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노래

 


저 이웃마을 소 우는 소리
달밤에 멀리멀리
퍼진다.

 

마당으로 내려와
별바라기 달바라기
조용히 하는 동안
밤새 밤벌레
밤자동차 밤바람
고즈넉히 노래한다.

 

이 땅에
자동차 생기지 않던
그리 안 먼 옛날까지
밤자동차 아닌
밤아이 밤어른
밤개 밤짐승
온갖 숨결 싱그러이
달노래 불렀겠지.

 

서울에서는 놀고 먹느라
귀 따가운 술노래 퍼지고,
시골에서는 서울로 떠나느라
작디작게 움츠러드는 마을마다
아이들 없어 아주 고요하다.

 


4345.11.22.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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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서재 보슬비 님 글 가운데

2012년 서재달인 되었다는 글이 보여

축하글을 남긴 다음,

알라딘 알림글을 들여다보니,

지난 12월 17일에

2012년 알리딘서재 달인을 밝혔더라.

벌써 열흘이나 지났네.

 

나도 거기에 이름이 끼었다.

올가을까지만 해도

나는 알라딘에 처음 들어올 때 쓴 '된장' 이름을 썼으니,

이런 데에서 발표가 나면

ㄱㄴㄷ 차례에 따라 꽤 앞에 이름이 나왔지만,

이제는 'ㅎ'인 함께살기 이름이니

꽤 뒤에 이름이 나온다.

~~ㅋ

 

아무튼, 나는 다른 것보다

'1월~12월 연간통계'를 볼 수 있는

새해를 기다린다.

 

나는 지난 2011년에

이웃서재한테 '댓글 남기기'를 너무 안 해서... ㅠ.ㅜ

더없이 미안했다.

 

이번에 통계를 보니... 이런 것도 나오던데...

 

아무튼, 2012년 목표였던 3650개 댓글 달기는...

다른 서재 분들한테는 퍽 '죄송한' 말씀이지만,

나로서는 '읽을 만한' 글이 너무 적어서

댓글을 달기 아주 힘들었다.

 

'읽은 글'에는 댓글을 다 달려고 애썼지만,

댓글은 못 달고 추천만 누른 적도 꽤 많다.

그래도... 2011년 12월부터 2012년 11월까지

댓글 810개를 달았다고 하니...

내가 보는 내가 꽤나 예쁘고 대견하다 ^^;;;;

(그래도 1000개를 못 넘겼네... ㅠ.ㅜ)

 

올 한 해 내가 받은 댓글 628개를 훌쩍 넘어

810개 댓글을 단 대목도 마음에 든다.

새해에는... 내가 받은 댓글 두 곱이나 세 곱쯤

댓글을 달 수 있기를 빈다.

 

..

 

아무튼.

모두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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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2-12-28 14:28   좋아요 0 | URL
함께살기님 서재의 달인에 오르신거 축하드려요^^

파란놀 2012-12-29 07:12   좋아요 0 | URL
카스피 님 또한 축하합니다~~~~ ^^

북극곰 2012-12-28 17:28   좋아요 0 | URL
메달이 네 개나 걸려있었군요. 이제야 봤습니다. ^^
가끔씩 들려주시는 함께살기님의 댓글에 감사를 표하며 한 자 적고갑니다.
함께살기님, 내년에도 건강하시고 시골살이 글도 자주자주 올려주세요. :)
복 많이 받으시구요~!

파란놀 2012-12-29 07:12   좋아요 0 | URL
에고고, 고맙습니다.
북극곰 님 새해는
언제나 사랑이기를 빌어요
 

소설은 어떻게 쓰는가
[말사랑·글꽃·삶빛 44] 글로 빚는 꽃인 문학

 


  시와 수필과 소설과 희곡을 일컬어 ‘네 갈래 큰 문학줄기’라고 일컫습니다. 이들 문학은 모두 글로 써서 이룹니다. 시는 으레 입으로 읊기 마련이고, 희곡은 무대에 올려 배우들이 공연을 하지만, 입으로 읊거나 무대에 올리기 앞서 누군가 글로 적바림하면서 문학으로 먼저 태어납니다.


  글이 있기에 문학이 있습니다. 글은 말이 있기에 있어요. 말은 곧 글이 되고, 글은 곧 문학이 됩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이면, 말은 삶이 있기에 있어요. 그러니까, 삶과 말과 글과 문학은 언제나 한 흐름입니다.


