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짐

 


  여름에는 땀을 많이 흘리니, 자주 갈아입히려고 여러 벌 챙긴다. 겨울에는 옷이 두툼하니, 날마다 빨아 말려서 입힌다 생각하며 두어 벌만 챙긴다. 그런데 여름에나 겨울에나 가방 부피는 어슷비슷하다. 아이들 여름옷은 갯수가 많고, 아이들 겨울옷은 두께가 두껍다. 아이들 스스로 저희 옷가지를 저희 가방에 챙겨 들고 다닐 때까지 아버지 가방은 옷짐으로 가득가득 찰밖에 없다. 4345.12.5.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학교에 간 필리포크 - 지혜의 샘, 생각의 뿌리 톨스토이 어린이학교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알렉산드르 파호모프 그림, 이항재 옮김 / 에디터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215


우리 어디에서 살면 즐거울까
― 학교에 간 필리포크
 레프 톨스토이 글,알렉산드르 파호모프 그림,이항재 옮김
 에디터 펴냄,2011.11.30./15000원

 


  겨울에 찬물로 빨래를 하면 손이 매우 시립니다. 여름에 찬물로 빨래를 하면 온몸이 퍽 시원합니다. 겨울에 찬물로 설거지를 하면 손이 차갑게 굳습니다. 여름에 찬물로 설거지를 하면 몸이 시원스레 풀어집니다.


  겨울에는 따스하고 포근한 잠자리를 마련합니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널널한 잠자리를 마련합니다. 따스함과 시원함이 갈마들면서 풀도 흙도 사람도 새도 모두 한결 튼튼하거나 씩씩하게 삶을 꾸릴 수 있구나 싶습니다. 봄을 노래하고 여름을 즐기며 가을을 누리다가는 겨울을 포근히 쉬면서 삶을 일구는구나 싶어요.


  푸르게 빛나는 풀을 봄과 여름과 가을에 먹습니다. 추운 날씨에 건사할 수 있는 푸성귀를 겨우내 먹습니다. 푸르게 빛나는 풀은 흙기운을 맑은 물로 헹구어 냠냠짭짭 즐깁니다. 추운 날씨에 건사하는 푸성귀는 송송 썰어 뜨끈한 국으로 끓여 먹습니다. 맑은 물방울과 푸른 풀을 먹습니다. 보들보들한 푸성귀와 따끈한 국물을 먹습니다. 밥 한 그릇 내 몸으로 스며들어 오늘 하루 새 힘과 새 마음으로 살아내자는 생각이 샘솟습니다. 밥 한 그릇 알뜰히 차려 아이들과 반갑게 마주하며 먹습니다.


.. 나는 동생과 나들이할 적엔 손을 꼭 잡고 데리고 다녀요. 동생은 아직 키가 작고, 다리도 짧거든요 ..  (6쪽)


  어버이가 노래를 부르면 아이들이 좋아합니다. 어버이가 골을 부리면 아이들이 싫어합니다. 어버이가 손가락 꼬물꼬물 놀이를 하면 아이들이 재미있어 합니다. 어버이가 이맛살을 찡그리면 아이들이 멀리멀리 내뺍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아이들이 찾아옵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 아이들이 등을 돌립니다. 아니, 아이들은 사랑이 있건 없건 찾아가요. 사랑이 없다 싶으면 아이들은 저희 사랑을 나누어 줘요. 어른들은 사랑이 있어도 알아보지 않거나 느끼려 하지 않기도 하는데다가, 사랑만 있고 돈이 없으면 슬그머니 발을 빼곤 해요.

  아무래도 오늘날 물질문명 사회에서는 돈이 없으면 굶기 딱 좋아 돈을 바랄밖에 없을 텐데, 돈은 있되 사랑이 없으면 너무 메마르고 너무 쓸쓸하며 너무 차가운 나머지 내 마음이 꽁꽁 얼어붙지 않을까 싶습니다. 돈이 많아야 하지 않아요. 돈은 저마다 쓸 만큼 누리면 돼요. 사랑을 키워야 하고, 꿈을 북돋아야 하며, 믿음을 살찌울 노릇이에요. 밝은 달과 별을 즐기고, 따사로운 햇살을 누리며, 파랗게 눈부신 하늘과 하얗게 빛나는 구름을 껴안을 노릇이에요.


