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 얻는 마음

 


  내가 씨앗을 맨 처음 본 때가 언제인지 또렷하게 떠오르지는 않습니다만, 국민학교 1학년 적에 학교 관찰일기 숙제를 내려고 콩을 심어 돌본 일은 환하게 떠올라요. 관찰일기 숙제를 해야 하기에 어머니한테 “콩알 주셔요.” 하고 말씀드리니, 밥으로 지어 먹는 콩을 석 알쯤 주셨어요. 나는 학교에서 배운 대로 속 비치는 동그란 그릇에 솜 깔고 물 적셔 콩알을 놓고 볕 잘 드는 자리에 두었어요. 날마다 신나게 오래오래 들여다보는데, 자고 일어난 석 밤째던가, 콩알 한쪽에 살짝 비져나온 꼬리가 보였어요. 뿌리라 할는지 싹이라 할는지 조금 돋았어요. 손가락으로 살살 만지는데 얼마나 보드랍고 앙증맞든지요. 이렇게 싹이 튼 콩을 꽃그릇에 흙 담고 하나하나 손가락 복복 눌러 심었고, 언제 흙 위로 삐죽 돋을까 하고 기다렸어요. 그리고 이 콩이 자라는 모습을 바지런히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써서 관찰일기를 다 꾸렸지요. 관찰일기는 담임선생이 거두어서 돌려주지 않아 이제 나한테는 없는데, 내가 어머니한테서 얻어 심은 콩 몇 알로 밥그릇 수북하게 담을 만한 열매(콩알)가 맺히고, 이 열매로 저녁에 소담스레 밥을 차려서 먹으니 얼마나 맛났는지 몰라요.


  그 뒤, 어머니는 동네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자, 여기 나팔꽃씨.” 하고는 몇 알 내 손바닥에 올려놓았어요. 작은 손바닥에 작은 꽃씨. 누르면 톡 터질 듯한 누런 알맹이 안쪽에는 새까만 꽃씨가 여럿 깃들었는데, 이 꽃씨 두서너 알 심고 나머지는 책상맡에 두고는 늘 바라보며 좋아했어요. 예쁘고 예쁘니까요.


  가을이 되어 나팔꽃 모두 지고 씨알을 맺으면, 씨주머니 터뜨리지 않게 곱게 건사해서 빈 필름통에 담아요. 그러고는 학교에 가져가서 동무들한테 보여주지요. 그러면 동무들은 저마다 저희 집이나 동네에서 건사한 ‘다른 꽃씨’를 이듬날 가지고 와서 보여줍니다. “나도 나팔꽃씨 있다! 너네는 이런 꽃시 없지?” 하고 으쓱대던 동무들이 많았어요. 그러면 나는 어머니한테 달려가서 ‘다른 꽃씨’도 찾아 달라고 조릅니다. 어머니는 이런 꽃씨 저런 꽃씨를 찾아서 줍니다. 해바라기씨를 받고, 민들레씨는 살살 떼어서 건사해 봅니다. 이동안, 씨 한 알이란 참 놀랍다고 느낍니다. 이 작은 씨앗에서 얼마나 고운 꽃 태어나 한 해 내내 즐거운 웃음꽃 피워내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곡식 씨앗은 따사로운 밥이 되고, 꽃 씨앗은 해맑은 마음이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씨앗으로 왜 장사를 하려 들까요. 왜 씨앗을 자꾸 이리 고치고 저리 바꾸면서 ‘개량·변형·조작’을 하려 드나요. 풀씨를 바꾸듯 사람씨도 바꾸려는 뜻은 아닌가요. 꽃씨를 고치듯 사람씨까지 고치려는 뜻은 아닌가요. 나무씨를 건드리지 않기를 빌어요. 살구씨는 살구씨대로 좋아요. 잣씨는 잣씨대로 좋아요. 볍씨는 볍씨대로 좋고, 이 좋은 기운 살포시 담아 내 사랑씨를 정갈히 다스릴 때에 아름답구나 싶어요.


