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계시냐 - 민경정 동시집
민경정 지음, 남궁산 그림 / 창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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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11

 


시골살이를 동시로 담을 때
― 엄마 계시냐
 민경정 글,남궁산 그림
 창비 펴냄,2012.7.25./8500원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을 동시로 담은 민경정 님 동시집 《엄마 계시냐》(창비,2012)를 읽습니다. 책 뒤를 보면, 어린이문학평론을 하는 김이구 님이 “사람 사는 모습을 두루 담아낸다”고 적습니다. 이 말마따나 민경정 님 동시집은 ‘사람 사는 모습’을 두루 담으려고 애씁니다. 다만, “요즘 동시들이 소홀히 하고 있는 ‘삶의 동시’의 당당한 복권”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민경정 님 동시집 《엄마 계시냐》는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을 보여주니까 “삶을 말하는 동시”가 되기는 할 텐데, 삶을 말하는 동시라고 해서 아름답게 읽을 만한 동시라거나 사랑스럽게 읽을 만한 동시가 되지는 않아요.


.. 발 구르고 소리쳐도 / 꼼짝 않고 / 돌멩이 던져도 / 꼬리만 휙휙 탁탁. // 그래, 난 투우사. / 빨간 잠바 벗어 들고 / 올래! ..  (투우사)


  이를테면, 배추밭과 무밭에 들어와 배추 뜯어먹고 무 밟는 소를 쫓으려고 하다가 그만 ‘투우 놀이’를 한다는 대목은 좀 생뚱맞습니다. 요즈음에도 소를 풀어서 기르는 시골집이 있을까요. 소한테 땅갈이를 시키며 풀을 뜯어서 먹이는 시골집은 어디에 얼마나 있을까요.


  시골 아이라 하더라도 집집마다 텔레비전 있어 ‘투우’를 보았을 수 있지요. 시골 아이도 요즈음은 어디에서나 어린이집이나 방과후학교나 학원에 가요. 우리 식구 살아가는 전남 고흥 시골마을 이웃을 살피면, 면소재지 아이들이든 읍내 아이들이든 들판에서 어버이와 함께 일하거나 숲에서 숲놀이 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시골 아이들도 영어 공부와 한자 공부로 바쁘고, 방과후학교 특별과외를 받느라 바빠요. 그리고, 텔레비전을 보거나 만화영화 보느라 하루를 보냅니다.


  그러니까, 시골 아이가 소를 쫓거나 풀을 뜯기는 곳은 거의 찾아볼 수 없어요. 그래도, 어딘가에는 틀림없이 소몰이를 한다든지 소치기를 하는 아이가 있겠지요. 〈투우사〉라는 시는, 아직 이 나라 시골 어딘가에서 아름다운 꿈 건사하는 아이를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어요. 배추밭과 무밭 망가뜨리는 소를 쫓으려 하다 제풀에 지쳐 투우놀이를 하는 싱그러운 아이를 보여준다 할 만합니다. 그런데, 왜 ‘투우’였을까요. 휘파람을 불거나 피리를 불며 소를 달랠 수 있을 텐데요. 소를 살살 어루만지며 다른 맛난 풀을 집어서 주둥이 쪽으로 내밀면 소가 천천히 따라올 텐데요.


.. 마늘 싹이 쏙쏙 돋은 봄날 / 낯선 사람들이 마늘을 밟으며 / 이리저리 밭을 쟀다. // “아서! 두 달 안에 캐는디.” / 할머니 손을 저으며 내쫓자 / “두 달이면 공장 다 지어요.” / 오십만 원을 내미는 땅주인. // 할머니는 서둘러 마늘을 캐 / 논두렁에 조심조심 옮겨 심었다 / 뿌리가 하얗게 내린 마늘을 ..  (마늘값)


  〈마늘값〉을 보면, 마늘밭을 아랑곳하지 않고 돈과 공장만 따지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몇 군데 알맞지 않습니다. 도시에서만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이 작품에서 어느 대목이 엉성한가를 못 느끼겠지만,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마늘값〉은 여러모로 엉성하다고 느낍니다.


