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계시냐 - 민경정 동시집
민경정 지음, 남궁산 그림 / 창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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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11

 


시골살이를 동시로 담을 때
― 엄마 계시냐
 민경정 글,남궁산 그림
 창비 펴냄,2012.7.25./8500원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을 동시로 담은 민경정 님 동시집 《엄마 계시냐》(창비,2012)를 읽습니다. 책 뒤를 보면, 어린이문학평론을 하는 김이구 님이 “사람 사는 모습을 두루 담아낸다”고 적습니다. 이 말마따나 민경정 님 동시집은 ‘사람 사는 모습’을 두루 담으려고 애씁니다. 다만, “요즘 동시들이 소홀히 하고 있는 ‘삶의 동시’의 당당한 복권”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민경정 님 동시집 《엄마 계시냐》는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을 보여주니까 “삶을 말하는 동시”가 되기는 할 텐데, 삶을 말하는 동시라고 해서 아름답게 읽을 만한 동시라거나 사랑스럽게 읽을 만한 동시가 되지는 않아요.


.. 발 구르고 소리쳐도 / 꼼짝 않고 / 돌멩이 던져도 / 꼬리만 휙휙 탁탁. // 그래, 난 투우사. / 빨간 잠바 벗어 들고 / 올래! ..  (투우사)


  이를테면, 배추밭과 무밭에 들어와 배추 뜯어먹고 무 밟는 소를 쫓으려고 하다가 그만 ‘투우 놀이’를 한다는 대목은 좀 생뚱맞습니다. 요즈음에도 소를 풀어서 기르는 시골집이 있을까요. 소한테 땅갈이를 시키며 풀을 뜯어서 먹이는 시골집은 어디에 얼마나 있을까요.


  시골 아이라 하더라도 집집마다 텔레비전 있어 ‘투우’를 보았을 수 있지요. 시골 아이도 요즈음은 어디에서나 어린이집이나 방과후학교나 학원에 가요. 우리 식구 살아가는 전남 고흥 시골마을 이웃을 살피면, 면소재지 아이들이든 읍내 아이들이든 들판에서 어버이와 함께 일하거나 숲에서 숲놀이 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시골 아이들도 영어 공부와 한자 공부로 바쁘고, 방과후학교 특별과외를 받느라 바빠요. 그리고, 텔레비전을 보거나 만화영화 보느라 하루를 보냅니다.


  그러니까, 시골 아이가 소를 쫓거나 풀을 뜯기는 곳은 거의 찾아볼 수 없어요. 그래도, 어딘가에는 틀림없이 소몰이를 한다든지 소치기를 하는 아이가 있겠지요. 〈투우사〉라는 시는, 아직 이 나라 시골 어딘가에서 아름다운 꿈 건사하는 아이를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어요. 배추밭과 무밭 망가뜨리는 소를 쫓으려 하다 제풀에 지쳐 투우놀이를 하는 싱그러운 아이를 보여준다 할 만합니다. 그런데, 왜 ‘투우’였을까요. 휘파람을 불거나 피리를 불며 소를 달랠 수 있을 텐데요. 소를 살살 어루만지며 다른 맛난 풀을 집어서 주둥이 쪽으로 내밀면 소가 천천히 따라올 텐데요.


.. 마늘 싹이 쏙쏙 돋은 봄날 / 낯선 사람들이 마늘을 밟으며 / 이리저리 밭을 쟀다. // “아서! 두 달 안에 캐는디.” / 할머니 손을 저으며 내쫓자 / “두 달이면 공장 다 지어요.” / 오십만 원을 내미는 땅주인. // 할머니는 서둘러 마늘을 캐 / 논두렁에 조심조심 옮겨 심었다 / 뿌리가 하얗게 내린 마늘을 ..  (마늘값)


  〈마늘값〉을 보면, 마늘밭을 아랑곳하지 않고 돈과 공장만 따지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몇 군데 알맞지 않습니다. 도시에서만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이 작품에서 어느 대목이 엉성한가를 못 느끼겠지만,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마늘값〉은 여러모로 엉성하다고 느낍니다.


