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절된 만화책이라 헌책방에서 낱권만 둘 사서 보았는데, 꽤 '박력'있게 그리는 만화로구나 싶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5권까지는 몽땅 품절이고, 2011년에 나온 6권만 살 수 있다. ㅠ.ㅜ 그야말로 눈물겨운 노릇이지만, 6권이라도 살 수 있으니 고맙다고 해야 할까. 7권도 나올까 궁금하다......


1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정의는 나의 것 6
히지리 치아키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11년 12월
4,500원 → 4,050원(10%할인) / 마일리지 220원(5% 적립)
2012년 11월 12일에 저장
품절


1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도서관을 말하는 책 (도서관일기 2012.11.12.)
 ―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동백마을, ‘서재도서관 함께살기’

 


  언제였는지 가물가물하기까지 한데, 우리 서재도서관을 취재하러 오신 분이 있었다. 올 2012년 2월쯤이었나, 서울에서 먼길을 찾아와 주셨는데, 그분이 돌아다닌 여러 도서관 삶자락을 말하는 책 《도서관 산책자》(반비 펴냄)가 나왔다. 오늘 큰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워 마실을 나가려 할 적에, 우체국 일꾼이 우리 집에 가져다준다.


  정갈한 겉그림에 알맞춤한 두께로 나온 책을 가만히 펼친다. 우리 서재도서관은 이른여름쯤 책갈무리는 모두 마쳤다. 다만, 책갈무리는 마쳤되 간판은 아직 안 걸었고, 고흥 안팎으로도 ‘도서관 생겼어요!’ 하고 알리지 않았다. 도서관 소식지 《삶말》은 두 달에 한 차례 내놓으며 이곳저곳에 보내기도 하고, 도서관 지킴이한테 띄우기도 하고, 고흥에서 살아가는 이웃한테 드리기도 하는데, 막상 ‘도서관 여는 잔치’를 하지도 않았다.


  이야기책 《도서관 산책자》에 실린 우리 서재도서관 모습은 ‘책갈무리가 까마득하게 남은 예전 모습’이다. 내 전화번호라든지 누리집이라든지 뭐라도 하나 적어 놓았으면, 사진책도서관을 궁금해 하는 이들이 이래저래 알음알이로 찾아오도록 할 만할 텐데, ‘고흥 도화면 동백마을’이라고 적어 놓으셨으니, 뜻이 있으면 다 알아보고 찾아오시겠지. 왜냐하면, 우리 서재도서관에는 국립중앙도서관뿐 아니라 이 나라 어느 도서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재미나고 아름다운 사진책이 그득그득 있으니까.


  아무쪼록, 《도서관 산책자》가 예쁘게 사랑받을 수 있기를 빈다. 우리 서재도서관 또한 곱게 사랑받으리라 믿는다. 책마다 서린 아리따운 넋을 사람들이 알뜰살뜰 알아보면서, 국립도서관이든 지자체도서관이든, 또 나처럼 혼잣힘으로 여는 개인도서관이든, 따사로운 손길로 아끼면서 즐길 수 있으리라 믿는다. 바람은 제법 불지만 햇살이 포근하고 해맑은 늦가을이다. 마을 할머니들 마늘밭 김매느라 바쁘시다.


* 도서관 지킴이 되기 : 우체국 012625-02-025891 최종규 *
* 도서관 지킴이 되어 주는 분들은 쪽글로 주소를 알려주셔요 (011.341.7125.)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드 덮고 자는 인형

 


  큰아이가 혼자 인형하고 놀면서 인형을 책꽂이에 기대어 재운다. 인형 하나는 바닥에 눕히고는 카드로 이불을 삼아 덮어서 재운다. 자장자장 노래를 부르고, 토닥토닥 가슴을 도닥여 준다. 예쁘게 노는 아이는 스스로 예쁜 넋을 불러들인다. 예쁘게 노래하는 아이는 스스로 예쁜 얼굴이 되고 예쁜 목소리가 된다. 남들이 예쁘다 얘기해 주어 예뻐지는 사람은 없다. 스스로 예쁘고 싶기에 예쁘게 살아가며 예쁜이로 빛난다. (4345.11.12.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내가 차린 맛난 밥

 


  나는 내가 차린 밥이 참 맛납니다. 내가 차린 밥을 함께 먹는 사람이 ‘참 맛있네.’ 하고 말할 때면 어쩐지 사랑이 새롭게 샘솟아 다음에 밥을 차리면서 한결 맛나게 하자는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내가 내 밥을 스스로 차려 먹은 지 이제 열여덟 해쯤 됩니다. 1995년에 제금을 난 뒤로, 밥이랑 옷은 언제나 스스로 건사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내 밥을 차리며 ‘밥을 맛나게 해야지’ 하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그저 ‘밥을 하자’고만 생각합니다. 내가 할 줄 아는 밥을 하고, 이웃이나 동무나 살붙이한테서 듣거나 배운 대로 조금씩 새롭게 밥을 해 보면서, 차츰차츰 밥맛이 돌게 살아왔다고 느낍니다.


