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이꽃 책읽기

 


  맨 먼저 피는 꽃은 없습니다. 꽃은 서로 다투지 않아요. 풀포기는 같은 자리에 뿌리를 내려 서로 엉키기도 합니다. 뿌리가 서로 엉키며 어느 한쪽이 더 기운을 내어 다른 뿌리를 말려죽일 수 있을 테지만, 밭에서 김을 매고 보면, 온갖 풀이 뿌리가 하나로 엉킨 채 씩씩하게 자라곤 합니다. 조금 일찍 피었다가 지는 꽃이 있고, 나란히 피며 나란히 지는 꽃이 있어요. 때에 맞추어 피는 꽃이지, 맨 첫째로 피거나 둘째로 피거나 하면서 다툴 일이 없습니다. 서로서로 알맞게 피고, 서로서로 즐겁게 씨앗을 맺어, 서로서로 흙숨 나누어 맡습니다.


  풀이 서로 다투거나 겨루기를 한다면, 아마 스스로 씨가 마르겠지요. 한 가지 풀만 자라는 땅은 기름지지 못하거든요. 여러 풀이 자라면서 여러 기운이 스미는 땅이 될 때에 기름지거든요.


  냉이꽃 조그맣고 하얀 꽃송이 벌어집니다. 겨울비 지나고 들판 촉촉하고 보드랍게 녹은 이듬날, 논둑과 들판마다 조그마한 들꽃이 잔치를 벌입니다. 아직 흐드러진 잔치는 아니요, 천천히 노래하는 잔치입니다. 머잖아 하얗게 파랗게 노랗게 발갛게 잔치마당 이루어지겠지요.


  아이들 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거닐다 냉이꽃 몇 송이 바라봅니다. 마을 할머니 할아버지는 군내버스 타고 이웃마을 지날 적에도 ‘저기 냉이꽃 피었네’ 하고 느끼시리라 생각합니다. 4346.2.3.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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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쉬는 글쓰기

 


  고흥에서만 살고 보면, 이웃한 순천이나 장흥으로 가더라도 숨이 막히는구나 싶습니다. 바람이 다르고 물과 햇살이 다르니까요. 고흥으로 오기 앞서 인천에서 살던 때를 떠올립니다. 인천에서 옆지기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인천에서 골목마실을 하며 골목밭이나 골목꽃을 누릴 때에는 조금씩 숨을 틀 수 있지만, 빽빽하게 들어찬 시멘트집과 아스팔트길은 숨통을 죕니다. 끝없이 지나가는 자동차는 매캐한 바람을 일으킵니다.


  짐을 싣기도 하고, 이곳에서 저곳까지 더 빨리 달리도록 한다는 자동차라지만, 자동차는 참말 사람한테 도움이 될까 궁금합니다. 자동차에 짐을 실으면서 내 몸은 차츰 무디어지는구나 싶어요. 이곳에서 저곳까지 더 빨리 달리면서 정작 이웃들 살아가는 마을을 지나치거나 잊기 쉽게 이끄는구나 싶어요.

 

  숨통을 트는 곳은 사람이 걸어다니는 곳입니다. 사람이 걷지 않고 자동차로 움직이거나 도시처럼 전철로 움직이는 데에서는 숨이 막힙니다. 고속도로를 무시무시하게 내달리는 고속버스 잔뜩 모인 곳에서는 숨이 갑갑합니다. 고속버스를 타고 달리면 몇 군데 쉼터에서 쉰다지만, 쉰다기보다 가까스로 숨을 돌릴 뿐입니다. 곰곰이 따지자면, 도시를 키우면서 시골을 죽이려고 고속도로를 놓는구나 싶습니다. 시골마을 둘로 셋으로 쪼개고, 시골마을 시끄럽게 하고, 시골마을 둘레에 매캐한 배기가스 흩뿌리는 고속도로인걸요. 고속도로 달리는 사람은 이곳에서 저곳까지 더 빨리 간다지만, 고속도로를 옆에 끼고 스무 해 쉰 해 백 해 살아갈 사람은 어쩌나요.


