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 얻는 마음

 


  내가 씨앗을 맨 처음 본 때가 언제인지 또렷하게 떠오르지는 않습니다만, 국민학교 1학년 적에 학교 관찰일기 숙제를 내려고 콩을 심어 돌본 일은 환하게 떠올라요. 관찰일기 숙제를 해야 하기에 어머니한테 “콩알 주셔요.” 하고 말씀드리니, 밥으로 지어 먹는 콩을 석 알쯤 주셨어요. 나는 학교에서 배운 대로 속 비치는 동그란 그릇에 솜 깔고 물 적셔 콩알을 놓고 볕 잘 드는 자리에 두었어요. 날마다 신나게 오래오래 들여다보는데, 자고 일어난 석 밤째던가, 콩알 한쪽에 살짝 비져나온 꼬리가 보였어요. 뿌리라 할는지 싹이라 할는지 조금 돋았어요. 손가락으로 살살 만지는데 얼마나 보드랍고 앙증맞든지요. 이렇게 싹이 튼 콩을 꽃그릇에 흙 담고 하나하나 손가락 복복 눌러 심었고, 언제 흙 위로 삐죽 돋을까 하고 기다렸어요. 그리고 이 콩이 자라는 모습을 바지런히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써서 관찰일기를 다 꾸렸지요. 관찰일기는 담임선생이 거두어서 돌려주지 않아 이제 나한테는 없는데, 내가 어머니한테서 얻어 심은 콩 몇 알로 밥그릇 수북하게 담을 만한 열매(콩알)가 맺히고, 이 열매로 저녁에 소담스레 밥을 차려서 먹으니 얼마나 맛났는지 몰라요.


  그 뒤, 어머니는 동네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자, 여기 나팔꽃씨.” 하고는 몇 알 내 손바닥에 올려놓았어요. 작은 손바닥에 작은 꽃씨. 누르면 톡 터질 듯한 누런 알맹이 안쪽에는 새까만 꽃씨가 여럿 깃들었는데, 이 꽃씨 두서너 알 심고 나머지는 책상맡에 두고는 늘 바라보며 좋아했어요. 예쁘고 예쁘니까요.


  가을이 되어 나팔꽃 모두 지고 씨알을 맺으면, 씨주머니 터뜨리지 않게 곱게 건사해서 빈 필름통에 담아요. 그러고는 학교에 가져가서 동무들한테 보여주지요. 그러면 동무들은 저마다 저희 집이나 동네에서 건사한 ‘다른 꽃씨’를 이듬날 가지고 와서 보여줍니다. “나도 나팔꽃씨 있다! 너네는 이런 꽃시 없지?” 하고 으쓱대던 동무들이 많았어요. 그러면 나는 어머니한테 달려가서 ‘다른 꽃씨’도 찾아 달라고 조릅니다. 어머니는 이런 꽃씨 저런 꽃씨를 찾아서 줍니다. 해바라기씨를 받고, 민들레씨는 살살 떼어서 건사해 봅니다. 이동안, 씨 한 알이란 참 놀랍다고 느낍니다. 이 작은 씨앗에서 얼마나 고운 꽃 태어나 한 해 내내 즐거운 웃음꽃 피워내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곡식 씨앗은 따사로운 밥이 되고, 꽃 씨앗은 해맑은 마음이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씨앗으로 왜 장사를 하려 들까요. 왜 씨앗을 자꾸 이리 고치고 저리 바꾸면서 ‘개량·변형·조작’을 하려 드나요. 풀씨를 바꾸듯 사람씨도 바꾸려는 뜻은 아닌가요. 꽃씨를 고치듯 사람씨까지 고치려는 뜻은 아닌가요. 나무씨를 건드리지 않기를 빌어요. 살구씨는 살구씨대로 좋아요. 잣씨는 잣씨대로 좋아요. 볍씨는 볍씨대로 좋고, 이 좋은 기운 살포시 담아 내 사랑씨를 정갈히 다스릴 때에 아름답구나 싶어요.


  믿음씨를 서로 마음밭에 심어 고운 마음씨 될 때에 이 지구별에 밝은 햇살 드리우겠지요. 글을 쓰는 사람은 글씨를 심습니다. 글씨가 담겨 책씨가 됩니다. 책씨에는 생각씨가 깃들고, 생각씨가 모여 슬기씨로 이어집니다. 나는 아이들한테 꿈씨를 물려주고 싶습니다. 시골마을에서 별바라기를 하며 별씨와 달씨를 아이들이랑 나누고 싶습니다. 흙을 보듬어 씨앗 하나 건사하니, 이웃이랑 즐거움을 나눕니다. 4345.12.23.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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