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시장 마이노리티 시선 5
이한주 지음 / 갈무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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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동무하는 내 이웃
[시를 노래하는 시 35] 이한주, 《평화시장》

 


- 책이름 : 평화시장
- 글 : 이한주
- 펴낸곳 : 갈무리 (2000.3.10.)
- 책값 : 5000원

 


  장모님과 옆지기는 김치를 담그느라 부산하고, 아이들은 뛰노느라 바쁩니다. 장모님과 옆지기는 김치를 담그면서 김치내음이 온몸에 흠뻑 배고, 아이들은 뛰놀면서 땀내음이 온몸에 물씬 뱁니다.


  나한테는 어떤 내음이 날까 생각해 봅니다. 밥을 먹으면 밥내음이 날 테고, 술을 마시면 술내음이 날 테지요. 떡을 먹으면 떡내음이 날 테며, 두부를 먹으면 두부내음이 나겠지요.


  풀을 즐겨먹는 사람한테서는 풀내음이 납니다. 고기를 즐겨먹는 사람한테서는 고기내음이 납니다. 흔히, 세겹살 구워먹은 다음 옷에 고기내음이 밴다고들 말하지만, 옷에만 고기내음이 배지 않아요. 온몸에 고기내음이 배어요. 왜냐하면, 내가 먹은 세겹살은 내 뱃속을 거쳐 내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거든요. 세겹살은 내가 되고, 나는 세겹살이 돼요. 그러니까 스스로 사람이라고 느낀다면 아무것이나 먹을 수 없어요. 화학조미료를 먹는 사람은 스스로 화학조미료가 됩니다. 자동차 배기가스를 먹는 사람은 스스로 자동차 배기가스가 됩니다. 발전소 매캐한 매연을 먹는 사람은 매캐한 매연이 되고 말아요.


  먹는 대로 내가 그 모습이 되듯, 보는 대로 내가 그 모습이 됩니다. 듣는 대로 내가 그 모습이 되고, 생각하는 대로 내가 그 모습이 돼요.

  스스로 아름다운 삶을 바란다면, 스스로 ‘어떤 모습인 삶일 때에 아름다운가’ 하고 생각해야 해요. 스스로 아름다운 삶을 생각한 다음, 이 아름다운 모습을 누리고 돌보며 가꿀 수 있을 만한 보금자리를 찾아 즐겁게 일구어야 합니다.


.. 아침 아홉시에 출근하면 / 다음날 아홉시에 퇴근하고 / 아침 아홉시에 퇴근하면 / 비가 오나 눈이 오나 / 일요일이나 빨간날이나 / 또 그 다음날 아홉시에 출근해야 하는 / 똑딱똑딱 / 스물네 시간 맞교대 / 내가 일하는 날은 / 비가 오지 말아야 하고 / 너무 춥거나 덥지도 말아야 하고 / 가을, 단풍이 너무 흐드러지지 말아야 한다 / 이틀 중 하루는 / 친구나 선배나 후배나 친척들 누구라도 / 아프지도 말며 결혼도 하지 말고 / 그 하찮은 모임도 하지 말아야 한다 ..  (스물네 시간 맞교대 나는)


  의사 집안에서는 의사가 나옵니다. 공장 노동자 집안에서는 공장 노동자가 태어납니다. 농사꾼 집안에서는 농사꾼이 태어납니다. 정치꾼 집안에서는 정치꾼이 태어납니다. 늘 보고 자란 대로 배웁니다. 언제나 마주하며 살아온 대로 젖어듭니다.


  의사 집안이 더 거룩하지 않고, 공장 노동자 집안은 덜 떨어지지 않습니다. 높고 낮은 직업이나 신분이나 계급이 없다고 말하는 민주주의 사회라 한다면,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의사가 되든, 공장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공장 노동자가 되든 대수롭지 않아요. 이 나라가 참말 민주주의 사회가 맞아, 평화와 평등이 꽃피우는 아름다운 삶터라 한다면, 농사꾼 집안에서 자라며 농사꾼 일을 하든, 정치꾼 집안에서 자라며 정치꾼 일을 하든 대단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가장 아름답다고 여기는 길을 걸어가면서 제 넋과 사랑과 꿈을 보듬으면 넉넉합니다.