  첫째, ‘마늘 싹이 돋았다’고 하면서 ‘낯선 사람들이 마늘을 밟는다’고 잇달아 적습니다. 마늘 싹이 돋았으면 낯선 사람들은 ‘마늘 싹을 밟는다’고 해야겠지요. 둘째, 마늘 싹은 봄날에 돋지 않습니다. 알뿌리 굵직하게 여문 마늘을 늦봄(5월)이나 이른여름(6월)에 뽑는걸요. 논에 심은 마늘은 논삶이도 해야 하니 일찍 뽑고, 밭에 심은 마늘은 조금 나중에 뽑습니다. 마늘 싹은 겨울에 돋습니다. 가을걷이를 마치고 거름을 내어 한 달쯤 묵힌 다음 이랑고랑 내고서 통마늘을 낱낱이 쪼개어 하나하나 심어요. 가을이 다 가기 앞서 마늘을 심으면, 겨울에 눈발 날리기 앞서 마늘 싹이 돋습니다. 한겨울에는 마늘잎이 제법 길게 뻗고, 소복소복 내리는 눈을 맞으며 마늘은 더 씩씩하고 튼튼하게 자라지요. 겨울이 물러나고 봄이 찾아오면 마늘쫑이 돋습니다. 그러니, 이 동시에서 마늘을 이야기하자면 “마늘쫑이 쏙쏙 돋은 봄날”이라고 적든지, “낯선 사람들이 마늘잎을 밟으며”라 적어야 올바릅니다.


  마늘밭과 얽힌 안타깝고 안쓰러운 시골살이를 다룬 뜻은 참으로 반갑습니다. 아이들하고 나누는 동시로 곱게 잘 그렸습니다. 그렇지만, 시골살이 흐름과 밭일과 푸성귀 자람새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고 그린다면, 이러한 동시를 읽을 시골 아이나 도시 아이가 무엇을 느끼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고도 살펴야지 싶습니다.


.. 하루를 묻혀 온 신발들 / 현관 앞에 엎어지고 포개졌네. / 툭툭 털어 가지런히 놓고 / 내 신발 나란히 벗는 저녁 ..  (저녁에)


  〈저녁에〉라는 작품은 시골에서 논일 밭일 하는 살림집 이야기를 다루다가 “현관 앞에”라고 적습니다. ‘현관(玄關)’은 일본 한자말입니다. 국어순화 대상 낱말입니다. ‘문간’으로 바로잡아야 알맞다고 하는데, 아파트에서는 으레 ‘현관’이라고만 씁니다. 아마, 도시 아파트에서는 이 낱말을 다듬거나 거르기 힘들 수 있겠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시골 흙집에서도 ‘현관’이라고 쓴다면?


  시골집을 생각해 보기를 빕니다. 시골집에는 마당이 있고 대문이 있습니다. 시골집에서 신을 놓는 자리는 대청마루 아래쪽입니다. 대청마루 아래쪽에는 섬돌을 놓고, 섬돌에 신을 올립니다. 곧, 시골마을에서 흙일 마치고 돌아온 식구들 신이 올망졸망 놓인 모습을 동시로 그린다 할 적에는 “현관 앞에 엎어지고 포개졌네”가 아니라 “섬돌에 엎어지고 포개졌네”라든지 “섬돌 둘레에 엎어지고 포개졌네”처럼 적어야 올발라요.


  하루일 마친 고단함과 살가움을 그리는 작품으로서 아름답구나 싶으면서도, 시골살이와 시골집 얼거리를 깊이 들여다보지 못하는 모습이 아쉽습니다.


.. 할머니는 발뒤꿈치로 파 / 콩 서너 알 던져 넣고 / 발끝으로 흙을 덮어 / 콩을 심고 ..  (콩 심는 날)


  〈콩 심는 날〉과 같은 동시는 할머니와 엄마와 아빠가 콩알을 어떻게 심는가 하는 모습을 잘 살피고 썼습니다. 예쁜 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작 콩심기를 ‘구경하는 내 모습’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시골 아이 눈길로 콩심기를 구경하는데, 왜 시골 아이는 손수 콩을 심지 않을까요. 할머니가 심고 엄마와 아빠가 심으며 ‘내가 함께 심는’ 흙일이 아닐는지요.


