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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간 필리포크 - 지혜의 샘, 생각의 뿌리 톨스토이 어린이학교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알렉산드르 파호모프 그림, 이항재 옮김 / 에디터 / 2011년 11월
평점 :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215
우리 어디에서 살면 즐거울까
― 학교에 간 필리포크
레프 톨스토이 글,알렉산드르 파호모프 그림,이항재 옮김
에디터 펴냄,2011.11.30./15000원
겨울에 찬물로 빨래를 하면 손이 매우 시립니다. 여름에 찬물로 빨래를 하면 온몸이 퍽 시원합니다. 겨울에 찬물로 설거지를 하면 손이 차갑게 굳습니다. 여름에 찬물로 설거지를 하면 몸이 시원스레 풀어집니다.
겨울에는 따스하고 포근한 잠자리를 마련합니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널널한 잠자리를 마련합니다. 따스함과 시원함이 갈마들면서 풀도 흙도 사람도 새도 모두 한결 튼튼하거나 씩씩하게 삶을 꾸릴 수 있구나 싶습니다. 봄을 노래하고 여름을 즐기며 가을을 누리다가는 겨울을 포근히 쉬면서 삶을 일구는구나 싶어요.
푸르게 빛나는 풀을 봄과 여름과 가을에 먹습니다. 추운 날씨에 건사할 수 있는 푸성귀를 겨우내 먹습니다. 푸르게 빛나는 풀은 흙기운을 맑은 물로 헹구어 냠냠짭짭 즐깁니다. 추운 날씨에 건사하는 푸성귀는 송송 썰어 뜨끈한 국으로 끓여 먹습니다. 맑은 물방울과 푸른 풀을 먹습니다. 보들보들한 푸성귀와 따끈한 국물을 먹습니다. 밥 한 그릇 내 몸으로 스며들어 오늘 하루 새 힘과 새 마음으로 살아내자는 생각이 샘솟습니다. 밥 한 그릇 알뜰히 차려 아이들과 반갑게 마주하며 먹습니다.
.. 나는 동생과 나들이할 적엔 손을 꼭 잡고 데리고 다녀요. 동생은 아직 키가 작고, 다리도 짧거든요 .. (6쪽)
어버이가 노래를 부르면 아이들이 좋아합니다. 어버이가 골을 부리면 아이들이 싫어합니다. 어버이가 손가락 꼬물꼬물 놀이를 하면 아이들이 재미있어 합니다. 어버이가 이맛살을 찡그리면 아이들이 멀리멀리 내뺍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아이들이 찾아옵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 아이들이 등을 돌립니다. 아니, 아이들은 사랑이 있건 없건 찾아가요. 사랑이 없다 싶으면 아이들은 저희 사랑을 나누어 줘요. 어른들은 사랑이 있어도 알아보지 않거나 느끼려 하지 않기도 하는데다가, 사랑만 있고 돈이 없으면 슬그머니 발을 빼곤 해요.
아무래도 오늘날 물질문명 사회에서는 돈이 없으면 굶기 딱 좋아 돈을 바랄밖에 없을 텐데, 돈은 있되 사랑이 없으면 너무 메마르고 너무 쓸쓸하며 너무 차가운 나머지 내 마음이 꽁꽁 얼어붙지 않을까 싶습니다. 돈이 많아야 하지 않아요. 돈은 저마다 쓸 만큼 누리면 돼요. 사랑을 키워야 하고, 꿈을 북돋아야 하며, 믿음을 살찌울 노릇이에요. 밝은 달과 별을 즐기고, 따사로운 햇살을 누리며, 파랗게 눈부신 하늘과 하얗게 빛나는 구름을 껴안을 노릇이에요.
.. 바랴네 집에는 검은머리방울새가 있었어요. 새장 속 검은머리방울새는 한 번도 울지 않았어요. “새야, 넌 왜 노래하지 않니?” 바랴가 물었어요. 그러자 새가 말했어요. “날 새장에서 내보내 줘. 그럼 온종일 노래할게.” .. (16쪽)
서울에서 살건 시골에서 살건, 자, 하늘을 올려다봐요. 서울에서는 높직높직 아파트와 건물 너무 많아 하늘이 잘 안 보이나요. 하늘이 아주 조금만 보이나요. 저 하늘에는 별이 아주 많아요. 서울에서라면, 또 부산이나 대구처럼 커다란 도시에서라면 달 빼고는 보이는 별이 거의 없을 테지만, 매캐한 먼지에 막혀 우리 눈에만 안 보일 뿐, 틀림없이 저 우주에서 환하게 빛나는 별이 흐드러져요. 끝없이 끝없이 온갖 우주가 펼쳐져요.
