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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들에게 ㅣ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59
최영미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돈이 있대서 시를 못 쓰지 않지만
[시를 노래하는 시 41] 최영미, 《돼지들에게》
- 책이름 : 돼지들에게
- 글 : 최영미
- 펴낸곳 : 실천문학사 (2005.11.25.)
- 책값 : 8000원
고속도로가 나고 고속철도가 다닙니다. 크고작은 공항이 생기고, 사람들은 자가용을 굴립니다.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찻길에는 자동차가 넘치며, 버스와 택시와 전철은 자꾸자꾸 늘어납니다.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를 안 들어도 될 만한 도시는 없습니다. 다만, 자동차 들락거리기 힘든 조그마한 골목길 있는 동네에서는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를 거의 못 듣기도 합니다. 오직 두 다리에 기대어 계단을 오르고 구비구비 지나다니는 골목동네에서는 이웃집 도란도란 속삭이는 소리를 듣습니다. 도시로도 흘러드는 가을철 바람소리를 듣고, 도시에도 싱싱 부는 겨울철 바람노래를 들어요.
달을 가장 가까이 볼 수 있대서 붙은 ‘달동네’라는 이름은, 돈이 적어 가난한 살림을 꾸리는 이들한테는 더할 나위 없이 어여쁜 선물이리라 생각합니다. 달동네라는 이름이라면, 해동네도 될 테고, 바람동네도 될 테지요. 꽃동네나 무지개동네, 또는 구름동네나 하늘동네라는 이름도 되리라 생각해요.
그러고 보면, 자동차 싱싱 달리는 찻길 가까이 있는 곳에는 아파트 높직하게 섭니다. 자동차 붕붕 시끄러운 둘레에는 높다란 건물 수두룩합니다. 이들, 자동차 북적대는 곳에서는 달을 바라보지 않아요. 해도 바라보지 않고, 구름이나 바람도 느끼지 않아요. 자동차 많은 데에서는 서로서로 얼마나 크고 까만 빛깔이면서 비싼 자동차인가를 뽐내려 해요.
.. 나의 소중한 보물을 지키기 위해 나는 피 흘리며 싸웠다. / 때로 싸우고 때로 타협했다. / 두 개를 달라면 하나만 주고, / 속이 빈 가짜 진주목걸이로 그를 속였다. / 그래도 그들은 돌아가지 않았다 .. (돼지들에게)
달동네에는 자동차 들어서기 힘든 만큼, 짐을 꾸려 보금자리 옮길라치면 몹시 고단합니다. 등짐을 져서 날라야 하니까요. 그런데, 달동네 살림집은 짐이 그닥 안 많아요. 등짐으로 여러 차례 지고 나를 만하고, 손수레로 짐을 옮길 만합니다.
가만히 돌아보니, 내 스물다섯 나이에 함께 신문사지국에서 신문 돌리며 일하던 선배가 ‘늦깎이 대학생’을 꿈꾸며 신문배달은 그만두고 요리사 부업으로 학비를 번다며 홀로 작은 방 얻어 떠날 적에, 손수레 하나로 선배 짐을 모두 날랐어요. 그러나, 선배는 늦깎이 대학 입시에 자꾸 떨어집니다. 그럴밖에 없다 싶었는데, 이른새벽부터 늦은밤까지 식당에서 쉬잖고 온갖 밥을 만들어 내야 하니, 책 들여다보며 공부할 겨를이 없거든요.
더 돌아보니, 달동네를 쏘다니며 신문을 돌리는 일은 즐겁습니다. 이 집 저 집 다 다른 살림살이에 맞추어 신문을 넣습니다. 어느 집은 대문 위에 걸치고, 어느 집은 대문 밑으로 밀어넣습니다. 어느 집은 대문 옆구리에 슬쩍 끼우고, 어느 집은 대문 손잡이 우유주머니에 넣습니다. 어느 집은 대문 위 빈틈으로 휙 던져서 안쪽 문간에 척 떨어지게 합니다. 어느 집은 2층 창가로 신문을 던지고, 어느 집은 3층 문턱으로 신문을 던집니다.