  김이구 님은 민경정 님 동시가 “삶의 동시의 당당한 복권”이라고 말하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민경정 님 동시에 나오는 시골살이는 ‘시골 삶과 이야기’라기보다는 ‘시골 모습 구경’에 그칩니다. 삶을 보여주기는 하되, 스스로 움직이는 삶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 어떻게 있는가 바라보는 모습이라고 할까요.


.. 등산 온 사람들 / 산을 오르다 말고 / 나무마다 붙어 서서 / 새순을 똑똑 딴다. / 낙엽 헤치고 / 산나물을 박박 뜯는다 ..  (입산 금지)


  도시사람이 시골에 와서 어떤 짓을 하는지 잘 밝히는 〈입산 금지〉 같은 작품을 생각해 봅니다. 참말, 도시사람은 시골에 와서 얄궂은 짓 잔뜩 하고 갑니다. 숲길과 멧길을 아무렇게나 파헤치지를 않나, 멧골에 핀 꽃을 몰래 파 가지 않나, 바닷가 돌멩이를 슬쩍 훔치지 않나, 이러면서 온갖 쓰레기를 모래밭이나 숲속이나 논둑에 팽개치고 자가용 몰아 부웅 내빼지 않나. 담배를 태우고 담배꽁초 밭둑에도 휙휙 던지지를 않나.


  민경정 님이 ‘시골 삶 구경’이 아닌 ‘시골 삶 주인공으로 우뚝 선’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한다면, 〈입산 금지〉에서도 사뭇 다른 줄거리가 나타나리라 생각합니다. 도시사람이 얄궂은 짓을 보여줄 적에 ‘얼마나 속이 다치는’지,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이리하여 도시사람한테 어떤 말을 들려주고 싶은지, 숲을 사랑하는 시골사람 마음은 어떠한지, 이런저런 줄거리를 차근차근 밝힐 만하겠지요.


.. 오늘은 / 고구마 다섯 개 / 무 두 개 ..  (엄마 계시냐)


  시집 이름이기도 한 대표작품 〈엄마 계시냐〉를 보면, 고구마와 무를 “다섯 개”와 “두 개”로 셉니다. 아무래도, 도시사람은 다들 ‘개’라고 세겠지요. 그러면, 시골사람도 이렇게 셀까요? 요즈음 시골사람도 텔레비전 많이 보고 농협 공무원 말투에 길들어 모두 ‘개’라고 셀까요?


  도시사람이나 시골사람 몽땅 ‘개’라고 세면, 동시를 쓸 적에도 ‘개’라고 세야 할까요? 아이들하고 지내는 어른은 고구마와 무를 어떤 낱말을 써서 세야 알맞을까요. 우리 어른들은 배추와 오이와 당근을 어떤 낱말을 써서 세야 슬기롭고 아름다울까요.


  “고구마 다섯 뿌리”와 “무 두 뿌리”처럼 셀 수 있기를 기다립니다. 시골살이를 동시로 담을 때에 어떤 사랑과 어떤 꿈을 그리면서 환하게 빛날 수 있는지 동시작가 민경정 님을 비롯해, 어린이문학평론을 하는 분들 모두 참다이 생각할 수 있기를 빕니다. 시골 모습을 그리기만 한대서 ‘삶을 보여주는 시’가 되지 않습니다. 시골 이웃들 모습을 구경한대서 ‘삶을 말하는 시’가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시골살이를 누리고, 스스로 시골사람으로 살아가며, 스스로 시골빛을 흐드러지게 즐길 때에, 비로소 ‘삶을 보여주’고 ‘삶을 말하’며 ‘삶을 빛내’는 동시 한 자락 태어납니다.