.. 바랴네 집에는 검은머리방울새가 있었어요. 새장 속 검은머리방울새는 한 번도 울지 않았어요. “새야, 넌 왜 노래하지 않니?” 바랴가 물었어요. 그러자 새가 말했어요. “날 새장에서 내보내 줘. 그럼 온종일 노래할게.” ..  (16쪽)


  서울에서 살건 시골에서 살건, 자, 하늘을 올려다봐요. 서울에서는 높직높직 아파트와 건물 너무 많아 하늘이 잘 안 보이나요. 하늘이 아주 조금만 보이나요. 저 하늘에는 별이 아주 많아요. 서울에서라면, 또 부산이나 대구처럼 커다란 도시에서라면 달 빼고는 보이는 별이 거의 없을 테지만, 매캐한 먼지에 막혀 우리 눈에만 안 보일 뿐, 틀림없이 저 우주에서 환하게 빛나는 별이 흐드러져요. 끝없이 끝없이 온갖 우주가 펼쳐져요.


  바다를 바라봐요. 서울에서거는, 또 인천이나 울산 같은 커다란 도시에서는 바다 구경조차 만만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가만히 바다를 마음속에 그려 봐요. 바닷속에 어떤 물고기가 살고 어떤 풀이 자라며 어떤 흙과 모래가 있는지 곰곰이 그려 봐요. 바다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그려요. 바다가 숨쉬는 결을 느껴요. 고래가 춤추고 새우가 노래하는 소리를 들어요. 오징어가 날고 거북이가 장구를 치는 모습을 느껴요. 우리 눈으로는 저 깊고 너른 바다를 들여다볼 수 없다지만, 틀림없이 저 깊디깊은 바닷속에서 맑게 빛나는 숨결이 가득해요. 가없이 가없이 온갖 이야기가 넘실거려요.


  흙을 만져요. 조그마한 흙알갱이 하나를 만져요. 이 흙은 사람을 살리고 짐승을 살리며 풀과 나무를 살려요. 아주 조그마한 흙알갱이 하나라 하지만, 요 조그마한 흙알갱이에 깃든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숨결’이 수천만 수억이 있다고 해요. 아마, 사람 잣대로는 헤아릴 수 없는 더 많은 작은 숨결이 수조 수천조 있을 수 있어요.


  졸졸 흐르는 냇물을 두 손으로 떠요. 냇물 냄새를 살며시 맡아요. 그러고는 입으로 살짝살짝 마셔요. 혀끝으로 맛을 보고 온몸으로 기운을 받아들여요. 물은 물이거든요. 물은 비닐병에 담겨야 물이 아니고, 물은 수도꼭지를 틀어야 물이 아니에요. 물은 흐르기에 물이에요. 사람이든 짐승이든 푸나무이든, 흐르는 물을 마실 때에 목숨이 살아나요. 땅에서 땅으로 흐르는 물이요, 하늘에서 땅으로 흐르는 물이에요. 우리가 빗물을 즐거이 마실 수 없다면, 어느덧 삶은 삶이 아니게 뒤틀렸다는 소리가 돼요.


.. 우리 집엔 암탉이 여섯 마리나 있어요. 이른아침에 닭에게 모이를 줍니다. 나는 “구구, 구구!” 닭을 소리쳐 부르며, 땅 위에 알곡을 흩뿌리지요 ..  (52쪽)


  노래하며 떠들던 아이들이 잠듭니다. 노래 한 가락 더, 더, 더, 하며 바라던 아이들이 새근새근 잠들어 콧소리 색색 냅니다. 고운 노래 부르며 잠든 아이들은 꿈나라에서도 고운 노래 부르며 훨훨 납니다. 맑은 목소리로 까르르 웃던 아이들은 꿈누리에서도 맑은 목소리 나누며 신나게 뛰고 구릅니다.