  시골마을 작은학교 아이들을 가르친 삶을 톺아보면서 ‘글쓰기’ 이야기를 나눈 이오덕 님이 있습니다. 이오덕 님은 《우리 글 바로쓰기》(한길사,1989)라고 하는 책을 내놓으면서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너무 엉터리로 쓰는 모습을 밝혔습니다. 《우리 글 바로쓰기》 1권을 읽다 보면, ‘소설쓰기’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203, 213, 214, 221쪽에 걸쳐 띄엄띄엄 나옵니다. 먼저 이 글을 천천히 읽어 봅니다. 옳고 그름이 아닌, 삶과 말을 헤아려 봅니다.


  “소설이고 동화고 수필이고 할 것 없이 지금 우리 글은 순수한 우리 말인 ‘웃는다’와 이 ‘웃는다’를 꾸미는 온갖 아름다운 어찌씨들을 다 쫓아내고, 대신 ‘미소짓다’한 가지만 쓰려고 하고 있다 …… 우리 말로 쓰는 소설에 꼭 남의 나라 말같이 남녀를 구분해서 ‘그’‘그녀’로 해야 할까 …… 다른 어떤 글보다도 소설은 입말에 가까운 말이 되어야 한다. 더구나 소설에 자주 나오는 등장인물을 가리키는 삼인칭의 말은 실제로 쓰는 말이거나 적어도 자연스럽게 쓰일 수 있는 듣기 좋은 말, 아름다운 말이어야 한다 …… 사라져 가는 순수한 우리 말 대신에 어떤 말이 생겨나고 어떤 말이 남게 되는가? 도시 산업사회의 병든 소비문화는 판에 박힌 획일의 말과 삶에서 떠난 추상의 말에다가 천박한 기분을 나타내는 감각의 말만을 남겨 놓는다.”


  이오덕 님은 ‘순수한 우리 말’이라고 적습니다만, 한국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한국사람이 쓰는 말은 그예 한국말입니다. 따로 ‘순수하거나 안 순수하거나’ 하는 금을 그을 수 없습니다. 다만, 나날이 서양 문화와 문명을 더 넓게 많이 받아들이다 보니, 자꾸자꾸 영어나 한문이 섞여 들어와서 ‘순수한 우리 말’을 남달리 살피기도 할밖에 없다고 느낍니다. 그렇잖아요. 한국사람이라면 ‘하양·희다·하얗다’ 같은 한국말을 쓰면 넉넉해요. 굳이 ‘百色’이라 쓸 까닭이 없어요. 어떤 이는 ‘純百色’ 같은 외국말(한자말)까지 쓰는데, 한국말로는 ‘새햐얗다’예요. 여기에 영어로 ‘white’가 끼어들지요. 그러니까, ‘百色’과 ‘white’가 어지러이 춤추는 드센 물결 사이에서 ‘순수한 우리 말’인 ‘하양·희다·하얗다’를 따로, 남달리, 새롭게 생각하면서 살피고 아끼지 않으면, 우리 한국말은 차츰 힘을 잃거나 사라집니다.


  회사나 공공기관에서는 ‘이름짓기’를 으레 ‘네이밍(naming)’이라는 영어로 이야기해요. 아예 ‘브랜드 네이밍’이라 하기도 하고, 여느 사람들 사이에서는 ‘베이비 네이밍’ 같은 말까지 퍼져요. ‘아이 이름 짓기’나 ‘아기 이름 짓기’처럼 말하면, 어딘가 시골스럽다며 깎아내리는 사람마저 있어요. 나라는 한국이고 사람은 한국사람이지만, 말은 한국말이 아니라 할까요. 나라도 사람도 말도 모두 ‘한국다움’을 벗어던져야 무언가 볼 만하거나 자랑할 만하다고 여긴달까요.


  이 흐름은 문학으로도 고스란히 이어집니다. 시에도, 수필에도, 희곡에도, 또 소설에도, 자꾸자꾸 외국말로 이야기를 빚으려는 젊은이가 늘어나요. 일본제국주의가 이 겨레를 짓밟을 적에는 뜻있는 문학꾼들이 힘을 내어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맑은 한겨레 말마디’로 문학을 했는데, 이제 일본제국주의도 중국사대주의도 없는 민주주의나라에서, 되레 중국 한자말과 일본 말투와 서양 말씨를 뒤섞는 얼치기 문학이 끝없이 쏟아져요.