  스스로 마늘 심는 즐거움을 동시로 써 보셔요. 스스로 풀 뜯어 나물비빔 먹는 기쁨을 동시로 써 보셔요. 스스로 숲에 깃들어 숲바람 쐬고 숲햇살 누리며 숲내음 맡는 웃음꽃을 동시로 써 보셔요. 구경하는 몸가짐만으로는 ‘시골살이 이야기’를 시골 아이한테도 도시 아이한테도 들려주지 못합니다. 4346.2.1.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동시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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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127] 짐시렁

 


  순천 기차역에서 기차표 한 장 끊습니다. 기차에 올라탄 다음 내 커다란 짐을 시렁에 올려놓습니다. 시렁이 조금 더 넓으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합니다. 떨어지지는 않겠지요. 책 몇 권과 물과 먹을거리 담은 작은 가방은 발밑에 둡니다. 기차가 슬슬 움직이고, 안내방송이 흐릅니다. “선반에 올려놓은 물건은 ……” 자리에 앉아 책을 펼치려다가 문득 생각합니다. 그래, 모두들 ‘선반(懸盤)’이라고만 말하는구나. 하기는, 버스에서든 기차에서든 비행기에서든 배에서든 모두 ‘물건(物件)’이나 ‘화물(貨物)’이라고만 말하지, ‘짐’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짐칸’이라 하는 사람보다 ‘화물칸’이라 말하는 사람이 많고, ‘짐차’라 하는 사람보다 ‘화물차’라 말하는 사람이 많으며, 그냥 ‘트럭(truck)’이라고까지 하지요. 짐을 올려서 ‘짐시렁’일 텐데, 이런 낱말을 쓸 사람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다만, 책을 얹는 ‘책시렁’ 같은 낱말은 더러 쓰는구나 싶어요. ‘옷시렁’이나 ‘이불시렁’이나 ‘그릇시렁’ 같은 낱말 쓸 사람이 있을까 모르겠어요. 부엌에서 그릇 물기 빼려고 놓는 것은 ‘살강’인데,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으레 ‘식기건조대(食器乾燥臺)’ 같은 메마른 낱말만 씁니다. 4346.2.1.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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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의 숲 22 - 신장판
이시키 마코토 지음, 양여명 옮김 / 삼양출판사(만화)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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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214

 


즐거운 삶과 즐거운 밥
― 피아노의 숲 22
 이시키 마코토 글·그림,양여명 옮김
 삼양출판사 펴냄,2013.1.15./4800원

 


  한겨울에 따순 볕 내리쬐기를 바라면, 추위는 어느새 걷히면서 따순 볕이 온누리를 포근히 감쌉니다. 그러나 한겨울은 꽁꽁 얼어붙을 뿐, 좀처럼 녹을 낌새가 없곤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한겨울 따순 볕을 제대로 바라지 않거든요. 하늘을 바라보고 해를 올려다보면서 가장 사랑스럽고 맑은 눈빛과 목소리로 따순 볕을 바라면, 참말 따순 볕이 드리우며 꽁꽁 얼어붙은 한겨울이 녹습니다.


  한여름에 시원한 바람 불기를 바라면, 더위는 어느덧 스러지면서 시원한 바람이 온누리를 상큼하게 감돕니다. 그러나 한여름은 푹푹 찔 뿐, 도무지 시원하지 않기 일쑤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한여름 시원한 바람을 슬기롭게 바라지 않거든요. 하늘을 바라보고 구름을 올려다보면서 가장 착하고 밝은 눈망울과 노래로 시원한 바람을 바라면, 참말 시원한 바람이 찾아들며 푹푹 찌던 더위를 잠재웁니다.


  가만히 보면, 사람들은 겨울날 난방기를 돌리거나 옷을 여러 벌 껴입기만 할 뿐, 하늘을 바라보지 않고, 해를 올려다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여름날 냉방기를 돌리거나 얼음과자를 사다 먹을 뿐, 하늘을 바라보지 않고, 구름을 올려다보지 않아요.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으로 날씨를 알아보기는 하더라도, 스스로 마음을 열어 하늘 흐름과 햇살 흐름과 바람 흐름을 느끼려 하지 않아요.


