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보 나무 내 친구는 그림책
카토 요코 지음, 미야니시 타츠야 그림, 고향옥 옮김 / 한림출판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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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227

 


나는 어떤 아이일까
― 울보 나무
 미야니시 타츠야 그림,카토 요코 글,고향옥 옮김
 한림출판사 펴냄,2012.9.24./1만 원

 


  어릴 적 걸핏하면 울음을 터뜨리던 나는 울보라고 할 만합니다. 몸이 여리고, 어른들은 으레 거친 말씨나 우락부락한 얼굴로 꾸짖으니, 지레 무섭다고 느껴 울음을 터뜨렸겠구나 싶습니다. 울음보를 곧잘 터뜨리는 아이는 울보라고 합니다. 그런데, 잘 우는 아이는 잘 웃어요. 웃음보를 해맑게 터뜨립니다.


  문득, ‘웃보’라는 이름을 떠올립니다. 잘 웃는 아이라면 ‘웃보’라는 이름으로 부를 만한데, 어릴 적부터 이런 말은 들은 일 없습니다. ‘울다·울보·울음보’이듯, ‘웃다·웃보·웃음보’처럼 이어질 텐데, 왜 ‘웃보’라는 이름은 없을까요. 아이라면 누구라도 잘 웃으니 웃보라는 말마디는 따로 안 지어도 되었을까요. 우는 아이를 놀리거나 달래려고 울보라는 말마디는 빚었지만, 웃는 아이는 언제 어디에서라도 보니까, 굳이 이런 이름은 안 붙여도 될 만하다 여겼을까요.


  ‘울기쟁이’라는 이름을 헤아립니다. ‘웃기쟁이’라는 이름도 헤아립니다. ‘울음쟁이’나 ‘웃음쟁이’라는 이름도 곰곰이 헤아립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살아가는 동안, 웃음과 울음은 서로 뗄 수 없으리라 느낍니다. 기쁜 일에 이어 슬픈 일이 꼭 뒤따르지 않을 테고, 슬픈 일은 기쁜 일이 곧 찾아들어 달래지 않을 테지만, 웃음이랑 울음은 늘 한 자리에 있구나 싶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기뻐서 울기도 하고 슬퍼서 웃기도 하거든요.

 

 


.. 위에서 우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올려다보니 나무가 울고 있지 뭐예요. “무, 무슨 일이야? 왜 울어, 나무야?” 아기 돼지가 깜짝 놀라 물었어요 ..  (7쪽)


  봄날 우리 집 처마에 제비가 찾아들어 집을 손질해서 새끼 네 마리를 낳고 여러 달 지냈을 때, 제비를 바라보며 싱긋빙긋 웃었습니다. 날갯짓 서툰 어린 제비가 그만 종이상자에 떨어져 허우적거릴 때 쯔쯔쯔 혀를 찼습니다. 자, 기운내어 상자에서 빠져나와 네 둥지로 올라가렴, 하고 말을 걸곤 했어요. 씩씩하게 자라 날개에 힘이 붙은 새끼 제비들이 날마다 더 멀리멀리 마실을 다니다가는 그예 처마 밑 둥지를 떠나 텅 비었을 때, 또 어미 제비 둘이 마지막으로 우리 집에 찾아와 빨래줄에 앉고는 인사 남기고 더 따스한 남녘나라 찾아 먼먼 바다를 가로질러 떠나던 날, 덩그러니 남은 빈 둥지를 바라보며 살짝 쓸쓸했어요. 어른이 된 내가 아닌 꼬맹이 나였으면, 빈 둥지를 바라보며 눈물 한 방울 감돌았을까요.


  지난여름, 뒤꼍 뽕나무가 드센 비바람에 뿌리가 반 남짓 뽑히며 쓰러졌어요. 저런, 어쩌니 뽕나무야, 하고 살살 줄기를 어루만졌는데, 어른이 된 내가 아닌 꼬맹이 나였으면, 쓰러진 뽕나무를 어루만지며 눈물 두 방울 맴돌았을까요.


