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빚기
― 다시 쓰는 사진

 


  숨을 거두어 이제 다시 사진기를 손에 쥘 수 없는 분들 작품이 ‘회고전’이라는 이름을 달고 새롭게 걸리곤 합니다. 이제 이 땅에 없는 분들 작품을 ‘회고전’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볼 수 있는 일은 반갑습니다. 그런데, 아직 팔팔하게 사진기를 손에 쥐고 사진길을 걸어갈 분들 작품이 ‘회고전’이나 ‘초대전’이라는 이름이 붙으며 다시 걸리면 적잖이 서운합니다. 왜 같은 사진을 다시 걸어야 할까요. 전국을 두루 돌며 사진을 보여주는 잔치마당이라 한다면, 같은 사진을 들고 전국을 돌 만하지만, 지난번에 내건 사진을 새 잔치마당에 거는 일은 반갑지 않습니다. 다섯 해 앞서 내놓은 사진을, 열 해 앞서 내놓은 사진을, 스무 해 앞서 내놓은 사진을, 새삼스레 들추는 사진잔치는 무엇일까요.


  작가는 창작하는 사람입니다. 사진작가는 사진을 늘 새롭게 빚는 사람입니다. 생각을 빚으면서 삶을 빚고, 삶을 빚으면서 사진을 빚습니다. 사진을 빚으면서 이야기를 빚고, 이야기를 빚으면서 사랑을 빚어요.


  지난 어느 한때 아주 놀랍구나 싶은 사진을 찍었기에, 이 사진들을 두고두고 새로 내걸 수 있겠지요. 그러나, 아주 놀랍구나 싶은 사진을 찍어서 한 번 선보였다면, 이 사진들은 사진책에 알뜰히 담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아주 놀랍구나 싶은 사진은 사진책에 아름답게 담아서, 이 사진책을 사람들이 즐겁게 장만하도록 북돋우고, 사람들은 즐겁게 장만한 사진책을 언제라도 기쁘게 꺼내어 들여다보아야지 싶습니다. 그러니까, 사진작가라 한다면, 새로운 사진책을 꾸준하게 펴낼 수 있게끔, 새로운 창작(사진)을 꾸준하게 선보일 수 있어야지 싶어요.


  날마다 새로운 넋이 되어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기에 새로운 사진을 빚을 수 있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꿈을 꾸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글로든 그림으로든 만화로든 춤으로든 노래로든, 또 사진으로든 빚기에, 삶이 거듭나면서 문화와 예술이 자랍니다.


  작가는 ‘재탕(다시 쓰는)’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작가는 늘 ‘창작(새롭게 일구는)’하는 사람입니다. 새 삶을 일구면서 새 사진을 일구지 못한다면, 이녁은 ‘작가’라는 이름을 쓸 수 없습니다. 새 사진도 새 삶도 새 넋도 일구지 못하는데, 어찌 ‘빚는 사람(작가)’라는 이름을 쓸 수 있나요.


  나는 일본이나 미국이나 서양을 가 보지 못했기에, 이들 나라에서도 ‘다시 쓰는 사진’으로 잔치마당 여는 사진작가들 있는지 잘 모릅니다. 나는 한국에서 살아가기에 내 둘레 적잖은 사진작가들이 ‘다시 쓰는 사진’으로 잔치마당을 자꾸 열고, 사진책마저 ‘다시 쓰는 사진’을 거듭 싣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한국 사진밭은 너무 좁은가요. 한국 사진밭은 너무 얕은가요. 꾸준하게 창작하기보다는 한 번 아주 놀랍다 싶은 사진을 찍으면 더는 창작을 안 해도 될 만한가요. 아주 놀랍다 싶은 사진에서 한 걸음 나아가는 사진은 더 찍을 수 없는가요. 아니, 날마다 새롭고 날마다 놀라우며 날마다 아름다운 삶을 누릴 수 없는가요. 사진도 삶도 생각도 사랑도 언제나 아름답게 빛낼 수 없는가요. 4346.1.16.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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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다

 


  무언가를 알려고 책을 읽지 않습니다. 스스로 오늘 하루 누리고 싶어 책을 읽습니다. 어떤 지식을 쌓으며 내 머리를 차곡차곡 채우려고 책을 읽지 않습니다. 이웃을 바라보고 숲을 껴안는 따스한 넋을 북돋우고 싶어 책을 읽습니다. 한 권 열 권 백 권 천 권 만 권, 이렇게 숫자를 늘리려고 책을 읽지 않습니다. 살아가는 즐거움을 한껏 누리고, 사랑하는 기쁨을 듬뿍 나누고 싶어 책을 읽습니다. 삶을 빛내는 책이고, 생각을 살찌우는 책이며, 이야기를 일구는 책입니다. 4346.1.16.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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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들에게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59
최영미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돈이 있대서 시를 못 쓰지 않지만
[시를 노래하는 시 41] 최영미, 《돼지들에게》