  첫째, ‘마늘 싹이 돋았다’고 하면서 ‘낯선 사람들이 마늘을 밟는다’고 잇달아 적습니다. 마늘 싹이 돋았으면 낯선 사람들은 ‘마늘 싹을 밟는다’고 해야겠지요. 둘째, 마늘 싹은 봄날에 돋지 않습니다. 알뿌리 굵직하게 여문 마늘을 늦봄(5월)이나 이른여름(6월)에 뽑는걸요. 논에 심은 마늘은 논삶이도 해야 하니 일찍 뽑고, 밭에 심은 마늘은 조금 나중에 뽑습니다. 마늘 싹은 겨울에 돋습니다. 가을걷이를 마치고 거름을 내어 한 달쯤 묵힌 다음 이랑고랑 내고서 통마늘을 낱낱이 쪼개어 하나하나 심어요. 가을이 다 가기 앞서 마늘을 심으면, 겨울에 눈발 날리기 앞서 마늘 싹이 돋습니다. 한겨울에는 마늘잎이 제법 길게 뻗고, 소복소복 내리는 눈을 맞으며 마늘은 더 씩씩하고 튼튼하게 자라지요. 겨울이 물러나고 봄이 찾아오면 마늘쫑이 돋습니다. 그러니, 이 동시에서 마늘을 이야기하자면 “마늘쫑이 쏙쏙 돋은 봄날”이라고 적든지, “낯선 사람들이 마늘잎을 밟으며”라 적어야 올바릅니다.


  마늘밭과 얽힌 안타깝고 안쓰러운 시골살이를 다룬 뜻은 참으로 반갑습니다. 아이들하고 나누는 동시로 곱게 잘 그렸습니다. 그렇지만, 시골살이 흐름과 밭일과 푸성귀 자람새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고 그린다면, 이러한 동시를 읽을 시골 아이나 도시 아이가 무엇을 느끼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고도 살펴야지 싶습니다.


.. 하루를 묻혀 온 신발들 / 현관 앞에 엎어지고 포개졌네. / 툭툭 털어 가지런히 놓고 / 내 신발 나란히 벗는 저녁 ..  (저녁에)


  〈저녁에〉라는 작품은 시골에서 논일 밭일 하는 살림집 이야기를 다루다가 “현관 앞에”라고 적습니다. ‘현관(玄關)’은 일본 한자말입니다. 국어순화 대상 낱말입니다. ‘문간’으로 바로잡아야 알맞다고 하는데, 아파트에서는 으레 ‘현관’이라고만 씁니다. 아마, 도시 아파트에서는 이 낱말을 다듬거나 거르기 힘들 수 있겠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시골 흙집에서도 ‘현관’이라고 쓴다면?


  시골집을 생각해 보기를 빕니다. 시골집에는 마당이 있고 대문이 있습니다. 시골집에서 신을 놓는 자리는 대청마루 아래쪽입니다. 대청마루 아래쪽에는 섬돌을 놓고, 섬돌에 신을 올립니다. 곧, 시골마을에서 흙일 마치고 돌아온 식구들 신이 올망졸망 놓인 모습을 동시로 그린다 할 적에는 “현관 앞에 엎어지고 포개졌네”가 아니라 “섬돌에 엎어지고 포개졌네”라든지 “섬돌 둘레에 엎어지고 포개졌네”처럼 적어야 올발라요.


  하루일 마친 고단함과 살가움을 그리는 작품으로서 아름답구나 싶으면서도, 시골살이와 시골집 얼거리를 깊이 들여다보지 못하는 모습이 아쉽습니다.


.. 할머니는 발뒤꿈치로 파 / 콩 서너 알 던져 넣고 / 발끝으로 흙을 덮어 / 콩을 심고 ..  (콩 심는 날)


  〈콩 심는 날〉과 같은 동시는 할머니와 엄마와 아빠가 콩알을 어떻게 심는가 하는 모습을 잘 살피고 썼습니다. 예쁜 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작 콩심기를 ‘구경하는 내 모습’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시골 아이 눈길로 콩심기를 구경하는데, 왜 시골 아이는 손수 콩을 심지 않을까요. 할머니가 심고 엄마와 아빠가 심으며 ‘내가 함께 심는’ 흙일이 아닐는지요.