아파트에서 신문을 돌릴 적에는 꼭대기까지 오르내리느라 힘듭니다. 새벽마다 여러 신문지국 일꾼이 승강기를 타려고 기다리느라 부산스럽기도 합니다. 골목에서는 서로 겹칠 일이 없지만, 아파트에서는 신문지국 일꾼마다 자꾸 부딪혀야 해요. 똑같이 생긴 층집 똑같이 생긴 대문 똑같이 생긴 골마루 다니며 신문 넣는 일은 하나도 재미없습니다. 더 먼 길을 달려야 하고, 더 많은 집들 다 다른 살림새에 맞추어 신문을 넣자면, 나중에 인수인계를 할 적에도 골치가 아프지만, 그만큼 ‘다 다른 사람 삶’을 돌아볼 수 있어서 재미있어요. 동네마다 다른 모습이요, 사람마다 다른 이야기입니다.
.. 그는 워낙 작고 소심한 돼지였는데 / 어느 화창한 봄날, 감옥을 나온 뒤 / 사람들이 그를 높이 쳐다보면서 / 어떻게 그 긴 겨울을 견디었냐고 우러러보면서 / 하루가 다르게 키가 커졌다 .. (돼지의 변신)
도시에서는 달동네라 한다면, 시골에서는 달마을이 될까 싶습니다. 아마, 시골이라면 어느 시골이나 달마을이 될 테지요. 시골에는 등불이 적고 자동차 드문 만큼, 도시하고는 견줄 수 없이 환하고 밝은 달을 누려요.
어젯밤에는 가느다랗고 노란 초승달을 봅니다. 작은아이를 안고 마을길에 서서 노래를 부르며 재웁니다. 달을 보니 별도 보고, 별도 보니 까맣디까만 하늘을 봅니다. 곧, 시골은 달마을이면서 별마을입니다. 별마을인 만큼 낮에는 환한 해마을입니다. 바람마을이요 들마을이고 숲마을입니다. 바닷마을이요 새마을(멧새 많은 새마을)이면서 꽃마을, 풀마을, 나무마을입니다.
아이들은 시골에서 꽃과 풀과 나무를 늘 곁에 두면서 꽃과 풀과 나무를 바라봅니다. 꽃과 풀과 나무를 바라보니, 꽃과 풀과 나무를 아낍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구름을 생각합니다. 구름을 생각하며 멧새를 좋아합니다. 바다를 바라보며 바람을 느낍니다. 바람을 느끼며 비와 눈을 사랑합니다.
.. 느끼지 못하는 바보들을 대신해 / 웃어주고 울어주는 / 영화는 위대한 사기. /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환상 .. (한국영화를 위하여)
시골에서만 있으면 귀를 따갑게 울리는 소리가 없습니다. 시골에서만 있으면 귀를 살며시 간질이는 소리가 있습니다. 바람이 나뭇잎을 건드립니다. 들새와 멧새가 바람을 가로지르며 날갯짓 소리를 냅니다. 이 겨울 지나 새로운 봄 찾아들면, 벌레들 하나둘 깨어나 새삼스럽게 풀벌레 노랫소리 들려주겠지요. 개구리는 논마다 밤노래잔치를 베풀 테고요. 개구리가 노래잔치를 벌이는 곳에는 먼먼 곳부터 해오라기와 왜가리 찾아들어 먹이를 찾으며 꺽꺽 울 테고, 한껏 푸르게 자라는 풀들은 풀노래를 베풀어요.
곰곰이 따지니, 시골마을은 달마을이요 풀마을이면서 노래마을이로구나 싶습니다. 모두 노래를 해요. 할머니 할아버지는 들일을 하면서 일노래를 부릅니다. 아이들은 마당에서 뛰놀며 놀이노래를 부릅니다. 새들은 새노래요, 벌레는 벌레노래입니다. 개구리는 개구리노래이고, 나무는 나무노래예요.
바람노래를 들어요. 달노래를 들어요. 바람노래를 듣고, 빗노래와 눈노래를 들어요. 구름은 구름노래를 부르겠지요. 무지개는 무지개노래입니다. 온갖 노래가 어여삐 얼크러지면서, 시골노래로 거듭납니다.
노래가 있기에 시골이요, 노래가 흐르며 시골입니다. 노래가 숨쉬며 시골이고, 노래가 흐드러지면서 시골입니다.