 


- 책이름 : 돼지들에게
- 글 : 최영미
- 펴낸곳 : 실천문학사 (2005.11.25.)
- 책값 : 8000원

 


  고속도로가 나고 고속철도가 다닙니다. 크고작은 공항이 생기고, 사람들은 자가용을 굴립니다.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찻길에는 자동차가 넘치며, 버스와 택시와 전철은 자꾸자꾸 늘어납니다.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를 안 들어도 될 만한 도시는 없습니다. 다만, 자동차 들락거리기 힘든 조그마한 골목길 있는 동네에서는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를 거의 못 듣기도 합니다. 오직 두 다리에 기대어 계단을 오르고 구비구비 지나다니는 골목동네에서는 이웃집 도란도란 속삭이는 소리를 듣습니다. 도시로도 흘러드는 가을철 바람소리를 듣고, 도시에도 싱싱 부는 겨울철 바람노래를 들어요.


  달을 가장 가까이 볼 수 있대서 붙은 ‘달동네’라는 이름은, 돈이 적어 가난한 살림을 꾸리는 이들한테는 더할 나위 없이 어여쁜 선물이리라 생각합니다. 달동네라는 이름이라면, 해동네도 될 테고, 바람동네도 될 테지요. 꽃동네나 무지개동네, 또는 구름동네나 하늘동네라는 이름도 되리라 생각해요.


  그러고 보면, 자동차 싱싱 달리는 찻길 가까이 있는 곳에는 아파트 높직하게 섭니다. 자동차 붕붕 시끄러운 둘레에는 높다란 건물 수두룩합니다. 이들, 자동차 북적대는 곳에서는 달을 바라보지 않아요. 해도 바라보지 않고, 구름이나 바람도 느끼지 않아요. 자동차 많은 데에서는 서로서로 얼마나 크고 까만 빛깔이면서 비싼 자동차인가를 뽐내려 해요.


.. 나의 소중한 보물을 지키기 위해 나는 피 흘리며 싸웠다. / 때로 싸우고 때로 타협했다. / 두 개를 달라면 하나만 주고, / 속이 빈 가짜 진주목걸이로 그를 속였다. / 그래도 그들은 돌아가지 않았다 ..  (돼지들에게)


  달동네에는 자동차 들어서기 힘든 만큼, 짐을 꾸려 보금자리 옮길라치면 몹시 고단합니다. 등짐을 져서 날라야 하니까요. 그런데, 달동네 살림집은 짐이 그닥 안 많아요. 등짐으로 여러 차례 지고 나를 만하고, 손수레로 짐을 옮길 만합니다.


  가만히 돌아보니, 내 스물다섯 나이에 함께 신문사지국에서 신문 돌리며 일하던 선배가 ‘늦깎이 대학생’을 꿈꾸며 신문배달은 그만두고 요리사 부업으로 학비를 번다며 홀로 작은 방 얻어 떠날 적에, 손수레 하나로 선배 짐을 모두 날랐어요. 그러나, 선배는 늦깎이 대학 입시에 자꾸 떨어집니다. 그럴밖에 없다 싶었는데, 이른새벽부터 늦은밤까지 식당에서 쉬잖고 온갖 밥을 만들어 내야 하니, 책 들여다보며 공부할 겨를이 없거든요.


  더 돌아보니, 달동네를 쏘다니며 신문을 돌리는 일은 즐겁습니다. 이 집 저 집 다 다른 살림살이에 맞추어 신문을 넣습니다. 어느 집은 대문 위에 걸치고, 어느 집은 대문 밑으로 밀어넣습니다. 어느 집은 대문 옆구리에 슬쩍 끼우고, 어느 집은 대문 손잡이 우유주머니에 넣습니다. 어느 집은 대문 위 빈틈으로 휙 던져서 안쪽 문간에 척 떨어지게 합니다. 어느 집은 2층 창가로 신문을 던지고, 어느 집은 3층 문턱으로 신문을 던집니다.


  아파트에서 신문을 돌릴 적에는 꼭대기까지 오르내리느라 힘듭니다. 새벽마다 여러 신문지국 일꾼이 승강기를 타려고 기다리느라 부산스럽기도 합니다. 골목에서는 서로 겹칠 일이 없지만, 아파트에서는 신문지국 일꾼마다 자꾸 부딪혀야 해요. 똑같이 생긴 층집 똑같이 생긴 대문 똑같이 생긴 골마루 다니며 신문 넣는 일은 하나도 재미없습니다. 더 먼 길을 달려야 하고, 더 많은 집들 다 다른 살림새에 맞추어 신문을 넣자면, 나중에 인수인계를 할 적에도 골치가 아프지만, 그만큼 ‘다 다른 사람 삶’을 돌아볼 수 있어서 재미있어요. 동네마다 다른 모습이요, 사람마다 다른 이야기입니다.