  김이구 님은 민경정 님 동시가 “삶의 동시의 당당한 복권”이라고 말하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민경정 님 동시에 나오는 시골살이는 ‘시골 삶과 이야기’라기보다는 ‘시골 모습 구경’에 그칩니다. 삶을 보여주기는 하되, 스스로 움직이는 삶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 어떻게 있는가 바라보는 모습이라고 할까요.


.. 등산 온 사람들 / 산을 오르다 말고 / 나무마다 붙어 서서 / 새순을 똑똑 딴다. / 낙엽 헤치고 / 산나물을 박박 뜯는다 ..  (입산 금지)


  도시사람이 시골에 와서 어떤 짓을 하는지 잘 밝히는 〈입산 금지〉 같은 작품을 생각해 봅니다. 참말, 도시사람은 시골에 와서 얄궂은 짓 잔뜩 하고 갑니다. 숲길과 멧길을 아무렇게나 파헤치지를 않나, 멧골에 핀 꽃을 몰래 파 가지 않나, 바닷가 돌멩이를 슬쩍 훔치지 않나, 이러면서 온갖 쓰레기를 모래밭이나 숲속이나 논둑에 팽개치고 자가용 몰아 부웅 내빼지 않나. 담배를 태우고 담배꽁초 밭둑에도 휙휙 던지지를 않나.


  민경정 님이 ‘시골 삶 구경’이 아닌 ‘시골 삶 주인공으로 우뚝 선’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한다면, 〈입산 금지〉에서도 사뭇 다른 줄거리가 나타나리라 생각합니다. 도시사람이 얄궂은 짓을 보여줄 적에 ‘얼마나 속이 다치는’지,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이리하여 도시사람한테 어떤 말을 들려주고 싶은지, 숲을 사랑하는 시골사람 마음은 어떠한지, 이런저런 줄거리를 차근차근 밝힐 만하겠지요.


.. 오늘은 / 고구마 다섯 개 / 무 두 개 ..  (엄마 계시냐)


  시집 이름이기도 한 대표작품 〈엄마 계시냐〉를 보면, 고구마와 무를 “다섯 개”와 “두 개”로 셉니다. 아무래도, 도시사람은 다들 ‘개’라고 세겠지요. 그러면, 시골사람도 이렇게 셀까요? 요즈음 시골사람도 텔레비전 많이 보고 농협 공무원 말투에 길들어 모두 ‘개’라고 셀까요?


  도시사람이나 시골사람 몽땅 ‘개’라고 세면, 동시를 쓸 적에도 ‘개’라고 세야 할까요? 아이들하고 지내는 어른은 고구마와 무를 어떤 낱말을 써서 세야 알맞을까요. 우리 어른들은 배추와 오이와 당근을 어떤 낱말을 써서 세야 슬기롭고 아름다울까요.


  “고구마 다섯 뿌리”와 “무 두 뿌리”처럼 셀 수 있기를 기다립니다. 시골살이를 동시로 담을 때에 어떤 사랑과 어떤 꿈을 그리면서 환하게 빛날 수 있는지 동시작가 민경정 님을 비롯해, 어린이문학평론을 하는 분들 모두 참다이 생각할 수 있기를 빕니다. 시골 모습을 그리기만 한대서 ‘삶을 보여주는 시’가 되지 않습니다. 시골 이웃들 모습을 구경한대서 ‘삶을 말하는 시’가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시골살이를 누리고, 스스로 시골사람으로 살아가며, 스스로 시골빛을 흐드러지게 즐길 때에, 비로소 ‘삶을 보여주’고 ‘삶을 말하’며 ‘삶을 빛내’는 동시 한 자락 태어납니다.


  스스로 마늘 심는 즐거움을 동시로 써 보셔요. 스스로 풀 뜯어 나물비빔 먹는 기쁨을 동시로 써 보셔요. 스스로 숲에 깃들어 숲바람 쐬고 숲햇살 누리며 숲내음 맡는 웃음꽃을 동시로 써 보셔요. 구경하는 몸가짐만으로는 ‘시골살이 이야기’를 시골 아이한테도 도시 아이한테도 들려주지 못합니다. 4346.2.1.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동시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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