  그러니까, 나는 1995년부터 내 옷가지를 스스로 빨면서 살았습니다. 2012년 봄에 처음으로 빨래기계를 들여서 가끔 기계빨래를 하곤 하지만, 한 달에 한 번쯤 기계빨래를 할 뿐, 으레 손빨래를 합니다. 빨래를 하면서 문득문득 생각합니다. 빨래를 널면서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빨래를 걷고 개면서 또 한 번 생각합니다. 내가 하는 내 빨래이지만, 내가 한 빨래는 참 깨끗하고 보송보송 좋구나, 하고 느낍니다.


  옆지기와 아이들도 느낄까요. 느끼겠지요. 어쩌면 못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딱히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즐겁게 빨래를 하고 밥을 하는걸요. 내 모든 사랑과 꿈과 믿음과 생각을 쏟아서 밥 한 그릇 차리고, 빨래 한 가지 하는걸요.


  때로는 밥상에 찬거리가 얼마 없곤 합니다. 어느 때에는 국과 밥과 나물 한두 가지만 있곤 합니다. 어느 때에는 세 시간 즈음 품을 들여 여러 반찬을 올리기도 합니다.


  나는 늘 끼니마다 모든 밥과 국과 반찬을 새로 합니다. 묵은 밥이나 국이나 반찬은 거의 안 씁니다. 끼니에 먹을 만큼 밥과 국과 반찬을 해요. 요사이에는 아침에 한 밥을 저녁에 먹고 끝내기도 하지만, 으레 새 끼니 새 밥, 새 끼니 새 국, 새 끼니 새 반찬, 이렇게 생각해요. 그때그때 손품을 들이는 밥이 참말 맛있거든요. 내가 먹어 보기에 이러하니까, 나랑 같이 밥을 먹는 사람도 이 느낌을 함께 받아들이기를 바라요.


  빨래를 하루에 서너 차례 하면서 이와 같이 생각합니다. 나는 스스로 즐거워서 하는 빨래인데, 참말 스스로 즐거워서 하는 빨래이다 보니, 빨래를 하면서 마음씻기를 이루어요. 괴롭거나 힘들거나 슬프거나 아픈 일이 있어도, 빨래를 하며 사르르 사라져요. 밥을 할 적에도 그렇고요.


  아마 사라진다기보다 잊힌다고 해야 맞을 텐데, 사라지든 잊히든, 빨래하기와 밥하기는 내 삶에서 빼놓을 수 없습니다. 또, 아이들하고 함께 놀거나 마실을 다니거나 잠을 재울 적에도 더없이 기쁘고 아름다운 숨결이 나한테 스며든다고 느껴요.


  나는 내가 차린 맛난 밥을 먹습니다. 나는 남이 차린 밥도 맛나게 먹습니다. 밥집에서 사먹는 바깥밥은 조미료 냄새에 수도물 냄새에 온갖 ‘이야 이렇게 나쁜 걸 잔뜩 집어넣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지만, 숟가락을 든 뒤로는 상긋방긋 웃으면서 먹어요. 내 숨결을 살리는 고마운 밥이거든요. 조미료 듬뿍 들어가든 말든 내 숨결이 되어요. 소시지이든 세겹살이든 내 몸이 되고 피가 되며 살이 되어요. 그래서, 이런 걸 먹든 저런 걸 먹든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합니다. 똥으로 범벅이 된 아이들 옷을 빨든, 바닷가에서 놀며 온통 모래투성이 된 옷을 빨든, 나는 노상 기쁘게 옷을 빨래합니다. 옳거니, 이런 옷은 이렇게 빨아야 하는구나, 저런, 이런 옷은 이렇게 빨아도 때와 얼룩이 안 지네, 하고 깨닫습니다. 내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던 손길을 떠올리고, 내 어머니를 낳은 어머니가 내 어머니를 사랑하던 눈길을 헤아립니다. 나는 나와 내 아이와 옆지기를 어떻게 사랑하며 하루를 빛낼까요. 밥을 먹습니다. 빨래를 합니다. 비질을 합니다. 하루가 어여쁩니다. (4345.11.12.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누가 누군가한테 '사과'를 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적어도, 몸소 찾아가서 꾸벅 절을 하고 술 한잔을 사든 과자 한 봉지나 과일 한 그릇을 주든 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과'를 한다면서 '자기 일기장'에만 슬쩍 적바림'하면, 이것을 사과라도 여겨야 할까 알쏭달쏭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올바로 바라보면서 사랑하는 길을 찾을'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참을성을 길러 보아야 스스로 아름답게 거듭날 수 없다고 느낍니다. 나는 이제 마태우스 님 서재에는 마실 갈 일이 없으리라 느껴, 이렇게 내 알라딘서재 자리에 마태우스 님한테 띄우는 글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올립니다.

