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살아가는 말 115] 언감

 

  겨울을 앞둔 늦가을에 자전거를 맨손으로 타니 손이 업니다. ‘언손’이 됩니다. 털신 아닌 고무신을 신고 자전거 발판을 밟으니 ‘언발’까지 됩니다. 한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다른 한손은 녹이며 자전거를 달리다가 생각합니다. 아마 국어사전에는 ‘언손’도 ‘언발’도 안 실리겠지요. 마을마다 이제 감알을 거의 다 땄습니다. 아직 감알 그대로 둔 집이 드문드문 있는데, 그리 멀지 않은 옛날에는 감알을 대롱대롱 매단 채 겨울을 맞이하기도 했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추운 겨울날 ‘언감’이 되면 새롭고 새삼스러운 먹을거리가 되거든요. 추운 날 추운 손을 비비며 꽁꽁 얼어붙은 감을 숟가락으로 파먹을 때에는 시골에만 있는 ‘얼음보숭이’가 되어요. 요즈음에는 집집마다 냉장고가 있어, 굳이 감나무에 감알 매단 채 언감 만들기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얼리는 칸에 말랑말랑 감알을 넣으면 하루도 안 되어 ‘얼린감’이 되어요. 그러니까, 지난날에는 감알이 스스로 얼어 ‘언감’이었다면, 오늘날에는 감알을 일부러 얼려서 ‘얼린감’이에요. 서울사람은 ‘냉동홍시’라느니 ‘아이스홍시’라느니, 시골사람으로서는 못 알아들을 말을 쓰기도 하던데, 나는 시골에서 언손 언발 언몸이 되면서 언감을 누립니다. 4345.11.26.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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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4] 사람읽기
― 사람은 어디에서 살아가는가

 


  어릴 적부터 내 둘레 어른들은 으레 ‘사람은 어디에서도 살 수 있다. 남극에서도 북극에서도 사막에서도 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땅속에서 햇볕을 안 쬐고도 살 수 있고, 사람은 물과 소금과 밥이 있으면 어디에서든 산다.’고 말했습니다. 곰곰이 헤아려 보면 이 말이 틀리지는 않구나 싶으면서도, 어딘가 영 내키지 않았어요. 어린 나는 이 말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딱히 어른들 말에 무어라 대꾸하지 못했어요.


  이제 나는 어른이 되어 우리 집 아이를 돌보기도 하고, 이웃 아이들을 마주하기도 합니다. 때때로 어린이 앞이나 푸름이 앞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합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는 나 스스로 어릴 적부터 궁금하게 여기며 스스로 길을 찾아나선 대목을 밝히곤 합니다. “사람은 어디에서라도 살 수 있다고들 말해요. 그런데 참말 사람은 어디에서라도 살 수 있을까 생각해 보셔요. 맞는 말일까요. 돼지는 차가운 시멘트바닥 조그마한 우리에서도 ‘목숨을 이을’ 수 있어요. 그렇지요? 그런데, 커다랗게 불어난 몸을 옴쭉달싹 못하며 조그마한 우리에 시멘트 차가운 바닥인 햇볕도 안 드는 곳에서 지내야 하는 돼지한테 ‘삶을 누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닭은 0.1평조차 안 되는 아주 좁은 데에 다닥다닥 붙은 채 밤에도 불빛을 받으며 잠을 못 자며 알을 낳아야 해요. 사료와 항생제를 먹으며 고작 한 달 만에 고기닭이 되기까지 해요. 이 닭한테도 ‘삶을 누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목숨을 이으’니 ‘산다’고 말할 만할까요?” 어린이나 푸름이 앞에서 이렇게 물어 봅니다. 어린이나 푸름이 스스로 삶길을 스스로 찾거나 헤아리기를 바라며 물어 봅니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모습이란 무엇이겠느냐고 저마다 슬기를 빛내어 깨닫기를 바라면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윽고 한 마디 붙입니다. “두 아이와 살아가는 어버이로서 생각해 보니, 사람은 숲 아니고서는 살아간다고 말할 수 없다고 느껴요. 그래서 우리 식구는 처음에는 인천이라는 도시에서 지내다가, 충청북도 멧골로 옮겨서 살았고, 다시 한결 깊은 시골인 전라남도 고흥으로 옮겨서 살아요. 숲을 누리는 데에서 살아야 비로소 사람답게 살아간다고 느끼거든요. 곧, 사람이 사람답게 목숨을 잇도록 북돋우는 숨결은 숲에서 비로소 푸르고 싱그러이 빛나는구나 싶어요. 어린 여러분이 먹는 모든 것, 어린 여러분이 입는 모든 것, 어린 여러분이 잠을 자거나 쉬는 모든 것, 이 모두는 바로 숲에서 얻어요. 연필 한 자루, 책 한 권, 종이 한 장, 모두 숲에서 자라던 나무한테서 얻어요. 마시는 물은 공장에서 뽑지 않아요. 수도물이건 먹는샘물이건 모두 정갈한 숲이 있는 시골에서 얻어요. 숲이 푸르게 빛날 때에 어린 여러분이 서울에서 살더라도 목숨을 이어요. 숲이 푸르게 빛나지 않으면 어린 여러분이 서울이나 시골에서 살더라도 목숨을 아름다이 잇는다고 할 수 없어요. 시골마을은 언제나 정갈해야 하고, 숲은 늘 푸르게 빛나야 해요. 시골에는 어떠한 위험·위해시설을 지어서는 안 돼요. 그렇지요? 시골에 발전소나 공장이나 골프장이나 고속도로나 공항이나 송전탑이나, 이런저런 시설을 지으면, 시골마을과 시골숲 모두 더러워지고, 시골마을과 시골숲이 더러워지면, 바로 어린 여러분이 먹고 입고 마시고 누리는 모든 것이 더러워진다는 뜻이에요.”