  믿음씨를 서로 마음밭에 심어 고운 마음씨 될 때에 이 지구별에 밝은 햇살 드리우겠지요. 글을 쓰는 사람은 글씨를 심습니다. 글씨가 담겨 책씨가 됩니다. 책씨에는 생각씨가 깃들고, 생각씨가 모여 슬기씨로 이어집니다. 나는 아이들한테 꿈씨를 물려주고 싶습니다. 시골마을에서 별바라기를 하며 별씨와 달씨를 아이들이랑 나누고 싶습니다. 흙을 보듬어 씨앗 하나 건사하니, 이웃이랑 즐거움을 나눕니다. 4345.12.23.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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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지놀이 1

 


  ‘씨드림 잔치마당’에서 고등학교 형아랑 초등학교 엉아가 딱지를 접어서 치며 논다. 다섯 살 두 살 아이들도 어느새 끼어들어, 딱지를 던져서 맞추려고 용을 쓴다. 이 어린 두 사람은 딱지를 맞추지도 못하는데, 한 번 빠져들면 헤어나기 어려우리라. 그런데, 딱지치기는 언제 생겼을까. 아주 먼 옛날에도 있었을까. 어떤 아이가 어떤 종이를 어떻게 접어 딱지를 처음 만들고, 이 놀이를 즐기면서 온 하루 뻘뻘 땀흘리며 누리도록 이끌었을까.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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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록달록 초록빛
하시바 마오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201


 

좋아하는 곳
― 알록달록 초록빛
 하시바 마오 글·그림,이상은 옮김
 시리얼 펴냄,2012.11.25./7000원

 


  어젯밤은 별을 몇 못 봅니다. 하늘에 구름이 그리 많이 끼지 않았는데에도 별이 얼마 안 보입니다. 동짓밤이 가깝기 때문일까요. 동짓밤이라서 별을 덜 보지는 않지 싶은데, 깊은 밤 아이들이랑 마을길을 거닐며 하늘바라기를 하면서 드문드문 보이는 별만 헤아립니다.


  우리 식구 살아가는 전남 고흥은 깊은 시골입니다. 그러나, 이곳 고흥에서도 읍내나 면내에 나가고 보면, 읍내와 면내도 ‘크기는 작다’ 하더라도 도심하고 비슷하게 생겼어요. 가게가 있고 전깃불이 많습니다. 도시하고 견주면, 고흥 이웃 순천보다도 훨씬 조그마한 ‘시내’일 뿐이지만, 이렇게 조그마한 ‘도심 전깃불’로도 별빛을 가리기에는 넉넉해요.


  인천을 떠나 음성으로 갔고, 음성을 다시 떠나 고흥으로 옵니다. 고흥에 보금자리 마련해 지내면서 둘레 이웃한테서 으레 ‘왜 고흥까지 왔느냐’ 하는 말을 듣습니다. 고흥‘으로’가 아닌 고흥‘까지’라고들 묻는데, 나도 옆지기도 들려줄 말은 오직 하나입니다. 우리 스스로 즐겁게 살아갈 만한 시골이요, 우리 아이들이 앞으로 무럭무럭 자라고 난 다음에도 신나게 지낼 만한 시골이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 ‘으악! 꼴이 이게 뭐야? 애벌레 같아! 녹색을 너무 많이 썼나 봐! 이런 꼴로 말을 걸 수는, 없어! 나중에 다시 오자.’ (5쪽)
- ‘2학년이 되고 나서 방과 후에는 언제나 이 마을의 낡은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언제부터였는지 토요일마다 이곳에 오는 남자아이를 은근히 기다리게 됐다.’ (9쪽)
- “타마는 매일 여기서 뭐 해?” “음, 숙제도 하고, 책도 읽고, 멍하니 있거나 잘 때도 있어.” “자는구나?” “응, 가끔.” “도서관 좋아해?” “응. 여긴 할머니 댁이랑 닮았으니까.” (11쪽)


  서울하고 가까운 시골은 시골다움을 잃습니다. 서울뿐 아니라 크고작은 도시와 가까운 시골은 시골다움을 빼앗깁니다. 서울하고 가까운 시골에서는 몽땅 서울로 사람(어린이와 젊은이)을 보내려는 흐름에 휘둘립니다. 서울하고 가깝기 때문에, 서울에서 자가용 몰고 시골을 구석구석 후비듯 누비려는 손님이 들끓어 골치아픕니다. 서울이나 부산에서도 멀고, 가까운 순천하고도 먼 고흥은 뜨내기 손님이 섣불리 들어오지 않습니다. 어떤 관광시설도 없고, 널리 알려진 관광지도 없으니, 굳이 이곳까지 들어오려 하지 않습니다. 애써 고흥까지 들어온 손님들은 시골 면이나 리에서 ‘구멍가게’ 하나 찾기 힘든 모습에 혀를 내두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가게 적고 논밭 넓으며 숲이 드리우니 좋은걸요.


