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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록달록 초록빛
하시바 마오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201
좋아하는 곳
― 알록달록 초록빛
하시바 마오 글·그림,이상은 옮김
시리얼 펴냄,2012.11.25./7000원
어젯밤은 별을 몇 못 봅니다. 하늘에 구름이 그리 많이 끼지 않았는데에도 별이 얼마 안 보입니다. 동짓밤이 가깝기 때문일까요. 동짓밤이라서 별을 덜 보지는 않지 싶은데, 깊은 밤 아이들이랑 마을길을 거닐며 하늘바라기를 하면서 드문드문 보이는 별만 헤아립니다.
우리 식구 살아가는 전남 고흥은 깊은 시골입니다. 그러나, 이곳 고흥에서도 읍내나 면내에 나가고 보면, 읍내와 면내도 ‘크기는 작다’ 하더라도 도심하고 비슷하게 생겼어요. 가게가 있고 전깃불이 많습니다. 도시하고 견주면, 고흥 이웃 순천보다도 훨씬 조그마한 ‘시내’일 뿐이지만, 이렇게 조그마한 ‘도심 전깃불’로도 별빛을 가리기에는 넉넉해요.
인천을 떠나 음성으로 갔고, 음성을 다시 떠나 고흥으로 옵니다. 고흥에 보금자리 마련해 지내면서 둘레 이웃한테서 으레 ‘왜 고흥까지 왔느냐’ 하는 말을 듣습니다. 고흥‘으로’가 아닌 고흥‘까지’라고들 묻는데, 나도 옆지기도 들려줄 말은 오직 하나입니다. 우리 스스로 즐겁게 살아갈 만한 시골이요, 우리 아이들이 앞으로 무럭무럭 자라고 난 다음에도 신나게 지낼 만한 시골이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 ‘으악! 꼴이 이게 뭐야? 애벌레 같아! 녹색을 너무 많이 썼나 봐! 이런 꼴로 말을 걸 수는, 없어! 나중에 다시 오자.’ (5쪽)
- ‘2학년이 되고 나서 방과 후에는 언제나 이 마을의 낡은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언제부터였는지 토요일마다 이곳에 오는 남자아이를 은근히 기다리게 됐다.’ (9쪽)
- “타마는 매일 여기서 뭐 해?” “음, 숙제도 하고, 책도 읽고, 멍하니 있거나 잘 때도 있어.” “자는구나?” “응, 가끔.” “도서관 좋아해?” “응. 여긴 할머니 댁이랑 닮았으니까.” (11쪽)
서울하고 가까운 시골은 시골다움을 잃습니다. 서울뿐 아니라 크고작은 도시와 가까운 시골은 시골다움을 빼앗깁니다. 서울하고 가까운 시골에서는 몽땅 서울로 사람(어린이와 젊은이)을 보내려는 흐름에 휘둘립니다. 서울하고 가깝기 때문에, 서울에서 자가용 몰고 시골을 구석구석 후비듯 누비려는 손님이 들끓어 골치아픕니다. 서울이나 부산에서도 멀고, 가까운 순천하고도 먼 고흥은 뜨내기 손님이 섣불리 들어오지 않습니다. 어떤 관광시설도 없고, 널리 알려진 관광지도 없으니, 굳이 이곳까지 들어오려 하지 않습니다. 애써 고흥까지 들어온 손님들은 시골 면이나 리에서 ‘구멍가게’ 하나 찾기 힘든 모습에 혀를 내두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가게 적고 논밭 넓으며 숲이 드리우니 좋은걸요.
숲바람을 누리며 숲내음을 맡습니다. 숲내음을 맡으며 숲속 골짝을 타고 흐르는 냇물을 마십니다. 골짝물을 마실 수 있으니 숲빛을 헤아립니다. 숲빛을 헤아리며 숲말을 가만히 듣습니다. 바람과 햇살과 멧새와 풀벌레가 조곤조곤 숲노래 들려줍니다.
숲은, 바라보기만 해도 즐겁습니다. 숲은, 아이들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 들어가면 한결 즐겁습니다. 숲은, 내 삶터를 숲처럼 일굴 때에 더할 나위 없이 즐겁습니다.
아마 예전에는 누구라도 느끼며 살았겠지요. 예전에는 누구나 시골사람이었고, 시골에서 흙을 만졌을 테니, 흙내음 숲내음 물내음 햇살내음 바람내음 잔뜩 들이켜면서 스스로 숲사람으로 살았겠지요.