  아이들한테 참거짓을 슬기롭게 밝히는 어른이 늘어나기를 빕니다. 아이들 앞에서 참거짓을 슬기롭게 밝히며 스스로 참답게 살아가는 어른이 늘어나기를 빕니다. 사람은 ‘서울에서도 목숨을 잇는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목숨을 잇는대서 ‘살아간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느껴요. 서울에서 일자리를 얻거나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닌대서 ‘살아간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스스로 참삶을 누리며 느껴야 하고, 스스로 거짓삶이 무엇인가를 깨달으며 바로세울 수 있어야 해요. 4345.11.26.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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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demian 2012-11-26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댓글을 많이 다는 거 같습니다만..느낀 바가 있어서요..
삶을 누리는 게 아니면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없는 것..와 닿습니다. 나는 그저 삶을 사는 게 아닌 '누리고' 있는가? '누리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숲 아니면 살아갈 수 없다..비록 몸으론 아직 체험해보진 못했지만..이성적으로는 알 수 있죠. 사람으로서 동물생명 자체가 나무-숲이 내뿜는 산소가 없었다면 생존하지 못했을거예요..숲에 들어가면 평안감..사람과 깊이 연결되어 있는 듯 합니다.
도시적 삶에 대해서 완전히 회의적이신건가요? 저도 서울에 대해서..아파트에 대해서..마당도 없고 좁은 주택에 대해서..거리에 대해서 안좋게 생각하고 느낍니다만..좀 더 나은 도시 삶에 대해서는 구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도시의 공기가 주는 자유. 멜팅팟이 주는 관용과 다양함..의 긍정적인 이미지 때문에요.

파란놀 2012-11-26 20:04   좋아요 0 | URL
제 서재에서
[국어사전 뒤집기] 게시판이 있는데,
그곳에서 다음 글을 한번 읽어 보셔요.
http://blog.aladin.co.kr/hbooks/5945787
'서울(도시)'과 '시골'이라는 말밑을 풀이한 글이에요.

그리고 다음 글도 한번 읽어 보셔요.
http://blog.aladin.co.kr/hbooks/5785494
'숲'과 '자연'이라는 낱말을 다룬 글이에요.
'자연'이라는 한자말이 어떻게 생겨났고,
한국말로는 어떻게 나타내야 알맞는가를 따진 글이에요.

'숲'이란 바로 '자연'이에요.
그러니까, 고기를 먹든 풀을 먹든 물을 마시든,
모든 먹을거리는 다 자연(숲)에서 나왔어요.
자연 아닌 데에서 나온 것은 아무도 안 먹어요.
가공식품도 모두 자연에서 나온 것을 가공하거든요.