- “기사가 진실인지 어떤지가 문제는 아니야. 팡 웨이가 내일 파이널에 맞춰서 최상의 컨디션으로 피아노를 칠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거야.” “그렇지요.” (24쪽)
- ‘아아, 빨리 이 무대에 서고 싶어. 빨리 내 1번을 이 회장에 들려주고 싶어.’ (37쪽)


  이시키 마코토 님이 그린 《피아노의 숲》(삼양출판사,2013) 스물둘째 권을 읽으며 문득문득 생각합니다. 만화책에 나오는 카이와 아지노 선생님은 늘 가장 즐겁고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한 가지를 바랍니다. 당신들이 ‘피아노를 가장 잘 칠 수 있기’를 바라지는 않아요. 당신들이 누릴 ‘아름다운 피아노 가락을 들을 수 있기’를 바라요. 카이도 아지노 선생님도 누구하고 겨루는 피아노를 치지 않습니다. 카이도 아지노 선생님도 ‘마음을 아름답게 다스리는 피아노 가락’을 좋아합니다. 콩쿠르 대회에 나와 피아노 솜씨를 선보인다 하지만, 두 사람 마음은 ‘솜씨 자랑’하고는 사뭇 동떨어집니다. 피아노 하나로 사람들 사이에 아름다운 사랑을 잇거나 맺는 즐거운 꿈을 꿉니다. 그리고, 이 꿈은 찬찬히 이루어져요. 여러 나라 여러 젊은이들 여러 피아노 가락을 실컷 누리지요.


  악보가 있지만, 악보와 똑같이 칠 수 있는 피아노는 없어요. 악보는 숨결이요 피아노 또한 숨결이거든요. 피아노 앞에 선 사람 또한 숨결이에요. 저마다 살아온 결에 맞추어 피아노 어루만지는 손길이 달라요. 저마다 생각하는 꿈과 사랑에 따라 피아노 가락이 달라요.


- ‘음악은, 어쩌면 이다지도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걸까.’ (48쪽)
- “카이는 아마미야 씨의 연주를 몇 번 들은 적 있습니다.” “네?” “1년에 한 번 학생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크리스마스 투어’를 하시죠? 그 리사이틀을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매년 빠짐없이 들으러 가요.” (79쪽)


  책을 읽는 까닭을 생각합니다. 지식 자랑을 하거나 지식 쌓기를 하려고 책을 읽지 않습니다. 피아노를 치는 까닭을 생각합니다. 솜씨 자랑을 하거나 솜씨 쌓기를 하려고 피아노를 치지 않습니다. 즐겁게 치는 피아노이고, 즐겁게 듣는 피아노입니다. 즐겁게 읽는 책이요, 즐겁게 쓰는 책이에요.


  즐겁게 밥을 지어, 즐겁게 밥을 먹습니다. 즐겁게 바느질을 하거나 빨래를 한 다음, 즐겁게 옷을 입어요. 즐겁게 자고, 즐겁게 일어납니다. 즐겁게 일하고, 즐겁게 놉니다. 즐겁게 노래하고, 즐겁게 춤춥니다. 삶입니다.


- “실은 그 녀석이 초등학생 때, 저에게 피아노를 배우는 대신 약속해 달라고 한 게 있어요. 피아노로 먹고살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계약이나 다름없죠! 카이에겐 일본에서 활동하기 힘든 사정이 있기 때문에, 세계를 상대로 먹고살겠다는 게 애초부터의 목표였지요.” (84쪽)
- “자네가 나의 피아노에 끌린 이유는, 태어날 때부터 자네가 추구하는 음과 내가 추구하는 음이 일치했기 때문일 수도 있네. 그래서 자네의 영혼이, 나의 피아노에 강하게 반응한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 줄 수는 없겠나?” (232∼233쪽)


  만화책에 나오는 카이는 ‘피아노를 치며 먹고살기’를 바랍니다. 피아노로 돈을 많이 벌 생각이 아닌, 카이 스스로 사랑하는 피아노를 언제나 사랑스레 치면서 날마다 즐겁게 삶을 꾸릴 수 있기를 바라요.