  학교는 배우는 곳입니다. 집은 살아가는 곳입니다. 학교는 꿈을 배우는 곳입니다. 집은 사랑으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지식을 다루는 곳은 학교가 될 수 없습니다. 아마, 학원쯤 되겠지요. 겉치레를 따지는 곳은 집이 될 수 없습니다. 글쎄, 겉치레에 휘둘리는 곳은 무어라 해야 알맞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길을 걸으며 아름다운 꿈을 꽃피울까 하고 생각하며 동무들과 어깨동무하는 학교입니다. 어떤 삶을 일구며 아름다운 사랑을 씨뿌리고 갈무리해서 나눌까 하고 헤아리며 이웃들과 손을 맞잡는 집입니다.


  레프 톨스토이 님은 글을 쓰고 알렉산드르 파호모프 님은 그림을 그려, 《학교에 간 필리포크》(에디터,2011)라는 그림책 하나 태어납니다. 필리포크라는 어린 아이는 저희 형을 따라 학교에 놀러가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며 무엇을 배웠을까요. 필리포크라는 아이는 집에서 저희 어버이와 어떤 삶을 누리며 어떤 사랑을 곱게 누릴까요.


.. 할머니에게 손녀가 있었어요. 예전에는 손녀가 어려서 늘 잠만 잤어요. 할머니는 손녀를 위해 빵을 굽고, 방을 쓸고 닦고, 바느질하고, 실을 잣고, 옷감을 짜셨습니다. 세월이 지나서, 할머니가 늙어 페치카 위에 누워 늘 잠만 주무셨어요. 이제 손녀가 할머니를 위해 빵을 굽고, 방을 쓸고 닦고, 실을 잣고, 옷감을 짭니다 ..  (54쪽)


  어디에서 살아가면 즐거울까 생각합니다. 무엇을 하며 사랑하면 기쁠까 생각합니다. 누구랑 꿈을 꿀 때에 아름다울까 생각합니다. 어떠한 빛을 가슴에 품고 하루를 누릴 때에 내 얼굴에 웃음꽃 피어날까 생각합니다.


  마음껏 놀 수 있는 학교가 반갑습니다. 실컷 일하고 쉬고 어울리고 노래할 수 있는 집이 살갑습니다. 개구지게 뛰놀 수 있는 학교를 기다립니다. 아름답게 사랑할 수 있는 집을 천천히 짓습니다. 4345.12.5.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겹말 손질 335 : 부정적으로 나쁜


현대에는 고독을 부정적이고 나쁜 것으로 보는 경향이 강한 것도 같지만
《야마오 산세이/김경인 옮김-애니미즘이라는 희망》(달팽이,2012) 30쪽

 

  ‘현대(現代)’ 같은 한자말은 굳이 손질하지 않아도 되리라 느낍니다만, 글흐름을 살피면 ‘오늘날’이나 ‘요사이’나 ‘요즈음’으로 손질할 수 있어요. ‘고독(孤獨)’은 ‘외로움’으로 손보고, ‘경향(傾)’은 ‘흐름’이나 ‘눈길’이나 ‘생각’으로 손봅니다. “강(强)한 것도 같지만”은 “센 듯도 보이지만”이나 “드센 듯하지만”이나 “짙은 듯하지만”으로 다듬는데, 앞말을 묶어 “나쁘다고 보는 듯도 하지만”이나 “나쁘다고 보는구나 싶지만”이나 “나쁘다고 보는 흐름이 짙지만”처럼 새롭게 쓸 수 있어요.


  ‘부정적(否定的)’은 “(1) 그렇지 아니하다고 단정하거나 옳지 아니하다고 반대하는 (2) 바람직하지 못한”을 뜻하는 한자말입니다. 이 자리에서는 (2) 뜻으로 썼구나 싶은데, ‘부정적’은 으레 ‘긍정적’과 맞서는 자리에 나타납니다. 쉽게 말하자면 ‘나쁜-좋은’ 꼴로 서로 맞서는 자리에 나타나는 낱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보기글에서는 ‘부정적(否定的)’과 ‘나쁜’이라는 낱말이 겹으로 쓰인 셈이에요.