그런데 서울(도시)에서는 이러한 얼거리를
모두 무시하거나 등돌리기만 해요.
이렇게 되면, 서울(도시)에서 살더라도
'나다운 삶'을 못 찾고 말면서 쳇바퀴 톱니바퀴에 허덕이지요.

서울(도시)에서 살더라도, 즐거운 삶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하는데,
정작 서울(도시) 사는 사람 가운데 즐거운 보람을
누리거나 찾거나 나누는 이는 얼마나 될까 궁금해요.

여러 가지를 깊이 헤아릴 만큼 느긋하게 내 하루를 누리면
이 글에서 밝히려는 생각을 받아들이실 수 있으리라 믿어요.
 


 껍질 먹는 사람

 


  오늘날 숱한 사람들이 돼지껍데기를 참 잘 먹는다. 일부러 찾아서 먹기까지 한다. 그런데 능금껍질이나 포도껍질을 냠냠 우걱우걱 씹어서 먹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감껍질이나 배껍질은 아예 먹을 생각을 않는다고 느낀다. 풀약을 치지 않은 귤이라 하면 껍질째 즐겁게 먹을 수 있으나, 이를 깨닫거나 느끼는 사람은 훨씬 드물다.


  집에서는 어떤 열매이든 으레 껍질까지 먹는 우리 아이들인데, 바깥에 나가면 다른 사람들은 으레 껍질을 벗겨서 열매를 내놓는다. 능금껍질을 벗기나 감껍질을 깎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큰아이가 말한다. “껍질 다 먹는 건데.” “껍질 다 먹어요. 깎지 마요.” 다른 사람들은 다섯 살 큰아이가 읊는 이 말을 들으면서도 껍질을 다 벗기거나 깎는다. 아이가 읊는 말을 한참 듣고서야 겨우 ‘옛날부터 껍질도 다 먹던 삶’이었다고 떠올린다.


  그런데, 오늘날 숱한 사람들은 밥을 먹을 적에도 씨눈까지 다 깎아 새하얀 쌀밥을 먹지, 씨눈을 살린 누런 쌀밥을 먹지는 않는다. 겨가 붙은 쌀이라면 못 먹는 줄 여기기도 한다. 곡식이든 열매이든 알짜를 도려낸다. 숨을 살리는 알맹이가 무엇인 줄 돌아보지 못한다. 곡식과 열매에서는 껍질이 껍데기가 아니요, 속엣것이 알맹이가 아닌데, 이를 옳게 바라보지 못한다.


  서울에서는 곡식 껍질과 열매 껍질은 몽땅 쓰레기통으로 간다. 그나마 시골에서는 곡식 껍질이나 열매 껍질이 흙으로 돌아가 거름이 되기는 한다만. 4345.11.26.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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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삶에 한 줄, 해맑게 읽는 책 ― 가을바람 누리는 책읽기

 


  가을 어귀에 들어서면서 가을바람이 여름바람하고 사뭇 다릅니다. 12월이 되면, 가을을 떠나 보내는 바람이 선뜻선뜻 차가우면서 서늘하겠지요. 눈을 이끄는 눈바람일 수 있고, 겨울비 뿌리는 비바람일 수 있어요. 고흥 앞바다부터 부는 바람결에 고흥 시골마을 들판을 가득 채운 누런 벼가 뿜는 내음이 묻어납니다. 들에 서면 온몸이 벼내음으로 빛납니다. 가을햇살과 가을내음이 싱그럽습니다. 배부릅니다.


  남도기행 이야기를 첫 꼭지로 담는 박완서 님 여행산문집 《잃어버린 여행가방》(실천문학사,2005)을 읽습니다. 첫머리를 여는 글 11∼12쪽에 “친구의 잘못이었는지 고의였는지 광주에서 해남까지의 장거리도 직행버스도 못 타고 수도 없이 정거하는 그냥 시외버스를 타게 됐다. 그러나 그동안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조금도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해 온 여행은 과정을 무시한 목적지 위주의 여행이었다. 그게 얼마나 바보 여행이었던가를 알 것 같았다.”와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천천히 밑줄을 긋습니다. 누구라도 도시에 살면, 또 서울에 살면, 어디에서 어디까지 가장 빨리 가는 길을 찾습니다. 사람들이 자가용에 붙이는 ‘길찾기 기계(네비게이션)’는 으레 가장 빨리 달리는 길을 알려줍니다. 골목을 누린다든지, 냇물이나 숲을 누린다든지, 조용하며 한갓진 길을 누리도록 알려주지 않아요.