 

..


 앉아서 받아먹기를 바라지 마셔요

 


  모든 궁금함은 궁금하다고 여긴 사람 스스로 풉니다.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한테 다른 사람이 궁금함을 풀어 주지 못합니다. 절집에서는 으레 ‘선문답’을 한다고 하는데, 선문답을 내주는 스승도 선문답을 받는 배움꾼도 스스로 궁금함을 풀지, 누구한테 무얼 가르치거나 알려주지 못합니다. 누가 알려주어서 안다고 하면, ‘참앎’이 아닌 ‘지식이나 정보’입니다. 누가 깨우쳐서 깨닫는다고 하면, 이때에도 ‘슬기’가 아닌 ‘지식이나 정보’일 뿐입니다.


  지식이나 정보는 쌓으면 쌓을수록 쌓일 뿐, 삶을 일으켜세우거나 북돋우지 않습니다. 참앎이나 슬기일 때에 비로소, 이 참앎과 슬기를 바탕으로 스스로 삶을 일으켜세우는 길을 느끼거나 삶을 북돋우는 손길을 찾습니다.


  책을 읽는대서 길이 열리지 않습니다. 길은 책이 아닌 내 마음속에 있거든요. 내 마음속에 있는 길을 느끼고 싶어 책을 읽습니다. 길을 찾으려고 한다면 책을 읽으면 안 돼요. 책을 읽으면서 내 마음속에서 무엇이 샘솟는가를 살펴야 하고, 책을 읽고 난 뒤에 스스로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꿈과 사랑을 다스려야 해요.


  앉아서 받아먹기를 바란다면 앉은뱅이가 됩니다. 앉은뱅이로 살아가면서도 만 리 밖을 내다보는 이가 있어요. 그러나, 앉아서 받아먹기를 바라며 앉은뱅이가 되는 사람은 만 리 밖이 아니라, 방 바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조차 몰라요. 방 바깥 부엌에서 누가 어떻게 밥을 차리는지, 빨래는 어떻게 하고 청소는 어떻게 하는지, 아이는 누가 어떻게 돌보는지를 하나도 몰라요. 날씨도 모를 뿐더러, 날씨에 따라 피고 지고 맺고 트는 잎사귀 또한 모르지요.


  오늘날 학교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아이들을 책상 앞에 앉혀서 지식과 정보만 받아먹도록 이끌’고 말아요. 교사이든 교수이든 아이들 스스로 삶을 찾고 꿈을 키우도록 이끌지 않아요. 너무 마땅한 노릇이라 할 텐데, 교사와 교수 스스로 당신 삶을 안 찾고 당신 꿈을 안 키우니까, 학교 아이들한테 아무것도 들려주지 못합니다.


  읽고 싶은 책은 스스로 찾아서 읽어야 합니다. 누가 읽으라 한대서 읽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책방마실을 하고 책시렁을 살펴야 합니다. 책은 손수 책장을 넘겨야 읽습니다. 책장에 찍힌 글은 스스로 읽어야 하고, 줄거리를 넘어 알맹이를 새겨야 하며, 알맹이마다 서린 넋을 아로새겨야 합니다. 넋을 아로새긴 뒤에는 스스로 삶을 짚으면서 하루하루 빛내는 길을 손수 찾고 가꾸어야겠지요.