  고속도로를 놓으며 시골사람이 고향마을 떠나도록 내몰아요. 고속도로가 놓이면 시골사람도 ‘도시로 마실 가기 수월해진다’고 생각하면서, 참말 아이들이 몽땅 도시로 떠나요. ‘교통이 좋다’는 말이란, ‘도시로 가기 좋다’는 말이지, ‘시골에서 살기 좋다’는 말이 아니에요. 도시에서도 ‘교통이 좋다’는 말이란, ‘물질문명 누리느라 돈을 쓸 시내 한복판으로 가기 좋다’는 말이지, ‘살림 꾸리며 지내기 좋다’는 말이 아니에요.


  문득 깨닫습니다. 인천에서 살던 때, 가끔 시골로 나들이를 다니면 숨통이 트였습니다. 다시 인천으로 돌아가면 숨통이 막혔습니다. 그래요, 시골 고흥에서 살아가니까, 고흥 두멧시골에서 아이들과 있을 적에는 숨통이 늘 맑게 트입니다. 읍내나 면소재지로만 나가더라도 숨통이 막히고, 순천이나 장흥이나 보성으로만 나가더라도 숨통이 막힐밖에 없습니다. 두 다리로 논둑길이나 숲길을 거닐면 숨길이 열립니다. 자전거수레에 아이들 태우고 천천히 이웃마을 드나들며 들과 숲을 누리면 숨길이 뚫립니다.


  넓은 찻길과 자동차가 숨통을 죕니다. 고속도로와 기찻길이 숨통을 죕니다. 공장과 골프장이 숨통을 죕니다. 아파트와 빽빽한 시멘트집이 숨통을 죕니다. 양복쟁이 회사원과 공무원이 숨통을 죕니다.


  흙은 숨통을 터 줍니다. 풀과 나무는 숨통을 열어 줍니다. 구름과 바람과 햇살은 숨통을 보듬어 줍니다. 바다와 들과 숲은 숨통을 사랑해 줍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며 글을 쓰는 사람은 숨을 쉬고 싶어 글을 쓰겠지요. 바람맛을 느껴요. 하늘내음을 맡아요. 바람 이야기를 쓰고, 하늘 이야기를 나누어요. 숨을 쉬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주고받아요. 그래야, 내 마음부터 열 수 있고, 내 마음부터 열 때에 서로 사랑을 열 수 있겠지요. 4346.2.3.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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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일요일들
은희경 지음 / 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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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23

 


생각을 읽는 말과 책
― 생각의 일요일들
 은희경 글
 달 펴냄,2011.7.20./12000원

 


  내가 쓰는 말은 내가 품은 생각입니다. 내가 품은 생각은 내가 누리는 삶입니다. 스스로 누리는 삶에 따라 생각이 자라고, 생각이 자라는 만큼 말이 태어납니다. 국어사전 한 질을 통째로 읽거나 외운대서 아름다운 말을 쏟아낼 수 없어요. 이오덕 님이 쓴 《우리 글 바로쓰기》 같은 책을 읽는대서 우리 말글을 알맞게 가다듬거나 바르게 쓰지 못해요. 먼저 생각을 가다듬어야 말을 가다듬을 수 있고, 생각을 가다듬자면 삶을 가다듬어야 해요.


  삶이 바로선 사람은 생각이 바로섭니다. 생각이 바로설 적에는 아무 말이나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삶이 바로서지 않으면 생각이 바로서지 않습니다. 생각이 바로서지 않는데 말이 바로설 수 없어요. 삶은 엉터리이면서 말만 번드레한 사람은 생각 또한 엉터리요 번드레할 뿐입니다. 입에 발린 말로 껍데기만 내세우는 꼴입니다.


  아마, 오늘날 같은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는지 모릅니다. 이른바 ‘감정노동’이라는 말까지 있는 만큼, 마음하고는 다른 말을 내뱉고, 마음하고는 동떨어진 생각을 품으며, 마음에 와닿지 않는 삶을 보내기도 해요. 아이들 가르치느라 도시에서 살아야 하고, 아이들 학원 보내느라 힘들게 돈을 벌어야 한다고들 하는데, 아이들 가르치는 삶이 무엇인지 슬기롭게 깨닫지 못하니, 스스로 굴레에 갇혀요. 가르침이 무엇인지 모르고, 스스로 삶으로 누리지 못하니까, 쳇바퀴질에서 맴돕니다.


