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른입니까 4] 사람읽기
― 사람은 어디에서 살아가는가
어릴 적부터 내 둘레 어른들은 으레 ‘사람은 어디에서도 살 수 있다. 남극에서도 북극에서도 사막에서도 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땅속에서 햇볕을 안 쬐고도 살 수 있고, 사람은 물과 소금과 밥이 있으면 어디에서든 산다.’고 말했습니다. 곰곰이 헤아려 보면 이 말이 틀리지는 않구나 싶으면서도, 어딘가 영 내키지 않았어요. 어린 나는 이 말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딱히 어른들 말에 무어라 대꾸하지 못했어요.
이제 나는 어른이 되어 우리 집 아이를 돌보기도 하고, 이웃 아이들을 마주하기도 합니다. 때때로 어린이 앞이나 푸름이 앞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합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는 나 스스로 어릴 적부터 궁금하게 여기며 스스로 길을 찾아나선 대목을 밝히곤 합니다. “사람은 어디에서라도 살 수 있다고들 말해요. 그런데 참말 사람은 어디에서라도 살 수 있을까 생각해 보셔요. 맞는 말일까요. 돼지는 차가운 시멘트바닥 조그마한 우리에서도 ‘목숨을 이을’ 수 있어요. 그렇지요? 그런데, 커다랗게 불어난 몸을 옴쭉달싹 못하며 조그마한 우리에 시멘트 차가운 바닥인 햇볕도 안 드는 곳에서 지내야 하는 돼지한테 ‘삶을 누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닭은 0.1평조차 안 되는 아주 좁은 데에 다닥다닥 붙은 채 밤에도 불빛을 받으며 잠을 못 자며 알을 낳아야 해요. 사료와 항생제를 먹으며 고작 한 달 만에 고기닭이 되기까지 해요. 이 닭한테도 ‘삶을 누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목숨을 이으’니 ‘산다’고 말할 만할까요?” 어린이나 푸름이 앞에서 이렇게 물어 봅니다. 어린이나 푸름이 스스로 삶길을 스스로 찾거나 헤아리기를 바라며 물어 봅니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모습이란 무엇이겠느냐고 저마다 슬기를 빛내어 깨닫기를 바라면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윽고 한 마디 붙입니다. “두 아이와 살아가는 어버이로서 생각해 보니, 사람은 숲 아니고서는 살아간다고 말할 수 없다고 느껴요. 그래서 우리 식구는 처음에는 인천이라는 도시에서 지내다가, 충청북도 멧골로 옮겨서 살았고, 다시 한결 깊은 시골인 전라남도 고흥으로 옮겨서 살아요. 숲을 누리는 데에서 살아야 비로소 사람답게 살아간다고 느끼거든요. 곧, 사람이 사람답게 목숨을 잇도록 북돋우는 숨결은 숲에서 비로소 푸르고 싱그러이 빛나는구나 싶어요. 어린 여러분이 먹는 모든 것, 어린 여러분이 입는 모든 것, 어린 여러분이 잠을 자거나 쉬는 모든 것, 이 모두는 바로 숲에서 얻어요. 연필 한 자루, 책 한 권, 종이 한 장, 모두 숲에서 자라던 나무한테서 얻어요. 마시는 물은 공장에서 뽑지 않아요. 수도물이건 먹는샘물이건 모두 정갈한 숲이 있는 시골에서 얻어요. 숲이 푸르게 빛날 때에 어린 여러분이 서울에서 살더라도 목숨을 이어요. 숲이 푸르게 빛나지 않으면 어린 여러분이 서울이나 시골에서 살더라도 목숨을 아름다이 잇는다고 할 수 없어요. 시골마을은 언제나 정갈해야 하고, 숲은 늘 푸르게 빛나야 해요. 시골에는 어떠한 위험·위해시설을 지어서는 안 돼요. 그렇지요? 시골에 발전소나 공장이나 골프장이나 고속도로나 공항이나 송전탑이나, 이런저런 시설을 지으면, 시골마을과 시골숲 모두 더러워지고, 시골마을과 시골숲이 더러워지면, 바로 어린 여러분이 먹고 입고 마시고 누리는 모든 것이 더러워진다는 뜻이에요.”
아이들한테 참거짓을 슬기롭게 밝히는 어른이 늘어나기를 빕니다. 아이들 앞에서 참거짓을 슬기롭게 밝히며 스스로 참답게 살아가는 어른이 늘어나기를 빕니다. 사람은 ‘서울에서도 목숨을 잇는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목숨을 잇는대서 ‘살아간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느껴요. 서울에서 일자리를 얻거나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닌대서 ‘살아간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스스로 참삶을 누리며 느껴야 하고, 스스로 거짓삶이 무엇인가를 깨달으며 바로세울 수 있어야 해요. 4345.11.26.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