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누군가한테 '사과'를 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적어도, 몸소 찾아가서 꾸벅 절을 하고 술 한잔을 사든 과자 한 봉지나 과일 한 그릇을 주든 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과'를 한다면서 '자기 일기장'에만 슬쩍 적바림'하면, 이것을 사과라도 여겨야 할까 알쏭달쏭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올바로 바라보면서 사랑하는 길을 찾을'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참을성을 길러 보아야 스스로 아름답게 거듭날 수 없다고 느낍니다. 나는 이제 마태우스 님 서재에는 마실 갈 일이 없으리라 느껴, 이렇게 내 알라딘서재 자리에 마태우스 님한테 띄우는 글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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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앉아서 받아먹기를 바라지 마셔요

 


  모든 궁금함은 궁금하다고 여긴 사람 스스로 풉니다.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한테 다른 사람이 궁금함을 풀어 주지 못합니다. 절집에서는 으레 ‘선문답’을 한다고 하는데, 선문답을 내주는 스승도 선문답을 받는 배움꾼도 스스로 궁금함을 풀지, 누구한테 무얼 가르치거나 알려주지 못합니다. 누가 알려주어서 안다고 하면, ‘참앎’이 아닌 ‘지식이나 정보’입니다. 누가 깨우쳐서 깨닫는다고 하면, 이때에도 ‘슬기’가 아닌 ‘지식이나 정보’일 뿐입니다.


  지식이나 정보는 쌓으면 쌓을수록 쌓일 뿐, 삶을 일으켜세우거나 북돋우지 않습니다. 참앎이나 슬기일 때에 비로소, 이 참앎과 슬기를 바탕으로 스스로 삶을 일으켜세우는 길을 느끼거나 삶을 북돋우는 손길을 찾습니다.


  책을 읽는대서 길이 열리지 않습니다. 길은 책이 아닌 내 마음속에 있거든요. 내 마음속에 있는 길을 느끼고 싶어 책을 읽습니다. 길을 찾으려고 한다면 책을 읽으면 안 돼요. 책을 읽으면서 내 마음속에서 무엇이 샘솟는가를 살펴야 하고, 책을 읽고 난 뒤에 스스로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꿈과 사랑을 다스려야 해요.


  앉아서 받아먹기를 바란다면 앉은뱅이가 됩니다. 앉은뱅이로 살아가면서도 만 리 밖을 내다보는 이가 있어요. 그러나, 앉아서 받아먹기를 바라며 앉은뱅이가 되는 사람은 만 리 밖이 아니라, 방 바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조차 몰라요. 방 바깥 부엌에서 누가 어떻게 밥을 차리는지, 빨래는 어떻게 하고 청소는 어떻게 하는지, 아이는 누가 어떻게 돌보는지를 하나도 몰라요. 날씨도 모를 뿐더러, 날씨에 따라 피고 지고 맺고 트는 잎사귀 또한 모르지요.


  오늘날 학교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아이들을 책상 앞에 앉혀서 지식과 정보만 받아먹도록 이끌’고 말아요. 교사이든 교수이든 아이들 스스로 삶을 찾고 꿈을 키우도록 이끌지 않아요. 너무 마땅한 노릇이라 할 텐데, 교사와 교수 스스로 당신 삶을 안 찾고 당신 꿈을 안 키우니까, 학교 아이들한테 아무것도 들려주지 못합니다.


  읽고 싶은 책은 스스로 찾아서 읽어야 합니다. 누가 읽으라 한대서 읽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책방마실을 하고 책시렁을 살펴야 합니다. 책은 손수 책장을 넘겨야 읽습니다. 책장에 찍힌 글은 스스로 읽어야 하고, 줄거리를 넘어 알맹이를 새겨야 하며, 알맹이마다 서린 넋을 아로새겨야 합니다. 넋을 아로새긴 뒤에는 스스로 삶을 짚으면서 하루하루 빛내는 길을 손수 찾고 가꾸어야겠지요.


