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빚기
― 다시 쓰는 사진
숨을 거두어 이제 다시 사진기를 손에 쥘 수 없는 분들 작품이 ‘회고전’이라는 이름을 달고 새롭게 걸리곤 합니다. 이제 이 땅에 없는 분들 작품을 ‘회고전’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볼 수 있는 일은 반갑습니다. 그런데, 아직 팔팔하게 사진기를 손에 쥐고 사진길을 걸어갈 분들 작품이 ‘회고전’이나 ‘초대전’이라는 이름이 붙으며 다시 걸리면 적잖이 서운합니다. 왜 같은 사진을 다시 걸어야 할까요. 전국을 두루 돌며 사진을 보여주는 잔치마당이라 한다면, 같은 사진을 들고 전국을 돌 만하지만, 지난번에 내건 사진을 새 잔치마당에 거는 일은 반갑지 않습니다. 다섯 해 앞서 내놓은 사진을, 열 해 앞서 내놓은 사진을, 스무 해 앞서 내놓은 사진을, 새삼스레 들추는 사진잔치는 무엇일까요.
작가는 창작하는 사람입니다. 사진작가는 사진을 늘 새롭게 빚는 사람입니다. 생각을 빚으면서 삶을 빚고, 삶을 빚으면서 사진을 빚습니다. 사진을 빚으면서 이야기를 빚고, 이야기를 빚으면서 사랑을 빚어요.
지난 어느 한때 아주 놀랍구나 싶은 사진을 찍었기에, 이 사진들을 두고두고 새로 내걸 수 있겠지요. 그러나, 아주 놀랍구나 싶은 사진을 찍어서 한 번 선보였다면, 이 사진들은 사진책에 알뜰히 담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아주 놀랍구나 싶은 사진은 사진책에 아름답게 담아서, 이 사진책을 사람들이 즐겁게 장만하도록 북돋우고, 사람들은 즐겁게 장만한 사진책을 언제라도 기쁘게 꺼내어 들여다보아야지 싶습니다. 그러니까, 사진작가라 한다면, 새로운 사진책을 꾸준하게 펴낼 수 있게끔, 새로운 창작(사진)을 꾸준하게 선보일 수 있어야지 싶어요.
날마다 새로운 넋이 되어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기에 새로운 사진을 빚을 수 있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꿈을 꾸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글로든 그림으로든 만화로든 춤으로든 노래로든, 또 사진으로든 빚기에, 삶이 거듭나면서 문화와 예술이 자랍니다.
작가는 ‘재탕(다시 쓰는)’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작가는 늘 ‘창작(새롭게 일구는)’하는 사람입니다. 새 삶을 일구면서 새 사진을 일구지 못한다면, 이녁은 ‘작가’라는 이름을 쓸 수 없습니다. 새 사진도 새 삶도 새 넋도 일구지 못하는데, 어찌 ‘빚는 사람(작가)’라는 이름을 쓸 수 있나요.
나는 일본이나 미국이나 서양을 가 보지 못했기에, 이들 나라에서도 ‘다시 쓰는 사진’으로 잔치마당 여는 사진작가들 있는지 잘 모릅니다. 나는 한국에서 살아가기에 내 둘레 적잖은 사진작가들이 ‘다시 쓰는 사진’으로 잔치마당을 자꾸 열고, 사진책마저 ‘다시 쓰는 사진’을 거듭 싣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한국 사진밭은 너무 좁은가요. 한국 사진밭은 너무 얕은가요. 꾸준하게 창작하기보다는 한 번 아주 놀랍다 싶은 사진을 찍으면 더는 창작을 안 해도 될 만한가요. 아주 놀랍다 싶은 사진에서 한 걸음 나아가는 사진은 더 찍을 수 없는가요. 아니, 날마다 새롭고 날마다 놀라우며 날마다 아름다운 삶을 누릴 수 없는가요. 사진도 삶도 생각도 사랑도 언제나 아름답게 빛낼 수 없는가요. 4346.1.16.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진책 읽는 즐거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