.. 박정희가 유신을 거대하게 포장했듯이 / 우리도 우리의 논리를 과대포장했다 / 그리고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 관념으로 도배된 자기도취의 감상적 애국이 / 연구실에서 광장으로, 감옥에서 시장으로 나온 흑백논리가 / 종이에 인쇄되어 팔리는 .. (시대의 우울)
최영미 님 시집 《돼지들에게》(실천문학사,2005)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돼지들은 어디에 있는 돼지들일까 생각해 봅니다. 시골에 있는 꿀꿀이일는지요. 도시에 있는 세겹살일는지요. 돼지들은 최영미 님한테서 왜 글월 하나 받아야 할까요. 최영미 님은 왜 돼지들한테 글월 하나 띄울까요.
사람들이 좁다란 우리를 짓고 시멘트바닥에 내몰기에 돼지들은 그저 먹고 또 먹으며 살점만 키웁니다. 돼지는 스스로 정갈하게 살고 싶으며, 돼지는 꾸역꾸역 먹고만 싶지 않으나, 돼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먹기만 합니다. 닭도 그래요. 닭은 사료와 항생제를 먹으며 살점만 키워야 합니다. 닭은 죽어라 알을 낳아야 합니다. 알을 죽어라 낳지 않으면 고기닭으로 죽고, 알을 죽어라 낳고 보면 또 똥줄이 타서 죽고 맙니다. 소도 돼지나 닭이랑 매한가지입니다. 살고 싶대서 살 수 없고, 죽고 싶대서 마음대로 못 죽습니다.
참말 사람은 어떤 짐승이기에, 우리 곁 숱한 푸른 숨결을 이다지도 괴롭히면서 잡아먹는가 궁금합니다. 참말 사람은 어떤 목숨이기에, 우리 곁 풀과 꽃과 나무를 모질게 괴롭히면서 풀약을 치고 비료를 뿌리는지 궁금합니다.
최영미 님은 돼지들한테 글월을 띄우다가 시집 한 권 냈다지만, 가만히 보면, 돼지 아닌 ‘사람’한테 띄우는 글월이지 싶어요. 사람답지 못한 사람한테, 사람다움을 스스로 버린 사람한테, 사람다움을 빼앗으려는 사람한테, 사람다움을 내려놓고 미친듯이 치고박으며 싸우는 사람한테, 글월 하나 띄우려 했구나 싶어요.
.. 내 앨범에는 이십대가 없다 / 입학식과 졸업식만 있지 중간이 텅 비었다 / 셔터를 누르는 몇 초만이라도 편안히 멈추어 / 나를 응시할 계절이 없었으니― / 누가 누구와 친한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 / 이미지에 불과한 종잇조각 때문에 곤란한 일을 당할까 봐 / 우리는 우리의 싱그러운 젊은 날들을, / 싱그러우며 황폐했던 청춘을 기념하지 않았다. / 친구를 감옥에 보낼지도 모르는 / 자본의 기술을 우리는 거부했다 .. (대학 시절 사진을 달라는 기자에게)
공순이 공돌이도 스무 살 푸른 숨결 사진이 없습니다. 군대로 끌려가는 젊은 사내도 스무 살 푸른 숨결 사진이 없습니다. 흙순이 흙돌이도 스무 살 푸른 숨결 사진이 없습니다. 대학생뿐 아니라,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모든 스무 살 푸른 숨결은 사진 하나 홀가분하게 누리지 못해요.
사진은 누가 남길까요. 사진은 몇 살쯤 되어야 느긋하게 남길 수 있을까요. 사진을 남기는 이는 어떤 이름·돈·힘을 누리는가요. 따지고 보면, 사진을 누린다고 하는 이들조차 당신 이름·돈·힘을 지키는 데에 바쁜 나머지, 정작 하루를 즐거이 못 누리지는 않나요. 이름에 얽매이고 돈에 휘둘리며 힘에 끄달리면서, 삶을 사랑하는 꿈을 잊지는 않나요.
돈이 있대서 시를 못 쓰지는 않지만, 돈을 생각하는 사람은 시하고 자꾸 멀어집니다. 이름이 있대서 시를 안 쓰지는 않지만, 이름을 생각하는 사람은 시하고 나날이 동떨어집니다. 힘이 있대서 시를 찢지는 않지만, 힘을 생각하는 사람은 시를 군화발로 짓이기곤 합니다.
착한 마음으로 시를 씁니다. 참다운 마음으로 시를 읽습니다. 고운 마음으로 시를 나눕니다. 착한 마음으로 흙을 일구고, 참다운 마음으로 서로 어깨동무하며, 고운 마음으로 달동네·숲마을·지구별을 사랑합니다. 4346.1.16.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