  그런데, 어느 모로 보면 이 흐름이 오늘날 한국에서는 참 어쩔 수 없는 노릇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일본제국주의나 중국사대주의가 판치던 때에는, 문학하던 이들이 으레 시골에서 살았어요. 서울에서 살더라도 흙을 밟고 나무를 만지며 풀을 먹으면서 살았어요. 오늘날에는 한국사람 거의 모두 도시에서 살아요. 92%가 넘는 사람이 도시에 주민등록을 두었다고 하니까, 훨씬 많은 사람이 도시에서 산다는 뜻이에요. 이제 문학꾼들 가운데 흙을 만지는 이는 매우 적어요. 나무를 만지거나 바라보는 문학꾼은 아주 드물어요. 풀을 먹으면서 스스로 씨앗을 심는 문학꾼은 참말 몇 없어요. 모든 문학은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퍼져요. 문학을 하는 이들도 도시에서 살고, 문학을 읽는 이들도 도시에서 살아요. 시골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시도 소설도 수필도 읽지 않아요. 아니, 책을 아예 안 읽는다고 할 만해요. 시골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텔레비전 연속극만 쳐다봐요. 그나마, 도시에 있는 사람들이 책도 읽고 문학도 읽어요. 이제 한국문학은 시골하고는 동떨어졌다고 해야지 싶어요. 시골에서는 문학이 태어나지 못하고, 시골에서 태어나는 문학이 있더라도 비평을 못 받는 한편 독자도 못 얻어요.


  곧, 모든 문학이 도시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이제부터 한국말은 차츰 사라지면서 빛을 잃을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도시는 경제성장과 투자무역과 건설건축으로 움직이거든요. 도시에서는 말을 이루는 바탕인 삶이 없어요. 경제성장과 투자무역과 건설건축만 있어요. 도시에서는 새말이 태어나지 않아요. 도시에서는 ‘이웃나라에서 새 물질과 문명과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새 외국말을 받아들이는 흐름’이 있을 뿐이에요.


  때때로, 도시에서도 새말이 태어나곤 해요. ‘즐겨찾기’라든지 ‘누리집’ 같은 낱말은 도시에서 만들지요. 그러나, 사람들 누구나 쓴다는 손전화 기계 하나만 바라봐도, 도시가 어떤 얼거리요 어떤 말짜임인가를 알 만해요. 이래저래 글다듬기를 해서 ‘손전화’라 할 뿐, 도시사람이 쓰는 말마디는 끝모를 영어물결입니다. 기계이름부터 이 구석 저 구석 모두 영어바람입니다. 한국말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한국말은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계다움(글로벌)’이라는 이름을 앞세워 영어 아닌 지구별 여러 나라 다 다른 삶과 문화와 이야기는 숨을 죽여야 합니다. 한국말도, 필리핀말도, 스리랑카말도, 볼리비아말도, 노르웨이말도, 핀란드말도, 체코말도, 잠비아말도, 모두모두 숨을 죽여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아이를 둔 어버이’는 아이들한테 영어동화를 읽힙니다. 아이들이 중학교에 들어설라치면 영어소설을 읽힙니다. 노벨상을 타려면 영어로 소설쓰기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마저 나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사람을 이웃으로 사귀며 문학을 누리는 즐거움보다는, ‘세계다움’이라는 허울을 뒤집어쓰면서, 스스로 삶을 빛내는 길하고는 동떨어지는 모습입니다.


  이오덕 님은 ‘순수한 우리 말’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순수한 우리 말’이란 따로 없습니다만, 이 ‘순수한 우리 말’이란 무엇인고 하면, 한국에서 나고 자라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꾸밈없이 드러내는 말입니다. 비가 올 때에 ‘비’라 말하고, 눈이 올 때에 ‘눈’이라 말합니다. 흙을 일구며 ‘흙’이라 말하고, 풀을 뜯으며 ‘풀’이라 말해요. 풀내음 향긋하다고 느끼며 ‘풀빛’을 ‘푸르다’고 여깁니다. 멧골에서 지저귀는 새들이니 ‘멧새’요,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노랫소리’로 받아들입니다. 졸졸 흘러 냇물입니다. 밭이랑 밭고랑 김매기를 합니다. 아침과 저녁으로 밥을 차립니다. 설거지를 합니다. 빨래를 합니다. 이부자리를 여밉니다. 자장노래를 부릅니다. 달빛을 바라보고 미리내를 즐깁니다. 별이 가뭇가뭇 스러지는 새벽에 천천히 동이 트며 노을빛 발갛고, 햇살은 온누리를 따숩게 감쌉니다.


  소설이란, 이와 같이 너른 삶자락을 담는 말그릇입니다. 지구별 저마다 다른 겨레가 서로서로 다 다르게 꾸리는 아름다운 삶자락을 겨레마다 다 다른 말마디로 알뜰살뜰 건사하며 갈무리하는 글이 바로 소설입니다.