 

 부정적이고 나쁜 것으로 보는
→ 바람직하지 않고 나쁘다고 보는
→ 나쁘다고 보는
→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는
→ 좋지 않다고 보는
→ 어둡거나 나쁘게 보는
 …

 

  “부정적이고 나쁜”이 겹말이듯 “긍정적이고 좋은” 또한 겹말입니다. 일부러 더 세게 말하고 싶어 이렇게 겹말을 쓸 수 있습니다만, 어떤 모습을 여러 갈래로 살피며 나타내려 했다면, “어둡거나 나쁘게 보는”이라든지 “안쓰럽거나 나쁘게 보는”처럼 뜻이나 느낌이 다른 낱말을 넣을 때가 한결 나으리라 생각해요. 4345.12.5.물.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요즈음에는 외로움을 어둡고 나쁘다고 보는 듯하지만

 

(최종규 . 20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혼인잔치 꽃다발 책읽기

 


  혼인잔치 꽃다발을 부케(bouquet)라고들 하는데, 이 낱말이 프랑스말인 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프랑스말이라 나온다. 시집을 가고 장가를 드는 사람들은 이 낱말뜻을 헤아려 보곤 할까. 국어사전 말풀이를 살피면 “신부가 손에 드는 작은 꽃다발”을 일컫는단다. 그러면, 한국말로는 ‘신부 꽃다발’쯤 될까. 이러한 모습 그대로 ‘신부 꽃다발’이라 할 만하고, ‘사랑꽃다발’이라든지 ‘예쁜꽃다발’이라든지 ‘꿈꽃다발’처럼 새 이름을 애틋하게 붙일 수 있으리라.


  신부가 되는 사람이 꽃다발을 던진다. 곧 신부가 되겠다는 사람이 꽃다발을 받는다. 꽃다발은 꽃내음 물씬 풍기며 하늘을 난다. 신부가 된 사람도, 곧 신부가 될 사람도 모두 꽃답다. 굳이 꽃을 들지 않아도 되지만, 꽃은 어디에나 있기에 어디를 가든 저마다 꽃내음을 담뿍 느낄 테지. 조그마한 꽃송이도 함박만 한 꽃송이도 모두 어여쁜 꽃이다. 노란 꽃도, 붉은 꽃도, 파란 꽃도, 모두 아리따운 꽃이다.


  아이들은 풀숲에 가면 으레 꽃송이를 하나둘 따서 조그마한 손에 조그마한 꽃송이를 다발처럼 잔뜩 쥐면서 논다. 가시내도 사내도 꽃밭에서 꽃이 되어 뛰논다. 아이들은 꽃을 따지 않아도 꽃다운 빛과 무늬가 맑고, 저마다 손과 손에 꽃송이묶음을 들지 않아도 꽃내음 물씬 풍긴다.


  꽃다발을 받지 않아도 내 손에는 꽃물이 든다. 꽃다발을 건네지 않아도 내 가슴에는 꽃사랑이 흐른다. 4345.12.4.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평화시장 마이노리티 시선 5
이한주 지음 / 갈무리 / 200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깨동무하는 내 이웃
[시를 노래하는 시 35] 이한주, 《평화시장》

 


- 책이름 : 평화시장
- 글 : 이한주
- 펴낸곳 : 갈무리 (2000.3.10.)
- 책값 : 5000원

 


  장모님과 옆지기는 김치를 담그느라 부산하고, 아이들은 뛰노느라 바쁩니다. 장모님과 옆지기는 김치를 담그면서 김치내음이 온몸에 흠뻑 배고, 아이들은 뛰놀면서 땀내음이 온몸에 물씬 뱁니다.


  나한테는 어떤 내음이 날까 생각해 봅니다. 밥을 먹으면 밥내음이 날 테고, 술을 마시면 술내음이 날 테지요. 떡을 먹으면 떡내음이 날 테며, 두부를 먹으면 두부내음이 나겠지요.


  풀을 즐겨먹는 사람한테서는 풀내음이 납니다. 고기를 즐겨먹는 사람한테서는 고기내음이 납니다. 흔히, 세겹살 구워먹은 다음 옷에 고기내음이 밴다고들 말하지만, 옷에만 고기내음이 배지 않아요. 온몸에 고기내음이 배어요. 왜냐하면, 내가 먹은 세겹살은 내 뱃속을 거쳐 내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거든요. 세겹살은 내가 되고, 나는 세겹살이 돼요. 그러니까 스스로 사람이라고 느낀다면 아무것이나 먹을 수 없어요. 화학조미료를 먹는 사람은 스스로 화학조미료가 됩니다. 자동차 배기가스를 먹는 사람은 스스로 자동차 배기가스가 됩니다. 발전소 매캐한 매연을 먹는 사람은 매캐한 매연이 되고 말아요.