  숲바람을 누리며 숲내음을 맡습니다. 숲내음을 맡으며 숲속 골짝을 타고 흐르는 냇물을 마십니다. 골짝물을 마실 수 있으니 숲빛을 헤아립니다. 숲빛을 헤아리며 숲말을 가만히 듣습니다. 바람과 햇살과 멧새와 풀벌레가 조곤조곤 숲노래 들려줍니다.


  숲은, 바라보기만 해도 즐겁습니다. 숲은, 아이들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 들어가면 한결 즐겁습니다. 숲은, 내 삶터를 숲처럼 일굴 때에 더할 나위 없이 즐겁습니다.


  아마 예전에는 누구라도 느끼며 살았겠지요. 예전에는 누구나 시골사람이었고, 시골에서 흙을 만졌을 테니, 흙내음 숲내음 물내음 햇살내음 바람내음 잔뜩 들이켜면서 스스로 숲사람으로 살았겠지요.


  이제 요즈음 사람들은 곁에 나무를 두지 않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곁에 시멘트와 아스팔트와 쇠붙이와 플라스틱을 둡니다. 한 달이고 한 해이고 흙 한 번 안 밟는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흙을 안 밟을 뿐 아니라 흙을 안 만지며 사는 사람이 대단히 많습니다.


  생각해 봐요. 사람이 숨을 쉬려면 풀과 나무가 있어야 해요. 그런데 도시에 풀과 나무가 얼마나 있습니까. 사람만 잔뜩 있고, 높은 건물만 잔뜩 있으며, 자동차만 잔뜩 있어요. 이런 데에서 참말 숨이 막혀 어떻게 사람답게 살아가겠어요.

 


- “미도리는 무슨 책 읽어?” “음. 주로 비소설이 많아. 특히 여행기. 이런 책을 읽으면, 내 세계가 얼마나 작은지 깨닫게 되거든. 그리고 낯선 세계를 직접 여행하는 것처럼 해방감과 자유를 느끼게 돼. 마음속이 채워지는 느낌이 들어. 아, 너무 이상한가?” “아니, 왠지 알 것 같아. 난 가끔 외톨이처럼 느껴질 때가 있지만, 그럴 때 할머니가 주신 책을 읽으면, 마음속이 서서히 따뜻해지거든. 아, 좀 다른가?”“아니, 아마 그런 느낌일 거야.” (15∼16쪽)
- “참, 연하장 도착했어. 그거 감상문이지?” “응. 좋은 책이라 알려주고 싶었거든.” “재밌던데? 그런 연하장은 처음이었어. 책 한 권 읽은 것 같아.” (21쪽)


  내 어버이는 시골에서 태어났지만, 도시로 와서 혼인했습니다. 나와 내 형은 도시에서 태어났습니다. 나는 도시사람이지만, 뿌리 하나만 거슬러 올라가면 나도 ‘시골내기’입니다. 뿌리를 둘 거슬러 올라가면 나뿐 아니라 내 둘레 동무나 이웃은 거의 다 ‘시골사람’이지 싶고, 뿌리를 셋 거슬러 올라가면, 아마 이 나라 모든 사람은 시골마을에 깃들던 넋이지 싶어요.


  도시가 이렇게 커지며 늘어난 지 얼마 안 되었어요. 도시 물질문명이 가득가득 흘러넘친 지 얼마 안 되었어요. 나쁘고 좋고를 떠나, 도시가 무엇이요 어떠한 터인가를 느낄 수 있어야지 싶어요. 저마다 스스로 꿈·사랑·이야기 빛낼 아름다운 나날은 어떤 그림인가 하고 아로새길 수 있어야지 싶어요.


  나는 나대로 나한테 아름다울 그림을 생각합니다. 내가 좋은 마음 되자면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시골에서 살아갑니다. ‘참 좋구나’ 하고 느낄 만한 시골에서 지낼 적에, 비로소 내 마음이 좋은 숨결이 되는구나 싶습니다. 좋은 이웃들이 좋은 마을을 만들어 주지 않아요. 스스로 ‘나한테 무엇이 좋은가’ 하고 생각하며 찾아나설 때에 천천히 ‘좋은 삶’이 이루어져요.