  서울에서 부산으로, 또 서울에서 목포로, 또 서울에서 여수로 신나게 달린다는 고속철도도 그래요. 사람들이 더 빨리 가고 싶다 하니까 고속철도가 생겨요. 모든 역을 두루 돌며 천천히 달리는 기차는 사라져요. 직행버스가 늘어나면서 완행버스는 줄어들어요. 완행버스가 줄어들면서 시골길은 호젓해지되, 사람들 눈·코·귀·입은 시골을 차츰 잊습니다. 사람들은 숲을 모릅니다. 나무를 만나지 못합니다.


  박노해 님이 쓴 시를 그러모은 두꺼운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느린걸음,2010)를 읽다가 〈무엇이 남는가〉라는 시를 오래도록 되읽습니다. 박노해 님은 “정치가에게 권력을 빼 보라 / 무엇이 남는가 // 부자들에게 돈을 빼 보라 / 무엇이 남는가 // 성직자에게 직위를 빼 보라 / 무엇이 남는가 // 지식인에게 명성을 빼 보라 / 무엇이 남는가 // 빼 버리고 남은 그것이 바로 그다 // 그리하여 다시 / 나에게 영혼을 빼 보라 / 나에게 사랑을 빼 보라 / 나에게 정의를 빼 보라 // 그래도 내가 여전히 살아 있다면 / 그래도 태연히 내가 살아간다면 // 나는 누구냐 / 나는 누구냐” 하고 노래합니다. 참말 나한테서 돈을 뺀다면 어떠할까요? 참말 나한테서 사랑을 뺀다면 어떠할까요? 돈을 뺄 때하고 사랑을 뺄 때에는 어떻게 다를까요? 둘 가운데 하나를 빼야 하는 갈림길에 선다면, 나는 돈과 사랑 가운데 나한테서 무엇을 빼면서 삶을 꾸릴 수 있을까요? 아니, 무엇을 빼거나 더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무엇을 찾거나 붙잡아서 누리는 삶이라 할까요?


  구드룬 파우제방 님이 쓴 청소년문학 《첫사랑》(양철북,2012)을 읽습니다. 211쪽에 “너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내가 얼마나 일찍 눈치챘는지 아니? 사랑은 완전히 가릴 수 없단다. 특히 너처럼 아주 젊은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은 온몸에서 행복을 발산하지.”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구드룬 파우제방 님은 1928년에 태어나셨으니 여든다섯 할머님입니다. 이 첫사랑 이야기는 1940년대에 독일이 이웃나라로 쳐들어가며 독일 젊은이가 이웃나라에서 애꿎게 죽고, 이웃나라 젊은이는 독일군한테 포로로 사로잡혀서 독일 시골이나 공장에서 부역을 해야 하던 일을 다룹니다. 누군가는 슬픈 전쟁을 일으키지만, 누군가는 맑은 사랑을 꿈꾸어요. 생각해 보면, 전쟁통에도 사랑을 꽃피우던 젊은 넋이 있어 이 지구별이 오늘날까지 이어질 수 있구나 싶어요. 사랑이 있었기에 아이들이 태어나고, 사랑이 있었기에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아끼며 보살폈겠지요.