  먹는 대로 내가 그 모습이 되듯, 보는 대로 내가 그 모습이 됩니다. 듣는 대로 내가 그 모습이 되고, 생각하는 대로 내가 그 모습이 돼요.

  스스로 아름다운 삶을 바란다면, 스스로 ‘어떤 모습인 삶일 때에 아름다운가’ 하고 생각해야 해요. 스스로 아름다운 삶을 생각한 다음, 이 아름다운 모습을 누리고 돌보며 가꿀 수 있을 만한 보금자리를 찾아 즐겁게 일구어야 합니다.


.. 아침 아홉시에 출근하면 / 다음날 아홉시에 퇴근하고 / 아침 아홉시에 퇴근하면 / 비가 오나 눈이 오나 / 일요일이나 빨간날이나 / 또 그 다음날 아홉시에 출근해야 하는 / 똑딱똑딱 / 스물네 시간 맞교대 / 내가 일하는 날은 / 비가 오지 말아야 하고 / 너무 춥거나 덥지도 말아야 하고 / 가을, 단풍이 너무 흐드러지지 말아야 한다 / 이틀 중 하루는 / 친구나 선배나 후배나 친척들 누구라도 / 아프지도 말며 결혼도 하지 말고 / 그 하찮은 모임도 하지 말아야 한다 ..  (스물네 시간 맞교대 나는)


  의사 집안에서는 의사가 나옵니다. 공장 노동자 집안에서는 공장 노동자가 태어납니다. 농사꾼 집안에서는 농사꾼이 태어납니다. 정치꾼 집안에서는 정치꾼이 태어납니다. 늘 보고 자란 대로 배웁니다. 언제나 마주하며 살아온 대로 젖어듭니다.


  의사 집안이 더 거룩하지 않고, 공장 노동자 집안은 덜 떨어지지 않습니다. 높고 낮은 직업이나 신분이나 계급이 없다고 말하는 민주주의 사회라 한다면,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의사가 되든, 공장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공장 노동자가 되든 대수롭지 않아요. 이 나라가 참말 민주주의 사회가 맞아, 평화와 평등이 꽃피우는 아름다운 삶터라 한다면, 농사꾼 집안에서 자라며 농사꾼 일을 하든, 정치꾼 집안에서 자라며 정치꾼 일을 하든 대단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가장 아름답다고 여기는 길을 걸어가면서 제 넋과 사랑과 꿈을 보듬으면 넉넉합니다.


.. 자르고 깁고 다리고 / 누이들의 눈물로 흐르던 / 복개천의 폐수를 알기에는 / 호기심보다 키가 작았을 무렵 / 발 밑에 돌을 얹어 놓고 / 까치발하며 몰래 넘겨보던 평화시장은 / 빨강 초록 옷가지보다 / 구경거리가 더 많이 널린 / 온통 내 희망이었습니다 ..  (사랑법 8―청계천 평화시장)


  나는 고운 이웃하고 어깨동무합니다. 나 스스로 이녁한테 고운 이웃이 되고 싶거든요. 나는 착한 동무하고 어깨동무합니다. 나 스스로 당신한테 착한 동무가 되고 싶어요. 나는 참된 살붙이하고 어깨동무합니다. 나 스스로 우리 살붙이하고 오순도순 얼크러지는 참된 삶을 누리고 싶어요.


  빛을 바라보는 사람은 빛을 바라봅니다. 어둠을 바라보는 사람은 어둠을 바라봅니다. 꿈을 바라보는 사람은 꿈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오늘날 도시 물질문명 사회처럼, 모두들 돈을 바라보도록 내모는 곳에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돈만 바라보면서 막상 스스로 어떤 모습인지를 돌아보지 못해요.