 


- “할머니는 언제나 마음의 눈으로 날 바라봤다고 생각해.” “응, 나도 만나 봤으면 좋았을걸. 타마가 좋아했던 할머니를.” (26쪽)
- “아마 늦봄이었을 거야. 도서관 옆을 흐르는 저 강에 반사된 빛이 천장에 어른거리는 게 너무 예뻐서 넋을 잃고 있었는데, 또 한 사람 가만히 바라보는 아이가 있어서, 아주 짧은 시간이었는데, 그 아이와 똑같은 걸 공유하는 기분이 들었어.” (28쪽)


  아주 어릴 적부터 별을 많이 보고 싶었어요. 인천에서 나고 자라는 동안 ‘인천에는 별 보기 너무 힘들다’고 느꼈어요. 내 어버이가 낳았을 뿐이기에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될 내 고향이니까, 애써 인천을 지키거나 보듬어야 한다고는 여기지 않지만, 내가 첫 발걸음을 떼면서 내 숨결 이을 바람을 마셨으니, 인천이라는 곳은 도시이고 아니고를 떠나 내가 마음으로 품으면 좋으리라 생각해요. 그러나, 아주 어린 나날부터 궁금해 하고 바라던 ‘별’을 늘 떠올렸기에, 나는 오늘, 밤이면 밤마다 흐드러지게 별을 누릴 만한 시골에서 살아갑니다.


  싱그러운 물을 마시면 몸이 매우 반깁니다. 푸른 바람을 마시면 몸이 참으로 흐뭇해 합니다. 보드라운 잎사귀를 쓰다듬거나 굵직한 나뭇줄기 어루만지면 몸이 더없이 활짝 웃어요.


  사람이 살아가는 밑바탕은 바로 숨·밥·물이 아니겠어요? 사람이 살아가자면 무엇보다 숨이랑 밥이랑 물을 맑고 넉넉하며 싱그러이 얻을 만한 데에 보금자리를 마련해야 하지 않겠어요? 돈은 많이 벌더라도 숨이랑 밥이랑 물이 정갈하지 못하면 어떤 삶이 될까요? 돈도 많이 벌고, 꽤 값지다는 아파트도 장만했으며, 퍽 멋지다는 자가용을 굴린다 하더라도, 숨·밥·물을 맑으며 곱게 누리지 못하는 삶은 얼마나 즐거울까요?

 


- ‘나도 슈 사진 갖고 싶어. 애들한테 인화해 달라고 할까? 아니야. 그런 말을 어떻게 해.’ (70쪽)
- “울고 싶으면 우세요.” “하하, 안 울어. …… 뻥이야. 잠깐 울어도 돼?” “얼마든지.” (95쪽)


  하시바 마오 님 만화책 《알록달록 초록빛》(시리얼,2012)을 읽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똑똑히 느낍니다. 누구나 ‘스스로 가장 좋아할 만한 곳’에서 삶을 누릴 때에 즐겁습니다. 꼭 도시여야 하지 않고, 굳이 시골이어야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가장 너르면서 아름다운 마음으로 지낼 만한 터를 찾아야 합니다. 내 마음이 가장 포근하면서 따사로울 수 있는 터에서 보금자리를 이루어야 합니다. 내 마음이 가장 사랑스러우면서 아늑할 만한 터에서 가장 살가운 짝꿍하고 가장 빛나는 하루를 누릴 때에 ‘즐거운 웃음’을 길어올립니다.


  아이들은 지식을 쌓으러 학교에 가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취업 걱정 때문에 대학교에 가거나 자격증을 따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살가운 짝꿍하고 사귀는 길을 찾으러 학교에 가서 또래 동무하고 어울립니다. 아이들 취업이 걱정이라면 땅을 장만하면 돼요. 내 땅에서 내 먹을거리를 거두면 돼요. 내가 먹고 남는 푸성귀랑 곡식이랑 열매를 예쁘게 갈무리해서 내다 팔면 돈도 되지요.


  흙일구기는 졸업장이나 자격증 없어도 돼요. 아니, 졸업장이 있거나 자격증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 흙을 안 만지려고 해요. 머리에 지식 많이 든 사람은 스스로 흙을 안 밟으려고 해요.


  마음에 사랑이 깃든 사람은 즐겁게 흙을 밟아요. 마음에 꿈을 품는 사람은 기쁘게 흙을 만져요. 그래서, 아이들은 언제나 거리끼지 않고 흙을 밟으며 뛰놀지요. 그러니까, 아이들은 늘 스스럼없이 흙을 만지며 놀지요.