  즐겁게 피아노를 치니까, 즐겁게 먹고살기를 바랄 테지요. 즐겁게 ‘다른 사람 치는 피아노 소리’를 들으니까, 즐겁게 피아노 삶을 누릴 테지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어버이는 무슨 생각을 할까요. 아이들이 대학입시를 치르도록 하는 어버이는 무슨 생각을 할까요. 아이들이 학교에서 ‘아름다운 삶’을 배우거나 누리기를 바라는가요? 아이들이 슬기로움을 빛낼 대학교에서 ‘아름다운 사랑’을 새로 익히거나 나누기를 바라는가요?


  아마, 아니겠지요. 오늘날 어버이들은 한결같이 ‘이녁 아이들이 시험점수 잘 따기’를 바라면서 학교에 보내겠지요. 오늘날 어버이라면 누구나 ‘이녁 아이들이 서울에 있는 몇몇 손꼽히는 대학교에 붙기’를 바라겠지요. 이렇게 붙은 다음에 돈 잘 버는 큰회사에 붙기를 바라겠지요.


  꿈을 꾸지 못하는 요즈음 이 나라 어버이와 아이입니다. 꿈을 꾸는 길로 이끌지 못하는 요즈음 이 나라 어른과 교사입니다. 공부는 무엇이고 왜 해야 하는가부터 생각할 수 있어야 해요. 밥은 무엇이고 왜 먹어야 하는가부터 알 수 있어야 해요. 서로서로 주고받는 말이란 무엇인가요. 마을과 나라와 정부와 사회란 무엇인가요.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사랑을 찾습니다. 생각을 안 하면서 살면 사랑도 못 찾습니다.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꿈을 이룹니다. 생각을 안 하면서 살면 꿈도 못 이룹니다. 돈은 벌까요? 아마, 돈은 벌는지 몰라요. 그러나, 즐겁게 버는 돈하고는 멀고, 즐겁게 나누거나 쓰는 돈하고도 멀 테지요.


- “슈우헤이, 이 거리는 아름답지? 정말 아름다워.” “응. 내가 1년 살면서 알게 된 건, 폴란드는 일본과 다르게 거의 ‘평지’라는 점이야. 한없이 평평하다는 느낌. 그 인상이 꽤 강렬했어. 일본은 섬나라이고, 독일에서도 이런 느낌은 없었거든. 알고 있어? 폴란드라는 이름의 유래가 ‘평지의 백성’이라는 의미라는 거? 쇼팽은 평지의 사람이야.” ‘쇼팽은 평지에서 자랐어. 끝없이 이어진 장대한 평지에서, 드넓은 하늘을 보며.’ (112∼115쪽)
- “최선을 다하게! 팡 웨이 군, 나는 자네의 미래가 궁금하네. 내가 추구하던 음이, 앞으로 어떻게 성장할는지 보고 싶어. 그러니, 더 이상 아무것도 두려워 말고,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펼쳐 보게!” (237∼238쪽)


  폴란드사람 쇼팽은 폴란드사람답게 살아가며 폴란드 이웃을 사랑하는 노래를 지어 피아노를 쳤습니다. 한국사람 아무개라면 어떤 아무개답게 살아가며 어떤 한국 어떤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는 노래를 지어서 피아노를 칠 만할까요. 한국은 어떤 나라라고 생각하나요. 한국에서 살아가는 이웃은 어떤 숨결이라고 생각하나요. 나는 어떤 숨결이라고 느끼나요. 내가 마실 바람이란 무엇이고, 내가 쬘 햇볕이란 무엇이며, 내가 뿌리내릴 보금자리는 어디일까요.


  만화책 《피아노의 숲》을 손에 쥐는 사람들 가슴에 즐거움이라는 싹이 틀 수 있기를 빕니다. 만화책 《피아노의 숲》을 읽는 사람들 마음밭에 사랑이라는 씨앗이 뿌리내릴 수 있기를 빕니다. 4346.2.1.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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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피아노의 숲》

 


  나는 《피아노의 숲》을 왜 읽는가. 피아노를 아주 잘 치는 아이들을 보려고? 콩쿠르 대회에서 멋들어진 피아노를 들려주는 모습을 보려고? 저마다 어떤 솜씨를 뽐내는지 보려고?