.. 그는 워낙 작고 소심한 돼지였는데 / 어느 화창한 봄날, 감옥을 나온 뒤 / 사람들이 그를 높이 쳐다보면서 / 어떻게 그 긴 겨울을 견디었냐고 우러러보면서 / 하루가 다르게 키가 커졌다 ..  (돼지의 변신)


  도시에서는 달동네라 한다면, 시골에서는 달마을이 될까 싶습니다. 아마, 시골이라면 어느 시골이나 달마을이 될 테지요. 시골에는 등불이 적고 자동차 드문 만큼, 도시하고는 견줄 수 없이 환하고 밝은 달을 누려요.


  어젯밤에는 가느다랗고 노란 초승달을 봅니다. 작은아이를 안고 마을길에 서서 노래를 부르며 재웁니다. 달을 보니 별도 보고, 별도 보니 까맣디까만 하늘을 봅니다. 곧, 시골은 달마을이면서 별마을입니다. 별마을인 만큼 낮에는 환한 해마을입니다. 바람마을이요 들마을이고 숲마을입니다. 바닷마을이요 새마을(멧새 많은 새마을)이면서 꽃마을, 풀마을, 나무마을입니다.


  아이들은 시골에서 꽃과 풀과 나무를 늘 곁에 두면서 꽃과 풀과 나무를 바라봅니다. 꽃과 풀과 나무를 바라보니, 꽃과 풀과 나무를 아낍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구름을 생각합니다. 구름을 생각하며 멧새를 좋아합니다. 바다를 바라보며 바람을 느낍니다. 바람을 느끼며 비와 눈을 사랑합니다.


.. 느끼지 못하는 바보들을 대신해 / 웃어주고 울어주는 / 영화는 위대한 사기. /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환상 ..  (한국영화를 위하여)


  시골에서만 있으면 귀를 따갑게 울리는 소리가 없습니다. 시골에서만 있으면 귀를 살며시 간질이는 소리가 있습니다. 바람이 나뭇잎을 건드립니다. 들새와 멧새가 바람을 가로지르며 날갯짓 소리를 냅니다. 이 겨울 지나 새로운 봄 찾아들면, 벌레들 하나둘 깨어나 새삼스럽게 풀벌레 노랫소리 들려주겠지요. 개구리는 논마다 밤노래잔치를 베풀 테고요. 개구리가 노래잔치를 벌이는 곳에는 먼먼 곳부터 해오라기와 왜가리 찾아들어 먹이를 찾으며 꺽꺽 울 테고, 한껏 푸르게 자라는 풀들은 풀노래를 베풀어요.


  곰곰이 따지니, 시골마을은 달마을이요 풀마을이면서 노래마을이로구나 싶습니다. 모두 노래를 해요. 할머니 할아버지는 들일을 하면서 일노래를 부릅니다. 아이들은 마당에서 뛰놀며 놀이노래를 부릅니다. 새들은 새노래요, 벌레는 벌레노래입니다. 개구리는 개구리노래이고, 나무는 나무노래예요.


  바람노래를 들어요. 달노래를 들어요. 바람노래를 듣고, 빗노래와 눈노래를 들어요. 구름은 구름노래를 부르겠지요. 무지개는 무지개노래입니다. 온갖 노래가 어여삐 얼크러지면서, 시골노래로 거듭납니다.


  노래가 있기에 시골이요, 노래가 흐르며 시골입니다. 노래가 숨쉬며 시골이고, 노래가 흐드러지면서 시골입니다.


.. 박정희가 유신을 거대하게 포장했듯이 / 우리도 우리의 논리를 과대포장했다 / 그리고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 관념으로 도배된 자기도취의 감상적 애국이 / 연구실에서 광장으로, 감옥에서 시장으로 나온 흑백논리가 / 종이에 인쇄되어 팔리는 ..  (시대의 우울)


  최영미 님 시집 《돼지들에게》(실천문학사,2005)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돼지들은 어디에 있는 돼지들일까 생각해 봅니다. 시골에 있는 꿀꿀이일는지요. 도시에 있는 세겹살일는지요. 돼지들은 최영미 님한테서 왜 글월 하나 받아야 할까요. 최영미 님은 왜 돼지들한테 글월 하나 띄울까요.