바다를 바라봐요. 서울에서거는, 또 인천이나 울산 같은 커다란 도시에서는 바다 구경조차 만만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가만히 바다를 마음속에 그려 봐요. 바닷속에 어떤 물고기가 살고 어떤 풀이 자라며 어떤 흙과 모래가 있는지 곰곰이 그려 봐요. 바다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그려요. 바다가 숨쉬는 결을 느껴요. 고래가 춤추고 새우가 노래하는 소리를 들어요. 오징어가 날고 거북이가 장구를 치는 모습을 느껴요. 우리 눈으로는 저 깊고 너른 바다를 들여다볼 수 없다지만, 틀림없이 저 깊디깊은 바닷속에서 맑게 빛나는 숨결이 가득해요. 가없이 가없이 온갖 이야기가 넘실거려요.
흙을 만져요. 조그마한 흙알갱이 하나를 만져요. 이 흙은 사람을 살리고 짐승을 살리며 풀과 나무를 살려요. 아주 조그마한 흙알갱이 하나라 하지만, 요 조그마한 흙알갱이에 깃든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숨결’이 수천만 수억이 있다고 해요. 아마, 사람 잣대로는 헤아릴 수 없는 더 많은 작은 숨결이 수조 수천조 있을 수 있어요.
졸졸 흐르는 냇물을 두 손으로 떠요. 냇물 냄새를 살며시 맡아요. 그러고는 입으로 살짝살짝 마셔요. 혀끝으로 맛을 보고 온몸으로 기운을 받아들여요. 물은 물이거든요. 물은 비닐병에 담겨야 물이 아니고, 물은 수도꼭지를 틀어야 물이 아니에요. 물은 흐르기에 물이에요. 사람이든 짐승이든 푸나무이든, 흐르는 물을 마실 때에 목숨이 살아나요. 땅에서 땅으로 흐르는 물이요, 하늘에서 땅으로 흐르는 물이에요. 우리가 빗물을 즐거이 마실 수 없다면, 어느덧 삶은 삶이 아니게 뒤틀렸다는 소리가 돼요.
.. 우리 집엔 암탉이 여섯 마리나 있어요. 이른아침에 닭에게 모이를 줍니다. 나는 “구구, 구구!” 닭을 소리쳐 부르며, 땅 위에 알곡을 흩뿌리지요 .. (52쪽)
노래하며 떠들던 아이들이 잠듭니다. 노래 한 가락 더, 더, 더, 하며 바라던 아이들이 새근새근 잠들어 콧소리 색색 냅니다. 고운 노래 부르며 잠든 아이들은 꿈나라에서도 고운 노래 부르며 훨훨 납니다. 맑은 목소리로 까르르 웃던 아이들은 꿈누리에서도 맑은 목소리 나누며 신나게 뛰고 구릅니다.
학교는 배우는 곳입니다. 집은 살아가는 곳입니다. 학교는 꿈을 배우는 곳입니다. 집은 사랑으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지식을 다루는 곳은 학교가 될 수 없습니다. 아마, 학원쯤 되겠지요. 겉치레를 따지는 곳은 집이 될 수 없습니다. 글쎄, 겉치레에 휘둘리는 곳은 무어라 해야 알맞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길을 걸으며 아름다운 꿈을 꽃피울까 하고 생각하며 동무들과 어깨동무하는 학교입니다. 어떤 삶을 일구며 아름다운 사랑을 씨뿌리고 갈무리해서 나눌까 하고 헤아리며 이웃들과 손을 맞잡는 집입니다.
레프 톨스토이 님은 글을 쓰고 알렉산드르 파호모프 님은 그림을 그려, 《학교에 간 필리포크》(에디터,2011)라는 그림책 하나 태어납니다. 필리포크라는 어린 아이는 저희 형을 따라 학교에 놀러가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며 무엇을 배웠을까요. 필리포크라는 아이는 집에서 저희 어버이와 어떤 삶을 누리며 어떤 사랑을 곱게 누릴까요.
.. 할머니에게 손녀가 있었어요. 예전에는 손녀가 어려서 늘 잠만 잤어요. 할머니는 손녀를 위해 빵을 굽고, 방을 쓸고 닦고, 바느질하고, 실을 잣고, 옷감을 짜셨습니다. 세월이 지나서, 할머니가 늙어 페치카 위에 누워 늘 잠만 주무셨어요. 이제 손녀가 할머니를 위해 빵을 굽고, 방을 쓸고 닦고, 실을 잣고, 옷감을 짭니다 .. (54쪽)
어디에서 살아가면 즐거울까 생각합니다. 무엇을 하며 사랑하면 기쁠까 생각합니다. 누구랑 꿈을 꿀 때에 아름다울까 생각합니다. 어떠한 빛을 가슴에 품고 하루를 누릴 때에 내 얼굴에 웃음꽃 피어날까 생각합니다.
마음껏 놀 수 있는 학교가 반갑습니다. 실컷 일하고 쉬고 어울리고 노래할 수 있는 집이 살갑습니다. 개구지게 뛰놀 수 있는 학교를 기다립니다. 아름답게 사랑할 수 있는 집을 천천히 짓습니다. 4345.12.5.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