  소설말은, 겨레마다 가장 아름다운 말이 싱그러이 넘치기 마련입니다. 겨레마다 가장 아름다운 말로, 저마다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옛이야기이든 ‘오늘이야기’이든, 소설말은 그때그때 가장 아름답다고 여기는 이야기를 살포시 고장마다 가장 아름답게 이어온 말마디로 담아서 뒷사람한테 곱디곱게 물려주는 말그릇 노릇을 해요. 말선물이랄 수 있고 말잔치랄 수 있으며 말꾸러미랄 수 있어요.


  한국은 한국 소설입니다. 경상도는 경상도 소설입니다. 전라도 전주는 전라도 전주 소설입니다.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은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소설이요,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에서도 신호리 동백마을이라면,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에서도 신호리 동백마을 소설이에요.


  삶터마다 다른 이야기가 삶터마다 다른 말빛으로 환하게 살아나도록 북돋우는 소설입니다. 소설이 글로 빚는 꽃인 문학인 까닭은, 삶을 아리땁게 바라보고 느껴 아리따운 글꽃으로 이루어서 나누기 때문입니다.


  소설은 삶으로 씁니다. 소설이 아름답자면 삶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삶이 아름답자면 말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말이 아름답자면, 넋과 꿈과 사랑이 아름다워야 할 테고, 우리가 보살피며 누리는 보금자리가 아름다워야겠지요. 마을도, 숲도, 흙도, 햇살도, 바람도, 냇물도, 나무도, 풀도, 모두모두 아름다울 때에 비로소 소설말이 아름다울 수 있다고 느껴요. 4345.12.28.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국어사전 뒤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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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121] 달려다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새 하루를 누리며 새 삶을 빚습니다. 새 하루요 새 삶이기에, 아이들 말소리는 늘 새로운 말이고, 새로운 넋이며, 새로운 사랑입니다. 여느 날과 같이 아침밥 차리고 먹이고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방바닥 비질하고 이불 말리고 빨래 개고 부산스레 보내다가 기지개 크게 켜고 살짝 방바닥에 드러누웠더니, 아이들 마룻바닥 콩탕콩탕 울리며 달리는 소리 한가득. 어라, 이 아이들 늘 달리면서 살잖아. 뛰거나 달리거나. 어른들은 살몃살몃 ‘걸어다니’는데, 아이들은 집에서고 마당에서고 길에서고 들에서고 숲에서고 멧골에서고 늘 ‘날아다니’듯 ‘뛰어다니’고, ‘달려다니’는구나. 심부름을 시킬까 싶어 부르든, 예쁜 아이 까까 주려고 부르든, 마실 가자며 부르든, 참말 아이들은 쪼르르 ‘달려오니’까, 노상 ‘달려다니’는 아이들이네. 4345.12.28.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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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밤 설거지

 


  넉 밤 자면 아이들 나이는 하나씩 는다. 큰아이는 곧 여섯, 작은아이는 이제 셋 된다. 작은아이 오줌가리기를 하느라 여러모로 마음을 많이 쓰는데, 작은아이 말문트기가 꽤 더디면서 오줌가리기 또한 퍽 더디다. 그래도 작은아이 몸과 움직임을 살피며 그때그때 오줌그릇에 앉히면 바지와 기저귀 버릴 일이 없다. 때로는 이틀이나 사흘 동안 오줌바지와 오줌기저귀 하나 안 나오도록 하기도 한다. 그래도 똥바지는 나오지만.


  작은아이 옷빨래가 줄면서 겨울빨래가 퍽 수월하다고 느낀다. 그런데, 이제 겨울이다 보니 밤새 물이 얼까 하고 헤아려 보곤 한다. 워낙 따스한 날씨인 전남 고흥이기는 하지만 또 모르는 일이라, 밤에 틈틈이 깨어 물을 틀곤 한다. 굳이 물 졸졸 흐르도록 물꼭지를 틀지 않아도 되는데, 여러 시간 안 쓰다가 다시 틀면, 땅밑에서 퍼올리는 물줄기가 처음에는 시원찮으니, 겨울날 자칫 물관에 얼음이라도 낄까 봐, 저녁에는 설거지를 다 안 하고 두었다가, 한두 시간에 두어 가지씩 설거지를 한다. 지난해까지는 밤에 두 시간마다 아이들 빨래를 하며 물을 썼다면, 올해에는 밤설거지로 물을 쓴달까. 아이들이 자라 작은아이가 네 살 되고 다섯 살 될 적에도 이렇게 밤설거지로 겨울밤을 지새우겠지. 큰아이가 여덟 살이나 아홉 살쯤 되면, 또 열 살이나 열한 살쯤 되면, 겨울밤 물쓰기를 살짝 나누어 맡을 수 있을까. 너희 아버지 가끔은 밤잠 느긋하게 잘 수 있게 말야. 4345.12.28.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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