  돈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돈은, 그예 돈입니다. 돈은, 물건을 사거나 팔 때에 주고받는 이음고리입니다. 책 한 권을 장만할 적에 돈을 치릅니다. 책 한 권을 만들 적에 돈을 치릅니다. 스스로 돈을 좋다고 여기거나 나쁘다고 여기면, 그만 ‘돈수렁’에 빠집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돈이기에, 꾸밈없이 돈을 돈대로 바라보며 마주하기만 하면 돼요.


  우리 식구들 살아가는 시골숲을 바라보면서 늘 똑같이 여깁니다. 시골숲이라서 더 좋지 않고 굳이 나쁘지 않습니다. 좋거나 나쁘다는 말마디로 시골숲을 금그을 수 없어요. 시골숲은 시골숲이에요. 풀이 자라고 나무가 크며 새들이 둥지를 트는 시골숲입니다. 하늘빛 파란 무늬를 눈부시게 올려다보는 시골숲입니다. 냇물이 쪼르르 흐르며 맑은 기운 뽐내는 시골숲입니다. 기름진 흙에 온갖 풀이 마음껏 자랍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갖은 풀벌레가 노래합니다. 개구리도 뱀도 시골숲에 구멍을 파고 들어가 겨울잠을 잡니다. 시골숲은 사람이 먹고사는 밑바탕이 됩니다. 시골숲은 모든 짐승을 살찌우는 밑터가 됩니다. 시골숲은 어떤 풀이나 나무라 하더라도 넉넉히 껴안아 품에 보듬는 밑자리가 됩니다.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울타리를 씌울 수 없는 시골숲은 바다와 같습니다. 바다는 너른 멧골과 같습니다. 너른 멧골은 푸른 들판과 같습니다. 푸른 들판은 파랗게 빛나는 하늘과 같습니다.


.. 동대문 지하철역 다번 출구 계단을 오르다 보면 수원행 막차가 지날 때까지 개떡쑥떡팥떡을 풍채만큼 넉넉하게 팔고 계시는 아주머니가 계실 거예요 오실 때쯤이면 누런 변또에 김치뿐인 점심을 드실 시간이겠군요 살짝 목례라도 하고 계단을 마저 오르면 한일은행이 보이지요 은행 옆길, 언제나 개나리처럼 노오랗게 웃어주시는 김씨 아주머니의 꽃집을 따라 고사리 손등처럼 오막조막 시장이 펼쳐지지요. 과일가게 대원식당 구두가게 옷가게 창신이발관 떡볶이집이 숨차게 놓여 있고요 마주보는 떡집과 옷가게 사이 파도 팔고 고등어도 팔고 떨이 사과도 파는 손수레들이 노란색 중앙선으로 옹기종기 모여 점심을 들고 있지요 ..  (창신동―평화의 집)


  나와 어깨동무하는 이웃은 누구인지 헤아려 봅니다. 나를 둘러싼 이웃은 누구일까 생각해 봅니다. 내 이웃은 어떤 숨결일까요. 내 이웃과 이웃한 다른 이웃은 어떤 꿈결일까요. 저마다 어떠한 마음 되어 어떠한 노래를 부르는 하루를 누릴까요.


  도시는 나쁘고 시골은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거꾸로, 도시는 좋고 시골은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도시는 도시일 뿐이요, 시골은 시골일 뿐입니다. 그저, 도시에서 살든 시골에서 살든, 도시는 어떤 곳이며 시골은 어떤 곳인가를 제대로 알아야 할 뿐입니다.


  도시는 시골을 빨아먹으며 목숨을 잇습니다. 도시는 모든 땅뙈기를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덮습니다. 도시에는 발전소나 공장 같은 위해·위험시설을 들이지 않습니다. 발전소나 공장 같은 위해·위험시설은 몽땅 도시 바깥이나 시골에 세웁니다.


  도시에는 논밭을 두지 않습니다. 도시는 논밭을 파헤쳐 아파트나 건물로 바꿉니다. 도시는 시골 논밭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나 기찻길이나 공항을 자꾸자꾸 새로 짓습니다. 도시는 도시를 키우려고 시골을 망가뜨리고, 도시와 도시를 잇는다며 시골을 허물어뜨립니다.