  사람들이 좁다란 우리를 짓고 시멘트바닥에 내몰기에 돼지들은 그저 먹고 또 먹으며 살점만 키웁니다. 돼지는 스스로 정갈하게 살고 싶으며, 돼지는 꾸역꾸역 먹고만 싶지 않으나, 돼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먹기만 합니다. 닭도 그래요. 닭은 사료와 항생제를 먹으며 살점만 키워야 합니다. 닭은 죽어라 알을 낳아야 합니다. 알을 죽어라 낳지 않으면 고기닭으로 죽고, 알을 죽어라 낳고 보면 또 똥줄이 타서 죽고 맙니다. 소도 돼지나 닭이랑 매한가지입니다. 살고 싶대서 살 수 없고, 죽고 싶대서 마음대로 못 죽습니다.


  참말 사람은 어떤 짐승이기에, 우리 곁 숱한 푸른 숨결을 이다지도 괴롭히면서 잡아먹는가 궁금합니다. 참말 사람은 어떤 목숨이기에, 우리 곁 풀과 꽃과 나무를 모질게 괴롭히면서 풀약을 치고 비료를 뿌리는지 궁금합니다.


  최영미 님은 돼지들한테 글월을 띄우다가 시집 한 권 냈다지만, 가만히 보면, 돼지 아닌 ‘사람’한테 띄우는 글월이지 싶어요. 사람답지 못한 사람한테, 사람다움을 스스로 버린 사람한테, 사람다움을 빼앗으려는 사람한테, 사람다움을 내려놓고 미친듯이 치고박으며 싸우는 사람한테, 글월 하나 띄우려 했구나 싶어요.


.. 내 앨범에는 이십대가 없다 / 입학식과 졸업식만 있지 중간이 텅 비었다 / 셔터를 누르는 몇 초만이라도 편안히 멈추어 / 나를 응시할 계절이 없었으니― / 누가 누구와 친한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 / 이미지에 불과한 종잇조각 때문에 곤란한 일을 당할까 봐 / 우리는 우리의 싱그러운 젊은 날들을, / 싱그러우며 황폐했던 청춘을 기념하지 않았다. / 친구를 감옥에 보낼지도 모르는 / 자본의 기술을 우리는 거부했다 ..  (대학 시절 사진을 달라는 기자에게)


  공순이 공돌이도 스무 살 푸른 숨결 사진이 없습니다. 군대로 끌려가는 젊은 사내도 스무 살 푸른 숨결 사진이 없습니다. 흙순이 흙돌이도 스무 살 푸른 숨결 사진이 없습니다. 대학생뿐 아니라,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모든 스무 살 푸른 숨결은 사진 하나 홀가분하게 누리지 못해요.


  사진은 누가 남길까요. 사진은 몇 살쯤 되어야 느긋하게 남길 수 있을까요. 사진을 남기는 이는 어떤 이름·돈·힘을 누리는가요. 따지고 보면, 사진을 누린다고 하는 이들조차 당신 이름·돈·힘을 지키는 데에 바쁜 나머지, 정작 하루를 즐거이 못 누리지는 않나요. 이름에 얽매이고 돈에 휘둘리며 힘에 끄달리면서, 삶을 사랑하는 꿈을 잊지는 않나요.


  돈이 있대서 시를 못 쓰지는 않지만, 돈을 생각하는 사람은 시하고 자꾸 멀어집니다. 이름이 있대서 시를 안 쓰지는 않지만, 이름을 생각하는 사람은 시하고 나날이 동떨어집니다. 힘이 있대서 시를 찢지는 않지만, 힘을 생각하는 사람은 시를 군화발로 짓이기곤 합니다.


  착한 마음으로 시를 씁니다. 참다운 마음으로 시를 읽습니다. 고운 마음으로 시를 나눕니다. 착한 마음으로 흙을 일구고, 참다운 마음으로 서로 어깨동무하며, 고운 마음으로 달동네·숲마을·지구별을 사랑합니다. 4346.1.16.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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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01-16 17:18   좋아요 0 | URL
함께살기님의 이 글을 읽으니, '거주자들은 모두 사자, 호랑이, 표범, 늑대, 여우, 소, 당나귀, 돼지들이었고,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말했던 쇼펜하우어의 말이 생각납니다.
* * *
세포조직에서 객관화되는 ‘재생력’(Reproduktionskraft)은 식물의 주된 특성이며 인간에게 있어서 식물적인 요소이다. 이것이 인간에게서 압도적으로 우세하면, 우리는 무기력, 느림, 게으름, 둔감을 추정한다(보이오티아인). 비록 추정이 언제나 완전히 입증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근섬유에서 객관화되는 ‘자극성’(Irritabilität)은 동물의 주된 특성이며 인간에게 있어서 동물적인 요소이다. 이것이 인간에게서 압도적으로 우세하면, 흔히 민첩함, 강함, 용감함이, 따라서 육체적인 노동과 전쟁을 위한 유용성이 발견된다(스파르타인). 거의 모든 온혈동물과 심지어 곤충도 자극성에서는 인간을 훨씬 능가한다. 동물은 자신의 존재를 자극성에서 가장 생생하게 의식한다. 따라서 동물은 자극성을 표현하는 것에서 희열을 느낀다. 인간에게서도 이 희열의 흔적이 춤으로 나타난다. 신경에서 객관화되는 '감수성'(Sensibilität)은 인간의 주된 특성이며 인간에게서 본래적으로 인간적인 요소이다. 어떤 동물도 이 점에서 인간과 조금이라도 비교될 수 없다. 감수성이 우월하게 지배적이면 천재가 산출된다(아테네인). 그래서 천재는 ‘높은 단계의 인간’(höherer Grade Mensch)이다.