  로저 디킨 님은 《나무가 숲으로 가는 길》(까치,2011)이라는 책 33쪽에서 “나무는 오랜 시간 동안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준다. 처음에는 우리가 그 나무를 베어 넘어뜨릴 때이고, 그 다음에는 싣고 올 때이며, 그 다음에는 톱질해서 장작으로 만들 때이다.” 하고 말합니다. 연필도 종이도 책도 모두 ‘나무’입니다. 편지종이도 편지봉투도 나무입니다. 가만히 보면, 종이돈도 나무라 할 만하고, 나무는 숲에서 벱니다. 우리는 어디에서나 숲을 누리는 사람이지만, 정작 숲을 잊는 사람이기도 하지 않나 싶어 고개를 갸우뚱해 봅니다. 가랑잎이 집니다. 뒤꼍 감나무와 뽕나무는 앙상한 몸으로 겨울을 맞이합니다. (4345.9.13.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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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 가수 새미 Dear 그림책
찰스 키핑 글 그림, 서애경 옮김 / 사계절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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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216

 


너는 서울에서 살아서 재미있니
― 길거리 가수 새미
 찰스 키핑 글·그림,서애경 옮김
 사계절 펴냄,2005.5.26./9500원

 


  서울에서 살아가기에 재미없는 나날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어디에서 살아가든 스스로 재미나는 꿈과 사랑이 있을 때에는, 스스로 재미나는 삶을 누리리라 느껴요. 서울에서 살아가든 고흥에서 살아가든, 내가 날마다 새롭게 맞이하는 하루를 즐거이 바라보지 못하거나 기쁘게 어루만지지 못한다면, 재미난 일은 나한테 찾아오지 않으리라 느껴요. 아니, 재미난 일이란 스스로 빚으니까, 스스로 너른 생각과 맑은 사랑과 푸른 꿈을 키워야겠지요.


  그런데, 서울에서 살아가며 스스로 너른 생각과 맑은 사랑과 푸른 꿈을 키우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궁금합니다. 어디에서 살아가든 스스로 생각과 사랑과 꿈으로 이야기를 지을 수 있으면 재미날 테지만, 막상 서울에서든 고흥에서든 스스로 이야기를 짓는 슬기를 빛내는 이는 너무 드물지 않느냐 싶어요.


  이야기꽃하고 자꾸 동떨어져요. 이야기샘하고 자꾸 멀어져요. 스스로 이야기꾸러미를 꾸리지 못해요.


  이야기빛을 영글 때에 삶빛이 환하고, 이야기열매를 나눌 적에 삶열매를 나누어요. 이야기사랑으로 삶사랑을 꽃피웁니다. 이야기꿈으로 삶꿈을 북돋웁니다.


  고흥 같은 시골에서는 아이들이 초·중·고등학교를 시골에서 다니며 서울바라기가 되도록 이끌어요.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가야 한다거나 서울에 있는 큰회사에 들어가야 한다고 내몰아요.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붙으면 학교나 읍내나 마을마다 걸개천을 내걸어요. ‘서울에 들어갔으니 축하한다’는 소리일 텐데, 아이들은 한 번 서울로 떠나면 한가위나 설날 때가 아니고는 고향마을로 돌아가는 일이 없어요. 서울에서 돈을 버느라 바쁘고, 서울에서 짝짓기를 하느라 바쁘며, 서울에서 일자리를 지키느라 바빠요.


  아이들은 꿈이 있어서 서울로 가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사랑이 있어서 서울로 가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서울로 가면 무언가 있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서울에 사람이 많으니, 뭐가 되든 되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이러한 생각조차 없이 서울로 떠나곤 합니다.


.. 동네 꼬마들과 개들도 흥에 겨워 새미를 따라다니며 춤을 춥니다. 새미에게 이곳은 천국이나 다름없습니다 ..  (3쪽)


  시골아이가 서울아이가 되는 흐름을 살피면, 시골아이는 태어나 자란 ‘주소’가 시골일 뿐, 정작 시골흙을 밟거나 시골숲을 누비거나 시골바다에서 헤엄친 일이 아주 드뭅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며 느긋하게 흙을 만지며 일하거나 놀지 못해요.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가서 비디오나 텔레비전을 볼 뿐입니다. 초등학교부터 교과서 수업에 바쁘고, 놀이를 한댔자 자전거를 탈 뿐이요, 또다시 텔레비전 앞에 앉습니다. 중학교부터 대입시험 굴레에 갇혀 늦도록 시험공부를 합니다. 이동안 시골 중·고등학교 아이들이 즐기는 놀이란 딱히 없습니다. 서로 모둠을 이루어 멧길을 오르거나 숲속놀이를 하지 않아요. 바다와 갯벌이 코앞에 있어도 바다를 누비거나 갯벌을 달리지 않아요.