.. 자르고 깁고 다리고 / 누이들의 눈물로 흐르던 / 복개천의 폐수를 알기에는 / 호기심보다 키가 작았을 무렵 / 발 밑에 돌을 얹어 놓고 / 까치발하며 몰래 넘겨보던 평화시장은 / 빨강 초록 옷가지보다 / 구경거리가 더 많이 널린 / 온통 내 희망이었습니다 ..  (사랑법 8―청계천 평화시장)


  나는 고운 이웃하고 어깨동무합니다. 나 스스로 이녁한테 고운 이웃이 되고 싶거든요. 나는 착한 동무하고 어깨동무합니다. 나 스스로 당신한테 착한 동무가 되고 싶어요. 나는 참된 살붙이하고 어깨동무합니다. 나 스스로 우리 살붙이하고 오순도순 얼크러지는 참된 삶을 누리고 싶어요.


  빛을 바라보는 사람은 빛을 바라봅니다. 어둠을 바라보는 사람은 어둠을 바라봅니다. 꿈을 바라보는 사람은 꿈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오늘날 도시 물질문명 사회처럼, 모두들 돈을 바라보도록 내모는 곳에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돈만 바라보면서 막상 스스로 어떤 모습인지를 돌아보지 못해요.


  돈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돈은, 그예 돈입니다. 돈은, 물건을 사거나 팔 때에 주고받는 이음고리입니다. 책 한 권을 장만할 적에 돈을 치릅니다. 책 한 권을 만들 적에 돈을 치릅니다. 스스로 돈을 좋다고 여기거나 나쁘다고 여기면, 그만 ‘돈수렁’에 빠집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돈이기에, 꾸밈없이 돈을 돈대로 바라보며 마주하기만 하면 돼요.


  우리 식구들 살아가는 시골숲을 바라보면서 늘 똑같이 여깁니다. 시골숲이라서 더 좋지 않고 굳이 나쁘지 않습니다. 좋거나 나쁘다는 말마디로 시골숲을 금그을 수 없어요. 시골숲은 시골숲이에요. 풀이 자라고 나무가 크며 새들이 둥지를 트는 시골숲입니다. 하늘빛 파란 무늬를 눈부시게 올려다보는 시골숲입니다. 냇물이 쪼르르 흐르며 맑은 기운 뽐내는 시골숲입니다. 기름진 흙에 온갖 풀이 마음껏 자랍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갖은 풀벌레가 노래합니다. 개구리도 뱀도 시골숲에 구멍을 파고 들어가 겨울잠을 잡니다. 시골숲은 사람이 먹고사는 밑바탕이 됩니다. 시골숲은 모든 짐승을 살찌우는 밑터가 됩니다. 시골숲은 어떤 풀이나 나무라 하더라도 넉넉히 껴안아 품에 보듬는 밑자리가 됩니다.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울타리를 씌울 수 없는 시골숲은 바다와 같습니다. 바다는 너른 멧골과 같습니다. 너른 멧골은 푸른 들판과 같습니다. 푸른 들판은 파랗게 빛나는 하늘과 같습니다.


.. 동대문 지하철역 다번 출구 계단을 오르다 보면 수원행 막차가 지날 때까지 개떡쑥떡팥떡을 풍채만큼 넉넉하게 팔고 계시는 아주머니가 계실 거예요 오실 때쯤이면 누런 변또에 김치뿐인 점심을 드실 시간이겠군요 살짝 목례라도 하고 계단을 마저 오르면 한일은행이 보이지요 은행 옆길, 언제나 개나리처럼 노오랗게 웃어주시는 김씨 아주머니의 꽃집을 따라 고사리 손등처럼 오막조막 시장이 펼쳐지지요. 과일가게 대원식당 구두가게 옷가게 창신이발관 떡볶이집이 숨차게 놓여 있고요 마주보는 떡집과 옷가게 사이 파도 팔고 고등어도 팔고 떨이 사과도 파는 손수레들이 노란색 중앙선으로 옹기종기 모여 점심을 들고 있지요 ..  (창신동―평화의 집)


  나와 어깨동무하는 이웃은 누구인지 헤아려 봅니다. 나를 둘러싼 이웃은 누구일까 생각해 봅니다. 내 이웃은 어떤 숨결일까요. 내 이웃과 이웃한 다른 이웃은 어떤 꿈결일까요. 저마다 어떠한 마음 되어 어떠한 노래를 부르는 하루를 누릴까요.


  도시는 나쁘고 시골은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거꾸로, 도시는 좋고 시골은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도시는 도시일 뿐이요, 시골은 시골일 뿐입니다. 그저, 도시에서 살든 시골에서 살든, 도시는 어떤 곳이며 시골은 어떤 곳인가를 제대로 알아야 할 뿐입니다.


  도시는 시골을 빨아먹으며 목숨을 잇습니다. 도시는 모든 땅뙈기를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덮습니다. 도시에는 발전소나 공장 같은 위해·위험시설을 들이지 않습니다. 발전소나 공장 같은 위해·위험시설은 몽땅 도시 바깥이나 시골에 세웁니다.


