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일요일들
은희경 지음 / 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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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23

 


생각을 읽는 말과 책
― 생각의 일요일들
 은희경 글
 달 펴냄,2011.7.20./12000원

 


  내가 쓰는 말은 내가 품은 생각입니다. 내가 품은 생각은 내가 누리는 삶입니다. 스스로 누리는 삶에 따라 생각이 자라고, 생각이 자라는 만큼 말이 태어납니다. 국어사전 한 질을 통째로 읽거나 외운대서 아름다운 말을 쏟아낼 수 없어요. 이오덕 님이 쓴 《우리 글 바로쓰기》 같은 책을 읽는대서 우리 말글을 알맞게 가다듬거나 바르게 쓰지 못해요. 먼저 생각을 가다듬어야 말을 가다듬을 수 있고, 생각을 가다듬자면 삶을 가다듬어야 해요.


  삶이 바로선 사람은 생각이 바로섭니다. 생각이 바로설 적에는 아무 말이나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삶이 바로서지 않으면 생각이 바로서지 않습니다. 생각이 바로서지 않는데 말이 바로설 수 없어요. 삶은 엉터리이면서 말만 번드레한 사람은 생각 또한 엉터리요 번드레할 뿐입니다. 입에 발린 말로 껍데기만 내세우는 꼴입니다.


  아마, 오늘날 같은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는지 모릅니다. 이른바 ‘감정노동’이라는 말까지 있는 만큼, 마음하고는 다른 말을 내뱉고, 마음하고는 동떨어진 생각을 품으며, 마음에 와닿지 않는 삶을 보내기도 해요. 아이들 가르치느라 도시에서 살아야 하고, 아이들 학원 보내느라 힘들게 돈을 벌어야 한다고들 하는데, 아이들 가르치는 삶이 무엇인지 슬기롭게 깨닫지 못하니, 스스로 굴레에 갇혀요. 가르침이 무엇인지 모르고, 스스로 삶으로 누리지 못하니까, 쳇바퀴질에서 맴돕니다.


  앞으로 오백 해나 천 해쯤 지나면, 우리 뒷사람은 우리를 어떻게 바라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개화기를 지나고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해방과 한국전쟁을 지나면서, 신분과 계급이 거의 사라졌다고 일컫습니다. 그러나, 종이쪽에 적은 신분이나 계급만 안 보일 뿐, 우리 사회는 사람들을 숱한 새 신분과 새 계급으로 나눠요. 먼저, 학교 졸업장이라는 신분과 계급이 있어요. 대학졸업장 없이는 공무원시험이든 여느 회사 취직시험이든 치를 수 없어요. 신문사도 출판사도 잡지사도 방송사도 대학졸업장을 반드시 갖춰야 해요. 곧, 대학졸업장은 새로운 신분증입니다. 은행계좌 숫자에 따라 삶자리가 갈리면서, 돈 크기에 맞추어 계급 또한 갈립니다. 동네와 마을이 계급으로 갈리고, 일자리에서도 계급으로 갈립니다. 한국 사회는 밥그릇이라 하는 나이에 따라 새삼스러운 신분과 계급이 있습니다. ‘년차’라고 하는 회사 밥그릇으로도 신분과 계급을 새삼스레 나눕니다.


  이 모든 신분이나 계급은 도시에만 있어요.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스스로 신분이나 계급에 갇혀요. 돈을 벌자니 어쩔 수 없다는 말은 핑계입니다. 아이들 가르친다는 말도 핑계입니다. 어쩌면, 수렁이나 덫일는지 모르지요.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며 스스로 신분이나 계급에 갇히도록 하는 수렁이나 덫일 수 있어요.


  그러니까, 나는 앞으로 오백 해쯤 뒤를 헤아려 봅니다. 2500년을 살아갈 뒷사람은 2000년대 사회를 어떻게 읽고 말하려나요. 봉건사회 다음으로 찾아온 2000년대 오늘날을 2500년대 사람들은 어떻게 읽고 말하려나요.


.. 소설을 쓰고 있을 때는 온힘을 다해 나 자신을 믿을 수밖에 없다 … 한 사람의 독자로서, 나에게도 좋아하는 작가들이 있어요. 동료나 후배이긴 해도 어쩔 수 없이 약간은 팬의 마음으로 대하게 되죠. 모임 같은 데에서 옆자리에 앉게 되면 기분이 좋구요. 그쪽에서 무슨 말을 하든 재미있어 할 준비를 갖추고 귀를 기울여요 … 봄날이었을까, 나는 오렌지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지. 행사가 끝난 다음날 선생님께서 아침밥을 먹자고 부르셨다. 박완서 선생님과 오정희 선생님이 와 계셨고, 햇살이 비쳐드는 선생님 댁의 아침밥상에서 세 분의 대선배가 나누시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그랬다. 정말 이것이 현실일까. 그렇구나. 꿈이 아니야. 내가 작가가 된 거야, 아아! ..  (6, 47, 199쪽)


  은희경 님이 쓴 《생각의 일요일들》(달,2011)이라는 산문책을 읽습니다. 생각이 있는 일요일인지, 생각을 하는 일요일인지, 생각이 쉬는 일요일인지, 생각이 모이는 일요일인지, 아무튼 생각하고 일요일이 만납니다. 책 하나에 깃든 글 한 줄 읽으면서, 소설쓰는 은희경 님 삶과 넋과 말을 만납니다.