  앞으로 오백 해나 천 해쯤 지나면, 우리 뒷사람은 우리를 어떻게 바라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개화기를 지나고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해방과 한국전쟁을 지나면서, 신분과 계급이 거의 사라졌다고 일컫습니다. 그러나, 종이쪽에 적은 신분이나 계급만 안 보일 뿐, 우리 사회는 사람들을 숱한 새 신분과 새 계급으로 나눠요. 먼저, 학교 졸업장이라는 신분과 계급이 있어요. 대학졸업장 없이는 공무원시험이든 여느 회사 취직시험이든 치를 수 없어요. 신문사도 출판사도 잡지사도 방송사도 대학졸업장을 반드시 갖춰야 해요. 곧, 대학졸업장은 새로운 신분증입니다. 은행계좌 숫자에 따라 삶자리가 갈리면서, 돈 크기에 맞추어 계급 또한 갈립니다. 동네와 마을이 계급으로 갈리고, 일자리에서도 계급으로 갈립니다. 한국 사회는 밥그릇이라 하는 나이에 따라 새삼스러운 신분과 계급이 있습니다. ‘년차’라고 하는 회사 밥그릇으로도 신분과 계급을 새삼스레 나눕니다.


  이 모든 신분이나 계급은 도시에만 있어요.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스스로 신분이나 계급에 갇혀요. 돈을 벌자니 어쩔 수 없다는 말은 핑계입니다. 아이들 가르친다는 말도 핑계입니다. 어쩌면, 수렁이나 덫일는지 모르지요.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며 스스로 신분이나 계급에 갇히도록 하는 수렁이나 덫일 수 있어요.


  그러니까, 나는 앞으로 오백 해쯤 뒤를 헤아려 봅니다. 2500년을 살아갈 뒷사람은 2000년대 사회를 어떻게 읽고 말하려나요. 봉건사회 다음으로 찾아온 2000년대 오늘날을 2500년대 사람들은 어떻게 읽고 말하려나요.


.. 소설을 쓰고 있을 때는 온힘을 다해 나 자신을 믿을 수밖에 없다 … 한 사람의 독자로서, 나에게도 좋아하는 작가들이 있어요. 동료나 후배이긴 해도 어쩔 수 없이 약간은 팬의 마음으로 대하게 되죠. 모임 같은 데에서 옆자리에 앉게 되면 기분이 좋구요. 그쪽에서 무슨 말을 하든 재미있어 할 준비를 갖추고 귀를 기울여요 … 봄날이었을까, 나는 오렌지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지. 행사가 끝난 다음날 선생님께서 아침밥을 먹자고 부르셨다. 박완서 선생님과 오정희 선생님이 와 계셨고, 햇살이 비쳐드는 선생님 댁의 아침밥상에서 세 분의 대선배가 나누시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그랬다. 정말 이것이 현실일까. 그렇구나. 꿈이 아니야. 내가 작가가 된 거야, 아아! ..  (6, 47, 199쪽)


  은희경 님이 쓴 《생각의 일요일들》(달,2011)이라는 산문책을 읽습니다. 생각이 있는 일요일인지, 생각을 하는 일요일인지, 생각이 쉬는 일요일인지, 생각이 모이는 일요일인지, 아무튼 생각하고 일요일이 만납니다. 책 하나에 깃든 글 한 줄 읽으면서, 소설쓰는 은희경 님 삶과 넋과 말을 만납니다.


  소설쓰는 은희경 님은 어떻게 소설쟁이 길을 걸었을까 헤아려 봅니다. 아마, 꿈을 꾸었겠지요. 그리고, 글을 썼겠지요. 그리고, 다시 꿈을 꾸었겠지요. 그러고서, 또 글을 썼겠지요.