이로부터 몇몇 천재들이 다른 사람들을 그들의 한결같은 용모와 일반적인 평범한 인상과 함께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천재들은 이런 사람들에게서 자신들과 같은 사람을 찾지 못했고, 그들 자신의 특성이 보통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연적인 오류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라시안은 아마도 지금까지 나온 것 중 가장 광대하고 가장 아름다운 우화소설인 <비평(Das Kritikon)>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그들이 나라 전체에서, 거주자들이 많은 도시에서조차 어떤 인간도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거주자들은 모두 사자, 호랑이, 표범, 늑대, 여우, 소, 당나귀, 돼지들이었고,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나중에 비로소 그들은 소수의 인간들이 자신을 숨기고 세상사를 보지 않으려고, 원래는 야수들의 거주지여야 했을 황야로 물러났음을 알게 되었다.”

사실상 모든 천재에게 특유한, 고독을 추구하는 성향은 같은 이유에서 기인한다.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가 천재들을 고독으로 몰아넣을 뿐 아니라 그들의 내적인 풍요로움이 그들에게 고독을 마련해준다. 왜냐하면 다이아몬드와 같이 인간도 굉장히 큰 것만이 단독으로 쓸모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것들은 모여 있어야 하고 집단을 이루어 활동해야 한다.
- 쇼펜하우어,『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中에서

파란놀 2013-01-16 23:58   좋아요 0 | URL
여러모로 즐거운 이야기 생각할 수 있도록 북돋우는
글을 옮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

oren 2013-01-16 17:23   좋아요 0 | URL
'인간은 인간에 대한 늑대(homo homini lupus)'가 되는 것

우리는 자연의 도처에서 항쟁, 투쟁, 그리고 승리의 교체를 본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서 의지와의 근본적인 분열을 한층 더 명확하게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의지의 객관화에서 각 단계는 다른 단계의 물질, 공간, 시간과 투쟁한다. 기계적, 물리적, 화학적, 유기적인 여러 현상은 각기 자신의 이념을 구현하고 싶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발현시키려고 애쓰면서 인과성의 실마리를 따라 서로 물질을 탈취하려고 하므로 지속적인 물질은 끊임없이 그 형태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싸움은 모든 자연 속에서 볼 수 있다. 그렇다. 자연은 이 투쟁을 통해서 비로소 성립하는 것이다. "만약 사물 속에 투쟁이 없다면, 모든 것은 하나일 것이다"라고 엠페도클레스는 말하고 있다.(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제5권) 왜냐하면 이 투쟁이야말로 의지와 자신과의 근본적인 분열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보편적인 투쟁이 가장 명백하게 보이는 것은 동물계이며, 동물계는 식물계를 그 영양으로 갖고, 또 각 동물은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되고 영양이 된다. 즉 그 이념을 나타낸 물질은 다른 이념을 나타내기 위하여 물러서지 않으면 안 되며, 각 동물은 다른 동물을 끊임없이 파괴함으로써만 그 존재를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생에 대한 의지는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먹어 치우고 여러 가지 형태로 자신의 영양이 되고 있지만, 결국 인류는 다른 존재를 제압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을 자기가 사용하기 위한 제품이라고 본다. 그러나 제4권에서 언급할 작정이지만, 그 인류도 자신 속에 투쟁, 즉 의지의 자기 분열을 무서울 정도로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고, '인간은 인간에 대한 늑대(homo homini lupus)'가 되는 것이다.(671쪽)
-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의지의 객관화 과정' 中에서

파란놀 2013-01-16 23:58   좋아요 0 | URL
번역이 옳은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번역을 짚으며 생각해 보면, '투쟁하지 않는 사물이라면 모두 하나'라 할 때에, 우리 지구별에 전쟁과 다툼이 사라지고 평화와 사랑이 감돈다면, 모든 사람은 서로 하나요 모든 목숨 또한 서로 하나인 줄 밝고 환하게 깨달을 수 있겠구나 싶어요.

