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말
[말사랑·글꽃·삶빛 43] 시와 노래로 태어난 말

 


  나는 몇 해 앞서부터 갑작스레 시를 많이 읽습니다. 몇 해 앞서 불현듯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시를 읽는대서 시를 쓸 수 있지는 않을는지 모르나, 내 마음속 깊이 ‘시 쓰고 싶은 꿈’이 생겨서 시를 읽습니다.


  나는 사진을 처음 배울 적에도 사진을 많이 읽었습니다. 사진찍기를 하자니 사진읽기를 해야 한다고 느꼈어요. 사진기는 가장 값싼 녀석으로 장만하고는, 사진책을 사려고 푼푼이 돈을 모아 퍽 비싼 책까지 꾸준히 사서 읽습니다. 사진책은 책방에 선 채 읽어도 그만이라 여기는 사람이 있을 텐데, 사진책은 한 번 훑고 그치는 책이 아니에요. 백 번 천 번 만 번 되읽으며 내 눈길을 가다듬거나 다독이도록 돕는 책이에요.


  아름답다 싶은 노래는, 또 즐겁다 싶은 노래는, 백 번 천 번 만 번 되듣습니다. ‘되듣다’라는 낱말이 있을까 모르겠습니다만, ‘되읽다’라는 낱말이 있으니, 이처럼 써도 좋으리라 생각해요. 아무튼, 내 마음으로 스며드는 아름답다 싶은 노래를 수없이 되듣듯, 내 눈으로 젖어드는 아름답다 싶은 사진을 수없이 되읽습니다. 그러니까, 시를 쓰고 싶은 꿈을 떠올리면서, 내 입술을 곱게 달싹이도록 북돋우는 어여쁜 싯말을 찾아서 내 마음밭을 살찌우는 셈이에요.


  날마다 새로운 시를 읽으며 곰곰이 생각을 가다듬습니다. 어떤 시는 그야말로 ‘문학’입니다. 어떤 시는 참말로 ‘말’입니다. 문학을 하려고 시를 쓰는 분이 있고, 말을 나누려고 시를 쓰는 분이 있어요. 저마다 스스로 하고 싶은 대로 할 테니, 문학을 하든 말을 나누든 대수롭지 않아요. 나는 내 길을 슬기롭게 찾으면 즐겁습니다.


  나는 내 나름대로 내 시를 씁니다. 이를테면, 〈나무그늘〉이라는 이름을 척 붙이고는 “옆에 자전거 세우고 / 다리를 쉰다. // 바람이 흔들며 빚는 / 보드라운 잎사귀 노래 / 듣는다. // 조그마한 흙땅에 / 조그마한 씨가 내려 / 나무로 자라고 / 그늘을 드리운다.”처럼 한달음에 내 시를 씁니다. ‘내 시’를 써요. ‘내 삶’을 씁니다. ‘내 사랑’을 쓰고, ‘내 이야기’를 쓰며, ‘내 꿈’을 써요. 내가 쓰는 내 사랑·꿈·삶 이야기는 내가 여느 자리에서 으레 쓰는 말마디로 이루어집니다. 나는 내가 잘 모르는 낱말을 안 씁니다. 나는 나 혼자만 아는 어떤 대단한 낱말을 안 씁니다. 나는 나랑 오붓하게 살아가는 살붙이하고 곱게 나누는 낱말을 ‘내 시’에 고스란히 담습니다.


  문득문득 ‘내 말’을 돌이켜보곤 합니다. 내 말은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는가 하고 되새기곤 합니다. 누가 이런 낱말을 지었을는지, 어떤 사람이 어떤 삶을 누리면서 어떤 사랑을 담아 이 낱말을 펼쳐서 이웃이랑 스스럼없이 나누었을는지 생각해 봅니다.


  말은 태어났습니다. ‘말’이라는 낱말도 태어났습니다. 숲·나무·짐승·꽃·물·흙·풀·돌·섬·뭍·바다·들·메·길·달·해·별·무지개·미리내·도랑·고랑 같은 낱말을 누가 어떻게 지었을까 궁금하지만, 누가 어떻게 지었는지 하는 뿌리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고 합니다. 어떤 책에도 적히지 않거든요. 쌀·벼·보리·냉이·수수·팥·콩·쑥·달래·감·배·살구·복숭아·오얏·머루·무 같은 낱말을 누가 어디에서 지었을까 궁금하지만, 이 또한 뿌리캐기를 할 수 없다고 해요. 어떤 학자나 지식인도 알아내지 못하고 책에 적지 못하거든요. 이름·꿈·머리·손·다리·몸·손가락·눈·귀·코·입·목 같은 낱말은 누가 어떤 마음으로 지었을까요. 살다·놀다·하다·짓다·쓰다·보다·누다·걷다·섞다·열다·먹다·자다·크다·놓다·주다·내다·뚫다·맞다 같은 낱말은 누가 어떤 사랑을 실어 지었을까요.


  생각을 기울이고, 다시 생각을 기울입니다. 만 해쯤 앞서 이런 낱말이 태어났을까요. 백만 해쯤 앞서는, 천만 해나 일억 해쯤 앞서는 어떤 낱말로 서로 생각과 뜻과 이야기를 주고받았을까요.


  한겨레뿐 아니라 어느 나라 어느 겨레에도 ‘일노래’라 하는 ‘구전민요’나 ‘노동요’가 있다고 해요. 그런데, 일노래는 일할 때에만 부르는 노래는 아니에요. 일할 때에도 부르지만 여느 때에도 으레 부르는 노래예요. 악보 없고 글로 남지 않지만, 아주아주 기나긴 나날에 걸쳐 사람과 사람은 입과 머리와 가슴과 마음에 아로새기면서 이 일노래를 물려주고 물려받았어요. 아이들 노래, 이른바 놀이노래도 이와 같아요. 누가 책으로 따로 적바림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아주 마땅히 물려주고 물려받았어요.