 


- “아아, 어젯밤에 아빠랑 싸워서.” “혹시 아빠랑 자주 싸우니? 왜 싸웠어?” “자주라기보다, 아빠랑 좀 안 맞는 것 같아요. 아빠를 보면, 짜증이 나거든요.” “흐음, 그렇구나.” (154쪽)
- ‘아빠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분명 이런 아빠에게도 내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일들이 있었겠지. 아빠에 대한 짜증은, 눈 녹듯이 사라져 있었다.’ (186쪽)


  좋아하는 곳을 바라봅니다. 좋아하는 곳을 돌봅니다. 좋아하는 곳을 생각합니다. ‘고향’이란 오늘 내가 살아가는 곳입니다. 스스로 좋은 마음 되어 아끼는 곳이 고향입니다. 태어난 곳은 ‘태어난 곳’입니다. 일자리 있는 곳은 ‘일자리 있는 곳’입니다. 좋아하는 곳은 ‘고향’입니다. 마음으로 좋아하고, 마음으로 아끼며, 마음으로 보살피며 누리는 곳은 바로 고향입니다.


  우리 아이들이랑, 우리 아이들 또래 다른 아이들 모두, 저마다 스스로 아끼고 사랑할 어여쁜 고향을 그리면서 가꿀 수 있기를 빌어요. 4345.12.23.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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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너무 쉽게 생각하는 책

 


  나중에 긴글 따로 쓸 생각인데, 긴글에 앞서 조금 다른 이야기를 써야 한다고 느껴, 두 아이 재운 깊은 밤 곰곰이 생각을 기울여 꿈을 꾸다가 슬그머니 일어난다.


  적잖은 이들이 이오덕 님 《우리 글 바로쓰기》라는 책을 읽는다. 그런데 막상 이 책을 읽고 나서 무엇 하나 제대로 배우는 이가 드물다. 이 책을 읽은 이들은 이녁 나름대로 ‘책을 꼼꼼히 읽었다’고 생각하는 듯하지만, 책은 꼼꼼히 안 읽어도 된다. 무엇을 밝히는 책인지 찬찬히 아로새겨서 내 삶으로 어떤 이야기를 받아들여 슬기와 넋을 빛낼 때에 아름다운가를 깨달으면 된다. 그러니까, 적잖은 사람들이 《우리 글 바로쓰기》를 읽으면서도, 또 읽고 나서도, 스스로 ‘우리 글 바로쓰기’를 못하는 까닭이라 한다면, 꼼꼼히 줄거리를 살피고 이야기를 좇기는 하지만, 스스로 말삶·글삶·생각삶·사랑삶·일삶·놀이삶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너무 마땅한데, 말마디와 글줄만 바로쓸 수 없다. 삶을 바로세울 때에 비로소 말과 글을 바로세운다. 지난날 몇몇 독재자가 ‘한글전용’을 외치기는 했으나, 이들 몇몇 독재자가 외친 ‘한글전용’이란 ‘한글로 담는 한국말을 알차게 가다듬어 쓰기’가 아니라, ‘말을 담는 그릇인 글만 한글로 적는 시늉’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아직도 한국사람 스스로 ‘한글’과 ‘우리 말’이 어떻게 다른가를 가누지 못하기까지 한다.


  사람들이 책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 첫 쪽부터 마지막 쪽까지 쭉 훑으면 ‘책읽기’가 되는 줄 잘못 안다. 이른바 ‘통독’을 한대서 책읽기가 되지 않는다. 통독 여러 차례 한대서 책읽기라 하지 않는다. 한 줄을 읽더라도 알맹이를 짚어 ‘내 것’으로 삼켜야 책읽기가 된다. 한 줄조차 슬기로이 깨닫지 못하고서 한 권을 다 읽는들 무슨 덧없는 짓일까.


  책읽기는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다. 내 삶에 맞추어 즐길 책읽기이다. 사진찍기나 글쓰기도 이와 같다. 살림하기와 아이키우기도 이와 같다. 훌륭하게 잘 해내야 할 무엇이란 없다. 스스로 사랑을 기울여 즐길 삶만 있다. 책을 내 삶으로 여겨 하나하나 알뜰살뜰 맛난 밥상 차려 먹듯, 슬기로우며 즐겁게 이야기빛을 누릴 노릇이다.