서로 하나라는 대목을 흐리게 하거나 잊어버리도록 하려고, 자꾸 전쟁이나 다툼을 만드는구나 싶어요.
 

군대에서 책읽기 (ㅈ상병)

 


  군인 ㅈ상병은 상병이라는 군대 계급을 얻기까지 사흘 가운데 하루는 휴가나 외박으로 지냈다. 연예인으로 있다가 군인이 된 ㅈ상병은 여론 뭇매를 받았고, 군부대에서 ㅈ상병한테 ‘근신 이레’라는 징벌을 준다. ㅈ상병은 이레 동안 ‘자숙’을 하면서 책을 두 권 읽었다고 한다.


  군인 ㅈ상병은 연예인이기에 여느 사람들과 달리 ‘사흘 가운데 하루를 휴가나 외박으로 지새우기’를 누렸고, ‘여론 뭇매’를 받으며, ‘근신 이레’라는 징벌을 받는데다가, ‘근신 이레 동안 책 두 권 읽기’를 하는구나 싶다. 여느 군인이었고, 강원도 양구 ‘최전방’이라는 데에서 젊은 날을 보낸 내 지난날을 돌이켜본다. 나는 여섯 달에 한 번 휴가 나오기도 힘들었지만, 열석 달만에 휴가를 나온 적도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찾아오셔서 외박을 딱 하루 받은 적 있고, 내가 군대에 있는 스물여섯 달 동안 읽을 수 있던 책은 한 권조차 없다. 나는 ‘영창’이라 하는 군대 감옥에 간 적은 없지만, 여러 선배나 동기나 후배는 영창살이를 했으며, 영창이 아니더라도 ‘군기교육대’라는 데를 다녀와야 하던 이들이 많았다. 영창이나 군기교육대를 가지 않더라도, 지오피 근무를 마치고 주둔지로 내려오면 두 달에 한 차례 군단훈련·사단훈련·연대훈련·중대훈련 들이 잇달았고, 한여름과 한겨울에 혹서기훈련·혹한기훈련이 찾아왔다. 혹서기훈련은 새로운 신병교육대 채찍질이요, 혹한기훈련은 영하 20∼30도 추위에 얼음산에서 텐트 치고 자면서도 살아남도록 하는 발길질이었다.


  내가 ‘최전방’에서 군대살이를 했기에 ㅈ상병 또한 최전방 군대살이를 해 보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ㅈ상병 스스로 ‘최전방’에 가겠다 말하니, 또 ‘근신 이레’를 하면서 책 두 권 읽었다고 하니, 문득 내 군대살이가 떠오른다. 군대 관계자들은 ‘보직 변경 신청’을 할 수 없다는 듯 말하지만, ‘신청’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땅개로 구르는 육군 보병조차, 어쨌든 ‘신청은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저, 신청을 하는 방법을 안 알려줄 뿐이요, 신청을 한들 들어주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이른바 ‘만고땡’이라는 보직을 누리는 이들이 스스로 ‘육군 땅개’가 되고 싶다 하면 ‘귀엽게(?)’ 봐주면서 육군 땅개로 굴러 보라고 해 주곤 한다.


  비록 ‘상병’까지 되고 나서 최전방에 가겠다고 하는 품이 미덥지 않으나, 최전방 지오피 말고, 지오피 바로 밑에 있는 주둔지로 가 보기를 바란다. 그곳에서 두 달에 한 차례, 때로는 다달이 훈련을 뛰어 보기를 바란다. 훈련을 뛰느라 휴가도 외출도 외박도 없이, 병장을 달고 전역을 앞두도록 내내 훈련에 훈련을 거듭하면서 삽질과 곡괭이질과 걸레질과 손빨래를 몸소 겪어 보기를 바란다. 스스로 ‘고생을 사고’ 싶다면, 휴가를 몽땅 ‘반납’하면 된다. 나는 내 후배 둘한테 내 휴가를 이레씩 잘라서 나누어 준 적 있는데, ㅈ상병도 나처럼 이녁 휴가를 ‘반납’해서 고향 어머니 그리워하는 후배한테 나누어 주면 된다.