  사랑을 누가 누구한테 가르치지 못합니다. 어느 한 사람이 누구 한 사람을 ‘홀리’거나 ‘꼬드기’는 길을 알려줄 수 있다 하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아끼는 사랑은 스스로 깨달아야 해요. 이것이 사랑이고 저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가르쳐 주지 못해요. 어떠한 일을 놓고도, 이것이 참이고 저것은 거짓이라고 가르쳐 주지 못해요. 이를테면, 드레퓌스 사건 참거짓을 누가 누구한테 가르쳐 주지 못해요. 스스로 책과 자료와 이야기를 살피고 읽고 새기고 견주면서 참거짓을 깨달아야 해요. 소설쟁이 공지영 씨가 《의자놀이》라는 책을 쓰면서 어떤 거짓말을 했고 쌍용 노동자와 이웃들한테 어떤 짓을 했는가 하는 대목 또한, 이 대목을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이 스스로 찾고 느끼고 알고 깨달아야 할 몫이지, 누가 누구한테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다고 알려줄 수 없어요. 알려준다 한들 ‘받아먹을 귀와 입과 손’이 없는데, 모두 부질없는 일이 되고 말아요.


  느끼는 사람은 한 줄을 읽으면서도 느껴요. 아는 사람은 낯빛을 보고도 알아요. 내 아이가 아플 적에는 먼발치에서 보아도 척 알 뿐 아니라, 멀리 떨어져 지내도 느낌으로 ‘어 우리 아이 아픈가 보네’ 하고 깨달아요. 왜냐하면, 나 스스로 내 아이한테 마음과 사랑과 생각을 쏟기 때문이에요.


  지식 하나를 얻으려 할 적에도 이와 같아야 해요. 스스로 마음과 사랑과 생각을 쏟아야 지식 하나 제대로 건사해요. 호미 쥐는 법을 익히려면 책이나 동영상이 아닌 몸소 호미를 쥐어 보면 알지만, 몸소 호미를 쥐어도 호미질이 서툰 사람이 많아요. 왜냐하면, 스스로 마음과 사랑과 생각을 안 쏟거든요. 스스로 마음과 사랑과 생각을 쏟으면, 삽질도 낫질도 도끼질도 익숙하게 해내요. 스스로 마음과 사랑과 생각을 쏟지 않으니까, 하늘을 보면서도 날씨를 못 읽어요. 스스로 마음과 사랑과 생각을 쏟으면, 지구별 어디에서라도 ‘쓰는 말이 달라’ 이야기를 못 나눌 일이란 없어요.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사랑으로 이야기를 나누니까요.


  앉아서 받아먹기를 바란다면 스스로 바보가 되고 말아요. 바보가 되어도 교수 노릇을 하고 교사 노릇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바보가 되어 살아가면 무슨 즐거움과 어떤 재미가 있을까요. 내 삶을 못 읽으니 이웃 삶을 못 읽잖아요. 내 삶을 못 깨달으니 동무 삶을 깨우치지 못하잖아요. (4345.11.12.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hnine 2012-11-12 17:49   좋아요 0 | URL
저는 좀처럼 이런 일에 나서지 않습니다만, 그리고 된장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뜻도 알 것 같지만, 상대방의 직업과 관련하여 쓰신 것은 좀 상처가 되지 않을까요? 본인이 본인의 직업과 관련하여 말하는 것과,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의 직업과 관련하여 쓰는 것은 다를 것 같아요.

파란놀 2012-11-12 10:27   좋아요 0 | URL
hnine님, '알 것 같지만'이란 무엇인가를 가만히 생각해 주셔요. 참말 '안다'와 '알 듯하다'와 '알 수 있을 듯하다'는 모두 달라요.

hnine님이 이 글에서 제가 무엇을 말하는가를 '아신다'면, 제가 이러한 글을 쓰면서 나누고 싶은 '뜻과 생각과 사랑과 꿈과 마음'도 '아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분 '직업'이 무엇인가요? 저는 그분 이름도 모르고 직업도 모릅니다. 그분 직업이 교사나 교수인가요? 제가 쓰는 글을 그동안 죽 보셨으면, 제가 글을 쓰면서 '지식인-교사-교수' 이런저런 사람들을 빗대는 이야기를 흔히 쓰는 줄 '아시'겠지요. 누가 무슨 직업이건 무슨 대수이겠어요. 직업이 농사꾼이면 어떻고 작가이면 어떠하며 주부이면 어떠하겠어요.

살아가는 '본질'이 무엇이고, 살아가며 나눌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스스로 하루를 빚을 수 있고,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남을 다치게 할 수 없어요. 스스로 생채기를 입히고 입을 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