  그러면, 이오덕 님 《우리 글 바로쓰기》는 어떤 책인가. 아직 한국말을 옳거나 바르거나 슬기롭거나 아름답거나 똑똑히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섣불리 통독하면 하나도 못 배우는 책이다. 내가 쓴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도 이와 매한가지이지만, 이런 책은 아주 더디 읽어야 한다. 하루에 다섯 쪽 읽어도 많이 읽는 셈이다. 하루에 두어 쪽씩 천천히 읽으며 스스로 생각을 기울여야 한다. 뒷줄거리 궁금해서 빨리 넘기는 소설책하고 다르다. 지식이나 정보를 다루는 책이 아니니까, 이들 책에서 다루는 이야기는 천천히 곰삭혀야 비로소 ‘내 것’이 된다.


  성경책을 통독한다지만, 정작 성경책이 들려주는 목소리를 슬기롭게 깨우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성경책은 굳이 안 읽어도 된다. 삶을 헤아리도록 도우려는 성경책인 만큼, 내 마음을 읽을 줄 알면 된다. 내 마음이 부르는 소리를 들을 줄 알면 된다. 그러고 나서 내 식구들 마음을 읽고, 내 이웃과 동무 마음을 읽으면 된다.


  이른바 ‘양심’이라고도 하는 내 마음을 읽을 노릇이다. 곧, 나 스스로 ‘내 착한 마음’을 읽고, ‘내 참다운 마음’을 읽으며, ‘내 고운 마음’을 읽으면 된다. 착함과 참다움과 고움은 어디 먼 데에 없다. 바로 내 마음속에 있다. 마음읽기를 할 수 있다고 느끼면, 비로소 종이책을 손에 쥐어 ‘다른 이웃이 다른 삶을 일구며 적바림한 다른 이웃 마음’이 알알이 담긴 책이 어떠한 빛인가 하는 대목을 읽으면 된다. ‘마음을 읽는 책’이라고 깨달으면 책읽기가 쉽지만, 마음 아닌 다른 지식조각이나 정보덩어리를 생각한다면 책읽기는 그저 어렵기만 하다. 4345.12.23.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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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말
[말사랑·글꽃·삶빛 43] 시와 노래로 태어난 말

 


  나는 몇 해 앞서부터 갑작스레 시를 많이 읽습니다. 몇 해 앞서 불현듯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시를 읽는대서 시를 쓸 수 있지는 않을는지 모르나, 내 마음속 깊이 ‘시 쓰고 싶은 꿈’이 생겨서 시를 읽습니다.


  나는 사진을 처음 배울 적에도 사진을 많이 읽었습니다. 사진찍기를 하자니 사진읽기를 해야 한다고 느꼈어요. 사진기는 가장 값싼 녀석으로 장만하고는, 사진책을 사려고 푼푼이 돈을 모아 퍽 비싼 책까지 꾸준히 사서 읽습니다. 사진책은 책방에 선 채 읽어도 그만이라 여기는 사람이 있을 텐데, 사진책은 한 번 훑고 그치는 책이 아니에요. 백 번 천 번 만 번 되읽으며 내 눈길을 가다듬거나 다독이도록 돕는 책이에요.


  아름답다 싶은 노래는, 또 즐겁다 싶은 노래는, 백 번 천 번 만 번 되듣습니다. ‘되듣다’라는 낱말이 있을까 모르겠습니다만, ‘되읽다’라는 낱말이 있으니, 이처럼 써도 좋으리라 생각해요. 아무튼, 내 마음으로 스며드는 아름답다 싶은 노래를 수없이 되듣듯, 내 눈으로 젖어드는 아름답다 싶은 사진을 수없이 되읽습니다. 그러니까, 시를 쓰고 싶은 꿈을 떠올리면서, 내 입술을 곱게 달싹이도록 북돋우는 어여쁜 싯말을 찾아서 내 마음밭을 살찌우는 셈이에요.


  날마다 새로운 시를 읽으며 곰곰이 생각을 가다듬습니다. 어떤 시는 그야말로 ‘문학’입니다. 어떤 시는 참말로 ‘말’입니다. 문학을 하려고 시를 쓰는 분이 있고, 말을 나누려고 시를 쓰는 분이 있어요. 저마다 스스로 하고 싶은 대로 할 테니, 문학을 하든 말을 나누든 대수롭지 않아요. 나는 내 길을 슬기롭게 찾으면 즐겁습니다.