  누구를 위로하고 누구를 위안해 주는 ‘연예인 사병’인지 나로서는 잘 모른다. 내가 있던 부대로 위로나 위안을 온 ‘연예인 사병’을 스물여섯 달 동안 한 차례도 본 적 없으니 모르겠다. 아니, 내가 있던 중대뿐 아니라, 내가 몸담은 대대나 연대 관할 언저리로도 위로나 위안을 온 ‘연예인 사병’은 없었다. 참말, ‘연예인 사병’으로서 무언가 베풀고 싶으면, 여느 육군 땅개 끄트머리 중대에서, 삽질 두 시간 하고 담배 한 개비 물며 쉴 적에 노래 한 가락 뽑으면 넉넉하다. 완전군장 짊어지고 높다란 멧골 오르내리며 땀을 비오듯 쏟고 나서 10분 쉴 참에, 어머니 그리는 노래 한 가락 뽑으면 된다.


  노래를 잘 해야 하지 않는다. 춤을 잘 추어야 하지 않는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으면 된다. 내 이웃을 바라보고, 내 동무를 생각할 수 있으면 된다. 군대는 평화를 지켜 주지 않고, 군대는 평화를 부르지 않는다만, 힘이나 이름이나 돈이 없는 여느 수수한 사내들이 군대로 끌려온다. 이들 여느 수수한 사내들 가슴을 촉촉히 적실 ‘노래 이야기’를 깨달을 수 있기를 빈다. 아직 멀지 않았고, 아직 늦지 않았다. 4346.1.16.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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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01-16 11:28   좋아요 0 | URL
함게살기님의 글을 읽으니 'ㅈ상병'에 관한 전후사정을 잘 모르고 있던 저조차 공감이 많이 느껴지고, 특히 까마득한 옛날 우리네 고달프고도 서글펐던 군대살이가 다시금 떠오르기도 하네요.

저도 대학 2학년을 마치고 '83년에 입대하여 '땅개'로 강원도 고성에서 군생활을 했는데, 부모님이 면회 오셨을 때 깊숙한 산골 군부대에 도착하신 게 밤 9시가 다 될 정도로 강원도 오지에 배치를 받았었어요. 농사를 지으시던 부모님께선 고향에서 새벽 6시에 출발하셨다더군요. 자식한테 먹일 음식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그 먼길을 오신 거였죠. 날은 저물고 '버스'조차 끊긴 캄캄한 밤길에 군부대는 가도 가도 나타나지 않아서 '그저 기가 막히다'는 말씀만 하시더군요. 저 역시 첫 휴가는 '열 달' 이상을 빡세게 뒹군 끝에 간신히 나왔고, 정기휴가는 27개월 근무하며 딱 두 번 찾아 먹은 거 같아요. 혹한기, 혹서기 훈련에다가 10월 초부터 시작되는 겨울은 그 다음해 5월 중순이 지나서야 끝이 날 정도로 지독시리 추웠었죠.

제가 군생활을 할 땐 특히 강제징집도 많았지요. 저는 다행히 자발적으로 입대했지만, 제가 입대 후에 '강집'당한 선배들도 더러 만났었고, 제 친구들도 여럿 강집을 당해 군대에 끌려갔었죠. 그들은 군생활 중에 수시로 혹은 정기적으로 보안반에 끌려가 '반성문'을 쓰고 '순화교육'을 받고 난 뒤에 '자대'로 되돌아오곤 했었고, 언제나 감시대상이었지요. 군생활의 혹독함 때문에 멀쩡히 복무하던 몇몇 전우들이 '탈영'을 시도하고 '영창'을 다녀오는 모습도 가끔 있었고, 군기교육대에 끌려가 열흘씩 보름씩 '지옥같은' 생활을 겪고 나온 전우들은 '중죄를 지은 죄수'와 조금도 다를바가 없는 모습들이었죠. 그러다가 '군생활'이 너무 힘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 부대원들을 사살하고 월북하는 경우조차 있었죠.(제 입대동기 한명이 GP근무 중 그렇게 희생되었답니다.)

세상이 온전히 공평하길 바랄 순 없는 노릇이라 하더라도, 우리 사회로부터 특별한 혜택을 받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들을 위해 '최소한의 공감'만이라도 느껴질 수 있는 모습들을 제발 좀 보여줬으면 싶어요.

파란놀 2013-01-16 12:00   좋아요 0 | URL
'전방'이나 '최전방'에서 군대를 보낸 분들 가운데에도 '중대'이나 '대대'이냐에 따라서도, 노는 물이 달랐어요. 아마, 겪은 분들은 다 아시리라 생각해요. 그러니까, ㅈ상병이 최전방에 간다 하더라도, 소총중대 아닌 대대나 연대 급으로 간다면... 연예인 사병으로 있더라도 똑같인 셈이 될 테지요.

저도, 제가 군대에 있을 적에, 지뢰 밟아서 죽었다는 사람과, 트럭엔진 과열로 터져서 죽었다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런데, 나는 '지뢰 터지는 소리'를 못 들었는데 죽었다고 하더라고요. 아마, 고참이나 하사관한테 얻어맞아 죽었을 텐데, 상부에는 거짓으로 보고했겠지요.

