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책 《피아노의 숲》
나는 《피아노의 숲》을 왜 읽는가. 피아노를 아주 잘 치는 아이들을 보려고? 콩쿠르 대회에서 멋들어진 피아노를 들려주는 모습을 보려고? 저마다 어떤 솜씨를 뽐내는지 보려고?
아니다. 나는 만화책 《피아노의 숲》에서 다른 이야기를 읽는다. 스스로 가장 아름답다고 여기는 길을 씩씩하게 걸어가면서, 스스로 맑게 웃고 싶은 아이들 꿈이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느끼려고 이 만화책을 읽는다. 피아노 숲에서 자란 아이들은 피아노 숲에서 배운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다. 어떤 스승한테서 배우지 않는다. 피아노 치기를 일깨우는 스승이나 동무나 길잡이는 있다. 그러나, 스승이나 동무나 길잡이가 있기 때문에 피아노를 칠 수 있지는 않다. 피아노 치는 삶을 누리고 싶은 ‘내’가 있기에, 나한테 스승이 찾아오고 동무가 찾아오며 길잡이가 찾아온다. 내 마음속에서 피아노 삶을 꿈꾸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나한테 찾아오지 않는다.
이찌노세 카이라 하는 아이한테 여러 사람이 찾아오는 까닭은 오직 하나이다. 카이는 피아노를 치고 싶기 때문이다. 즐겁게 피아노를 치고 싶은 카이한테는 ‘피아노 삶을 즐기려는 스승’이 찾아온다. ‘피아노 삶을 즐기지 못하는 동무’도 찾아온다. 왜냐하면, 피아노 삶을 즐기지 못하는 동무는 마음속으로 ‘이게 아닌데’ 하며 갈피를 못 잡으면서 헤매니까. 헤매는 동무는 갈피를 잡고 싶어 떠돌다가, 카이를 보고는, 가만히 다가와서, 카이가 누리는 ‘피아노 즐기는 삶’을 바라보고는, 천천히 깨닫는다. 피아노 삶을 즐기지 못한 나날이란 무엇이었고, 앞으로 나아갈 길은 어디인가 하고 느낀다.
피아노 솜씨는 대수롭지 않다. 이를테면, 밥하는 솜씨라든지 빨래하는 솜씨라든지 노래하는 솜씨는 그닥 대수롭지 않다. 솜씨는 차츰 무르익는다. 게다가, 솜씨는 차츰 무르익어도, 솜씨가 무르익는 줄 스스로 느끼지 않는다. 오래도록 한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솜씨’ 아닌 ‘사랑’에 마음을 기울인다. 사랑을 어떻게 펼치고, 사랑을 어떻게 나누며, 사랑을 어떻게 즐기는가 하는 대목 하나에 온마음을 기울인다. 카이는 바로 피아노 삶을 씩씩하게 걸어가면서 ‘피아노 숲에서 이루는 사랑’을 환하게 열매로 맺고 싶어한다. 4346.2.1.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