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 한 줄, 해맑게 읽는 책 ― 가을바람 누리는 책읽기

 


  가을 어귀에 들어서면서 가을바람이 여름바람하고 사뭇 다릅니다. 12월이 되면, 가을을 떠나 보내는 바람이 선뜻선뜻 차가우면서 서늘하겠지요. 눈을 이끄는 눈바람일 수 있고, 겨울비 뿌리는 비바람일 수 있어요. 고흥 앞바다부터 부는 바람결에 고흥 시골마을 들판을 가득 채운 누런 벼가 뿜는 내음이 묻어납니다. 들에 서면 온몸이 벼내음으로 빛납니다. 가을햇살과 가을내음이 싱그럽습니다. 배부릅니다.


  남도기행 이야기를 첫 꼭지로 담는 박완서 님 여행산문집 《잃어버린 여행가방》(실천문학사,2005)을 읽습니다. 첫머리를 여는 글 11∼12쪽에 “친구의 잘못이었는지 고의였는지 광주에서 해남까지의 장거리도 직행버스도 못 타고 수도 없이 정거하는 그냥 시외버스를 타게 됐다. 그러나 그동안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조금도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해 온 여행은 과정을 무시한 목적지 위주의 여행이었다. 그게 얼마나 바보 여행이었던가를 알 것 같았다.”와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천천히 밑줄을 긋습니다. 누구라도 도시에 살면, 또 서울에 살면, 어디에서 어디까지 가장 빨리 가는 길을 찾습니다. 사람들이 자가용에 붙이는 ‘길찾기 기계(네비게이션)’는 으레 가장 빨리 달리는 길을 알려줍니다. 골목을 누린다든지, 냇물이나 숲을 누린다든지, 조용하며 한갓진 길을 누리도록 알려주지 않아요.


  서울에서 부산으로, 또 서울에서 목포로, 또 서울에서 여수로 신나게 달린다는 고속철도도 그래요. 사람들이 더 빨리 가고 싶다 하니까 고속철도가 생겨요. 모든 역을 두루 돌며 천천히 달리는 기차는 사라져요. 직행버스가 늘어나면서 완행버스는 줄어들어요. 완행버스가 줄어들면서 시골길은 호젓해지되, 사람들 눈·코·귀·입은 시골을 차츰 잊습니다. 사람들은 숲을 모릅니다. 나무를 만나지 못합니다.


  박노해 님이 쓴 시를 그러모은 두꺼운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느린걸음,2010)를 읽다가 〈무엇이 남는가〉라는 시를 오래도록 되읽습니다. 박노해 님은 “정치가에게 권력을 빼 보라 / 무엇이 남는가 // 부자들에게 돈을 빼 보라 / 무엇이 남는가 // 성직자에게 직위를 빼 보라 / 무엇이 남는가 // 지식인에게 명성을 빼 보라 / 무엇이 남는가 // 빼 버리고 남은 그것이 바로 그다 // 그리하여 다시 / 나에게 영혼을 빼 보라 / 나에게 사랑을 빼 보라 / 나에게 정의를 빼 보라 // 그래도 내가 여전히 살아 있다면 / 그래도 태연히 내가 살아간다면 // 나는 누구냐 / 나는 누구냐” 하고 노래합니다. 참말 나한테서 돈을 뺀다면 어떠할까요? 참말 나한테서 사랑을 뺀다면 어떠할까요? 돈을 뺄 때하고 사랑을 뺄 때에는 어떻게 다를까요? 둘 가운데 하나를 빼야 하는 갈림길에 선다면, 나는 돈과 사랑 가운데 나한테서 무엇을 빼면서 삶을 꾸릴 수 있을까요? 아니, 무엇을 빼거나 더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무엇을 찾거나 붙잡아서 누리는 삶이라 할까요?


  구드룬 파우제방 님이 쓴 청소년문학 《첫사랑》(양철북,2012)을 읽습니다. 211쪽에 “너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내가 얼마나 일찍 눈치챘는지 아니? 사랑은 완전히 가릴 수 없단다. 특히 너처럼 아주 젊은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은 온몸에서 행복을 발산하지.”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구드룬 파우제방 님은 1928년에 태어나셨으니 여든다섯 할머님입니다. 이 첫사랑 이야기는 1940년대에 독일이 이웃나라로 쳐들어가며 독일 젊은이가 이웃나라에서 애꿎게 죽고, 이웃나라 젊은이는 독일군한테 포로로 사로잡혀서 독일 시골이나 공장에서 부역을 해야 하던 일을 다룹니다. 누군가는 슬픈 전쟁을 일으키지만, 누군가는 맑은 사랑을 꿈꾸어요. 생각해 보면, 전쟁통에도 사랑을 꽃피우던 젊은 넋이 있어 이 지구별이 오늘날까지 이어질 수 있구나 싶어요. 사랑이 있었기에 아이들이 태어나고, 사랑이 있었기에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아끼며 보살폈겠지요.


  로저 디킨 님은 《나무가 숲으로 가는 길》(까치,2011)이라는 책 33쪽에서 “나무는 오랜 시간 동안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준다. 처음에는 우리가 그 나무를 베어 넘어뜨릴 때이고, 그 다음에는 싣고 올 때이며, 그 다음에는 톱질해서 장작으로 만들 때이다.” 하고 말합니다. 연필도 종이도 책도 모두 ‘나무’입니다. 편지종이도 편지봉투도 나무입니다. 가만히 보면, 종이돈도 나무라 할 만하고, 나무는 숲에서 벱니다. 우리는 어디에서나 숲을 누리는 사람이지만, 정작 숲을 잊는 사람이기도 하지 않나 싶어 고개를 갸우뚱해 봅니다. 가랑잎이 집니다. 뒤꼍 감나무와 뽕나무는 앙상한 몸으로 겨울을 맞이합니다. (4345.9.13.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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