  도시는 스스로 먹을거리를 빚지 못해요. 시골에서 먹을거리를 사다가 실어 날라야 합니다. 한국땅에서는 한국 시골에서든 아니면 중국이나 칠레나 필리핀 시골에서든, 먹을거리를 돈을 치러 사다가 실어 날라야 합니다.


  도시는 학교를 짓습니다. 도시에 지은 학교는 아이들이 언제까지나 도시에 남아 도시 회사원이나 공무원이나 장사꾼이 되도록 길들입니다. 도시에 지은 학교 가운데 아이들이 시골숲으로 깃들며 흙을 일구거나 나무를 아끼라고 가르치는 데는 없습니다. 대학교에서도 중·고등학교에서도 초등학교에서도, 시골 어린이집에서까지도, 아이들한테 농사짓기를 가르치는 데는 없어요.


  시골은 햇살이 있고 바람이 있으며 풀과 나무가 있는 데입니다. 시골은 무지개가 뜨고 뭉게구름이 피어나며 미리내가 노래하는 데입니다. 시골은 냇물을 두 손으로 떠서 마시는 데요, 맨발로 흙을 밟으며 새 숨결을 빛내는 데입니다.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틀로 도시와 시골을 바라볼 까닭이 없습니다. 도시 속살과 시골 속내를 꾸밈없이 올바로 들여다보면서 ‘스스로 어떤 이웃과 어깨동무하며 살아가고 싶은가’를 슬기롭게 깨달아야 할 뿐입니다.


.. 팽이처럼 / 밖으로 밖으로만 나돌다가 / 두루루 / 앞치마를 두르고 / 저녁밥을 짓는다 / 감자도 볶고 / 시금치도 무치고 / 국만 끓으면 / 밥상 가득 들어찰 / 모처럼만의 안식에 / 진득허니 끓어야 한다던 / 콩나물국을 / 몇 번이고 엿보다 ..  (신혼일기 3―일요일)


  이한주 님 시를 갈무리한 《평화시장》(갈무리,2000)을 읽습니다. 이한주 님은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서울에서 노동시를 쓰는 길을 걷습니다. 서울사람으로서 바라보고 느끼며 생각하는 이야기를 시 하나로 갈무리합니다.


  이한주 님 시는 ‘좋거나 나쁘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저 이한주 님 삶을 드러냅니다. 이한주 님 시는 ‘아름답거나 안 아름답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예 이한주 님 넋을 나타냅니다. 이한주 님 시는 ‘읽을 만하거나 안 읽을 만하거나’ 하지 않아요. 온삶 그대로 이한주 님 꿈을 보여줘요.


.. 가난보다 / 서너 발짝 앞서 오는 겨울이 / 발을 뻗어 / 창신동 아랫목에 / 잠시 머무는 사이 / 동화처럼 / 눈이 내리고 / 비탈길, / 아이들은 / 햇살을 주워 봄이 된다 ..  (겨울)


  우리 집 아이들이 까르르 웃고 떠들며 노래합니다. 우리 집 아이들은 시골집에서건, 도시로 마실 나온 뒤 찾아가는 아파트나 여러 층짜리 건물에서건 신나게 쿵쿵쾅쾅 뛰고 놉니다. 아래층에 발소리를 내건 위층에 노랫소리를 내건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저희 마음속에서 터져나오는 소리를 신나게 터뜨립니다. 아이들은 저희 가슴속에서 샘솟는 몸짓을 흐드러지게 뽑아냅니다.


  우리 이웃 아이들도 개구지게 뛰놀 수 있기를 빕니다. 우리 이웃 아이들 누구나 목청껏 소리질러 노래를 부르고, 온몸이 부서져라 뜀박질을 하면서 들과 멧골과 숲과 바다에서 흙투성이 개구쟁이가 되기를 빕니다.


  재미나게 놀며 자란 아이들은 재미나게 일하며 어깨동무하는 어른이 돼요. 신나게 놀며 큰 아이들은 신나게 일하며 어깨동무하는 어른이 돼요. 사랑스레 놀며 손을 맞잡는 아이들은 사랑스레 일하며 어깨동무하는 살가운 어른이 돼요. 4345.12.4.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