  도시에는 논밭을 두지 않습니다. 도시는 논밭을 파헤쳐 아파트나 건물로 바꿉니다. 도시는 시골 논밭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나 기찻길이나 공항을 자꾸자꾸 새로 짓습니다. 도시는 도시를 키우려고 시골을 망가뜨리고, 도시와 도시를 잇는다며 시골을 허물어뜨립니다.


  도시는 스스로 먹을거리를 빚지 못해요. 시골에서 먹을거리를 사다가 실어 날라야 합니다. 한국땅에서는 한국 시골에서든 아니면 중국이나 칠레나 필리핀 시골에서든, 먹을거리를 돈을 치러 사다가 실어 날라야 합니다.


  도시는 학교를 짓습니다. 도시에 지은 학교는 아이들이 언제까지나 도시에 남아 도시 회사원이나 공무원이나 장사꾼이 되도록 길들입니다. 도시에 지은 학교 가운데 아이들이 시골숲으로 깃들며 흙을 일구거나 나무를 아끼라고 가르치는 데는 없습니다. 대학교에서도 중·고등학교에서도 초등학교에서도, 시골 어린이집에서까지도, 아이들한테 농사짓기를 가르치는 데는 없어요.


  시골은 햇살이 있고 바람이 있으며 풀과 나무가 있는 데입니다. 시골은 무지개가 뜨고 뭉게구름이 피어나며 미리내가 노래하는 데입니다. 시골은 냇물을 두 손으로 떠서 마시는 데요, 맨발로 흙을 밟으며 새 숨결을 빛내는 데입니다.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틀로 도시와 시골을 바라볼 까닭이 없습니다. 도시 속살과 시골 속내를 꾸밈없이 올바로 들여다보면서 ‘스스로 어떤 이웃과 어깨동무하며 살아가고 싶은가’를 슬기롭게 깨달아야 할 뿐입니다.


.. 팽이처럼 / 밖으로 밖으로만 나돌다가 / 두루루 / 앞치마를 두르고 / 저녁밥을 짓는다 / 감자도 볶고 / 시금치도 무치고 / 국만 끓으면 / 밥상 가득 들어찰 / 모처럼만의 안식에 / 진득허니 끓어야 한다던 / 콩나물국을 / 몇 번이고 엿보다 ..  (신혼일기 3―일요일)


  이한주 님 시를 갈무리한 《평화시장》(갈무리,2000)을 읽습니다. 이한주 님은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서울에서 노동시를 쓰는 길을 걷습니다. 서울사람으로서 바라보고 느끼며 생각하는 이야기를 시 하나로 갈무리합니다.


  이한주 님 시는 ‘좋거나 나쁘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저 이한주 님 삶을 드러냅니다. 이한주 님 시는 ‘아름답거나 안 아름답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예 이한주 님 넋을 나타냅니다. 이한주 님 시는 ‘읽을 만하거나 안 읽을 만하거나’ 하지 않아요. 온삶 그대로 이한주 님 꿈을 보여줘요.


.. 가난보다 / 서너 발짝 앞서 오는 겨울이 / 발을 뻗어 / 창신동 아랫목에 / 잠시 머무는 사이 / 동화처럼 / 눈이 내리고 / 비탈길, / 아이들은 / 햇살을 주워 봄이 된다 ..  (겨울)


  우리 집 아이들이 까르르 웃고 떠들며 노래합니다. 우리 집 아이들은 시골집에서건, 도시로 마실 나온 뒤 찾아가는 아파트나 여러 층짜리 건물에서건 신나게 쿵쿵쾅쾅 뛰고 놉니다. 아래층에 발소리를 내건 위층에 노랫소리를 내건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저희 마음속에서 터져나오는 소리를 신나게 터뜨립니다. 아이들은 저희 가슴속에서 샘솟는 몸짓을 흐드러지게 뽑아냅니다.


  우리 이웃 아이들도 개구지게 뛰놀 수 있기를 빕니다. 우리 이웃 아이들 누구나 목청껏 소리질러 노래를 부르고, 온몸이 부서져라 뜀박질을 하면서 들과 멧골과 숲과 바다에서 흙투성이 개구쟁이가 되기를 빕니다.


  재미나게 놀며 자란 아이들은 재미나게 일하며 어깨동무하는 어른이 돼요. 신나게 놀며 큰 아이들은 신나게 일하며 어깨동무하는 어른이 돼요. 사랑스레 놀며 손을 맞잡는 아이들은 사랑스레 일하며 어깨동무하는 살가운 어른이 돼요. 4345.12.4.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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