이제 요즈음 사람들은 곁에 나무를 두지 않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곁에 시멘트와 아스팔트와 쇠붙이와 플라스틱을 둡니다. 한 달이고 한 해이고 흙 한 번 안 밟는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흙을 안 밟을 뿐 아니라 흙을 안 만지며 사는 사람이 대단히 많습니다.
생각해 봐요. 사람이 숨을 쉬려면 풀과 나무가 있어야 해요. 그런데 도시에 풀과 나무가 얼마나 있습니까. 사람만 잔뜩 있고, 높은 건물만 잔뜩 있으며, 자동차만 잔뜩 있어요. 이런 데에서 참말 숨이 막혀 어떻게 사람답게 살아가겠어요.

- “미도리는 무슨 책 읽어?” “음. 주로 비소설이 많아. 특히 여행기. 이런 책을 읽으면, 내 세계가 얼마나 작은지 깨닫게 되거든. 그리고 낯선 세계를 직접 여행하는 것처럼 해방감과 자유를 느끼게 돼. 마음속이 채워지는 느낌이 들어. 아, 너무 이상한가?” “아니, 왠지 알 것 같아. 난 가끔 외톨이처럼 느껴질 때가 있지만, 그럴 때 할머니가 주신 책을 읽으면, 마음속이 서서히 따뜻해지거든. 아, 좀 다른가?”“아니, 아마 그런 느낌일 거야.” (15∼16쪽)
- “참, 연하장 도착했어. 그거 감상문이지?” “응. 좋은 책이라 알려주고 싶었거든.” “재밌던데? 그런 연하장은 처음이었어. 책 한 권 읽은 것 같아.” (21쪽)
내 어버이는 시골에서 태어났지만, 도시로 와서 혼인했습니다. 나와 내 형은 도시에서 태어났습니다. 나는 도시사람이지만, 뿌리 하나만 거슬러 올라가면 나도 ‘시골내기’입니다. 뿌리를 둘 거슬러 올라가면 나뿐 아니라 내 둘레 동무나 이웃은 거의 다 ‘시골사람’이지 싶고, 뿌리를 셋 거슬러 올라가면, 아마 이 나라 모든 사람은 시골마을에 깃들던 넋이지 싶어요.
도시가 이렇게 커지며 늘어난 지 얼마 안 되었어요. 도시 물질문명이 가득가득 흘러넘친 지 얼마 안 되었어요. 나쁘고 좋고를 떠나, 도시가 무엇이요 어떠한 터인가를 느낄 수 있어야지 싶어요. 저마다 스스로 꿈·사랑·이야기 빛낼 아름다운 나날은 어떤 그림인가 하고 아로새길 수 있어야지 싶어요.
나는 나대로 나한테 아름다울 그림을 생각합니다. 내가 좋은 마음 되자면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시골에서 살아갑니다. ‘참 좋구나’ 하고 느낄 만한 시골에서 지낼 적에, 비로소 내 마음이 좋은 숨결이 되는구나 싶습니다. 좋은 이웃들이 좋은 마을을 만들어 주지 않아요. 스스로 ‘나한테 무엇이 좋은가’ 하고 생각하며 찾아나설 때에 천천히 ‘좋은 삶’이 이루어져요.

- “할머니는 언제나 마음의 눈으로 날 바라봤다고 생각해.” “응, 나도 만나 봤으면 좋았을걸. 타마가 좋아했던 할머니를.” (26쪽)
- “아마 늦봄이었을 거야. 도서관 옆을 흐르는 저 강에 반사된 빛이 천장에 어른거리는 게 너무 예뻐서 넋을 잃고 있었는데, 또 한 사람 가만히 바라보는 아이가 있어서, 아주 짧은 시간이었는데, 그 아이와 똑같은 걸 공유하는 기분이 들었어.” (28쪽)
아주 어릴 적부터 별을 많이 보고 싶었어요. 인천에서 나고 자라는 동안 ‘인천에는 별 보기 너무 힘들다’고 느꼈어요. 내 어버이가 낳았을 뿐이기에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될 내 고향이니까, 애써 인천을 지키거나 보듬어야 한다고는 여기지 않지만, 내가 첫 발걸음을 떼면서 내 숨결 이을 바람을 마셨으니, 인천이라는 곳은 도시이고 아니고를 떠나 내가 마음으로 품으면 좋으리라 생각해요. 그러나, 아주 어린 나날부터 궁금해 하고 바라던 ‘별’을 늘 떠올렸기에, 나는 오늘, 밤이면 밤마다 흐드러지게 별을 누릴 만한 시골에서 살아갑니다.