군대에 있을 적에는 '개미에 물려 죽었다'는 사람도 보았는데, 나중에 전역하고 나서야 그 말이 '구실을 갖다 붙이는 말' 가운데 하나인 줄 알았어요. 구타로 죽은 사람은 이래저래... 그런 셈이었지요..

oren 님도 힘든 나날 겪으셨군요. 그 힘든 나날이 좋은 씨앗이 되리라 생각해요.

oren 2013-01-16 11:47   좋아요 0 | URL
한가지 의아한 건, 함께살기님처럼 책을 좋아하시는 분이 '군대에 있는 스물여섯 달 동안' 한 권의 책조차 읽을 수 없었다는 점인데요. 어쩌면 그만큼 함께살기님의 군대살이가 힘들었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저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군대에서 책을 좀 읽을 수 있었답니다. 주로 형한테 부탁하거나 '장교분들' 한테 말씀드려서 책을 사달라고 해서, 취침시간에 몰래 관물대 밑에서 담요를 뒤집어 쓰고 읽기도 했었죠. 물론 편안하게 '책만 읽을 수 있는 시간들'도 있었는데 그건 군복무중 제법 심하게 다쳐서 여러달 '후송'을 간 덕분이긴 했지만요. http://blog.aladin.co.kr/oren/4070322



파란놀 2013-01-16 12:04   좋아요 0 | URL
상병 6호봉이 될 때까지는 책을 건드릴 수 없었고요, 상병 6호봉을 넘긴 뒤로는 훈련이라든지, 강원도에 잠수함 타고 건너온 북쪽 병사들 때문이라든지, 또 훈련이라든지... 여름에는 비 오면 물골작업 가고, 겨울에는 눈 오면 눈치우기 가며... 이래저래 해서 책은 손에 대지도 못하고 전역을 했어요.

지오피, 도솔산, 선점중대... 늘 이렇게 돌고 돌다 보니까, 군대에 있는 동안 늘 1000~1500 고지에서 지냈답니다... '도솔산'이라는 곳은 이제는 없어진 곳인데, 흔히 '펀치볼'이라고 일컫는 곳입니다 ^^;;;

군대에서 열여덟 권 읽으셨나요? 오오... 스스로 더 단단히 갈고닦았으면, 저도 그렇게 읽을 수 있었을는지 모르나, 저는 군대에서 그냥 몸으로 때우며 살았어요.
 

 

골목해설사

 


  사람들한테 골목동네를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골목해설사’가 있다고 한다. 문학을 비평하는 ‘문학비평가’처럼, 골목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을 만하리라 본다. 그런데, 문학을 어떻게 왜 누구한테 이야기해야 할까. 그리고, 골목을 어떻게 왜 누구한테 이야기해야 하는가.


  문학을 이야기하는 사람 가운데 스스로 ‘문학 이야기꾼’이라 말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골목을 이야기하는 사람 가운데 스스로 ‘골목 이야기꾼’이라 말하는 사람은 몇이나 있을까. 곧, 문학비평가나 골목해설사는 ‘이야기’ 아닌 ‘지식’을 다루는 사람으로 살아간다. 문학을 빚은 사람들 마음을 읽기보다 문학이라는 그릇에 담긴 줄거리를 읽는 문학비평가요, 골목동네에서 꿈과 사랑을 빚는 사람들 넋을 읽기보다 골목이라는 건축물에 깃든 역사나 문화를 읽는 문화해설사로구나 싶다.


  문학을 이야기하려면 문학을 누려야 한다. 스스로 문학을 읽을 뿐 아니라 문학을 써야 한다. 골목을 이야기하려면 골목을 누려야 한다. 스스로 골목을 거닐 뿐 아니라, 골목(동네)에서 살아야 한다. 문학을 하지 않으며 문학비평만 하는 일이란 얼마나 재미있을까 궁금하다. 골목(동네)에서 살아가지 않으며 골목해설만 하는 일이란 얼마나 살가울까 궁금하다.


  글쓰기가 바로 문학쓰기이다. 역사에 남는다든지 작품책을 내야 문학쓰기가 아니다. 스스로 일구는 삶을 사랑으로 아로새길 때에 문학쓰기, 곧 글쓰기이다.


  삶읽기가 바로 골목읽기이다. 이런 건축물 저런 문화재를 알려준대서 골목읽기가 되지 않는다. 스스로 골목사람 되어 골목이웃과 알콩달콩 빚고 엮는 이야기를 누릴 때에 골목읽기, 곧 삶읽기이다. 4346.1.16.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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