  아니다. 나는 만화책 《피아노의 숲》에서 다른 이야기를 읽는다. 스스로 가장 아름답다고 여기는 길을 씩씩하게 걸어가면서, 스스로 맑게 웃고 싶은 아이들 꿈이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느끼려고 이 만화책을 읽는다. 피아노 숲에서 자란 아이들은 피아노 숲에서 배운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다. 어떤 스승한테서 배우지 않는다. 피아노 치기를 일깨우는 스승이나 동무나 길잡이는 있다. 그러나, 스승이나 동무나 길잡이가 있기 때문에 피아노를 칠 수 있지는 않다. 피아노 치는 삶을 누리고 싶은 ‘내’가 있기에, 나한테 스승이 찾아오고 동무가 찾아오며 길잡이가 찾아온다. 내 마음속에서 피아노 삶을 꿈꾸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나한테 찾아오지 않는다.


  이찌노세 카이라 하는 아이한테 여러 사람이 찾아오는 까닭은 오직 하나이다. 카이는 피아노를 치고 싶기 때문이다. 즐겁게 피아노를 치고 싶은 카이한테는 ‘피아노 삶을 즐기려는 스승’이 찾아온다. ‘피아노 삶을 즐기지 못하는 동무’도 찾아온다. 왜냐하면, 피아노 삶을 즐기지 못하는 동무는 마음속으로 ‘이게 아닌데’ 하며 갈피를 못 잡으면서 헤매니까. 헤매는 동무는 갈피를 잡고 싶어 떠돌다가, 카이를 보고는, 가만히 다가와서, 카이가 누리는 ‘피아노 즐기는 삶’을 바라보고는, 천천히 깨닫는다. 피아노 삶을 즐기지 못한 나날이란 무엇이었고, 앞으로 나아갈 길은 어디인가 하고 느낀다.


  피아노 솜씨는 대수롭지 않다. 이를테면, 밥하는 솜씨라든지 빨래하는 솜씨라든지 노래하는 솜씨는 그닥 대수롭지 않다. 솜씨는 차츰 무르익는다. 게다가, 솜씨는 차츰 무르익어도, 솜씨가 무르익는 줄 스스로 느끼지 않는다. 오래도록 한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솜씨’ 아닌 ‘사랑’에 마음을 기울인다. 사랑을 어떻게 펼치고, 사랑을 어떻게 나누며, 사랑을 어떻게 즐기는가 하는 대목 하나에 온마음을 기울인다. 카이는 바로 피아노 삶을 씩씩하게 걸어가면서 ‘피아노 숲에서 이루는 사랑’을 환하게 열매로 맺고 싶어한다. 4346.2.1.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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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똥

 


  자는 아이가 끄응끄응 소리를 내기에 왜 그런가 하고 들여다본다. 이불을 걷어차는가 싶어 이불을 여미려 하는데 이불 한쪽이 촉촉하다. 쉬를 누었나. 바지 앞쪽을 만진다. 안 젖었다. 뭘까. 문득 옆지기가 말한다. “냄새 나지 않아요?” 응? 이불 젖은 자리를 손으로 비빈 다음 코에 댄다. 그러고는 일어나서 옆방 불을 켠다. 아이 몸을 돌려 엉덩이를 본다. 엉덩이 쪽이 흥건하게 젖었다. 아, 자면서 응가를 누었구나. 왼팔로 작은아이를 안고 씻는방으로 간다. 바지를 벗기고 물을 틀어 똥꼬와 다리와 발바닥을 씻긴다. 똥 묻은 아랫도리를 씻기니 작은아이가 으앙 하고 운다. 그러나 작은아이를 왼팔로 품에 안아 다독이니 울음을 그친다. 이내 새근새근 잠든다. 천으로 물기를 닦는다. 한팔로 안은 채 바지를 새로 입힌다. 조금 더 품에 안아 다독이고 나서 천천히 자리에 눕힌다. 깊이 잠들었는지 깨지 않는다. 속이 더부룩해서 자다가 똥을 누었나 보다. 시원하게 다 누었을까. 개운한 얼굴로 잘 자는 아이를 바라본다. 똥바지 빨래는 아침에 하기로 한다. 4346.2.1.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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