싱그러운 물을 마시면 몸이 매우 반깁니다. 푸른 바람을 마시면 몸이 참으로 흐뭇해 합니다. 보드라운 잎사귀를 쓰다듬거나 굵직한 나뭇줄기 어루만지면 몸이 더없이 활짝 웃어요.
사람이 살아가는 밑바탕은 바로 숨·밥·물이 아니겠어요? 사람이 살아가자면 무엇보다 숨이랑 밥이랑 물을 맑고 넉넉하며 싱그러이 얻을 만한 데에 보금자리를 마련해야 하지 않겠어요? 돈은 많이 벌더라도 숨이랑 밥이랑 물이 정갈하지 못하면 어떤 삶이 될까요? 돈도 많이 벌고, 꽤 값지다는 아파트도 장만했으며, 퍽 멋지다는 자가용을 굴린다 하더라도, 숨·밥·물을 맑으며 곱게 누리지 못하는 삶은 얼마나 즐거울까요?

- ‘나도 슈 사진 갖고 싶어. 애들한테 인화해 달라고 할까? 아니야. 그런 말을 어떻게 해.’ (70쪽)
- “울고 싶으면 우세요.” “하하, 안 울어. …… 뻥이야. 잠깐 울어도 돼?” “얼마든지.” (95쪽)
하시바 마오 님 만화책 《알록달록 초록빛》(시리얼,2012)을 읽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똑똑히 느낍니다. 누구나 ‘스스로 가장 좋아할 만한 곳’에서 삶을 누릴 때에 즐겁습니다. 꼭 도시여야 하지 않고, 굳이 시골이어야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가장 너르면서 아름다운 마음으로 지낼 만한 터를 찾아야 합니다. 내 마음이 가장 포근하면서 따사로울 수 있는 터에서 보금자리를 이루어야 합니다. 내 마음이 가장 사랑스러우면서 아늑할 만한 터에서 가장 살가운 짝꿍하고 가장 빛나는 하루를 누릴 때에 ‘즐거운 웃음’을 길어올립니다.
아이들은 지식을 쌓으러 학교에 가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취업 걱정 때문에 대학교에 가거나 자격증을 따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살가운 짝꿍하고 사귀는 길을 찾으러 학교에 가서 또래 동무하고 어울립니다. 아이들 취업이 걱정이라면 땅을 장만하면 돼요. 내 땅에서 내 먹을거리를 거두면 돼요. 내가 먹고 남는 푸성귀랑 곡식이랑 열매를 예쁘게 갈무리해서 내다 팔면 돈도 되지요.
흙일구기는 졸업장이나 자격증 없어도 돼요. 아니, 졸업장이 있거나 자격증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 흙을 안 만지려고 해요. 머리에 지식 많이 든 사람은 스스로 흙을 안 밟으려고 해요.
마음에 사랑이 깃든 사람은 즐겁게 흙을 밟아요. 마음에 꿈을 품는 사람은 기쁘게 흙을 만져요. 그래서, 아이들은 언제나 거리끼지 않고 흙을 밟으며 뛰놀지요. 그러니까, 아이들은 늘 스스럼없이 흙을 만지며 놀지요.

- “아아, 어젯밤에 아빠랑 싸워서.” “혹시 아빠랑 자주 싸우니? 왜 싸웠어?” “자주라기보다, 아빠랑 좀 안 맞는 것 같아요. 아빠를 보면, 짜증이 나거든요.” “흐음, 그렇구나.” (154쪽)
- ‘아빠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분명 이런 아빠에게도 내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일들이 있었겠지. 아빠에 대한 짜증은, 눈 녹듯이 사라져 있었다.’ (186쪽)
좋아하는 곳을 바라봅니다. 좋아하는 곳을 돌봅니다. 좋아하는 곳을 생각합니다. ‘고향’이란 오늘 내가 살아가는 곳입니다. 스스로 좋은 마음 되어 아끼는 곳이 고향입니다. 태어난 곳은 ‘태어난 곳’입니다. 일자리 있는 곳은 ‘일자리 있는 곳’입니다. 좋아하는 곳은 ‘고향’입니다. 마음으로 좋아하고, 마음으로 아끼며, 마음으로 보살피며 누리는 곳은 바로 고향입니다.
우리 아이들이랑, 우리 아이들 또래 다른 아이들 모두, 저마다 스스로 아끼고 사랑할 어여쁜 고향을 그리면서 가꿀 수 있기를 빌어요. 4345.12.23.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