  두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면소재지나 읍내나 이곳저곳 시골길 따라 마실을 다니고 보면, 어느 시골길에서든 자동차 바퀴에 깔려 죽은 짐승이나 벌레를 만납니다. 삵도 있고 고라니도 있고 뱀도 있고 고양이도 있지만, 개구리도 사마귀도 나비도 잠자리도 개미도 무당벌레도 있어요. 때때로 멧새나 들새가 자동차에 받혀 머리가 터지거나 깨져 죽는 모습도 봐요. 한 번 치여 죽은 짐승이나 벌레를 다른 자동차가 수없이 밟고 지나가면 납작쿵이 되고 맙니다. 아직 납작쿵이 되지는 않고, 피만 잔뜩 흘리며 죽은 짐승이나 벌레를 볼 때면, 자전거를 세우고 길섶 풀밭으로 주검을 옮깁니다. 어른이 된 내가 아닌 꼬맹이 나였으면, 이들 가녀린 주검을 풀밭으로 옮겨 누이며 눈물 세 방울 또르르 흘렀을까요.

 


.. “나 이제 안 아파. 울지 마. 헤헤헤.” 아기 돼지가 웃었어요. “정말? 다행이야!” 나무도 웃었어요. 둘은 그렇게 친구가 되었어요. 같이 있으면 얼마나 즐거운지 시간이 후딱 지나갔어요 ..  (19쪽)


  나한테는 두 아이가 있습니다. 두 아이는 나를 어버이 삼아 하루하루 곱게 누립니다. 내가 어버이로서 슬기로웁다면, 아이들은 슬기로움을 물려받습니다. 내가 어버이로서 따사롭다면, 아이들은 따사로움을 이어받습니다.


  아이들과 날마다 복닥이며 찬찬히 옛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나는 두 아이한테 어버이로 지내면서, 내 어버이 두 분한테는 아이입니다. 나는 어떤 아이일까요. 나는 어떤 어버이일까요. 나는 내 어버이한테서 어떤 꿈과 사랑을 받아먹으며 하루를 누렸을까요. 나는 내가 받아먹은 꿈과 사랑을 우리 두 아이한테 즐겁게 물려주는 삶을 누리는 사람일까요. 나는 내가 미처 못 받았거나 제대로 못 느낀 꿈과 사랑을 내 깜냥껏 새롭게 빚어 우리 두 아이한테 넉넉하게 나누는 하루를 보내는 사람일까요.


  깊은 밤 두 아이 밤오줌을 누입니다. 오줌그릇을 비우고 밤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나도 쉬를 누고 방으로 들어옵니다. 자면서 자꾸자꾸 이불을 걷어차며 굴러다니는 두 아이를 바라봅니다. 나는 밤마다 자꾸자꾸 잠에서 깨어 아이들 이불을 여미고, 이리저리 구른 아이를 들어서 옮깁니다. 내 어버이는 나하고 함께 잠자리에 들며 이불을 얼마나 자주 여미었고, 굴러다니는 나를 얼마나 바로 누였을까요. 내가 스스로 자고 일어나며 이부자리를 개기까지, 내 어버이는 얼마나 밤잠을 잊으며 당신 아이를 사랑으로 보살피는 나날을 보냈을까요.


  나는 아이들 어버이이자, 내 어버이한테 아이입니다. 내 어버이 또한 나한테 어버이이자 당신으로서는 당신 어버이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아이이면서 어버이일까요. 맨 처음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은 어떤 숨결이었을까요. 맨 첫 사람도 아이이면서 어버이였을까요. 맨 첫 사람은 어떤 꿈과 사랑을 스스로 북돋우는 삶을 지었을까요.


  꿈이 웃음이라면, 사랑은 눈물이라 할 만한가요. 꿈을 꾸며 웃는다면, 사랑을 하며 운다고 할 만한가요. 꿈꾸는 삶은 웃는 삶이라면, 사랑하는 삶은 우는 삶이라 할 만한가요. 곱게 웃는 꿈으로 지구별을 보듬는다면, 맑게 우는 사랑으로 지구별을 보살핀다 할 만한가요.

 

 


.. 눈물 대신 나뭇잎이 아기 돼지 위로 우수수 쏟아졌어요. 나뭇잎이 아기 돼지를 포근하고 따뜻하게 덮어 주었어요. 그리고 그 주위를 눈이 새하얗게 감싸 주었어요 ..  (23쪽)


  미야니시 타츠야 님 그림이랑 카토 요코 님 글이 어우러진 그림책 《울보 나무》(한림출판사,2012)를 읽습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울보 나무’와 ‘울보 돼지’는 그야말로 울보입니다. 그런데 두 울보는 이래 보나 저래 보나 더할 나위 없이 웃보입니다. 두 동무는 울음꽃과 웃음꽃을 늘 나란히 터뜨려요. 두 아이는 울음빛과 웃음빛을 언제나 나란히 나눠요.