  꿈을 꾸고(생각) 글을 씁니다(삶). 다시 꿈을 꾸고(생각) 글을 씁니다(삶). 거듭거듭 꿈을 꾸고(생각) 글을 씁니다(삶). 이리하여 소설(말)이 태어납니다. 소설(말)이 태어나면서 꿈(생각)이 천천히 이루어지고, 꿈이 천천히 이루어지면서 글(삶)을 쓰는 하루가 새롭게 빛납니다. 삶을 누리려고 생각을 밝히고, 생각을 밝히면서 말이 샘솟아요. 삶을 일구면서 생각이 자라고, 생각이 자라면서 말이 나타납니다.


.. 하지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 하나하나 제자리를 찾아 주고 싶어요 … 한국어는 소수의 언어이다. 한국 작가는 제한된 독자밖에는 가질 수 없다, 고 생각해 왔다. 헝가리어를 쓰는 사람은 더 적다. 그런데 자기 언어에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한다. 죽은 지 400년 뒤에 유명해진 국민 작가가 있는데, 내가 놀란 것은 400년 전에 씌어진 글이 지금도 아무 곤란 없이 잘 읽힌다는 점이다 ..  (137, 158쪽)


  사백 해 앞서 어떤 헝가리 글쟁이가 쓴 글을 오늘날 헝가리 사람들이 ‘즐겁게’ 읽는다고 합니다. 헝가리는 참 아름다운 나라로군요. 사람들도 삶터도 말도 아름답기에, 사백 해 앞서이건 사천 해 앞서이건, 또 사백 해 뒤이건 사천 해 뒤이건, 헝가리는 아름다움을 곱게 이을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그러면, 오늘날 한국사람은 어떠할까요. 2000년대 한국사람이 쓴 글을 1600년대 사람이 ‘즐겁게’ 읽을 만할까요. 2000년대 한국사람이 오늘 쓰는 글을 1600년대 사람이 ‘즐겁게’ 읽을 만하다면, 앞으로 2400년대 한국사람도 2000년대 우리들 글을 ‘즐겁게’ 읽을 만하리라 느껴요.


  뿌리가 없이 쓰는 글이라면, 참말 뿌리가 없습니다. 잎사귀를 틔우지 않는 글이라면, 참말 잎사귀가 트지 않습니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만한 글을 쓰면, 참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요.


  글이란 내 생각입니다. 글이란 내 삶입니다.


  시골에서 흙을 만지며 푸성귀 돌보는 손길은 내 삶입니다. 아이들과 살아가며 따사로이 어루만지는 손길은 내 삶입니다.


  내 삶은 어디 먼 데에 있지 않아요. 내 삶은 바로 내 곁에 있어요. 삶을 읽을 때에 생각을 읽고, 생각을 읽기에 글을 읽습니다. 이렇게 하기에 예쁘거나 아름답지 않아요. 저렇게 하기에 밉거나 못나지 않아요. 즐거움을 깨닫고 즐거움이라는 씨앗을 삶자리에 뿌릴 때에 즐거움은 웃음꽃으로 피어나요.


.. 대중은 쉽고 재미있는 것을 애호하는 한편, 아예 어려운 것이라야 존경심을 품는 것 같다 … 하늘과 구름에 가장 잘 어울리는 건, 역시 산 … 바람이 섞인 빗소리가 너무 좋아 잠들기 아깝다 ..  (217, 222, 224쪽)


  겨울비 하루 내내 들판과 숲을 적신 고흥 시골집에서 은희경 님 산문책을 읽습니다. 빗소리는 참 즐겁습니다. 바람소리는 참 싱그럽습니다. 비님 지나가신 하늘은 티없이 맑습니다. 깜깜한 밤을 빛내는 수많은 별빛을 낮에도 가만히 그려 봅니다. 햇빛이 워낙 밝게 드리우니 별빛을 못 느끼는 한낮일 텐데, 어쩌면, 별빛이 어우러지며 햇빛이 한껏 눈부시게 온 들판과 숲을 포근히 감쌀는지 몰라요. 즐거운 넋으로 쓴 글이 즐거운 웃음이라는 씨앗을 뿌립니다. 4346.2.3.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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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결에 물든 미국말
 (671) 멘탈(mental)

 

네 녀석은 참 모든 면에서 멘탈이 약하구나
《우니타 유미/양수현 옮김-토끼 드롭스 (9)》(애니북스,2012) 33쪽

 

  “모든 면(面)에서”는 “모든 곳에서”나 “모든 구석에서”나 “모든 자리에서”로 다듬을 수 있는데, 이 대목에서는 “언제나”나 “늘”이나 “노상”으로 다듬어도 됩니다. ‘약(弱)하구나’는 ‘여리거나’로 손봅니다.


