 살피지 않아요. 무턱대고 영어를 가르칩니다. 지식인이나 작가로 살아가는 어른은 스스로 어떤 말이며 어떤 넋인가를 돌아볼 겨를 없이 갖가지 한자말과 영어로 이녁 생각을 적바림합니다. 삶을 살피지 않고 말을 앞세워요. 삶을 돌아보지 않고 글을 써요.


  살아가는 생각이 나타나는 말입니다. 살아가는 모습이 드러나는 말입니다. 흙을 밟고 풀을 만지는 시골 할머니는 풀내음과 흙내음 물씬 풍기는 말을 합니다. 자가용을 몰고 아파트에서 지내는 도시 젊은이는 쇳덩이와 시멘트로 둘러싸인 내음이 풍기는 말을 합니다. 더 낫거나 덜 떨어지는 말이란 없습니다. 삶자리 따라 말자리가 다를 뿐입니다. 삶을 짓는 꿈에 따라 말을 빚는 넋이 다를 뿐입니다.


  어린이는 어떤 삶을 누리며 어떤 말을 나눌 때에 아름답게 꿈을 키울까 생각해 봅니다. 푸름이는 어떤 삶을 즐기며 어떤 말을 주고받을 때에 아리땁게 사랑을 빛낼까 헤아려 봅니다. 어른이 되어서는 어떤 삶을 꽃피우며 어떤 말을 북돋울 때에 어여쁘게 마음을 밝힐까 가만히 그려 봅니다. (4345.11.7.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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