  나는 내 나름대로 내 시를 씁니다. 이를테면, 〈나무그늘〉이라는 이름을 척 붙이고는 “옆에 자전거 세우고 / 다리를 쉰다. // 바람이 흔들며 빚는 / 보드라운 잎사귀 노래 / 듣는다. // 조그마한 흙땅에 / 조그마한 씨가 내려 / 나무로 자라고 / 그늘을 드리운다.”처럼 한달음에 내 시를 씁니다. ‘내 시’를 써요. ‘내 삶’을 씁니다. ‘내 사랑’을 쓰고, ‘내 이야기’를 쓰며, ‘내 꿈’을 써요. 내가 쓰는 내 사랑·꿈·삶 이야기는 내가 여느 자리에서 으레 쓰는 말마디로 이루어집니다. 나는 내가 잘 모르는 낱말을 안 씁니다. 나는 나 혼자만 아는 어떤 대단한 낱말을 안 씁니다. 나는 나랑 오붓하게 살아가는 살붙이하고 곱게 나누는 낱말을 ‘내 시’에 고스란히 담습니다.


  문득문득 ‘내 말’을 돌이켜보곤 합니다. 내 말은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는가 하고 되새기곤 합니다. 누가 이런 낱말을 지었을는지, 어떤 사람이 어떤 삶을 누리면서 어떤 사랑을 담아 이 낱말을 펼쳐서 이웃이랑 스스럼없이 나누었을는지 생각해 봅니다.


  말은 태어났습니다. ‘말’이라는 낱말도 태어났습니다. 숲·나무·짐승·꽃·물·흙·풀·돌·섬·뭍·바다·들·메·길·달·해·별·무지개·미리내·도랑·고랑 같은 낱말을 누가 어떻게 지었을까 궁금하지만, 누가 어떻게 지었는지 하는 뿌리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고 합니다. 어떤 책에도 적히지 않거든요. 쌀·벼·보리·냉이·수수·팥·콩·쑥·달래·감·배·살구·복숭아·오얏·머루·무 같은 낱말을 누가 어디에서 지었을까 궁금하지만, 이 또한 뿌리캐기를 할 수 없다고 해요. 어떤 학자나 지식인도 알아내지 못하고 책에 적지 못하거든요. 이름·꿈·머리·손·다리·몸·손가락·눈·귀·코·입·목 같은 낱말은 누가 어떤 마음으로 지었을까요. 살다·놀다·하다·짓다·쓰다·보다·누다·걷다·섞다·열다·먹다·자다·크다·놓다·주다·내다·뚫다·맞다 같은 낱말은 누가 어떤 사랑을 실어 지었을까요.


  생각을 기울이고, 다시 생각을 기울입니다. 만 해쯤 앞서 이런 낱말이 태어났을까요. 백만 해쯤 앞서는, 천만 해나 일억 해쯤 앞서는 어떤 낱말로 서로 생각과 뜻과 이야기를 주고받았을까요.


  한겨레뿐 아니라 어느 나라 어느 겨레에도 ‘일노래’라 하는 ‘구전민요’나 ‘노동요’가 있다고 해요. 그런데, 일노래는 일할 때에만 부르는 노래는 아니에요. 일할 때에도 부르지만 여느 때에도 으레 부르는 노래예요. 악보 없고 글로 남지 않지만, 아주아주 기나긴 나날에 걸쳐 사람과 사람은 입과 머리와 가슴과 마음에 아로새기면서 이 일노래를 물려주고 물려받았어요. 아이들 노래, 이른바 놀이노래도 이와 같아요. 누가 책으로 따로 적바림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아주 마땅히 물려주고 물려받았어요.


  시를 읽다가 퍼뜩 깨닫습니다. 그래요. 맞아요. ‘바람’이라는 낱말을 처음 빚어서 쓴 사람은 그예 시인입니다. ‘눈물’이라는 낱말을 처음 빚어서 쓴 사람도 그예 시인입니다. ‘숟가락’이라는 낱말을 처음 빚어서 쓴 사람도 그예 시인이에요. 우리가 여느 자리에서 으레 쓰는 가장 수수한 낱말을 처음 빚은 사람은 모두 시인이에요. 어둡다·밝다·좋다·싫다·곱다·밉다·맑다·흐리다·똑똑하다·멍청하다·부르다·고프다·가리다·어울리다 같은 낱말을 처음 빚은 사람 또한 모두 시인이에요. 곧, 우리가 쓰는 ‘가장 흔한 낱말’은 싯말입니다. 싯말이란 노랫말입니다. 일하며 부르든 놀이하며 부르든, 살아가며 부른 노래예요.