  시를 읽다가 퍼뜩 깨닫습니다. 그래요. 맞아요. ‘바람’이라는 낱말을 처음 빚어서 쓴 사람은 그예 시인입니다. ‘눈물’이라는 낱말을 처음 빚어서 쓴 사람도 그예 시인입니다. ‘숟가락’이라는 낱말을 처음 빚어서 쓴 사람도 그예 시인이에요. 우리가 여느 자리에서 으레 쓰는 가장 수수한 낱말을 처음 빚은 사람은 모두 시인이에요. 어둡다·밝다·좋다·싫다·곱다·밉다·맑다·흐리다·똑똑하다·멍청하다·부르다·고프다·가리다·어울리다 같은 낱말을 처음 빚은 사람 또한 모두 시인이에요. 곧, 우리가 쓰는 ‘가장 흔한 낱말’은 싯말입니다. 싯말이란 노랫말입니다. 일하며 부르든 놀이하며 부르든, 살아가며 부른 노래예요.


  간추려 말하자면 ‘일노래 = 놀이노래 = 삶노래’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삶노래 = 사랑노래 = 꿈노래’입니다. 거듭 말하자면 ‘일 = 놀이 = 삶’이요, ‘노래 = 사랑 = 꿈’입니다. 또한 ‘삶 = 사랑 = 꿈’이고, ‘꿈 = 놀이 = 삶’이기도 합니다.


  시를 쓴다 할 때에는, 노래를 부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시를 쓰는 사람은 삶을 짓는 사람이요, 일과 놀이를 짓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랑을 짓고 꿈을 짓는 마음이기에 시를 쓸 수 있어요. 이러는 동안 시나브로 ‘말을 짓’습니다.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면서 아주 보드랍게 ‘새말 한 자락 태어나’요.


  오늘날 같은 물질문명 사회에서는 새 물건이 끝없이 자꾸 나오기에 ‘새 물건’ 가리킬 새 이름이 있어야 한다고 해요. 그런데 잘 살펴보셔요. 새로 나오는 물건에 붙이는 새 이름은, ‘새 물건’이 머잖아 ‘헌 물건’이 되면 감쪽같이 사라져요. ‘죽는 말’이 돼요. 이와 달리, 우리 삶을 나타내는 아주 오래된 낱말, 이를테면 ‘밥’이나 ‘사람’이나 ‘집’ 같은 낱말은 달라지지 않아요. 천 해나 만 해 앞선 때 사람들이 먹던 밥하고 오늘 우리가 먹는 밥은 다르잖아요. 그렇지만, 예나 이제나 밥은 밥이에요. 예나 이제나 비는 비요 눈은 눈이에요. 하늘은 하늘이고 달은 달이에요. 자동차 배기가스와 공장 매연 때문에 하늘이 뿌옇다 하더라도 하늘은 그저 하늘이고, 구름 또한 그저 구름이에요.


  아하, 하고 또 하나 깨우칩니다. 내가 스스로 시를 쓰고 싶다 생각했을 때에는, 바로 나 스스로 삶을 짓고 싶다 느꼈다는 뜻입니다. 나 스스로 사랑을 짓고 꿈을 지으면서, 나부터 스스로 오래오래 누리고픈 이야기를 우리 아이들이랑 나누고 싶다는 소리예요. 새 삶을 지으며 새 노래를 짓겠지요. 새 노래를 지으면서 새 말마디를 짓겠지요. 새 말마디를 짓되, 억지스레 짓거나 우스꽝스레 지을 수 없어요. 늘 쓰는 낱말을 짓고, 언제나 주고받을 낱말을 짓습니다.


  밤에 깨어 잠 못 이루는 아이를 무릎에 누여 토닥토닥 재웁니다. 곧바로 나는 ‘무릎잠’이라는 낱말을 새로 짓습니다. 아이들이 저희 어버이한테 쓰는 고운 마음결을 느끼면서, 이야 이 아이들 마음속에 참 고운 빛줄기 있구나 생각합니다. 곧바로 나는 ‘마음빛’이라는 낱말을 새로 짓습니다. 옆지기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찬찬히 듣다가, 서로 믿고 아끼는 넋이기에 이처럼 이야기를 나누는구나 싶어, 나는 또 곧바로 ‘이야기꿈’이라든지 ‘이야기사랑’이나 ‘이야기씨’ 같은 낱말을 새로 짓기도 하고, ‘사랑씨(사랑씨앗)’나 ‘꿈씨’ 같은 낱말을 새로 짓습니다.


  시를 쓰기에 말을 씁니다. 노래를 부르기에 말을 부릅니다. 아이들과 나누는 새로운 말마디가 국어사전에 실리건 안 실리건 대수롭지 않습니다. 옆지기와 주고받는 새로운 말자락을 국어학자가 알아주건 안 알아주건 대단하지 않습니다. 나로서는 오늘 하루를 즐기는 말이요 꿈이고 빛입니다. 나로서는 언제나 하루를 밝히는 넋이요 삶이며 숨입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사람들은 스스로 시를 안 씁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문학을 읽을 뿐, 시를 스스로 쓰지 못해요. 오늘날 사람들은 문학을 읽거나 쓰거나 평론할 뿐, 스스로 시를 사랑하지 못해요. 오늘날 사람들은 학교를 다닙니다. 대학교도 많이 다닙니다. 졸업장이나 자격증을 많이 땁니다. 그러나, 문학과 졸업장만 넘치고, 정작 말은 싱그러이 살아나지 못합니다. 문학은 있되 말이 없고, 졸업장은 있되 삶이 없어요. 4345.12.22.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국어사전 뒤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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