  사랑을 누가 누구한테 가르치지 못합니다. 어느 한 사람이 누구 한 사람을 ‘홀리’거나 ‘꼬드기’는 길을 알려줄 수 있다 하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아끼는 사랑은 스스로 깨달아야 해요. 이것이 사랑이고 저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가르쳐 주지 못해요. 어떠한 일을 놓고도, 이것이 참이고 저것은 거짓이라고 가르쳐 주지 못해요. 이를테면, 드레퓌스 사건 참거짓을 누가 누구한테 가르쳐 주지 못해요. 스스로 책과 자료와 이야기를 살피고 읽고 새기고 견주면서 참거짓을 깨달아야 해요. 소설쟁이 공지영 씨가 《의자놀이》라는 책을 쓰면서 어떤 거짓말을 했고 쌍용 노동자와 이웃들한테 어떤 짓을 했는가 하는 대목 또한, 이 대목을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이 스스로 찾고 느끼고 알고 깨달아야 할 몫이지, 누가 누구한테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다고 알려줄 수 없어요. 알려준다 한들 ‘받아먹을 귀와 입과 손’이 없는데, 모두 부질없는 일이 되고 말아요.


  느끼는 사람은 한 줄을 읽으면서도 느껴요. 아는 사람은 낯빛을 보고도 알아요. 내 아이가 아플 적에는 먼발치에서 보아도 척 알 뿐 아니라, 멀리 떨어져 지내도 느낌으로 ‘어 우리 아이 아픈가 보네’ 하고 깨달아요. 왜냐하면, 나 스스로 내 아이한테 마음과 사랑과 생각을 쏟기 때문이에요.


  지식 하나를 얻으려 할 적에도 이와 같아야 해요. 스스로 마음과 사랑과 생각을 쏟아야 지식 하나 제대로 건사해요. 호미 쥐는 법을 익히려면 책이나 동영상이 아닌 몸소 호미를 쥐어 보면 알지만, 몸소 호미를 쥐어도 호미질이 서툰 사람이 많아요. 왜냐하면, 스스로 마음과 사랑과 생각을 안 쏟거든요. 스스로 마음과 사랑과 생각을 쏟으면, 삽질도 낫질도 도끼질도 익숙하게 해내요. 스스로 마음과 사랑과 생각을 쏟지 않으니까, 하늘을 보면서도 날씨를 못 읽어요. 스스로 마음과 사랑과 생각을 쏟으면, 지구별 어디에서라도 ‘쓰는 말이 달라’ 이야기를 못 나눌 일이란 없어요.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사랑으로 이야기를 나누니까요.


  앉아서 받아먹기를 바란다면 스스로 바보가 되고 말아요. 바보가 되어도 교수 노릇을 하고 교사 노릇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바보가 되어 살아가면 무슨 즐거움과 어떤 재미가 있을까요. 내 삶을 못 읽으니 이웃 삶을 못 읽잖아요. 내 삶을 못 깨달으니 동무 삶을 깨우치지 못하잖아요. (4345.11.12.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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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2-11-12 17:49   좋아요 0 | URL
저는 좀처럼 이런 일에 나서지 않습니다만, 그리고 된장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뜻도 알 것 같지만, 상대방의 직업과 관련하여 쓰신 것은 좀 상처가 되지 않을까요? 본인이 본인의 직업과 관련하여 말하는 것과,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의 직업과 관련하여 쓰는 것은 다를 것 같아요.

숲노래 2012-11-12 10:27   좋아요 0 | URL
hnine님, '알 것 같지만'이란 무엇인가를 가만히 생각해 주셔요. 참말 '안다'와 '알 듯하다'와 '알 수 있을 듯하다'는 모두 달라요.

hnine님이 이 글에서 제가 무엇을 말하는가를 '아신다'면, 제가 이러한 글을 쓰면서 나누고 싶은 '뜻과 생각과 사랑과 꿈과 마음'도 '아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분 '직업'이 무엇인가요? 저는 그분 이름도 모르고 직업도 모릅니다. 그분 직업이 교사나 교수인가요? 제가 쓰는 글을 그동안 죽 보셨으면, 제가 글을 쓰면서 '지식인-교사-교수' 이런저런 사람들을 빗대는 이야기를 흔히 쓰는 줄 '아시'겠지요. 누가 무슨 직업이건 무슨 대수이겠어요. 직업이 농사꾼이면 어떻고 작가이면 어떠하며 주부이면 어떠하겠어요.

살아가는 '본질'이 무엇이고, 살아가며 나눌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스스로 하루를 빚을 수 있고,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남을 다치게 할 수 없어요. 스스로 생채기를 입히고 입을 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