  간추려 말하자면 ‘일노래 = 놀이노래 = 삶노래’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삶노래 = 사랑노래 = 꿈노래’입니다. 거듭 말하자면 ‘일 = 놀이 = 삶’이요, ‘노래 = 사랑 = 꿈’입니다. 또한 ‘삶 = 사랑 = 꿈’이고, ‘꿈 = 놀이 = 삶’이기도 합니다.


  시를 쓴다 할 때에는, 노래를 부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시를 쓰는 사람은 삶을 짓는 사람이요, 일과 놀이를 짓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랑을 짓고 꿈을 짓는 마음이기에 시를 쓸 수 있어요. 이러는 동안 시나브로 ‘말을 짓’습니다.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면서 아주 보드랍게 ‘새말 한 자락 태어나’요.


  오늘날 같은 물질문명 사회에서는 새 물건이 끝없이 자꾸 나오기에 ‘새 물건’ 가리킬 새 이름이 있어야 한다고 해요. 그런데 잘 살펴보셔요. 새로 나오는 물건에 붙이는 새 이름은, ‘새 물건’이 머잖아 ‘헌 물건’이 되면 감쪽같이 사라져요. ‘죽는 말’이 돼요. 이와 달리, 우리 삶을 나타내는 아주 오래된 낱말, 이를테면 ‘밥’이나 ‘사람’이나 ‘집’ 같은 낱말은 달라지지 않아요. 천 해나 만 해 앞선 때 사람들이 먹던 밥하고 오늘 우리가 먹는 밥은 다르잖아요. 그렇지만, 예나 이제나 밥은 밥이에요. 예나 이제나 비는 비요 눈은 눈이에요. 하늘은 하늘이고 달은 달이에요. 자동차 배기가스와 공장 매연 때문에 하늘이 뿌옇다 하더라도 하늘은 그저 하늘이고, 구름 또한 그저 구름이에요.


  아하, 하고 또 하나 깨우칩니다. 내가 스스로 시를 쓰고 싶다 생각했을 때에는, 바로 나 스스로 삶을 짓고 싶다 느꼈다는 뜻입니다. 나 스스로 사랑을 짓고 꿈을 지으면서, 나부터 스스로 오래오래 누리고픈 이야기를 우리 아이들이랑 나누고 싶다는 소리예요. 새 삶을 지으며 새 노래를 짓겠지요. 새 노래를 지으면서 새 말마디를 짓겠지요. 새 말마디를 짓되, 억지스레 짓거나 우스꽝스레 지을 수 없어요. 늘 쓰는 낱말을 짓고, 언제나 주고받을 낱말을 짓습니다.


  밤에 깨어 잠 못 이루는 아이를 무릎에 누여 토닥토닥 재웁니다. 곧바로 나는 ‘무릎잠’이라는 낱말을 새로 짓습니다. 아이들이 저희 어버이한테 쓰는 고운 마음결을 느끼면서, 이야 이 아이들 마음속에 참 고운 빛줄기 있구나 생각합니다. 곧바로 나는 ‘마음빛’이라는 낱말을 새로 짓습니다. 옆지기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찬찬히 듣다가, 서로 믿고 아끼는 넋이기에 이처럼 이야기를 나누는구나 싶어, 나는 또 곧바로 ‘이야기꿈’이라든지 ‘이야기사랑’이나 ‘이야기씨’ 같은 낱말을 새로 짓기도 하고, ‘사랑씨(사랑씨앗)’나 ‘꿈씨’ 같은 낱말을 새로 짓습니다.


  시를 쓰기에 말을 씁니다. 노래를 부르기에 말을 부릅니다. 아이들과 나누는 새로운 말마디가 국어사전에 실리건 안 실리건 대수롭지 않습니다. 옆지기와 주고받는 새로운 말자락을 국어학자가 알아주건 안 알아주건 대단하지 않습니다. 나로서는 오늘 하루를 즐기는 말이요 꿈이고 빛입니다. 나로서는 언제나 하루를 밝히는 넋이요 삶이며 숨입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사람들은 스스로 시를 안 씁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문학을 읽을 뿐, 시를 스스로 쓰지 못해요. 오늘날 사람들은 문학을 읽거나 쓰거나 평론할 뿐, 스스로 시를 사랑하지 못해요. 오늘날 사람들은 학교를 다닙니다. 대학교도 많이 다닙니다. 졸업장이나 자격증을 많이 땁니다. 그러나, 문학과 졸업장만 넘치고, 정작 말은 싱그러이 살아나지 못합니다. 문학은 있되 말이 없고, 졸업장은 있되 삶이 없어요. 4345.12.22.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국어사전 뒤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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