  울 수 있기에 웃을 수 있는지 모릅니다. 웃을 수 있기에 울 수 있는지 모릅니다. 환하게 웃는 넋이기에 따사로이 어깨동무하는 손길을 뻗는구나 싶습니다. 해맑게 우는 얼이기에 너그러이 얼크러지는 눈길을 보내는구나 싶습니다.


  울보 나무와 울보 돼지는, 처음에는 고운 꿈을 품으며 웃음을 바랍니다. 울보 나무와 울보 돼지는, 이윽고 살가운 동무가 되고, 마음 나누는 벗이 되면서, 시나브로 울음이 무엇인가를 깨달아 고즈넉히 사랑을 이룹니다. 울음 한 방울에 깃든 사랑을 깨닫습니다.


  웃음이 까르르 터지면서 숲이 푸르게 빛납니다. 울음이 방울져 흐르면서 숲에 하얗디하얀 눈송이 내려앉습니다. 푸르게 빛나는 숲은 아름다운 노래 가득합니다. 정갈히 하얀 숲은 따사로운 이야기 조용히 퍼집니다. 4345.12.21.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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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책 함께 읽기 (Brian Lanker)

 


  사진책을 살 적마다 ‘이 사진책을 언제부터 아이하고 함께 들여다볼 만할까’ 하고 헤아린다. 어린 우리 아이들도 들여다볼 만한 사진책이 될는지, 어린 우리 아이들한테는 보여줄 만하지 않은 사진책이 될는지 곰곰이 생각한다. 상을 받았다고 하는 다큐사진이라 하더라도 아이들한테 함부로 보여줄 수 없다. ‘끔찍한 죽음’을 담은 사진이기에 아이들한테 함부로 못 보여주지는 않는다. 보여줄 뜻이나 값이나 보람이 없으면 보여줄 까닭이 없다. 게다가, 다큐사진이라 하면 사람들이 으레 ‘어두운 이야기’만 떠올리는데, 다큐사진은 하나도 어두울 까닭 없다. 밝든 어둡든 대수롭지 않다만, 사람이 살아가는 사랑을 들려줄 만한 이야기가 있어야 비로소 다큐사진이라 할 수 있다.


  ‘Brian Lanker’라 하는 미국 사진쟁이 사진책 하나를 장만한 지 한 달 즈음 되는데, 집일에 치여 한 쪽조차 못 펼친 채 마루 한켠에 덩그러니 얹어놓기만 했다. 엊저녁 비로소 책을 펼친다. 처음 장만할 적에는 살까 말까 망설이다가 ‘나중에 언제 다시 보겠느냐’ 생각하며 장만했는데, 사진을 한 장 한 장 찬찬히 살피고 보니, 무척 뜻깊은 사진이면서, 매우 마음 기울여 담은 사진이로구나 하고 느낀다. 혼자서 사진을 죽 넘기다가 큰아이를 부른다. 다섯 살 큰아이더러 “여기 할머니들 사진 볼래. 할머니들이 뭐를 하는 모습일까.” 하고 말하면서 함께 들여다본다. 사진만 보더라도 사진으로 찍힌 이들이 ‘어떤 일’을 하며 살았는가를 헤아릴 만하다. 사진에 붙인 글을 읽어도 발자국을 알 만하고, 사진에 붙인 글을 애써 안 읽어도 사진으로 삶을 읽을 만하다.


  그러고 보면, 글책이건 그림책이건 사진책이건, 이러한 책을 읽는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날개를 펼 수 있도록 이야기를 담아야 비로소 ‘책’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겠구나 싶다. 겉모양이 책이라서 ‘책’이 되지는 않는다. 알맹이가 어여삐 책이 되어야 ‘책’이다. 밥도, 삶도, 사람도, 사랑도, 꿈도, 믿음도, 겉껍데기로는 따지지 않는다. 모든 자리 모든 이야기는 언제나 속알맹이로 따진다. 가슴 깊이 사랑할 노릇이다. 마음 깊이 아끼며 꿈꿀 노릇이다. 4345.12.21.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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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놀이 1

 


  아이들이 흙놀이를 마음껏 할 수 있으니, 마당 있는 집이 좋다. 돌이켜보면, 지난날에는 마당 있는 집이 아니더라도, 도시 여느 골목집 어디에서나 흙놀이를 할 수 있었다. 길바닥이 흙이었고, 동네 어디에서나 흙을 쉽게 만질 수 있었다. 내 어린 나날을 떠올리면, 바지 주머니에 모래나 흙을 잔뜩 집어넣고 집 언저리로 나르기도 했다. 집 언저리에서도 흙놀이를 하거나, 또는 집에서까지 몰래 흙놀이를 하고 싶어서. 다섯 살 큰아이가 새해에 여섯 살이 되면서, 어느 날 갑자기 주머니에 흙 잔뜩 넣고 들어와서는 방바닥에 흙을 쫙 펼치고는 놀는지 모른다. 뭐, 너희 아버지도 어릴 적에 그랬거든. 4345.12.21.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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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