  영어 ‘mental’은 영어입니다. 한국말이 아닙니다. ‘멘탈’이라 적는들 한국말일 수 없습니다. 일본만화에 나온 이 낱말을 한글로 ‘멘탈’로 적는 일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일본사람이 이런 영어를 즐겨쓴다 하더라도 한국사람이 읽는 책에는 한국말로 옮겨야지요. 게다가 ‘mental’은 그림씨입니다. 이름씨가 아닙니다. 이름씨는 ‘mentality’입니다.


  영어사전 말풀이를 살피면, ‘mental’은 “정신의, 마음의”라고 나옵니다. 영어사전에서는 한국말 ‘마음’이 한자말 ‘정신(精神)’ 뒷자리에 나옵니다. 오늘날 한국사람은 으레 이 두 가지 낱말을 섞어서 쓰니 영어사전 말풀이에도 두 가지 낱말을 적는 셈일 테지만, ‘정신’이라는 낱말은 한국말 ‘마음’을 한자로 옮겨적은 낱말일 뿐, 다른 뜻이 더 없습니다.

 

 멘탈이 약하구나
→ 마음이 여리구나
→ 여린 마음이구나
→ 여리구나
 …

 

  마음이 세거나 드센 아이가 있고, 마음이 여린 아이가 있습니다. 힘이 세거나 기운이 센 아이가 있으며, 힘이 여리거나 모자란 아이가 있습니다. 어느 아이는 다부지거나 씩씩하거나 당찹니다. 어느 아이는 더없이 여리거나 어리숙합니다.


  곰곰이 돌아봅니다. 어느덧 서른 해 즈음 지난 내 어릴 적, 내 둘레 어른 가운데 나이 제법 든 분들은 ‘여리다’라는 말을 곧잘 쓰셨으나, 제법 젊은 어른들은 ‘약하다’라는 말만 쓰셨습니다. 국민학교 교과서에는 노래를 가르치는 자리에서 ‘센박·여린박’이라고 쓸 뿐, 다른 자리에서는 늘 ‘약하다’라고만 씁니다. 노래를 가르치는 교사조차 교과서에 나온 ‘여린박’이라는 낱말을 풀이할 적에 ‘약하게’라고 말했어요.


  ‘여리다’라는 낱말은 오늘날에는 거의 사라졌다고 해야 할까 싶기도 합니다. 내 둘레에서 이런 낱말 쓰는 이를 찾아볼 길이 아주 없는데, 나 혼자 이런 낱말을 써도 될는지 아리송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우리 아이들한테 ‘여리다’라고 말하고 싶지 ‘弱하다’ 같은 낱말은 말하고 싶지 않아요. 여린 짐승을 아끼고, 여린 풀을 쓰다듬으며, 여린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착하게 가다듬으면서 마음밭에 사랑이라는 씨앗을 뿌리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참답게 보듬으면서 마음자리에 꿈을 가득 담기를 바랍니다.


  우리 아이뿐 아니라 이웃 아이 누구나 생각틀을 살찌우고 마음틀을 넓히기를 빌어요. 모든 아이들이 생각결을 일구고 마음결을 아낄 수 있기를 빌어요. 아이와 어른 모두 생각누리를 북돋우고 마음누리를 빛낸다면 참 아름다우리라 느껴요. 4346.2.3.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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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녀석은 참 늘 마음이 여리구나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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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결에 물든 미국말
 (672) 페이버릿 아이템(favorite item)

 

이건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에 썼던 대사인데요, 달력도 나의 페이버릿 아이템이랍니다
《생각의 일요일들》(달,2011) 164쪽

 

  ‘대사(臺詞)’라는 한자말은 연극이나 영화에서 쓰는 낱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낱말은 ‘말’을 뜻해요. 어느 모로 보면 전문 낱말이라 하겠지만, 한국말 ‘말’이라 하면 될 낱말을 굳이 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기글에서는 “이건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에 썼던 말인데요”라고 다듬거나, “이 말은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에 썼는데요”처럼 다듬어야 알맞습니다. ‘나의’는 ‘내’나 ‘나한테’나 ‘내게’로 손질합니다.