  소설쓰는 은희경 님은 어떻게 소설쟁이 길을 걸었을까 헤아려 봅니다. 아마, 꿈을 꾸었겠지요. 그리고, 글을 썼겠지요. 그리고, 다시 꿈을 꾸었겠지요. 그러고서, 또 글을 썼겠지요.


  꿈을 꾸고(생각) 글을 씁니다(삶). 다시 꿈을 꾸고(생각) 글을 씁니다(삶). 거듭거듭 꿈을 꾸고(생각) 글을 씁니다(삶). 이리하여 소설(말)이 태어납니다. 소설(말)이 태어나면서 꿈(생각)이 천천히 이루어지고, 꿈이 천천히 이루어지면서 글(삶)을 쓰는 하루가 새롭게 빛납니다. 삶을 누리려고 생각을 밝히고, 생각을 밝히면서 말이 샘솟아요. 삶을 일구면서 생각이 자라고, 생각이 자라면서 말이 나타납니다.


.. 하지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 하나하나 제자리를 찾아 주고 싶어요 … 한국어는 소수의 언어이다. 한국 작가는 제한된 독자밖에는 가질 수 없다, 고 생각해 왔다. 헝가리어를 쓰는 사람은 더 적다. 그런데 자기 언어에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한다. 죽은 지 400년 뒤에 유명해진 국민 작가가 있는데, 내가 놀란 것은 400년 전에 씌어진 글이 지금도 아무 곤란 없이 잘 읽힌다는 점이다 ..  (137, 158쪽)


  사백 해 앞서 어떤 헝가리 글쟁이가 쓴 글을 오늘날 헝가리 사람들이 ‘즐겁게’ 읽는다고 합니다. 헝가리는 참 아름다운 나라로군요. 사람들도 삶터도 말도 아름답기에, 사백 해 앞서이건 사천 해 앞서이건, 또 사백 해 뒤이건 사천 해 뒤이건, 헝가리는 아름다움을 곱게 이을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그러면, 오늘날 한국사람은 어떠할까요. 2000년대 한국사람이 쓴 글을 1600년대 사람이 ‘즐겁게’ 읽을 만할까요. 2000년대 한국사람이 오늘 쓰는 글을 1600년대 사람이 ‘즐겁게’ 읽을 만하다면, 앞으로 2400년대 한국사람도 2000년대 우리들 글을 ‘즐겁게’ 읽을 만하리라 느껴요.


  뿌리가 없이 쓰는 글이라면, 참말 뿌리가 없습니다. 잎사귀를 틔우지 않는 글이라면, 참말 잎사귀가 트지 않습니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만한 글을 쓰면, 참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요.


  글이란 내 생각입니다. 글이란 내 삶입니다.


  시골에서 흙을 만지며 푸성귀 돌보는 손길은 내 삶입니다. 아이들과 살아가며 따사로이 어루만지는 손길은 내 삶입니다.


  내 삶은 어디 먼 데에 있지 않아요. 내 삶은 바로 내 곁에 있어요. 삶을 읽을 때에 생각을 읽고, 생각을 읽기에 글을 읽습니다. 이렇게 하기에 예쁘거나 아름답지 않아요. 저렇게 하기에 밉거나 못나지 않아요. 즐거움을 깨닫고 즐거움이라는 씨앗을 삶자리에 뿌릴 때에 즐거움은 웃음꽃으로 피어나요.


.. 대중은 쉽고 재미있는 것을 애호하는 한편, 아예 어려운 것이라야 존경심을 품는 것 같다 … 하늘과 구름에 가장 잘 어울리는 건, 역시 산 … 바람이 섞인 빗소리가 너무 좋아 잠들기 아깝다 ..  (217, 222, 224쪽)


  겨울비 하루 내내 들판과 숲을 적신 고흥 시골집에서 은희경 님 산문책을 읽습니다. 빗소리는 참 즐겁습니다. 바람소리는 참 싱그럽습니다. 비님 지나가신 하늘은 티없이 맑습니다. 깜깜한 밤을 빛내는 수많은 별빛을 낮에도 가만히 그려 봅니다. 햇빛이 워낙 밝게 드리우니 별빛을 못 느끼는 한낮일 텐데, 어쩌면, 별빛이 어우러지며 햇빛이 한껏 눈부시게 온 들판과 숲을 포근히 감쌀는지 몰라요. 즐거운 넋으로 쓴 글이 즐거운 웃음이라는 씨앗을 뿌립니다. 4346.2.3.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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