 


  언젠가 옆지기가 ‘아이들한테 속 깊은 이야기를 슬기롭게 물을’ 수 있으면, 아이들은 꾸밈없이 환한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말했다. 나는 아직 아이들한테 속 깊은 이야기를 슬기롭게 묻지 못한다고 느낀다. 어쩌면, 이런 대목은 생각조차 안 하며 살아오지 않았을까.


  저녁 아홉 시가 넘어가고 열 시에 이르면서 몸이 고단해 먼저 잠자리에 드러눕는다. 아이 둘 모두 잠들 낌새가 안 보인다. 아니, 두 아이 모두 졸려 하기는 하지만 자려고 않는다. 큰아이는 잠자리에 공을 들고 와서 주고받기 놀이를 하잖다. 나는 누운 채 공을 받아서 되던지며 함께 논다. 이러다가 아이랑 뒹굴며 슬쩍 물어 본다. “하늘에는 뭐가 있어?” “타요.” “쳇.” 다섯 살 큰아이가 ‘타요’라는 만화영화 보여 달라는 뜻으로 엉뚱한 말을 한다. 그러나, 언젠가 큰아이가 본 만화영화에서 ‘타요’가 하늘을 날았을는지 모른다. 다시 아이한테 묻는다. “하늘에는 뭐가 있을까?” “구름. 하늘에는 구름 있어.” “그러면 구름 속에는 뭐가 있어?” “씨.” “씨? 왜 씨가 있을까? 그러면 씨 속에는 뭐가 있어?” “씨. 씨 속에는 작은 씨가 있지.” 큰아이는 ‘뼈’라는 낱말을 아직 안 쓴다. 물고기를 먹을 적에 나오는 가시 또는 뼈를 ‘씨’라고 가리킨다. 어찌 보면 아예 틀린 생각은 아니다. 왜냐하면, 열매를 먹을 때 속에 나오는 것이 ‘씨’이듯, 물고기 속에 있는 뼈도 ‘씨’라 할 만하다. 아이가 ‘씨’라는 말을 할 적마다, 난 이 낱말 ‘씨’에 더 깊고 너른 느낌과 이야기가 있다고 새삼스레 느낀다. “벼리 마음속에는 뭐가 있어?” “씨.” “쳇. 씨는 벼리 몸속에 있잖아.” “음, 벼리 마음속에는 하느님 있어.” “하느님은 어떤 사람이야?” “공부하는 사람. 연필로 ‘사·름·벼·리’라고 써.” 하느님이 공부하는 사람인가 하고 헤아려 본다. 그럴 수 있으리라. 슬쩍 “아버지 마음속에는 뭐가 있어?” 하고 묻는데, 아이는 “몰라.” 하고만 말한다. 그런가. 그러려나. 내 마음속에는 아직 아무것 없나. “흥. 아버지 마음속에는 꿈이 있어.” 하고 말하고는 큰아이를 옆에 누이고 한참 노래를 부르며 논다. 이러다가, 옆방에서 칭얼거리기만 하는 작은아이를 안아 기저귀를 채운 다음 내 옆에 누이며 노래부르기를 잇는다. 노래를 대여섯 가락쯤 부를 무렵 작은아이는 새근새근 잠들고, 큰아이는 스무 가락 남짓 노래를 부르자 코코 잠든다. 큰아이 잠드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도 비로소 마음을 폭 놓고 느긋하게 잠든다. 4345.12.21.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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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쓴 시에 딸이 그린 그림이 어우러진 책이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나는 우리 집 아이들이 담긴 사진을 바라보면서 새 글감을 떠올리곤 한다. 아이들은 어여쁜 손길로 예쁜 그림을 그려 주기도 하지만, 따로 그림을 그려 주지 않더라도, 맑은 웃음과 밝은 목소리로 늘 푸짐한 선물을 나누어 준다고 느낀다. 어버이인 나는 아이들한테 어떤 선물을 주는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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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조무래기별들- 시와 그림이 있는 풍경
박일환 지음, 박해솔 그림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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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21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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