 

 나의 페이버릿 아이템 (x)
 마이 페이버릿 아이템 (x)
 내 취향 (x)
 내가 좋아하는 것 (o)

 

  소설쓰는 은희경 님 산문책에서 ‘페이버릿 아이템’이라는 영어를 보고 문득 궁금해서 인터넷을 뒤집니다. 사람들이 참말 이런 말을 쓰는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어느 패션잡지라 하는 곳에서는 “리키로제타의 핸들 워머로 퍼(fur)장식을 더하면 보다 스타일리시하다. 스터드 룩에는 패셔니스타의 페이버릿 주얼리 브랜드 ‘마위’의 액세서리를 더한다.” 같은 글을 씁니다. 토씨만 빼면 몽땅 영어라 할 만한 글입니다. 껍데기만 한글일 뿐, 그냥 영어로 쓰는 쪽이 훨씬 낫겠다 싶습니다. 아니, 차라리 영어로 쓰려면 영어로 쓰지, 왜 번거롭게 한글로 옮겨적을까 싶어요. 이런 글을 한글로 적는대서 얼마나 알아보겠어요.


  은희경 님은 그나마 “‘나의’ 페이버릿 아이템”처럼 쓰지만, 다른 이들은 “‘마이’ 페이버릿 아이템”처럼 쓰는 듯합니다. 그렇지요. ‘페이버릿 아이템’은 한국말 아닌 영어인 만큼, 껍데기로나마 ‘나의’를 쓰자면 덜 어울려요. 아주 ‘마이(my)’를 넣어야 어울립니다.


  사람들이 영어를 마구 쓰기 앞서는 으레 한자말로 ‘취향(趣向)’을 쓰곤 했어요. 이렇게 한자말로 써야 무언가 멋스럽다고 여겼습니다. 이러다가 영어바람이 불고 온누리가 온통 영어투성이가 되니, ‘취향’ 같은 낱말은 구닥다리가 되면서 ‘페이버릿 아이템’ 같은 말투를 쓰려 하는구나 싶어요. 한국말 ‘좋아하다·즐기다·사랑하다’를 알맞게 쓰는 사람은 사라집니다. 한국말로 이웃이랑 살가이 이야기꽃 주고받는 사람은 줄어듭니다.

 

 달력도 내가 참 좋아합니다
 나는 달력도 참 좋아합니다

 

  아이들은 이런 영어 저런 한자말을 모릅니다. 아이들은 “난 무엇무엇이 좋아요.”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요즈음 아이들은 어른들한테서 배워 ‘페이버릿 아이템’ 같은 말투를 쓸는지 모르겠어요. 어떤 아이들은 ‘버스데이 파티’라는 말도 쓰거든요. 그나마 ‘생일파티’조차 아닌 ‘버스데이 파티’라고 하거든요. 여느 어버이와 교사가 ‘생일잔치’라는 말을 안 쓰니까 아이들도 ‘파티’라 말하고 ‘버스데이’라 말해요. 초등학교마다 있는 ‘영어 교실’을 ‘잉글리쉬 존’이라고만 가리키니,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영어 쓰기가 아주 익숙해요. 한국사람이면서 한국말로 이야기하는 말투나 말버릇이나 말결을 익히지 않아요.


  소설쓰는 분들이 소설을 쓰거나 여느 글(산문)을 쓸 적에 조금 더 생각을 기울이기를 빌어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쓴 글 한 줄이 사람들 말투에 크게 스며들어요. 아무렇게나 쓴 글 두 줄이 사람들 말씨를 어지럽히기도 해요. 가장 사랑스러우면서 가장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기를 빌어요. 가장 맑으면서 가장 빛나는 글을 쓰도록 마음을 쏟을 수 있기를 빌어요. 4346.2.3.해.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이 말은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에 썼는데요, 나는 달력도 참 좋아합니다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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