  서울아이는 밤이 되어도 별이나 달을 보지 않습니다. 별이나 달이 안 보일 만큼 높은 건물이 빽빽할 뿐 아니라, 가게마다 등불이 훤하기 때문이지만, 서울어른 가운데 별이나 달을 사랑하면서 누리는 분이 매우 적어요. 곧, 서울어른 스스로 별이랑 달을 안 즐기니, 서울아이 또한 별이랑 달을 안 즐겨요. 시골아이도 이와 같아요. 시골어른 스스로 별이랑 달을 즐길 적에 시골아이도 별이랑 달을 즐겨요. 그러나, 시골어른 스스로 시골숲을 누리지 않는 나머지 시골아이 또한 ‘주소만 시골인 틀’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 아이들이나 이 어른들은 시골에 있든 서울에 있든 스스로 삶을 빚는 꿈과 사랑이 없어요. 스스로 재미난 하루를 열지 못해요.


..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관객들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없게 되었지요. 어마어마한 스타디움 공연에서 새미는 모래알처럼 작은 존재였고, 새미의 귀에는 어둠 속에서 관객들이 질러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관객들은 전혀 새미의 노래를 듣지 않는 듯했습니다 ..  (14쪽)


  그림책 《길거리 가수 새미》(사계절,2005)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길거리 가수 새미’는 도시에서 살아가며 노래를 불렀는데, 새미가 사는 도시는 좀 변두리라 할 만한 데입니다. 새미는 도시 변두리, 이를테면 골목동네 한켠에서 조용히 살아가며 노래를 즐겼고, 새미 둘레에는 새미가 부르는 노래를 함께 즐기는 벗이 있습니다. 그런데, 새미는 제 삶터를 한껏 누리지 않아요. ‘변두리’ 아닌 ‘한복판’을 바라요. 돈을 많이 벌고 이름을 높이 얻으며 힘을 실컷 거머쥐기를 바라요.


  이리하여 새미는 ‘길거리 가수’ 아닌 ‘큰무대 가수’가 됩니다. 자, 그러면, 새미는 삶이 즐거울까요. ‘큰무대 가수’가 되었으니 날마다 아름다운 꿈이랑 사랑을 즐길까요.


.. 비 오는 날, 새미는 공원에 앉아 제 처지를 속상해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문득 옛 친구들이 자기를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는 것을 깨달았지요. 순간 머릿속에 번뜩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새미 스트리트싱어는, 변함없이 혼자서도 노래하고 춤출 수 있는, 길거리 가수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  (29쪽)


  서울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바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바보스럽게 살아갈 때에 바보요, 스스로 슬기롭게 살아간다면 슬기쟁이입니다. 그래서 한 번 묻고 싶어요. “너는 서울에서 살아서 재미있니?” 하고. 재미가 있으면 무엇 때문에 재미있는지 다시 묻고 싶어요. 재미가 없으면 무엇 때문에 재미없는지 거듭 묻고 싶어요.


  서울에서 살며 재미있는 사람은 이 재미를 이웃 시골이나 도시하고 얼마나 예쁘게 나눌는지 궁금합니다. 서울에서 살며 재미없는 사람은 왜 재미없는 곳에 그대로 붙박아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아니, 서울사람은 ‘살아가는 재미’를 생각하는 하루를 보내는지 궁금합니다.


  별을 못 보는 삶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궁금합니다. 해를 못 쬐는 삶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궁금합니다. 무지개를 못 보는 삶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궁금합니다. 미리내를 못 보고, 뭉게구름을 못 보며, 제비와 사마귀를 못 보는 삶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궁금합니다.


  아이들이 자동차 걱정을 않고 신나게 뛰어놀 빈터와 흙땅이 없는 서울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궁금합니다. 어른들이 바람소리와 나무그늘을 누리며 막걸리 한 잔 즐길 만한 너른 마당이 없는 서울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궁금합니다. 아이들이 어버이와 풀을 뜯으면서 풀내음을 먹을 수 없는 서울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궁금합니다. 어른들이 스스로 씨앗을 심어 나무 한 그루 사랑할 손바닥만한 마당조차 건사할 수 없는 서울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궁금합니다. 4345.11.25.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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